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고 태연자약

황세준展 / HWANGSEJUN / 黃世畯 / painting 

 

2022_0715 ▶ 2022_0801 / 월요일 휴관

 

황세준_늦저녁 전선_캔버스에 유채_53×65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아트비트 갤러리

ARTBIT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3(화동 132번지)

Tel. +82.(0)2.738.5511

www.artbit.kr@artbit_gallery

 

왜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의 평범한 일상을 그토록 안 그렸을까? 가 작업을 하는 내내 달라붙는 생각이었다. 과거의 일상, 윤색된 일상(무슨 k양의 초상등), 특수한 상황의 일상(예를 들어 전쟁 통의 부산, 또는 빈민촌 등)정도가 우리 회화의 일상을 그린 것 전부였다. 물론 박상옥 같은 예외적 작가도 존재하긴 했으나 그 수가 너무 적었다. 삶은 사실 일상이며 예술은 삶에서 나오고 삶을 재구축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 결여를 채우지 않으면 우리 회화는 나아갈 수도 넓어질 수도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탐구의 대 주제는 일상이다. 그런데 일상은 정말 눈앞에 있는,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습관적으로 바라보는 그것 자체일까? 거기에는 어떤 다른 시공간이 겹쳐 있는 것은 아닐까?

 

황세준_랜드 스케이프_캔버스에 유채_140×140cm_2022

또는 그 습관적이고 관습적인 시야의 일상을 회화를 통해 다르게 보게 할 수는 없을까? 이런 질문들은 일상을 주제로 그려지는 그림의 표현과 관계된다. 우리 눈앞에 현전現前하는 우리의 드러난 삶과 그런 삶이 구성 되도록 추동하는, 요구하는, 강제하는 구조들이 있다. 일상을 회화적 주제로 삼아 작업한다는 것은 회화라는 아주 느리고 약한 매체의 평면적 화면에 이 일상의 총체를 구현해 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표현의 방법은 무수하겠으나 당연히 그 모든 방법을 탐색할 수는 없는 것이고, 다만 일상의 회화적 구현이라는 대 주제 아래 그때그때 당면한 현실과 과제를 가장 잘 드러낼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일정한 표현적 제한은 없다. 시간, 혹은 시대의 요구에 응하는 표현을 검토하고 시험해 봐야 한다.

 

황세준_여름의 철거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21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말을 좋아한다. 그 선언성도 맘에 들고 그것의 원대한 목표도 좋아한다. 단 그것은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어서 단숨에 도달할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예술의 역사가 거의 완전히 단절 되다시피 한 나라의 문화 속에서 그것에 도달한다는 것은 사기이거나 순교이거나 일거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나 댐은 물 위에서 갑자기 솟아나는 것이 아니고 수면 아래 수많은 돌과 구조물이 토대가 되어야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통한 삶의 고양은, 일상이라는 지루한 삶을 향한 예술의 (일종의)헌신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실재적으로 꿈꿔볼 수 있는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다. 삶이 더 넓은, 더 깊은, 혹은 더 높은 무언가로의 지향이라면 예술이야말로 당대의 삶을 정직하게 비추고, 그 비추인 상을 통해 자신을 재구축하는 작업이라는 것. 대체 당대의 삶의 정직함은 무엇이고, 그것을 그렇게 만드는 구조, 그것을 망치는 구조는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화면에 드러내는 것이 회화의 가치와 관심일 것이다.

 

황세준_지하철 풍경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22

도시는 특히 서울 같은 메가시티는 구조이고, 그 구조는 현 시대를, 그러니까 시간대를 공간적으로 구성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간-당대-21세기라는 이 혼란스럽고 위태위태한 동시대의 공간적 약도인 서울을 '회화'라는 평면에 어떻게 축약해서 보여줄 수 있을까, 그 회화의 구조는 무엇일까를 보다 더 깊이 탐색해야 한다.

 

황세준_콘크리트 블러드_캔버스 천에 유채_113×220cm_2021~2

이를테면 (『뉴욕타임스』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지 20년도 안 되어 2017년에 쓴 기고문에서 대담하게 선언했다. "이번 세기는 고장 났다".「스케일이 전복된 세계, 에서 재인용」)고 했다고 한다. 뉴욕과 동시대 유사 공간인 서울의 세기도 고장 났다, 고 할 수 있으며 그렇다 고도 생각한다. 이 고장, 이랄지 난장亂場, 이랄지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덧붙여 회화는 그것을 할 수 있을까, 라는 회화 자체에 대한 전면적 방법론적 회의가 필요하다.

