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오세필씨가 올라와 점심이나 같이 먹자는 연락을 했다.

서둘러 나갔는데, 인사동이 난리 쳐들어 온 것처럼 시끄러웠다.

조계사에서부터 안국역까지 버스가 줄지어 섰고,

확성기 소리가 쩌렁쩌렁 인사동을 울렸다.

 

‘조계사'에서 정청래의원 ’봉이 김선달‘ 발언에 반발하는

승려대회가 열리는데, 오천명여 명이나 몰렸다고 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방역규칙을 어겨가며,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광화문광장에서 규탄대회하다 교도소까지 전전한 전광훈 목사 패거리와 다를 게 뭐 있겠는가?

돈과 권력을 위해 정치에 까지 개입하려는 못된 짓거리다.

‘공수래 공수거’라며 무소유를 설법한 부처의 말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행여 아는 중 만날까 두려워, 얼른 약속장소로 옮겼다.

벽치기 골목의 ‘유목민’은 그 때까지 문이 잠겨있었다.

‘유담‘에서 기다리는 오세필씨를 불러내어 밥집부터 갔다.

어디가 좋겠냐고 물어왔지만, 당신이 정하라며 한 발 물러났다.

나야 끼니를 때우는 식이지만, 그는 맛을 즐기는 미식가가 아니던가?

 

속으로는 ‘툇마루’ 된장비빔밥이나 ‘부산식당’의 생태탕,

아니면 ‘나주곰탕’이나 ‘여자만‘ 정식 등 여러가지를 떠 올렸지만,

생각지도 못한 북인사마당 코너에 있는 ’조금‘으로 들어갔다.

오래전 한정식선생 따라 한 번 간적이 있는데, 일식 풍의 분위기도 별로지만,

돌솥 밥 하나에 만 칠천 원이라 다른 밥집에 비해 비샀다.

 

그리고 실내조명도 조도를 낮추어 어두침침했다.

밥을 비볐으나, 무슨 맛인지 아무 맛도 모르겠더라.

입맛이 간 것인지 음식 맛이 없는 건지, 분간 못한 채 먹어 치웠는데,

다 먹고 보니 양념장도 넣지 않고 비벼 먹은 것이다.

이제 치매환자나 다름없어 실수를 밥 먹듯 한다.

 

식당에서 나와 커피 마시러 ‘유담’에 다시 들렸다.

그때사 주인 마담이 타주는 달달한 커피 맛을 즐겼는데,

오세필씨가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냈다.

"형도 잘 나갈 때가 있었다는데, 그 때가 어디 있을 때요?“

아마 돈 벌 때를 말하는 것 같은데, 돈이 많으면 잘 나가는 걸까?

40여 년 전 ‘한마당’ 시절을 떠 올리며 케케묵은 추억을 들먹였는데,

아마 그 운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나 역시 돈벌레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때 마침 장보러 갔던 전활철씨가 등짐을 지고 ‘유목민’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 이런 저런 안부만 전하고 헤어져야 했다.

나도 하는 일 없이 바쁘지만, 전활철씨는 장사 준비를 해야 하고

오세필씨는 또 다른 약속이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인사동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건물 벽을 임대한 노점상은 늘어났고, 아직 빈 점포가 많이 남아 있었다.

 

건물주와 임대자가 분쟁 중에 있는 인사동 문화공간 ‘코트’ 건물 전면에는

함민복의 시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전시를 방해하는 자동차 두 대가 버티고 있었는데.

천으로 덮어 놓았다. 돈 밖에 모르는 이런 악덕 지주를 정말 단죄할 수 없을까?

​문화예술을 짓밟는 '코트' 폭력사건만은 절대 승복하선 안 된다.

예술과 돈의 한 판 싸움이다.

 

​사진, 글 / 조문호

 

 

 

 
 

 

 

 

 
 

 




지난 28일의 인사동엔 방배추로 불리는 조선의 삼대구라 중 한 분인 방동규선생과
강민 시인께서 나와 오랜만에 진득한 사람냄새 나는 인사동이 되었다.






강민선생 시집 출판을 기념하여, ‘나주곰탕’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강민, 방동규선생을 비롯하여 김명성, 김상현, 조준영, 정영신씨가 함께 했는데,
술잔에 녹인 이야기는 노익장 방동규선생의 치열한 삶이었다.





팔순을 넘긴 연세지만, 요즘도 공장에 일하러 나간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삼일이지만,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손톱에서 피가 흐르는 피땀의 시간을 보낸다고 하셨다.





가방 하나 만드는데, 몇 십원 정도이니 받아보았자 얼마 되지 않는 돈일게다.
그 돈으로 체육관을 드나들며 육체미를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 본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라해라.






‘나주곰탕’에서 커피 마시러 ‘유담’으로 가는 중에 사진가 김영호씨를 만났다.

김상현씨와는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라 죽은 사람 만난 듯 반가워했다.
‘유담‘’에서 커피로 한 숨 돌린 후, ‘유목민’으로 옮기는 이차가 이어졌다.
강 민선생은 먼저 일어 나셨지만 방동규선생께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날따라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대훈, 노인자 내외가 왔다기에 안쪽으로 들어가니, 부산에 사는 김진규씨가 반색을 했다.
그 자리에는 임경일, 임계재씨를 비롯하여 처음 보는 미녀도 두 분이나 있었다.
김진규씨가 부산에서 전시하러 왔다는 화가 황보 연이씨와 최숙희씨를 소개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털니라도 끼고 나올 걸, 후회막급이었다.






두 분이 ‘인사아트’에 있는 ‘부산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

최숙희씨는 '욕망에 대한 몸의 사유'라는  전시 리프렛을 주었고,

황보 연이씨는 '그리움은 너야만 했다'라는 리프렛을 건네주었는데, 둘 다 제목이 야릇했다.

정선 갈 일로 전시를 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애석했다.



 



낮술에 쥐약인 놈이 일찍부터 빨았으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본색을 드러내 미투의 경계를 넘나들었지만,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돈도 권력도 없으니, 미투도 아무나 하는 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늦게는 공윤희, 임태종, 이인섭씨 등 반가운 분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그날 밤엔 인사동 악사들의 연주도 골고루 이어졌다.
전활철씨와 김상현씨의 노래에 이어 김진규씨의 하모니카 연주도 한 몫 했다.
무슨 기생도 아닌 주제에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며 홀짝거렸으니,
완전 맛이 가버렸다.






이틀 날 새벽부터 정선 갈 생각하니, 더 이상 죽칠 형편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방동규선생께서 자리하고 계셨으나, 삼십육계 줄행랑쳐야 했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
 노래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유행가 자락을 뱉으며...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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