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 KIDS

최윤정展 / CHOIYUNJNG / 崔允禎 / painting 

2023_0418 ▶ 2023_0501

최윤정_pop kids #121_캔버스에 유채_53×53cm_2022

최윤정 홈페이지_www.choiyunjung.kr

 

초대일시 / 2023_0418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5:30pm

 

갤러리 H

GALLERY H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0

Tel. +82.(0)2.735.3367

www.galleryh.onlineblog.naver.com/gallh

 

최윤정의 팝 키즈, 미디어화된 인간종에게 길을 묻다  1. '현대성은 곧 시뮬라크르'라는 들뢰즈나 보드리야르의 현실 담론은 벌써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다. 시뮬라크르는 원본성이 그나마 설정 가능했던 아날로그적 상황에서 도출된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전면적 디지털 시대에 원본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복제나 복제성 자체가 불가능하다. 모두가 원본이거나 복제본이고, 실재인 동시에 시뮬라크르다. 임의성, 상호성 없는 반복, 혼종과 변종의 무한대의 증식뿐이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들에서 독립적이지 않다. 의미들이 뒤섞이고 갈려 나간다. 경계는 닳아 없어졌다. ● 최윤정의 세계가 그렇다. 스타벅스 커피와 맥도널드 햄버거, 마이클 잭슨과 백남준, 미키마우스와 코카콜라를 든 산타클로스 모두 상품경제가 만들어낸 판타지, 지구촌화된 팍스 아메리카나의 유산이다. 목록은 끝이 없다. 최윤정의 인간들은 유전적으로 개량된 인간종이다. 모두가 동일한 유전형질을 지닌 형제거나 자매다. '팝 키즈(pop kids)'로 명명되는 그들 모두는 성장을 멈추었거나 성장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동이거나 극강의 동안(童顏)을 유지하는 어른이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실존의 고유한 지표들, 중력이 작동하는 행성에서 살아온 흔적, 예컨대 피부 착색이나 주름, 흉터, 기미 등의 완전한 부재에 있다. 국적, 인종, 나이와 관련된 정보들의 디지털적 삭제. 야무지게 오므린 입술과 인중 사이에서 이질적인 표정이 만들어진다. 사회적 경험, 대체로 스트레스와 고통을 견디는 과정의 산물인 실존 인간의 표정에선 찾아볼 수 없는 부재의 표정이다. ● 안경: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는 안경, 최윤정이 설계한 과도함의 게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템'이다. 핵심적인 미학적 전략이기도 하다. 안경의 과도하게 큰 렌즈는 캔버스 안의 또 하나의 쉐입트 캔버스로 작동한다. 이 캔버스 안의 캔버스, 스크린 안의 스크린은 원래 캔버스(스크린)에는 부재하는 다른 세계를 투영해낸다. 이로 인해 최윤정의 매우 팝(pop)하게 평면적으로 처리된 회화에 연극적 긴장감이 감돈다. 팝 키즈의 결핍된 실체? 욕망하고, 집착하고, 빠져나올 수 없는 해방구의 부재, 중독? 어떻든 두 개의 서사가 굴러간다. 이것은 팝 스타 앤디 워홀이 선글라스를 착용했던 것과는 상반된 맥락이다. 워홀은 백반증으로 탈색되어 창백해 보이는 피부를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진한 메이크업과 은색 가발과 같은 맥락이었다. 은폐용이었던 셈이다. 반면 최윤정의 팝 키즈의 안경은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스크린이다.

 

최윤정_pop kids #122_캔버스에 유채_30×30cm_2023
최윤정_pop kids #120_캔바스에 유채_200×200cm_2022
최윤정_pop kids #125_캔바스에 유채_53×53cm_2023