 

황세준_천천히 펑펑_캔버스에 유채_97×80cm_2006/2021

『다정하고 태연자약』展 은 우리시대의 공간적 지표인 메가시티 서울의 분열되면서 위계적인, 또한 위계적이고 조현증적 모습을 회화적으로 담아내기 위한 시도, 라고 할 수도 있겠다. ■ 황세준

 

 

Vol.20220715e | 황세준展 / HWANGSEJUN / 黃世畯 / painting

Men on the Moon 

 

강상우展 / KANGSANGWOO / 姜尙佑 / painting 

2022_0518 ▶ 2022_0607 / 월요일 휴관

 

강상우_Men on the moon 0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53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아트비트 갤러리

ARTBIT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3(화동 132번지)

Tel. +82.(0)2.738.5511

www.artbit.kr

 

본 전시의 제목 『Men on the Moon』은 미국의 얼터너티브 락 밴드 R.E.M 이 1984년에 사망한 유명 예능인 앤디 카우프만을 기리며 1992년 발표한 Man on the Moon 이라는 노래와 1999년에 상영된 동명의 영화로부터 내 최근의 평면 작업들 속 다양한 상상적 인물과 풍경의 모습들을 조명하는 키워드이다. 전시 작품들은 아트비트 전시 공간 1층에 구성된 평면회화 작업들과 2층을 아우른 160여 점의 소형 회화작업들로 나뉜다.

 

강상우_80's Korean Movie series-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4.3×230cm_2022
강상우_80's Korean Movie series-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22

1층은 전시 제목이 표방하는 주제와 내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1980년대 TV 광고나 방화 및 헐리웃 영화의 배경이미지들을 차용한 작업들 (80년대 방화시리즈 1, 2, 외부초점 페인팅 1, 3, 4, 5), 그리고 추상 형태의 인물 초상들 (Men on the Moon 시리즈) 이 전시된다. 해당 작업들의 특징은 15년여 동안 진행되어 온 소형 페인팅들 (2층 작품들, 160/1600) 의 사이즈와 내용적 확장이 이뤄진 최근 1년여의 시도 속에서 내면의 다양한 상상 이미지들이 형식적으로 소형 작업들과 비교해 뚜렷이 구분되어 발현되고 무엇보다 그 다양함의 편차가 생각보다 크게 관찰된다는 점이다.

 

강상우_Outer-focused Painting 06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4.9×90.7cm_2022
강상우_Outer-focused Painting 0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6×72.5cm_2022
강상우_Outer-focused Painting 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5cm_2021

유년기에 소비했던 광고나 특선방화 등 미디어 이미지에 대한 사회 관념적 해석, 캡쳐된 영화 배경 공간에서 등한시되는 이미지들을 감상의 중앙으로 재조명 시키기 위한 연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초상화 인물들이 향하는 얼굴방향, 왜곡의 정도와 그것들이 반영하는 나 자신의 정서 상태에 대한 탐구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1, 2층의 공간을 이동하며 그 시간적 궤적을 역으로 따라가듯 감상할 수 있도록 설치되었다.

 

강상우_Men on the moon 0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3×91cm_2022
강상우_Men on the moon 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60.5cm_2022

코미디언, 엘비스, 부 캐릭터 토니 클립튼, 레슬러 등 다양한 인격과 외형으로 변신하며 사후에도 관객들을 기이한 체험과 의문, 논란으로 유도했던 미국의 괴짜 예술인 앤디 카우프만의 분방함에 대해 감명 받은 한 미술인이 그러한 동경을 머금으며 평면 회화 속의 자유로운 유영을 위한 여러 상상적 이미지와 형식들을 시도한 결과물로서 본 전시를 감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강상우

 

Vol.20220518b | 강상우展 / KANGSANGWOO / 姜尙佑 / painting

 

눈먼 나라에선 애꾸눈이 왕이다

In the country of the blind, the one-eyed man is king

 

강래오展 / KANGRAEO / 姜來旿 / painting 

2022_0427 ▶ 2022_0517 / 월요일 휴관

 

