몬드리안의 정원


이혜숙展 / LEEHYESOOK / 李惠淑 / photography.collage
2019_0417 ▶︎ 2019_0422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_70×70cm_201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Tel. +82.(0)2.733.8877

www.gallerymeme.com



「몬드리안의 정원」 혹은 격자 속의 헤테로토피아 『Mondrian's Garden』 or Heterotopias in Grid ● 메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 1904–1996)는 추상화 역시 연속체continuum로서의 공간의 일부만을 절취하는 구상화의 속성에 온전히 부응한다면서 그 예로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을 인용했다. "더 이상 대상들을 재현하지 않는 몬드리안은 상이한 두께의 수평선, 수직선들로 격자grid를 구축했다. 그러나 몇몇 격자들은 액자틀에 의해 잘려나간 드가Degas의 형상처럼, 가장자리에서 불완전한 사각형으로 끊겨버린다. 이 규칙적인 형태들은 비례적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우리는 무한하게 펼쳐진 어떤 공간 구조의 작은 일부분만 바라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파편적 표본, 이 기이한 연결부분은 이중성을 지니는바 뚜렷한 균형성과 일관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서는 그 나머지가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추측할 수 없게 만든다. 이 구성 속에서 우리는 예술가의 이상적 질서와 정교함뿐만 아니라 현대 사상의 한 전형적 양상을 보게 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세계를 구성하는 단순한 기본요소들의 관계는 법칙에 묶여져 있지만, 개방적이고 불확정적이며 무한한 전체를 구축한다."1) 샤피로에게 있어서 몬드리안의 검은 격자 속의 삼원색의 규칙적/불규칙적 배열은 현대적 공간 개념의 회화적 구성이다. 격자를 구성하는 삼원색과 배경인지 형태인지 구분할 수 없는 흰색 그리고 직선인지 가느다란 사각형인지 단언할 수 없는 검정색은 분명히 현실의 공간이 아니지만 어떤 공간의 지형을 추상적으로 암시한다. 이 격자의 반복은 우리 시선의 기억 속에 공간구성의 도식처럼 인각되어 실제 공간 속에 이월된다. 그리하여 현실 세계의 지형을 '이 파편적 표본'을 통해 새롭게 구축하게 만든다. 이혜숙의 「몬드리안의 정원」은 "상이한 두께의 수평선, 수직선들로 격자를 구축한"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지형 속에 사진으로 재현한 현실 공간인 식물원, 세계 도처의 식물들이 자라는 정원을 이월시킨 작업이다.


A 04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_60×60cm_2018


정원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공간이지만 특정한 실제 현실과는 다른 비현실적 장소다. 즉 현실 속에서 고정된 위치를 차지하는 실제 장소지만 특정 장소의 식물상flora과는 배치되는 공간이다. 특정 지역의 고유 식물 곁에는 열대 우림의 수목이 자라고, 또 그 곁에서 사막의 선인장이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특정 장소 밖의 다양한 식물계를 아우르는 정원은 그러니까 세계의 다양한 식물들을 한 장소에서 관람할 수 있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유토피아2)인 셈이다. 양립할 수 없는 토양과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한 공간에 병존하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다. 헤테로토피아라는 용어를 창안한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정원-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순된 장소들로 이뤄진 형식으로 아마도 가장 오래된 헤테로포피아의 예는 정원일 것이다. 천 년 전에 만들어진 놀라운 창조물인 정원은 동방에서 아주 심오하고 중첩된 의미를 지녔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페르시아의 전통 정원은 세계의 사방을 대표하는 네 부분을 사각형 속에 모았는데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 신성한 장소는 그 중심에 있는 세계의 배꼽이었다. 거기에는 수반(水盤)과 분수가 있었다. 그리고 정원의 모든 식물은 이곳에 나뉘어 일종의 소우주를 구성했다. (...) 정원은 세계의 아주 작은 조각이지만 세계의 총체성이다. 정원은 고대 초기부터 일종의 행복한 보편적 헤테로토피아이며, 여기에서 근대의 동물원이 비롯된다."3)



A 05 : 이혜_잉크젯 프린트_60×60cm_2018


이혜숙의 「몬드리안의 정원」은 한 마디로 말하면 헤테로토피아의 충만, 헤테로토피아의 과잉이다. 우선 작가는 정원의 세부를 사진으로 찍었고, 이것을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과 결합시켰다. 이혜숙은 현실대상과 반사광을 매개로 물리적 접촉physical contact에 의해 생겨나는 기호인 인덱스index로서의 사진과 상상력의 소산인 몬드리안 회화의 색과 격자를 중첩, 병치시킨 장소를 창조했다. 정원의 세부를 찍은 사진을 몬드리안의 회화로 인지되는 곳에 자리를 잡게 했다. 두 개의 상이한 매체가 공존하는 혹은 대립하는 헤테로토피아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 헤테로토피아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과 몬드리안의 트레이드마크를 베낀 모방의 공존으로 저작권과 그 위반의 병치를 의미한다. 이혜숙 자신의 사진과 몬드리안 회화의 공존/대립은 매체의 이종교배hybridization인 동시에 창작과 차용appropriation의 병존인 셈이다.