2. 최윤정의 팝 키즈는 전자 미디어로 세계를 경험하는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다. 낯선 무표정과 컬러풀한 헤어 스타일, 그리고 피부는 뾰루지 하나 없이 비현실적이다. 팝 키즈는 인간종(human race)과는 다른 미디어화된 신 인간종(mediaized new human race)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것은 무엇인가? 두 종 사이에 일어난 사건은 진화(evolution)인가? 미디어화된 인간종은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인식이 아니다. 먼저 그것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세상에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괴물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나치즘, 카지노자본주의 같은 사악한 전체주의는 존재했던 적도 없고, 의지했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배신과 좌절의 기억은 '완삭'된 세계다. 언젠가 알베르 카뮈가 통렬하게 고발했던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짓으로 치닫는 사회"는 구닥다리 고전에나 나오는 드라마로 치부된다. 그렇기에 온갖 편견과 맞서 자기 시대의 병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 애쓰는 고독한 인간이 등장할 필요도 없는 세상이다. 이 세계에서 합법적 대의(justa causa)는 시럽을 잔뜩 뿌린 케이크 같은 삶이다. 여기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모두 적으로 간주된다. 이 세계에서 여성은 "현모양처, 여전사, 동화 속 공주여야 한다. 착하고, 약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모두 소유한 자"여야 한다. 최윤정은 질문한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미디어가 곧 메시지고, 기술이 도덕적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만큼 도덕적인 인간은 이전에 없었다! 마셜 매클루언의 논제를 기억하자. "미디어는 단지 다양한 내용을 운반하는 중립적인 컨테이너가 아니다. 미디어는 특수한 내용을, 예컨대 새로운 지각을 만들어낸다"(한병철). 최윤정의 팝 키즈는 미디어로부터 배우고, 깨닫고, 촉구된다. 팝 키즈의 인식은 디지털 미디어 체계에서 길을 잃는다. 보는 감각, 보는 방법을 잃어버렸기에 그들이 아는 세계는 포스트자본주의의 소비재들, 패스트푸드, 디즈니랜드의 캐릭터들과 할리우드의 미디어 스타로 국한된다. 그들은 소망의 충족을 소망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첨병이 된다. 자본주의는 소망의 경제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니다. 이것은 뒤집힌 세상이다. 최윤정이 제대로 본 셈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착으로부터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사실 말이다. "세상의 실재는 우리가 세상의 사물들 속에 옮겨놓은 자아의 실재다." 스타벅스 커피와 맥도널드 햄버거, 나이키와 페라리는 집착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 외적인 실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끝없이 집착하는가? 어떤 것이 실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팝 키즈가 소망하는, 시럽을 뿌린 경험에만 의존하는 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헤겔이 탄식했던 대로 세계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세계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지라도, 결과는 배우기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인이건 현대인이건 당하는 일은 모두 동일하고 해결책은 없다. 집착의 역사다. 시몬 베유를 읽어야 한다. ● "어떤 것이 실재임을 알게 되면 더는 집착할 수 없게 된다. 집착이란 결국 실재감의 부족인 것이다." 하지만 자아에 선험적으로 각인된 불완전성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이 실재인지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나기 전에 우리는 외적인 실재를 볼 수 없다. 베유는 사태나 상황을 구성하는 조건들과는 다른, "인간 영혼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과 연결된 다른 개념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의 영역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이 영역에 대한 베유의 서술이다. "우주의 바깥에,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의 너머에, 모든 인간에서 발견되며, 모든 인간의 마음이 일치하는 총체적인 선(善)에 대한 하나의 실재가 있다. 이 실재로부터 이 지상에서의 모든 선이 흘러나온다." 이 공간, 이 영역에서만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공간이다. 존재성의 근원, 눈과 마음을 여는 지성과 풍요로운 감정….

 

최윤정_pop kids #31_캔바스에 유채_150×150cm_2010
pop kids #80(missing)_캔바스에 유채_18×26cm_2014

3. 최윤정의 팝 키즈는 몸이 부재하다. 신체적 접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다. 만지거나 포옹할 수도 없고, 걷거나 달릴 수도 없다. 안경이, 접촉이 없는 봄(seeing)이 세계를 경험하는 유일한 통로다. 하지만 이러한 접촉이 결여된 봄은 응시의 타락으로 귀결된다. 단지 소비할 뿐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닌, 실재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되는 미디어 문맹의 길, 인식의 퇴화(regression)로의 치닫기다. 이 퇴화의 연대기가 더 가속화되는 중이다. ● 최윤정의 회화가 지속적으로 던져온 세상 읽기의 일환이다. 하지만 기표의 사치랄까. 아니면 반어법? 후퇴로 보이는 전진의 기술일 수도 있다. 최윤정의 회화 방식은 전략적인 뒤집어 말하기를 충분히 즐긴다. 이를테면 최윤정의 팝 키즈는 거대 기업 자본주의 아래서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힐 수 있으며, 그 희생자가 자신일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부서지기 쉬운 존재며 그럼에도 물적 토대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어떤 억압 아래서도 고결하게 남을 수 있는 자질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모르는 것처럼 군다. 이 역할극-회화에서 팝 키즈는 새로운 미디어 전장의 실감 나는 해설자(commentator)다. 이 해설자는 자아의 근원적 결함을 환기할 때 특히 놀이를 하듯 한다. 도덕적 위엄, 계몽적 분위기, 선언이나 강론의 불손함을 경계하면서 진실이 스크린 뒤에서 배음처럼 울리게 하는 방식이다. ■ 심상용

 

최윤정_pop kids #124_캔바스에 유채_53×53cm_2023
pop kids #116-달나라의 장난_캔바스에 유채_100×72.7cm_2021

최윤정 작가 문답 「현대사회의 시대적 욕망을 유쾌하게 그립니다」1) 최근에 발표하는 작품들은 주로 인물의 얼굴로 화면이 가득 차고 있다. 언제부터 이런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나? 얼굴 이전 작품들은 어떤 작품이었나? 공적 작품 발표 이후 작품의 변화를 시기별로 나눌 수 있나?