강래오_눈먼 나라에선 애꾸눈이 왕이다#2_우신예찬_ 캔버스에 혼합재료_91×116.8cm_2021

 

강래오 인스타그램_@raeokang

 

초대일시 / 2022_042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아트비트 갤러리

ARTBIT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3(화동 132번지)

Tel. +82.(0)2.738.5511

www.artbit.kr

 

전시 제목 『눈먼 나라에선 애꾸눈이 왕이다』는 에라스무스의 잠언을 인용한 것이다. 제목에서 애꾸눈은 실제로 한쪽 눈만 보이는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빛을 찾는 눈먼 이들에게 자신은 빛을 가지고 있다고 거짓 선동하는 위선적인 위정자와 타락한 종교 지도자, 그리고 인간을 죽음의 벼랑으로 내모는 그릇된 이데올로기를 가리킨다. 어둠의 나라에서는 어둠에 가장 익숙한 자가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을 통해 16세기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면서, 성직자의 위선과 신학자의 허구성을 풍자하고 야유하였다면, 작가는 사악한 위정자와 타락한 종교 지도자, 그릇된 이데올로기를 오늘날의 우신愚神으로 생각하여 이를 전시를 통해 비판하고자 한다. 현재 전 세계를 팬데믹 상황으로 몰아넣은 근본적인 원인을 작가는 세 우신愚神과 우신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눈먼 이들에게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강래오_눈먼 나라에선 애꾸눈이 왕이다#1_Guernica,Again_ 캔버스에 혼합재료_130×162cm_2020

현재 전 세계는 팬데믹 상황에서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는 분명 무차별적 개발과 경제 성장주의를 지향하며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이다. 인간이 물질적 부로 탐욕의 배를 채우는 동안 그 대가로 삶의 터전은 무너지고, 결국 인간 절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우신愚神은 그동안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만들어 지구 환경 파괴를 선두에서 지휘해왔다. 사실 우신 자체보다 우신을 예찬하며 여전히 탐욕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더 큰 문제다. 우신愚神은 결국 그러한 인간들이 창조한 괴물이기 때문이다.

 

강래오_우신예찬_믿음과 앎의 도그마21_캔버스에 혼합재료_100×80cm_2021

작가는 장기화된 코로나19 상황과 20대 대선을 치르며 우리 사회의 현 수준과 부끄러운 민낯을 보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어떻게 우신/괴물을 만들고 키우는지 알았다. 민주주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는 한국의 위정자들이 법과 언론을 주무르며 그들을 추종하는 눈먼 자들을 꼭두각시처럼 내세워 권모술수로 권력을 거머쥐고자 하였고, 진의를 파악할 능력조차 부재해 보이는 대중은 신뢰할 수 없는 언론과 정치인들의 말에 널뛰기를 하며 자신의 이익을 향해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또한,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난 사이비종교 집단의 치명적인 폐해의 여파는 사회를 더욱 불안과 공포로 떨게 했으며 지금도 암적 존재로 기생하고 있고, 기성 종교 지도자들은 힘없고 가난한 자의 편이 아닌 자본과 권력에 빌붙어 안락한 권세를 누리기 위해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악용하고 있다.

 

강래오_눈먼 세상에선 애꾸눈이 왕이다#3_No! New World_ 캔버스에 혼합재료_91×116.8cm_2021

그뿐만 아니라 지구 환경은 자정 능력을 상실해 생태위기, 기후위기에 직면해 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바로 보지 못하고 경제 성장을 외치며 무한성장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기존 세력들은 우리의 삶을 더 궁지로 몰고 있다. 여기에 더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긴장감이 최고조 되면서 나라별 군비 증강이 최대치에 이르렀고, 한국은 세계의 군사력 6위를 달성했다. 그만큼 엄청난 비용을 군사력 강화를 위해 군비에 퍼부었다는 방증이다. 과연 군사력 강화로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강래오_Melancholia#3_숲林_캔버스에 혼합재료_80×100cm_2022

주제 사라마구의 장편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에서 저자는 작품 속에서 전염병, 실명, 격리병동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간의 이기심이나 폭력성과 함께 그 속에서도 살아 숨 쉬는 인간애를 그리고 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시각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저자는 바로 인간이 가장 의존하는 시각을 상실케 함으로써 '인간'에 관해 묻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만 가지고 있던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를 참혹하게 그려내고 있다.

