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은 지옥 같은 하루를 보냈다.

이태원 참사 소식으로 온 종일 일손을 놓고 가슴 태웠다.

 

젊은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날벼락에 깔렸는지 모르겠다.

지긋지긋한 공부에 얽매어 살다, 모처럼 축제 한 번 즐기러 나갔다가 목숨 잃은 것이다.

대비는 물론 늦은 대처로 더 많은 인명을 잃게 한 정부의 무능에 할 말을 잃었다.

 

더 이상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 없어, 다음 날 집을 나섰다.

인사동 북인사마당에 마련되었다는 합동 분향소를 찾아 간 것이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추모객은 많지 않았으나, 덕원스님 모습이 보였다.

비명에 숨져 간 청춘들에게 고개 숙여 명복을 빌었다.

 

인사동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었다.

 

가게에 걸린 상품은 안타까운 희생을 애도하는 조화처럼 보였고,

목 없는 한복 마네킹은 희생자의 넋인 냥 비통함을 더했다.

 

이재민씨의 이것은 돌이다전시 보러 나무화랑'에 갔다.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작가가 반갑게 맞아주었는데,

전시작은 여러 가지 형태의 돌이 그림과 병치되어 있었다.

 

불안감을 조성하는 허공에 뜬 돌은,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 공간에 끌어들인 것 일까?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가 연상되는 작품이었다.

실물인 돌을 그림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다.

 

꿈과 실제의 구분을 허문 작품들은 돌 덩이에 의한 중량감으로

화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작가의 철학적 사유를 감지할 수 있었다.

 

작품에 등장한 돌의 형태 또한 기묘했다.

때로는 섬이 되거나 산이 되어 서사적 의미를 더했다.

 

그날따라 이재민씨의 돌이 무겁게만 느껴졌던 것은

비명에 떠난 청춘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한 몫 했으리라.

 

이 전시는 오는 118일까지 열리니, 추모기간 동안 많은 관람을 바란다.

나무화랑은 인사동 합동 분향소와 백 미터 지점에 있다.

 

다 같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합시다.

 

사진, / 조문호

 

 

이것은 돌이다

이재민展 / LEEJAEMIN / 李在民 / painting.mixed media 

2022_1026 ▶ 2022_1108

이재민_복제와 전이_캔버스에 돌, 아크릴채색_82×122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이재민의 "이것은 돌이다" ● 하나의 현상을 두고 상호 다른 세계를 감지하거나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장자 제물론의 호접몽(胡蝶夢)은 꿈과 실재, 주체와 타자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도가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 호접몽을 각색한 듯한 영화 매트릭스(Matrix)는 디지털 가상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교란한다. "네오, 너무나 현실 같은 꿈을 꾸어본 적이 있나? 만약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럴 경우 꿈속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어떻게 구분하겠나?" 라는 모피어스의 대사는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런가 하면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웜홀(Wormhole)을 통해서 우주와 지구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다. 또 양자역학에서 물질과 에너지의 질량과 위치가 궁극적으로 불확정적인 관계는 또 어떤가. 이런 철학적 관념, 과학적 가설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 중국의 산해경, 우리 단군신화 모두 신계/인간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런 예는 기존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 시간, 물질, 사물과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이재민_불안한 중력_캔버스에 돌, 아크릴채색_82×40cm_2022
이재민_아직도 어두운 밤_캔버스에 돌, 아크릴채색_61×82cm_2022
이재민_어떤 풍경_캔버스에 돌, 아크릴채색_38×68cm_2021

이재민의 작업도 화면에 불러들인 실체인 '돌'과, 그 돌'그림'과의 관계항을 주요 모티프로 활용한다. 이미지 공간인 화면 안으로 실제 오브제인 돌이 들어오게 함으로써, 실제의 돌과 그 돌을 정교하게 그린 돌의 이미지를 병치하는 구성이다. 그러면 이 그림 내부 이미지 공간에 위치한 실재의 돌은 과연 사물인가 이미지인가,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물론 실재 사물인 돌과 그 돌을 재현한 일류전인 '돌'은 같을 수 없다. 하나는 물질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돌의 모사인 환영일 뿐이니까. 그럼에도 이재민은 이 둘을 나란히 제시하면서 "이것은 돌이다"라고 전시 제목으로 선언한다. 주어와 서술어 각 한 단어로 구성된 간단하고도 명징한 문장. 그야말로 「이것=돌」이라는 확정적 명제다. 비유나 서술도 없는 액면 그대로, 돌과 돌 이미지가 자신의 그림에서는 이미 통일된 하나의 실재란 뜻인 것처럼.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이것은 돌이다"라고 선언한 이재민의 미술행위는 결국 그 반대로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쓴 마그리뜨의 명제와 같은 구조가 된다.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처럼, 참/거짓의 논리적 경계를 교란하는 유기적 혼돈구조 말이다. 그러니까 이재민에게 있어서는 실재계(돌)/상징계(모방)가 상호 모순을 드러내되, 결국 "이것은 돌이다"와 "이것은 돌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오히려 같다는 뜻이 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이재민의 작업노트 한 구절을 보자.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은, (과거 내가) 빠르게 움직이며 살았던 삶의 반증이다." 이 문장은 경험을 기술한 것으로는 논리적이되, 그 기준을 제시할 수 없으므로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비논리적이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나", "빠르게 움직이며" 살았던, 이재민의 경험에서 그저 상대적으로 느끼는 이 속도감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 것인가. "어둠 속에서만 있으면 밝음을 알지 못 한다"는 작가노트도 마찬가지 진술이다. 여기서의 밝음과 어둠 역시 광량과 조도의 문제가 아니라, 굴곡진 인생사의 비유임에랴. 그러니까 이재민의 "이것은 돌이다"라는 선명한 전시명칭은, 이런 그의 의식세계에 대입해보면 결국 "이것은 돌이 아니다"와 같은 맥락으로도 기능한다. 이것과 저것의 분리와 구분이 굳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이재민_핵2_캔버스에 돌, 아크릴채색_61×46cm_2022
이재민_핵3_캔버스에 돌, 아크릴채색_46×61cm_2022