얼굴 그림은 2009년의 개인전을 통해 처음 발표했습니다. 얼굴 그림은 과거에 비해 미디어의 영향이 막대해진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욕망과 존재방식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제 안의 모호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욕망에 대한 생각을 화면 한 가운데 지평선이 펼쳐진 풍경으로 그리면서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근원을 향하는 마음과도 같은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문득문득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욕망의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pop kids는 미디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현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하며 만들어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바탕으로 만든 시리즈였는데요, 초기의 작품은 일방적인 미디어 환경에 노출된 다소 수동적인 인간에 대한 초상이었다면, 최근의 작품들은 자신의 관심이나 생각, 주장들을 일인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로, 그간에 약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2) 주로 그리는 인물들은 누구이며,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큰 얼굴의 주인공은 구글에서 검색한 인물의 초상인데요, 좀 더 통통한 형태로 왜곡하면서 그렸습니다. 구글 검색창에서 'boy', 'girl', 'woman', 'man' 등의 단어로 검색한 결과의 이미지와 유명인의 사진, 그리고 제 자신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검색을 통해 얻은 인물의 사진은 여러 단계의 이미지 가공 과정을 거치면서 세부 정보가 사라지기도 하고, 애초에 인물 사진을 제작하는 단계에서 다양한 포토샵 효과를 사용하면서 매끄럽고, 화사한 얼굴로 만드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가공된 이미지는 실제 얼굴보다 부드럽고 생기가 넘치는데요, 처음 제가 pop kids를 그리기 시작하던 시기에는 특히나 피부에 대한 미디어의 언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습니다. 피부와 관련된 제품과 시술에 관한 광고와 정보가 인터넷에 쏟아지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2000년이 시작되던 시기에 비해서 차츰 재정비되는 도시 또한 매끄럽고 반짝이며, 화려한 색채를 갈아입는 중이라는 인상을 받고는 하였는데요, 그런 인상 때문에 저는 '현재'를 표현하고자 기획하였던 시리즈에서 붓터치를 제거하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였으며, 광택이 있는 표면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3) 그림의 인물은 대부분 안경을 쓰고 있다. 그 안경에 그려진 이미지와 글자가 그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나?

일상생활에서 제 주위를 떠도는 이미지들입니다. 그 중 더 많이 미디어를 통해 언급되면서 재생산되는 이미지들인데요, 이 시리즈를 그리던 초기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대상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어느 날 대중문화의 캐릭터와 유명브랜드가 과거 사회에서 신화가 차지했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거의 신화는 서사를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의 프레임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대중 스타와 캐릭터, 브랜드의 서사는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 그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위해 어떤 기법이나 장치를 쓰고 있나?

안경이라는 장치는 프레임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저는 '자유가 무엇인가?' '나는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이따금 해보는데요,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했던 생각은 나는 언제나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언제나 어떤 보이지 않는 틀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어나서 공부를 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것을 배우는데요, 경험이 많아질수록 그 프레임이 견고해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그 프레임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미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큰 프레임으로 눈을 가린 인물을 그리면서 현대사회의 단면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5) 작품들이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사회의 여러 상황을 담고 있거나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현재의 삶의 어떤 부분을 담아왔고, 또 앞으로 표현하려 하는가?

1990년대 후반 이후에 인터넷 환경이 보편화되고, 티비 방송의 채널 숫자도 급증했습니다. 신문, 잡지 등 인쇄 매체도 빠른 주기로 탄생하고 사라지를 반복했습니다. 우리는 이전의 사회에서 보다 매일매일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이슈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시기를 지나 스스로 매체를 생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환경문제 등 장기간 지속적으로 관심의 깊이를 더해가는 이슈가 있는가하면, 일정 기간 많은 사람들이 초집중하였다가 빠르게 잊어버리는 이슈들도 많습니다. 하나의 이슈에 대해 반대 주장의 논리는 넘쳐나는데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 또한 혼란스러울 때가 많지만, 넘쳐나는 이슈들의 다양한 층위를 검토하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급변하는 환경과 더불어 제 자신의 생각도 충분한 고민을 하기 전에 다른 곳을 헤매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유의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저의 어수선한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두서없이 돌아다니며 떠나지 않는 생각들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을 되새기며 나와 내가 속한 사회를 돌아보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6) 그동안의 작품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 매스 미디어의 여러 다양한 국면을 단순한 색채와 구성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팝아트'라 구분할 수 있는데 동의하는가?