 

강래오_Melancholia#1_연蓮_캔버스에 혼합재료_91×116.8cm_2022

현재 우리가 처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소설 속 상황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눈을 뜨고 있고 볼 수 있지만 눈먼, 바로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눈뜬장님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현재 우리는 위기 앞에 서 있다. 기후 변화의 위기, 경제적 불평등의 극대화와 민생의 위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 무엇보다 전염병의 창궐로 인한 생명의 위기, 이 외에도 우리가 극복해야 할 위기들이 산재해 있지만 우리는 이를 제대로 보지 않고 외면하고 있다.

 

강래오_우신예찬_Paradis is Where We Are_캔버스에 혼합재료_145×112cm_2020

작가는 이를 비판하고자 오늘날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재난시대)과 위기 앞에서도 여전히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정치적 갈등과 이념/종교 문제를 연결지어 고찰하였다. 무엇보다 사이비종교에 쉽게 빠져드는 젊은 '개인'들과 집단/지역 이기주의 및 사리사욕에만 밝을 뿐 위기를 직시하지 못하고 무관심한 '개인'을 소재로 삼아 이를 풍자하고 비판하여, 현재의 삶을 돌이켜보고자 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이다. ■ 강래오

 

 

Vol.20220427e | 강래오展 / KANGRAEO / 姜來旿 / painting

외곽순환

 

김기수展 / KIMGISOO / 金基洙 / painting 

2022_0126 ▶ 2022_0222 / 월요일 휴관

 

김기수_기원의 조건_캔버스에 유채_195×130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아트비트 갤러리

ARTBIT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3(화동 132번지)

Tel. +82.(0)2.738.5511

www.artbit.kr

 

공간, 폭력, 여정  1. 이번 전시에 김기수가 선보인 작업은 예의 풍경그림이다. 그의 작가 이력은 압축성장이 초래한 이곳 도시공간의 폭력성, 그 난맥상에 대응한 일련의 실험 작업을 선보이며 시작되었다. 개념주의적 사진, 퍼포먼스 성격의 야외 오브제 설치, 아카이브 등으로 전개된 이 작업들이 풍경그림으로 전화된 지도 어느덧 10년을 넘어선다. 그 동안 4번의 개인전 『밤산책』(11), 『녹색광선』(12), 『대단지 입구』(14), 『창동 레지던시 입주보고서』(16)이 있었고, 이번 전시 『외곽순환』은 시간 격차를 두고 5년여 만에 열린다.

 

김기수_낯익은 능선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21

2. 초기 그림에서 일단 눈에 띠는 것은 작업 모티브를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는 일상 주변에서 맞닥뜨린 장면들을 모티브로 삼는다. 집 근처 골목이나 동네 주위를 거닐면서, 차를 타고 가거나 주차하는 중에, 어떤 장소를 방문하거나 산을 오르면서 우연히 마주치거나 눈에 들어온 장면들을 선택한다. 하긴 이런 방식 자체는 특이할 것도 없다. 하지만 작업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런 식의 모티브 선택이 일상의 사물과 공간을 대하는 작가의 감각적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밤산책』에는 낮의 일상에선 주변화되어 있던 밤의 사물과 정경들이 등장한다. 밤의 빛으로 드러난 사물과 정경들은 낮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바위, 인공폭포, 성벽, 정자, 국사당, 화분, 골목 길바닥을 지나는 고양이, 텅 빈 공원의 풀밭, 불 켜진 문방구 등은 밤의 어두움에 뒤섞여 산란되는 빛을 받아 기묘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그 기묘함은 한편으로 우리들이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 체화한 자동화된 감성체계를 해체하는가 하면, 동시에 일상 속에서 상처받은 우리의 감각을 몽환적인 매력의 이질적 세계로 이끌어 위무하기도 한다. 작가는 일상 속에 있으나, 일상의 주변을 떠돈다. 그리고 그 주변부에서 일상을 빗겨나간 어떤 틈새와 마주한다. 밤의 사물, 정경이 펼쳐놓는 이질적 감각세계를 감수하는 것은 또 다른 삶을 기대하는 것과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김기수_둘레 3_캔버스에 유채_90.5×162cm_2021