B 01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_80×80cm_2018


게다가 사진 속 식물들의 구체적 형상은 개별적으로는 일종의 규칙성을 띠지만, 몬드리안 회화의 '뚜렷한 균형성과 일관성'을 띤 기하학적 도상으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식물 세부의 비정형성이 사진의 구체적 양상으로 드러나는 이혜숙의 정원은 몬드리안의 규칙적이고 정형화된 형상과 대비되는 공간, 즉 헤테로토피아를 형성한다. 「몬드리안의 정원」의 헤테로토피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몬드리안의 그림이 '상이한 두께의 수평, 수직선들로 이뤄진 격자들'로 구성된다면, 「몬드리안의 정원」은 '상이한 두께'의 삼각형, 사각형 조각들이 일종의 부조relief를 형성한다. 몬드리안의 검은 격자선의 두께는 2차원의 평면성에 머물지만, 이혜숙의 삼원색 삼각형과 사각형은 표면에 음영을 주면서 평면성을 거부한다. 삼원색 부조를 통해 「몬드리안의 정원」은 2차원의 평면과 3차원의 공간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를 형성하고야 만다. 결국 「몬드리안의 정원」은 구상적 사진과 추상적 회화가 공존하는 헤테로토피아, 비정형성과 엄격한 정형성이 상충하는 헤테로토피아, 평면과 부조가 경쟁하는 헤테로토피아인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이질적 공간들은 「몬드리안의 정원」 속에서 서로를 배려한다. 「몬드리안의 정원」이 보여주는 시각적 안정감, 상쾌함은 바로 이러한 상호 존중에서 비롯된다.



D 01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에 색판지_60×60cm_2018


정원의 기원에 대해 미셀 푸코는 이 신성한 헤테로토피아는 전 세계를 요약하는 '소우주'였으며, 거기에는 '세계의 중심, 배꼽'이 자리했었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 중심의 자리는 세계를 창조한 신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혜숙의 정원에는 페르시아 정원의 '신성한 배꼽'도, 더 나아가 '세속적 중심'도 없다. 그저 보이는 것은 세계의 사방에서 온 식물들의 몇몇 세부뿐이다. "무한하게 펼쳐진 어떤 공간 구조의 작은 일부분만" 지시하는 몬드리안 회화의 격자들처럼, 작가는 정원이라는 '소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분', '파편적 표본'만을 보여줄 뿐이다. 중심이 부재하는 혹은 중심이 흐트러진 정원을 식물들의 세부 사진을 통해 암시한다. 그리고 이제는 낯익어 이국종이라 여겨지지도 않는 식물들을 통해 한편으로는 세계화된, 다른 한편으로는 토착성을 잃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은연중에 인식케 한다. 이혜숙의 정원에는 사방의 세계를 구성하는 표본들이 중심을 잃은 채 여기저기 병치되어 있다. 세계의 사방에서 온 전자제품, 식재료. 의류들이 탈 중심의 지금, 이곳의 삶을 부분적으로 유지시키고, 세계 사방의 가치관과 믿음이 현대성을 파편적으로 구성하듯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세계는 몬드리안의 격자 속에 갇혀 있는 저 무국적/다국적 식물의 세부와 구조적 상동homology인 셈이다. 우리의 삶은 저 「몬드리안의 정원」을 닮은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개방적이고 불확정적이며 무한한 전체를 구축하는 저 단순한 기본요소들' 속에서, 저 정원의 식물들처럼 중심과 방향을 잃어버린 채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 최봉림


* 각주1) Meyer Schapiro,「On Some Problems in the Semiotics of Visual Art: Field and Vehicle in Image-Signs」in Theory and Philosophy of Art: Style, Artist, and Society, George Braziller, Inc., 1994, p. 32.2) '이상향'으로 번역되는 utopia의 문자적 의미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다. 3) Michel Foucault,「Des espaces autres, Hétérotopies」in Architecture, Mouvemet, Continuité, No.5, 0ctobre 1984, p. 48.