팝아트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제 작품이 팝아트의 범주 안에 있을 수도 있고 그 밖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와 매스미디어의 다양한 국면과 대중의 삶에 대한 내용을 담는 작업을 팝아트로 정의한다면 저의 작품 중 pop kids 시리즈는 팝아트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의 생산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에 가깝습니다. 저는 대량생산, 주문생산 등의 산업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는 작업방식 보다는 현대사회의 이야기를 작업실에서 홀로 작업합니다. 작가의 고유한 작업방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근대적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춰서 얘기한다면 제 자신을 '팝아티스트'라고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 작업을 보는 사람에 따라 팝아트로 보기도하고 조금 다르게 보기도 하는데요, 저는 스스로 제 자신을 어떤 양식의 작가로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7) 가장 최근에는 여성주의(Feminism)적 관점, 환경문제(Ecology)에 대한 비판적 접근 등 그 주제가 다양해지는 것 같다. 작가로서의 의식에 변화가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나?

저는 사회가 개인의 사고와 삶의 방식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늑대소년의 이야기와 다른 도시로 입양되어 매우 다른 삶의 방식을 지향하는 성인으로 자란 쌍둥이의 이야기 등에 매우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여러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편입니다. pop kids 시리즈 중에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업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여성이라서 저를 돌아보면서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 풍경의 변화 속도만큼 여성의 사회적 역할 또한 빠르게 확대되면서 변화하였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여성들이 전통적, 보수적인 여성상과 현대적, 진보적인 여성상의 이미지 중간 어디엔가 위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면서 여성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자아상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작업들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삶의 패턴으로 야기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동의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광우병, 미세플라스틱의 해양오염, 미세먼지로 인한 대기오염, 음식물쓰레기 처리문제,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문제와 다양한 종의 멸종문제, 멸종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문제 등등 수많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며 즐기는 화려한 컬러와 매끈한 표면의 광택과 환경문제에 직면하여 고민하는 우리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삶은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최근에는 삶의 모순된 양면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생각이 앞으로 어떤 작업을 만들어갈지 스스로 생각하고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상상하는 시간을 즐기는 편입니다.

 

8) 그동안 비슷한 구도와 표현방식으로 인해 관람자에 강렬한 인식을 남기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에선 표현 형식이 틀에 갇혀 다소 단조롭게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대응은?

처음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시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 사실이지만, 중간에 사고가 있어서 몇 년 동안은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처음 시리즈를 계획하면서 비슷비슷한 얼굴 100점 이상을 그려서 전시하는 기획이 머릿속에 있었는데, 아직 그 전시를 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못할 것 같습니다. 다른 새로운 전시에 대한 아이디어도 몇 가지 있었는데, 아파서 누워있는 동안 제 머릿속에서 전시가 이루어지고 끝났습니다. 기존에 제가 몰두했던 생각이 한편에 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거나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전에 하지 않았던 생각도 하는데요, 최근에 기존의 작업에서 조금 변화된 형태의 작품 제작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전시에서 어떤 형태로 작품이 완성될지 저도 조금 기대하고 있습니다.

 

9) 작가에게 미술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왜 그림을 그리는가?

시각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저의 20대의 많은 시간을 빼앗았던 질문인데요.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저런 자료들과 작품들을 보면서 이것도 시각예술 저것도 시각예술, 이것도 시각예술... 여러 예술을 공통적으로 포괄할 수 있으면서 제 자신을 설득할 수 있으며, 제가 해야 하는 시각예술에 대한 목표는 '한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뭐라도 정해야 어떤 예술을 할 것인가에 대해 방향을 정하고 제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유효한 생각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 점이 우선이었지만, 저 또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일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답을 구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많은 시간을 들여 세상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자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10) 세계의 미술인 중에서 누구의 무엇을 좋아하는가? 왜 거기에 관심이 가는가?

바바라 크루거, 낸 골딘, 뱅크시, 뒤마, 루시앙 프로이트, 김홍도, 신윤복 등 너무 많습니다. 시각적 충격 또는 즐거움을 주는 것과 더불어 인간에 대해, 인간 사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작품을 통해 소설책에서 발견하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부조리, 불안, 웃음 등을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에 이해하고 느끼며, 이야기 너머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을 즐깁니다. 신윤복이 선택한 양반을 그리는 고상하지 않은 양식을 보면서 그 사회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친구와 수다를 떨던 시간이 매우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는데요, 그의 그림에 있는 유머가 특히 강력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Vol.20230417b | 최윤정展 / CHOIYUNJNG / 崔允禎 / painting

생명력 Vitality

문혜정展 / MOONHYEJUNG / 文惠正 / painting

 2022_1123 ▶ 2022_1213 / 월요일 휴관

 

문혜정_풍경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120×120cm_1991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베카갤러리

BEKA Gallery

서울 종로구 삼청로9길 5

Tel. 070.8807.2260

www.bekagallery.com

 