『밤산책』의 경우 사물과 정경의 감성적 전환에 초점이 있었다면, 『녹색광선』에선 사물 혹은 상황 자체의 황폐함이 전면에 부각된다. 고속도로 터널 입구의 멍한 풍경, 비어있는 다이빙 풀의 하릴없는 물질적 존재감, 물 뿜는 분수의 허망한 풍경, 연립주택 입구를 장식한 색 전구의 무심한 반짝임 등이 그렇다. 이 작업들이 확인시켜 주는 것은 일상의 감각과 의미가 무화된 순간들이다. 하지만 이 순간은 자동화된 감각의 해체나 상처받은 감각의 승화과정에서 생겨나기보다는 우울증적으로 고착된 작가의 시선에 의해 발생하는 듯하다. 작가는 녹색광선*을 찾아 헤매지만, 녹색 빛은 화면 위를 언뜻언뜻 떠돌고 있을 뿐이다. 사물과 공간은 무의미하게 존립하는 망연자실한 광경 안에 빠져들어 있다.

 

김기수_강변의 아침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21

3. 『대단지 입구』展에서 그가 다시 현실 공간으로 되돌아 온 것은 아마도 이러한 막막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지 모른다. 일상 속에서 그 너머의 감각에 몰입하던 그는 이제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장소, 나름의 역사와 사건, 그곳을 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기억이 새겨져 있는 성남이라는 시공간에 위치를 잡는다. 아마도 그는 현실 공간에 축적된 시간을 통해 현재와 화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작업은 공적, 사적으로 남겨진 사진들(성남시 공식 행사들, 사건, 기록, 친척, 지인 등), 기억으로부터 이끌려 나온 장면들(주스, 참외, 찬송 등), 그리고 시간의 흔적이 배어든 공간과 건물, 장소로부터 모티브를 채택해 그려진다. 하지만 이 장면들 각각은 서로 모아지지도 연결되지도 않는다. 작가는 장면 하나하나를 마치 파편처럼 다룬다. 그리하여 그 장면들 각각은 연쇄적으로 중첩된 수많은 기억과 사건,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알레고리로 작동하지만, 결국은 모호한, 요해불가능한 무엇으로 남는다. 이들은 상처를 떠올릴 뿐 위무하지 않으며, 기묘한 매력을 발산하지도 않는다. 단지 끊임없는 연상을 일으키며 그렇게 존립할 뿐이다.

 

김기수_외곽순환로_캔버스에 유채_130×97cm_202

4. 김기수의 이번 전시 제목은 『외곽순환』이다. 작업에서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초기 그림에서처럼 모티브를 다시 일상 주변에서 채택한다는 점이다. 살고 있는 동네의 골목, 건물, 집 안팎의 정경을 그린 작업이 여럿 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방문지나 여행지에서 혹은 차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장면이다. 하지만 사물과 공간, 정경을 대하는 작가의 감각적 태도는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이 변화가 어떤 식으로든 '화해'를 모색하려는 작가의 새로운 지향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간 김기수의 그림들 배후에는 모종의 폐허감각 같은 것이 깔려있었다. 초기의 개념적이고 실험적인 작업들이 급속한 난개발로 인한 공간 환경의 폭력성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이 그랬고, 그림으로 전환한 이후 작가가 끊임없이 일상의 주변을 떠돌거나(『밤산책』), 일상 곳곳에서 그 개발 성과들이 남겨놓은 공허함을 응시했던 점을 볼 때 그렇다(『녹색광선』). 『대단지 입구』에서 모든 장면들이 부서진 파편처럼 병렬될 때 그 배후에 놓여있던 것 역시 그 같은 폐허감각 때문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번 전시는 그가 이 폐허감각으로부터 큰 보폭으로 걸어 나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기수_섬망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21