D 03-2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에 색판지_60×60cm_2018


소란스런 객석이 잦아들고 어둠속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무희들. 몸의 움직임에 따라 무수히 많은 선들이 만들어지고, 그 선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닌 무대를 떠다니는 환영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중학교 입학식 때 본 한국무용 공연 이야기이다. 당시 느꼈던 선에 대한 인상은 매우 강렬했고 지금까지도 아름다움을 논할 때 그것이 미의 기준이 되곤 했다. ● 사진으로 만나는 세상은 선 그 자체였다. 널려져 있는 외계현실이 사진에 찍히는 순간 내가 본 현실과 사진 속 재현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고, 세상의 모든 선들은 서로 다른 관계를 빚어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직선의 조합. 반듯반듯한 직선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말 할 수 없는 안정감과 꽉 찬 만족감을 주었다. 사진에 박제된 선들이 내가 사는 현실이기도 하고 이루지 못한 꿈이기도 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내게 있어 직선은 일상이고 곡선은 일탈이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끊임없이 일상과 일탈의 경계를 넘나든다.



E 01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에 색판지_80×80cm_2018


식물원에서 내 이목을 끈 건 아름다운 꽃도 싱그러운 식물도 아닌 온실 유리를 감싸고 있는 철제 프레임이었다. 프레임 안에 제멋대로 자리 잡은 식물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그림과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되 뇌였다. 그래, 이건 몬드리안의 정원이야 ! 철제 프레임의 수직 수평선 안에 식물을 배치하여 몬드리안의 그림과 유사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상상한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프레임을 찾는 건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한두 번 만날법한 우연 정도였고, 그 우연마저도 슬며시 내 옆을 비켜가기 일쑤였다. 막연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해가 갈수록 온실 유리엔 때가 앉고, 식물들은 나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건 안되는거구나, 이제 그만하자고 포기할 즈음 신의 계시와도 같았던 세 글자. 꼴.라.주



E 02 : 이혜숙_잉크젯 프린트에 색판지_80×80cm_2018


이번 작업은 몬드리안 오마주이다. 두 개의 섹션으로 구성했는데, 하나는 몬드리안의 수직, 수평선과 원색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고, 다음은 임의로 선을 구성해 무채색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 그것이다. 각각의 사진은 이질적이고 다양한 식물을 프레임 속 프레임 안에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수직선과 수평선을 그려 하늘과 땅을, 정신과 물질을, 창조와 보존을 그리고 보편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몬드리안의 이상을 그리고 우주의 조화와 균형을 평형상태로 구현하고자 했던 몬드리안의 정신을 내 나름대로 재해석한 것이라 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 10년만이다. 첫 개인전을 한지 10년 만에 두 번째 전시를 갖는다. 식물원을 찍은지도 10년이 훌쩍 넘어간다. 풀지 못한 숙제처럼 마음 한 구석에 짐으로 있던 나의 식물원에, 미운 마음이 들 정도로 사랑했던 몬드리안의 정원에 이제 작별을 고한다. 안녕 나의 식물원... Goodbye my Mondrian' Garden... ■ 이혜숙



Vol.20190415b | 이혜숙展 / LEEHYESOOK / 李惠淑 / photography.collage




요즘, 일본 장보러 간 애편내 덕으로 이틀 동안 독수공방 했다.
내일 정선가려 꼼짝 않고 밀린 일만했으나, 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렀다.
일요일과 현충일이 겹쳐, 미루었던 곽명우씨 전시에 들리기 위해서다.

강남역에 내려 ‘스페이스22’에 들렸더니, 지킴이 한 명만 있었다.
또 늦어 버렸다. 조용한 전시장에서 혼자 사진을 살펴봐야 했는데,

사진에는 온통 반가운 이들로 가득했다.
여지 것 많은 사진전에 다녔지만 그토록 꼼꼼히 살펴 본적은 없었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분도 있었지만, 사진에서 많은 분을 만나며, 아련한 추억에 빠져 들었다.

전시장은 곽명우씨의 십 여 년 노력의 결실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예술지상주의에 빠져, 허구의 이미지만 양산하는 세태를 무색케 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 기록들은 바로 한국의 사진사였다.

전시된 사진들은 사진가들에게 사진하는 의미를 되묻게 했다.
현실이 배제된 채, 소통되지 않는 사진들만 판치는 세상 아니던가?
작가를 내 세우는 사진은 많았지만, 이런 겸손한 사진전은 없었다.

본질에 대한 직관적 관찰을 중시하는 곽명우의 사진은 정직했다.
스트레이트 사진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의 사진은 연출이나 트릭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직관과 정확한 묘사만 있지, 개인의 주장도 없다.
작가적 권위마저 버린 곽명우의 사진은 ‘작가는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폼만 잡는 얼치기 사진가들이 곽명우 사진에 한 방 먹은 것이다.
세월이 지난 먼 훗날, 대부분의 사진이 쓰레기가 되어도 곽명우의 사진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빠졌는데, 곽명우씨를 비롯한 여러 명이 올라왔다.

곽명우씨에게 밥 한 끼 사려는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모두들 반가웠다.
이경자, 이은숙, 이혜숙씨를 비롯한 ‘스페이스22’의 미녀 운영위원들이 여럿 올라와 모처럼 꽃밭에서 놀았다.

커피도 마시고, 기념사진도 찍고...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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