시련을 견디는 생명력에서 온 조형미학 ● "하늘로 향해있는 "예술의 길"을 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본다." - 문혜정 ● 문혜정이 1991년에 그린 「White Flower Ⅰ」과 「White Flower II」는 30년이 지난 오늘날 더 인상적이다. 검정색 터치로 뒤덮인 캔버스 위로 구불구불, 끊길 듯하다 되돌아 나가는 흰 터치들 끝에서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난다. 꿈틀거림, 그건 살아있는 것들 곧 생명의 특성이다. 꿈틀거림은 그 자체 하나의 온전한 시(詩)이기도 하다. 죽음의 감성은 시(詩)에 더 적합하다. 하지만 생명의 감정은 더더욱 그러하다. 살아있는 것은 장황한 묘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문혜정_풍경Ⅱ LandscapeⅡ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22
문혜정_풍경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120×120cm_1991
문혜정_풍경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45×70cm×3_1991

2004년 작 「Lotus Landscape」부터는 부쩍 산문적 감성이 묻어난다. 대상을 보는 시점이 한결 관조적인 것이 되었다. 대상의 인식과 표현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김종영 미술관의 박춘호는 그것을 '꽃의 연대기로, 즉 '어떤 꽃'에서 '연꽃'을 거쳐 이름 없는 '들꽃'으로 변하는 여정으로 함축한다. 그 무렵 문혜정은 특별히 연꽃을 많이 그렸다. 연꽃은 사람들을 각기 자신의 내밀한 존재로 되돌려 보낸다. 청순한 연두 빛의 줄기들이 실은 진흙탕 속을 기는 까닭일 터다. 그토록 영롱한 청록빛이 진흙탕 속에서 잉태되다니! 그리고 연분홍 빛깔의 영롱함을 끝내 피워내고 만다. 이 여름 꽃은 토양을 문제 삼지 않는다. 신비로움, 숭고한 역설이다. 환경에 연연하지 않음, 위기를 견디는 힘, 도래할 만개를 믿고 기다리는 절개, 이것이 문혜정이 그의 회화에 담고자 했던 것의 이름이다. 문혜정의 꽃은 그저 관상용이 아닌 셈이다.

 

문혜정_무제 No title_캔버스에 유채_45×70cm×8_1991
문혜정_제단 Altar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1996
문혜정_묘사된 자연 Described nature_캔버스에 유채_130×390cm_1999

1990년대부터 문혜정은 꽃을 많이 그렸다. 「Lotus Landscape」는 10여년 전의 「White FlowerⅠ」이나 「White Flower II」와 비교할 수 없이 화사하다. 절제된 재현 미학이 새롭게 시도된다. 뜨거운 심리상태가 이끄는 표현주의의 자취는 한결 완화되었다. 그렇더라도 그저 화사하기만 한 꽃은 없다. 희망은 상실의 한가운데서 세워지는 법이다. 이즈음에 그려진 「Landscape」에 단골로 등장하는 기둥, 수직적인 도상의 의미가 그러하다. 그것은 대지에서 대기를 향하는 모든 질서의 대변인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의 기상(起床), 상승의 의지, 세파의 조류에서 위안과 격려의 축이다.

 

문혜정_움트기 Sprout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22
문혜정_꽃이야기 Flower story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8
문혜정_풀숲 Grassland_캔버스에 유채_65×120cm_2004

이 세계에 등장하는 것들은 시련의 역사와 시련을 견디는 생명력과 관련이 있다. 이 힘, 이 생명력이 문혜정의 40여년 회화사를 관류하는 주제다. 어떤 힘인가? 살아있음 자체에서 발현되는 힘, 씨앗에서 생명이 움트고 봉오리를 맺는 그 힘이다. 살아있는 것만이 조건에 동화되지 않고, 사망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의 설치작업 「Ginseng Field」 연작도 같은 맥락이다. 인삼도 연꽃만큼이나 상징성이 강한 식물이다. 인삼의 생명성은 여러 측면에서 예술의 그것과 유사하다. 생장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점이 그렇고, 충분한 약효성분을 위해서는 6년에 달하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빛가림(차광)과 저광도에서만 정상적인 생육이 가능한 점에서 특히 그렇다. 예술성(예술적 질)도 종종 인생의 전 기간을 요할 만큼 더디 성취되고, 그 긴 기간 외부세계의 혼탁한 자극에서 충분히 독립적이어야만 하는 가치다. 예술의 힘이 세상을 견뎌온 이력에서 발현되는 이유이다.