이번 전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업 중 하나는 「기원祈願의 조건」(2021)이다. 이 그림은 우연히 방문한 바닷가 절의 전망대 마당을 그린 것이다. 난간 위편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공간 앞쪽에는 두 개의 기물이 서있다. 앞쪽 것은 독특한 형태의 3층짜리 음수대이고, 뒤쪽 '바르게 살자' 류의 돌덩이에는 무언가 글이 적혀있다. 바닥엔 음수대에서 넘쳐 나온 듯 물이 흐른다. 첫 눈에 이 그림은 '못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붓질은 통상 아마추어가 공간을 메꾸는 데 주력하듯 조악해 보이며, 색채 또한 크레용을 사용한 아동화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형태 또한 세부 묘사 없이 대충 윤곽에 맞춘 듯 여겨지며, 화면의 구성은 실제 정경에 근거했다 하더라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기물들이 과장된 비례로 위치해 있어 괴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김기수_노래방_캔버스에 유채_97×130.3cm_2017~21

하지만 약간 거리를 두고 그림 전체를 조망해 보면, 이 그림이 매우 잘 그려진 그림임을 알아챌 수 있다. 우선 화면 속 공간은 편하게 열려있고, 구성물들은 차분하게 그 안에 안착하고 있다. 바다와 파도는 부피감을 형성하여 부딪침과 움직임을 드러내며, 빛은 하늘과 구름 속을 부유하며 미세하게 흐르는 듯 반짝인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바닥은 안정되어 있고, 심지어 물의 흐름도 고졸하여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림의 초점은 기도하듯 손 모으고 있는 음수대와 뜬금없는 권위를 내뿜으며 멀뚱히 자리하고 있는 돌비석에 있다. 부조화를 과시하는 듯 홀연히 두드러진 이 두 개의 기물은 하지만 철저히 작가의 의도에 따라 형상화된 것이다. 작가는. 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기물들이 자연, 관광, 종교, 정치, 전통문화가 한국식으로 생경하게 혼합된 이 장소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게끔, 그것들을 부각시켰다. 이 광경을 수용자들이 인문의 시선으로 반추할 있게끔 구성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첫 눈에 못 그린 느낌을 주던 화면 안 요소들은 작가가 이 장소의 황당한 리얼리티를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취한 방법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

 

김기수_학교 2_캔버스에 유채_72.7×91cm_2021

5.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은 이번 전시의 작업들이 이전과 달라진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어서다. 여러 차이를 언급할 수 있겠지만 두 가지 지점에 주목하고 싶다. ●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 배드페인팅**의 경향이 나타나는 점이다. 이는 나쁜 대상, 곧 폭력적으로 형성된 이곳 현실공간에 핍진하는 형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그런 공간의 형상화를 외면해 온 기존 예술적 스타일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의도적인 마구잡이 붓질과 검은색의 비상식적 활용, 세부묘사를 생략하는 단순화가 기법적 특징이다. 이번 작업들 중 「강변의 아침」이나 「나무」, 「입산」 등이 대표적 사례다. ● 다른 하나는 특유의 추상抽象 방법을 활용한 점이다. 이는 작가가 모티브로 채택한 장면이 발산하는 정보(감각적, 정서적, 인문적)를 필요에 따라 생략(단순화), 응축, 전환시키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앞서 「기원祈願의 조건」 역시 작가가 파악한 장소의 요체를 이런 추상 장치를 활용, 재구성해 제시하는 방법을 사용한 바 있다. 「낯익은 능선」(2021)에선 이 장치를 좀 더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은 흔히 볼 수 있는 산사山寺의 한 장면을 그렸다. 좌측에 법당의 일부가 보이고 아래쪽으로 계단이 있다. 멀리 중앙부와 우측으로는 능선이 지나고 중앙 뒤쪽에 탑이 그리고 우측 앞쪽에 나무 한그루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계단은 정성스럽게 그려졌지만, 나무는 동그라미 정도로 표현되고, 탑은 윤곽선만 투명하게 제시되며, 산은 능선 정도로 단순화된 표현방식이다. 이를 통해 낯익은 풍경은 결코 낯익지 않은 그림으로 변화되며, 작가에 의해 새로 해석된 풍경으로 전환한다.