실재 작품들을 보자.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한 화면에 특정한 형태의 돌을 꼼꼼하게 재현하고, 그 옆에 재현의 대상이었던 실제 돌을 붙여 놓았다. 오브제와 일류전이 하나의 화면에서 결합한다. 텅 빈 바다와 하늘 풍경에 돌이 떠있는 이런 기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구사한 전치(轉置, 떼뻬이즈망) 기법인데, 거기에 돌 이미지의 실제 원형 오브제인 돌을 병치시키면서, 다시 전치 효과를 사살하는 묘한 이중구조가 형성된다. 본디 콜라주·아쌍블라주·오브제와 초현실주의자들의 일류전을 통한 전치는, 사물을 익숙하지 않은 때와 낯선 시공간에 위치시킴으로 본래 성질과 기능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바꾸는 기법이다. 그런데 이재민의 화면에서는 일류전인 돌과 오브제인 돌이 병치됨으로 인해 오브제와 일류전이 같은 기능을 하게 된다. 즉 돌이 여타의 이미지로 변하는 전치는 되었으나, 한편 오브제인 돌의 등장으로 돌의 이미지가 다른 맥락과 기능의 돌로 전치되지 않고 여전히 돌로 남는다는 뜻이다. 전치효과가 일어나다가 실제 사물과의 연동으로 전치가 교란되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마그리뜨가 파이프를 정교하게 재현한 이미지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쓰면서 재현의 리얼리티에 대한 문제 제기에 덧붙여, 이재민은 그 환영에 실물인 돌을 추가로 첨부함으로서, 이 작품의 돌이 일류젼인지 오브제인지를 다시 되묻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재민의 이번 전시 명칭인 "이것은 돌이다"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마그리뜨의 문제제기에, 자신의 회화는 "일류전=리얼리티"가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는 입장을 보이는 셈이다. 사실 모든 미술은 시각을 넘어서는 조건에서도 이미지다. 현대미술의 숱한 전위들도 결국은 이미지로 그 주제를 드러낸다. 개념미술의 언어에 의한 연상과 논리와 해석도 언어의 이미지로 귀착되고, 이미지를 거부하며 사물 자체의 리얼리티로 제시된 미니멀도 관객의 기억에는 결국 형태와 질감으로 저장된다. 작가로서 이재민은 채집한 돌(오브제)과 그린 돌(일루전)을 동일시하면서, 그것을 연상으로 이미지화하고, 또 보는 관객들도 그러길 바라는 듯하다. "이것은 돌이다"라는 그의 명제는 결국 이미지/오브제의 구분 너머 그의 주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이 중요하다는 것이겠다. 기법은 주제를 강화하는 보완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는 뜻과 같다.

 

이재민_휴식_캔버스에 돌, 아크릴채색_122×82cm_2022

그러면 이재민이 오브제와 일류전의 구분을 넘어서서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내용이 중요한데, 그게 무엇일까? 먼저 자연인 바다·하늘·섬·산·대지 등과 같은 배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돌을 통해서 이재민의 말하려는 내용의 무대다. 거기에 등장하는 돌은 배경과 함께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다. 거기에 자연에서 가장 견고한 돌을 그리고, 또 실재 돌을 화면에 부착함으로,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경계 짓는 개념적 습성의 무용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각자 "스스로 그렇게" 생긴 대로의 돌로부터 이재민은 유사형상을 발견하고 이미지화 한다. 일종의 아포페니아(Apophenia)이자 빠레이돌리아(Pareidolia)다. 돌이 독도도 되고, 구름도 되고, 산도 되고, 맨드라미도 되고, 섬도 되고, 독수리도 되고, 심장도 되고, 낮과 밤의 이미지도 되고, 공룡의 뼈도 되고, 사람의 얼굴도 된다. 그리고 그렇게 돌이 풍경으로 전치되고 이미지화 되는 사이로, 가끔 핵무기가 발사되는 '반-자연'의 장면을 삽입해서 서사적 내용도 덧붙인다. 이 지점에서 보자면 이재민에게 있어서 '그린다'는 것과 오브제를 '제시'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형상으로 접근해가는 의지로 귀결된다. 그것은 사물성과 환영이 어떻게 상상의 볼륨을 증폭할 것인가라는 그의 원초적 충동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돌이다"라는 명제는, 자연과 자신의 이미저리(imagery)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이재민의 감수성과 작업을 표상하는 수사이자, 그에게 있어서의 리얼리티라 하겠다. ■ 김진하

 

 

Vol.20221026e | 이재민展 / LEEJAEMIN / 李在民 / painting.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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