 

문혜정_꽃 Flower_캔버스에 유채_80×120cm×4_1992
문혜정_가을 Autumn_캔버스에 유채_120×150cm_1992
문혜정_흰꽃Ⅰ, 흰꽃Ⅱ White flowerⅠ, White flowerⅡ_ 캔버스에 유채_150×150cm×2_1991

문헤정의 「Ginseng Field」에서 마주하는 생명력은 그의 터치들, 꽃의 호흡을 기억하고 있는 거친 붓질에 배어 있는 속성이기도 하다. 줄기인 듯도 하고 그저 붓질인 듯도 한, 꽃잎인 듯하다가 어느덧 색의 몽글몽글한 향연이 되는 표현이다. 문혜정의 붓과 안료는 현실과 해석, 재현과 표현의 경계를 왕래한다. 여기서 표현은 대상에 한정되지 않고 대상을 뛰어넘는 자유를 따른다. 조금 거친 채여도 무방한, 굳이 정돈되지 않아도 되는 유희로 흐른다. 운률을 머금은 자유분방한 선(線)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굳이 의식하지 않는다.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 이야말로 살아있음의 특성이다. 이질적인 두 세계를 규정하는 관점에 갇히지 않는 것 또한 힘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형식주의와 그 이분법을 넘어서도록 하는 그 가능성의 실체, 이것이 문혜정의 조형세계에서 읽어야 하는 미(美)의 테제다. (2022년 10월) ■ 심상용

 

문혜정_인삼밭 Ginseng Field_ Wuerttembergischer Kunstverein Stuttgart_2001
문혜정_인삼밭 Ginseng Field_KIC Buedelsdorf_2010
문혜정_인삼밭 Ginseng Field_한지에 잉크_210×250cm_2008

Aesthetics Arising from Enduring Vitality ● "I see myself advancing to the "path to art" in the sky." - Moon, Hye-Jung ● Moon, Hye-Jung's 1991 works, 「White Flower I」 and 「White Flower II」 are even more striking today after three decades have passed. A flower blooms at the end of white brush strokes, winding yet unending on a canvas covered with black touches. The wriggles are a sign of life, of vitality. Wriggling itself becomes a complete poem. Poetry is more fitting for a sentiment of death. The emotion of life is more so. Living things do not require a lengthy description. ● A prose sensitivity is evident in Moon's 2004 work 「Lotus Landscape」. Her perspective toward her subjects has become more contemplative. Changes can be found in her perception and expression of her subjects. Park, Choon Ho at the Kim, Chong Yung Museum summarizes the work as a "chronicle of flowers," as "a flower" becomes a "lotus flower," which then transforms into a nameless "wildflower." During this period, Moon, Hye-Jung painted a series of lotus flowers. Lotus flowers send people to reach their inner selves. This may be why the vibrant yellow-green stems of the flower are rooted in murky marshes. How can such a pure turquoise color be created from mud? Then, in the end, they blossom into light pink flowers. These summer blossoms have no issues with the types of soil. It is a mystical and sublime paradox. Resilience to the environment, the power of withstanding crises, and the integrity of waiting for the full bloom that will come, are what Moon, Hye-Jung aimed to reflect in her paintings. Moon, Hye-Jung's flowers are not merely for appreciation. ● Moon, Hye-Jung frequently chose flowers as her subjects since the 1990s. 「Lotus Landscape」 is incomparably more colorful than 「White Flower I」 or 「White Flower II」, both of which were painted about a decade before. Here Moon attempted an understated aesthetics of representation. The vestiges of expressionism led by a heated state of mind have mellowed. The flowers, however, are not merely there for their beauty. Hope arises in the midst of loss. Such is the significance of the column, the vertical icon that frequents her painting Landscape which was painted during this period. It represents all orders rooted from the earth and stretches to the atmosphere. It is the vigor of Vincent van Gogh's cypress trees, the will to soar, and the axis of comfort and reassurance amidst life's hardship. ● What appears in this world is closely related to the vitality that endures the history of hardship and crises. A power, a vitality, is at the essence of Moon, Hye-Jung's four decades of painting. What is this power? It is the power that arises from being alive, the power that enables a seed to sprout and blossom. Only life is unconditional and unscathed from death. Moon's installation works, the Ginseng Field series, could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Ginseng is a plant that is as symbolic as the lotus flowers. The vitality of ginseng is, in many ways, similar to that of art. Ginseng grows at a languid pace and takes as long as six years to gain potency. Moreover, it can only be cultivated in low light and requires shutters. Artistry, that is, artistic quality, also often requires an entire lifetime to bear fruit and is a value that should be adequately independent of the stimuli from the outer world. The power of art emerges through the time one spends enduring the world. ● The vitality found in Moon, Hye-Jung's 「Ginseng Field」 is engraved in her touches and rough brush strokes that envelop the memory of flowers. The bubbly bouquets of colors look like stems at first glance but could also be mere brushstrokes resembling flower petals. Moon, Hye-Jung's brushes and paint traverse the boundaries of reality and interpretation, representation and expression. The expression here is not limited to the subject and follows the freedom that transcends it. It flows into a play that can be left rough and disorganized. The freewheeling and rhythmic lines are unaware of the boundary that divides figurative and abstract art. The act of crossing boundaries itself is a sign of vitality. Freeing oneself from the perspective that regulates the two worlds also requires power. The power that enables one to overcome formality and its dichotomy - this is the aesthetic thesis of Moon, Hye-Jung's artistic world. (2022 October) ■ Sangyong Shim