 

김기수_예술적인 저녁_캔버스에 유채_145.7×145.7cm_2021

이번 전시의 작업에서 이 두 가지 회화적 장치는 거의 모든 작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활용된다. 나는 이 두 장치가 작가가 그동안 회피해왔던 폭력적인 현실 공간 혹은 공간의 폭력성과 직접 대면하기 시작한 신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의 폭력성에 대한 작가의 저항, 회피, 절망, 알레고리적 대응은 이제 숙고된 대면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유의 대화 방식을 획득해내고 있다. 이 지난한 과정은 작가가 이제 비로소 지나치게 근접해 있어 상처(충격)로만 다가오던 대상, 곧 근대화의 압축성장이 초래한 이곳의 공간 현실과 그 폭력성에 대해 일종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졌음을 알려준다. 작품 「둘레 3」은 이렇듯 거리두기를 통해 확장된 시공간 감각이 나름의 성취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이영욱

 

* 각주* 해돋이 직후 또는 해넘이 직전에 태양방향 수평선 근처에서 녹색 빛이 관측되는 광학적인 현상, 에릭 로메르가 감독한 영화 『녹색광선』(1986)에선 이 광선을 보게 되면 자신의 진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진실까지도 알 수 있게 된다.** 배드 페인팅은 1970년대 미국 형상미술 중 한 흐름에 붙여진 명칭으로, 비평가이지 큐레이터인 마르시아 터커Marcia Tucker가 1978년 뉴욕의 뉴뮤지엄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서 했던 동명의 전시 이름에서 유래. 배드페인팅은 당대의 스타일들에 대한 의도적이며 고의적인 불신을 표방하는 작품들을 말함. 특징은 형상의 변형, 미술사적 자료와 비미술 자료의 혼합, 환상적이거나 부적절한 내용 같은 것들. 배드 페인팅은 정확한 재현이나 예술에 대한 관습적 태도를 무시하는 가운데 재미있으면서 뭉클하기도 하며, 종종 좋은 취향이라는 기준을 비웃는 황당함을 드러냄. 위키피디아 참조.

 

Vol.20220126b | 김기수展 / KIMGISOO / 金基洙 / painting展

잔해풍경 Wreck scenery

 

구본아展 / KOOBONA / 具本妸 / painting

2020_0902 ▶ 2020_0920 / 월요일 휴관

 

구본아_Wreck scenery 2_한지 콜라주에 먹, 채색, 금분, 은분_60×120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90921i | 구본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20_090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아트비트 갤러리

ARTBIT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3(화동 132번지)

Tel. +82.(0)2.738.5511

www.artbit.kr

 

 

사회와 문화는 자연과 별개로 존재한다는 이른바 서구근대성의 이분화 사유 양식에 따라 대다수 사람은, 특히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기호, 담론, 의미, 믿음, 이데올로기 등의 비물질적인 것들에 의해 조직된다고 여겨서 물질적인 것들이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사람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지구적으로 유행하는 사태에 직면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비롯하여 사회적 관계가 바이러스라는 사물에 의해 급격히 재편되는 상황에 부닥침으로써 비인간 사물의 역능을 불쑥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회와 문화는 더 넓은 자연에 묻어 들어가 있는 생태임을 떠올리게 되었다.

 

구본아_Teeth of Time_한지 콜라주에 먹, 채색, 금분, 은분_140×100cm_2019

구본아_Wreck scenery 9_한지 콜라주에 먹, 채색, 금분, 은분_117×91cm_2020

 

구본아_Wreck scenery 12_한지 콜라주에 먹, 채색, 금분, 은분_117×182cm_2020

 

구본아_Wreck scenery 13_한지 콜라주에 먹, 채색, 금분, 은분_60×70cm_2020

 

 

이번 전시는 대산수, 대자연의 모습과 도시폐허의 유사성과 이질성을 보여주는 기존의 작업에서 변화하여 문명과 자연의 관계에 대하여 좀 더 가깝고 축소된 시각으로 접근하였다. 기존에는 폐허의 골계와 같은 건축적인 이미지를 통해 미완과 붕괴의 이중성을 담았다면, 이번 작업에는 고문서에 좀이 쓴 모습과 화려했던 결정체의 풍화된 형상 속에서 자연의 흔적을 담아냈다. 자연의 순환과정속에서 문명의 잔해들을 통해 옛 영광을 엿볼 수 있는 시각을 창조함과 동시에 시간의 흐름과 퇴화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문명의 쇠락과 잔해에 피어나는 새로운 자연의 태동은 ‘시간성’, 그리고 나아가서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을 내포한다. 어떠한 사회나 역사적인 시기도 종국에 남겨지는 것은 그 잔해이다. 이 잔해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보고, 또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생활을 재해석하고 바라보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 구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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