 

Vol.20221123d | 문혜정展 / MOONHYEJUNG / 文惠正 / painting

메타만다라 Meta-mandala

 

전인경展 / JEONINKYUNG / 全仁敬 / painting 

2021_1001 ▶ 2021_1024 / 월요일 휴관

 

전인경_메타만다라 21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480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자하미술관

ZAHA MUSEUM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부암동 362-21번지)

Tel. +82.(0)2.395.3222

www.zahamuseum.org

 

 

팬데믹 시대, 컬러플 만다라 ● 2021년 전인경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그리기 시작했다. 인류를 걸어 넘어트린 덫, 문명의 훼방꾼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서사를 도상학적으로 풀어내는 야심만만한 연작이다. 조형성의 기조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생각이 깊어진 것만큼은 확연히 드러난다. 정방형 캔버스의 4면을 둘러싼 사방문(四方紋)의 등장이 먼저 그러한 인상을 준다. 사방문은 만다라 미학에서 차용한 것으로, 성과 속을 구분하는 기제였다. ● 전인경 회화의 고유한 조형체계가 강렬한 색에 얹혀진 채 쇄도해온다. 「바이러스의 공간과 시간」(2021)은 마치 세폭 제단화의 상징성을 부여하려는 듯,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내용을 세 개의 캔버스에 나누어 담긴다. 이 만다라 세상에선 한낱 바이러스에도 나름의 미와 위엄이 허용된다.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망각이 아니라면, '별과 바이러스와 인간'은 모두, 의심의 여지 없이 형제요 따라서 동등체이다. 인간과 바이러스의 관계는 악(惡)과 일방적 희생 같은 일방향의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백신이 이 병든 문명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듯, 바이러스가 퇴치해야 하는 괴물인 것도 아니다. 2020년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이지 않는 적"으로 간주하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는 동안 사재기, 온라인 통신, 다양한 사회적 제재들을 통해 일상을 마치 군사 캠프와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이 기간 미국 사회에서 미디어의 선전적인 위력(propaganda power)은 매우 완강한 것이 되었다. 문제적인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탐욕과 야심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 퇴치 이전에 경청이어야 한다.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듣는 것, 인간과 바이러스의 '적대적 공생관계(antagonistic cooperation)'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전인경의 만다라 회화론에 부합하는 시대정신이다. ● 이런 맥락에서, 「바이러스의 공간과 시간」의 세폭 회화에서 각각의 바이러스가 노란색과 빨간색, 파란색의 신체를 입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살아있고 역동하는 많은 조형적 요인들에도 정교한 회화적 질서는 흔들림이 없다. 리듬은 마치 심장박동처럼 규칙적이다. 이 안정적인 리듬이 강렬한 채색의 분방함을 적절하게 조율한다. 이 리듬에 의해, 이 세계는 예컨대 최근에 그린 바이러스 이미지처럼 그 형태의 재현성이 분명한 경우에도 일러스트레이션을 넘어서는 순도 높은 회화성을 획득한다. 사실 이 조율된 내적, 외적 리듬감이 회화성이라는 미적 가치를 구성하는 결정적인 요인들 가운데 하나다.

 

전인경_바이러스의 시공간 Ⅰ,Ⅱ,Ⅲ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150cm×3_2021
전인경_메타만다라 21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5×116.5cm_2021

전인경의 만다라의 미학 안에서는 모든 폭력의 전조증상인 피아(彼我)의 구분이 무색하다. 미와 추의 분열, 천과 귀의 계층적 구분, 자연과 문명, 동양과 서양, 유색인과 백인, 문명과 야만, 전통과 현대, 남자와 여자의 분리, 이 모든 이분법의 자리는 이 미학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만다라는 어느 하나도 무의미한 것이 없으며 각기 고유한 존재의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상호연관성을 갖는다는 점을 성찰하는 예술이다."(전인경) 여기서 만다라는 더는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고, 미학도 그것의 세속화된 탐미의 범주로만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회화는 교환이고 사건이다. 영적인 것은 형태와 색을 옷 입고, 형태와 색은 지난 근대기의 망각을 딛고 정신과 가치의 차원을 스스로 복원하는 교환이다. 여기서 만다라의 영성(靈性)은 시각적 조형성으로 기꺼이 번역되고, 예술은 다시 초월계의 호출 우주의 부름에 귀와 마음을 연다. ● 전인경은 이 재회의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만다라」 연작에 임해 왔다. 그리고 최근 그의 만다라 회화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실험인 「메타 만다라」로의 나아감을 준비 중이다. 만다라 미학의 근간에서 보면 그 자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되었듯, 그-만다라 미학- 자체가 이미 기존 회화론의 경계 허물기며 교환이고, 공존과 상호호혜의 융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메타 만다라의 미적 융합은 이번에는 디지털 기술, 가상현실까지 그 영역을 넓힌다는 의미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러한 행보는 최근 '디지털 페인팅' 또는 '디지털 코드 페인팅'으로 명명할 수 있을 듯한 실험의 결과물을 보여주어 온, 독특한 경력의 이주행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구현되었다. ● 디지털 코드 페인팅은 수백, 수천 장씩 스스로를 복제해내며, 벨기에의 화가 뤽 튀망(Luc Tuymans. 1958~ )이 말했던 "정말로 좋은 그림은 암기하는 것조차 거부한다"를 비웃는다. 그럼에도 전인경이 메타 만다라, 초월적 만다라로 명명하는 그 미학은 가능성과 비웃음 사이를 초연히 지나면서, 지금껏 '붓의 운행'을 신화화하는 전통적인 회화론에 대한 의미심장한 성찰에 몸을 맡긴다. 작가는 이제 전통적인 운필의 회화론이 구획해온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싶어한다. 경계를 넘어 자유하기, 그것이 만다라 미학의 더 깊은 심해를 유영하는 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전인경_메타만다라 2105 Ⅰ,Ⅱ,Ⅲ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0×70cm×3_2021
전인경_메타만다라 2104 Ⅰ,Ⅱ,Ⅲ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72.5cm×3_2021

하지만,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몸뚱이에서 사리가 나오도록 수련을 거듭해도 녹록치가 않은, 만다라는 결코 미학 문법으로 풀어내기에 녹록치 않은 수준의 주제다. 세속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에게 깨달음은 영적 향수요 의지적 지향일 수 있어도, 그 완성형은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깨달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깊은 학습은 그 불구성의 일부를 보완하는 많지 않은 수단 가운데 하나다. 전인경은 요즈음의 작가들에게서는 보기 드문 미덕인 성실한 학습과 자기성찰을 통해 인간의 몸과 정신에 대한 사유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에 다가서 왔다. 원자에서 초신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인간의 홍체에서 초신성의 폭발에 이르기까지, 긴 스펙트럼을 오가면서 프랙탈 우주론, 존재와 우주의 도상학적 유사성 등, 여정의 흥미진진한 기록을 회화라는 도상학적 결정체로 남긴다. ● 그럼에도 작가가 인용한 바 있는 20세기 초 신경과학자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Santiago Ramón y Cajal)의 다음의 말을 전향적으로 곱씹어보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신경세포는 수 많은 나무들로 가득한 정원과 유사해서,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펴서 매일 더 많은 꽃과 과일을 맺는다." 하지만, 비유는 앞과 뒤를 바꿀 때 더 훨씬 더 조형미학적으로 잠재력을 지닌 진술이 된다. 즉 많은 꽃과 과일이 맺히고 소멸하는 것을 볼(seeing) 때, 실은 우리는 우주의 생성과 마주하는(facing) 것이고, 마주하는 것은 결단코 그것을 가장 잘 아는(knowing) 방법인 것이다.(Seeing is Facing. Facing is Knowing).

 

전인경_메타만다라 008(feat. 이주행)_한지에 디지털 프린트_가변크기_2021
전인경_메타만다라 013(feat. 이주행)_한지에 디지털 프린트_가변크기_2021

전인경의 회화에 다가서기 위해 핵융합과 초신성 폭발, 인체를 구성하는 원소들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을의 맑은 대기와 높아진 하늘과 마주하고, 가슴 깊이 초대해 들이는 것은 원소와 초신성 폭발과 성운들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주어지는 미학적 특권이다. 즉, 만다라가 우리로 보게 만드는 만큼이나, 보는 자체가 우리를 만다라의 초입으로 인도하기도 하는 것이다. 무려 31년(1977-2008) 동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을 역임했던 필립 몬테벨로(Philippe Montebellow)가 고전 미술사의 빛나는 작품들과 마주하며 했던 말을 생각난다. "위대한 시대의 작품은 우리를 매혹하고 잃어버린 문명 가까이로 데려갑니다." 위대한 시대는 "물질을 넘어 정신적인 가치로 나아간 시대"다. ● 이것이 다시금 절실히 필요한, 전인경의 회화가 그 염원을 시각화하고자 하는 만다라 시대의 도래, 그 미학의 복원이다. 포스트 휴먼을 노랫말처럼 입에 달고 사는 이 시대이기에, 만다라 미학은 그리 탐탁치 않은 고전극으로의 회귀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원이라는 거울 없는 탐색과 발견은 한계가 명백한 일일 뿐이다. 뿌리를 잊은 문명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게임은 그리 무겁지만은 않다. 전인경을 따라, 뭉글거리는 생명의 입자들, 질서정연한 원소들의 향연, 코로나 바이러스도 형제가 되는 형형색색의 우주로 초대되는 것으로 충분하기에 그렇다. ■ 심상용

 

 

Vol.20211002g | 전인경展 / JEONINKYUNG / 全仁敬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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