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성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

 


[짬] ‘전통문화의 오늘과 내일…’ 펴낸 심우성 민속극연구소 소장

 

1974년 <남사당패 연구>(동화출판공사)가 나왔을 때 민속학계는 깜짝 놀랐다. 민속학 연구의 새 지평을 연 내용뿐 아니라 우리말 문장도 빼어났기 때문이었다. 지은이는 민속학자이자 1인극 배우인 심우성(81)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1950년대부터 남사당패에 관심을 두고, 60년대 본격적으로 이 분야를 파헤쳤다. 그는 평생 우리 민속놀이를 연구하고, ‘살아있는’ 동시대 공연예술로 만들어왔다. 그는 뛰어난 작명가다. 이름을 불러주자 전통예술은 꽃이 됐다. 장고·북·꽹과리·징이란 각각의 악기를 묶어 처음으로 ‘사물놀이’라고 이름 붙였다. 일본 말투인 막(幕)은 ‘마당’으로, 경(景)은 ‘거리’로, 농악은 ‘풍물’로 가다듬었다. 그는 뛰어난 광대다. 2001년 분단의 아픔을 그린 1인극 <결혼굿>, <쌍두아>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2009년 일본 도쿄의 세계적인 인형극장에서 1인극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4·3 고개를 넘어간다>로 4·3의 실상을 알렸다. 지난해엔 세월호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넋전 아리랑>을 만들었다. 심 소장은 최근 <전통문화의 오늘과 내일: 그의 눈물과 웃음>(답게)을 펴냈다. 스스로 발굴하고 알린 남사당패 놀이, 솟대쟁이패 놀이, 인형극 등 민속놀이와 예인들의 삶을 짚어보고, 우리 민속놀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지난 18일 서울 인사동에서 그를 만났다.

1970년대 ‘남사당패 연구’ 이어
이번에 처음으로 책에 담아
솟대패들이 창호지 인형 만들어
넋 위로하는 춤 ‘넋전’도 수록
전통은 어제에서 내일로 가는 것
통일 등 현재의 내용 담고 싶어


‘민속학 80평생’을 이끈 첫 단추는 춤이었다. “다섯살 때부터 할머니 따라 최승희 춤을 보러 갔어요. 현재 서울시의회로 쓰는 부민관에서 춤을 췄는데, 할머니 덕에 최승희 춤에 반했지요. 최승희의 남편 안막이 우리 아버지 선배입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회현동 최승희 집도 자주 놀러 갔어요.” 최승희(1911~1967)는 우리 춤에 서구 무용을 접목했다. 칼춤과 부채춤, 승무 등을 현대화해 조선 제일의 춤꾼으로 불렸다. 최승희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이론가 안막(1910~미상)과 함께 해방 뒤 북한으로 갔다.


최승희에 빠졌던 심 소장이 우리 전통문화에 빠진 건 당연했다. 공연예술계에 끼친 그의 발자취는 뚜렷하다. 오태석 극단 목화 대표는 우리 고유의 연극 문법을 찾는 데 힘이 된 분으로 심 소장을 꼽은 바 있다. “그분 덕분에 산대 극본을 접할 수 있었으니까요. 산대놀이꾼들이 인간문화재라고 불리기 이전의 순수한 형태, 퀴퀴한 체취, 넉살, 말의 힘 등이 살아있는 그대로를 만날 수 있던 게 심우성 선생이 해온 작업 덕이었거든요. (제가 1973년 만든) 작품 <초분>도 그분에게 처음 들은 말이었어요.”


심 소장 덕분에 산대놀이가 박물관의 박제가 아니라, 우리 곁의 공연예술로 되살아났다. 그런 심 소장이니만큼 이번 책에서도 ‘민속놀이가 왜 전승돼야 하는가’를 거듭 강조한다. “민속은 한마디로 ‘민간의 풍속’의 준말이다. 민속의 바른 뜻은 옛날의 풍속이 아니라 오늘의 일상생활 속에 살아있는 풍속을 말하는 것이다.”(250쪽) 그는 책 내용을 더 자세히 설명했다. “민속, 전통문화 하면 자칫 막혀 있는 옛날이야기로 알거든. 그런데 전통은 어제의 것이면서 내일로 흘러가는 물길이어야지, 옛날이야기로 끝나면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 얘기를 하고파서 이 책을 쓴 거지요.”


심 소장은 2007년 방북 때 봉산탈춤, 강령탈춤을 직접 보고 왔다. 그런데 실망했다. “내심 약간 기대를 했는데, 북한에서도 옛날 춤을 추고 있었어요. 죽은 춤을 추는 것은 남쪽이나 북쪽이나 똑같아서 슬픕디다. 남한에서도 아팠지만 북한에서도 아팠어요. 그건 흉내 춤이에요.” 여기서 심 소장은 친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말을 인용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백기완은 나를 ‘우새이’(우성이)라고 불러요. 백기완은 늘 옛날 탈춤을 추지 말고 오늘의 탈춤, 통일탈춤을 추라고 소리치고 다녀요.”


사실 심 소장은 백 소장 때문에 남산 정보기관에 몇 번이고 불려갔다. 1970년대 서울 명동의 3층 건물에 한국민속극연구소 사무실을 열었을 때다. “백기완이 사무실에 와서 ‘야, 이 도적놈의 새끼야, 너 혼자 쓰냐? 나도 같이 쓰자’고 합디다. 그러곤 한국민속극연구소 간판 위에다 백범사상연구소 간판을 써붙였어요. 그랬더니 정보기관에서 불러 ‘같은 사무실을 쓰는 백기완이 뭐 하는 놈인지 털어놓으라’고 했어요.”


그는 1950년대부터 남사당 놀이에 관심을 가졌다. “저한테 남사당 놀이를 얘기해준 분이 남운용(남형우), 양도일, 송순갑 세 사람이에요. 이분들이 ‘우리는 남사당패하고 솟대쟁이패 두 패한테 미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면서 어린 세월을 지냈다’고 하더라고. 남사당패 연구는 1970년대에 책을 냈지만, 솟대쟁이패 연구는 이번에 처음으로 이 책에 담았어요. 솟대놀이는 경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요즘 진주에 강연하러 여러 번 갔지요.”


심 소장은 남사당, 솟대쟁이 연구뿐 아니라 ‘넋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넋전이란 게 뭔가 하면 솟대패들이 창호지로 넋전이라는 종이인형을 오려서 넋을 위로하는 춤을 춘 거거든요. 옛날 넋전은 절집하고 무당집에서 많이 했는데, 요즘은 전라도에서 굿할 때만 남아 있어요.” 그가 퍼뜨린 넋전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성행하고 있다. “홋카이도부터 규슈 섬들까지 일본 전체에 가르치지 않은 곳이 없어요.” 팔순의 심 소장이 꼭 해보고 싶은 공연이 있다. “요즘 대학생들하고 함께 넋전을 무대에 올리고 싶습니다. 오늘의 젊은이들도 통일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겨레신문] 글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호남우도 여성농악단 ‘연희단 팔산대’의 길놀이와 판 굿이
지난 17일 오후2시부터 정선시가지와 문화장터에서 펼쳐졌다.

유명세만큼이나 그 들의 신명은 정선 장터를 흥건히 적셨다.
어린이에서부터 학생에 이르기 까지 소녀들로 구성된 팔산대의 솜씨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 지켜 본 그들의 신명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연희단 팔산대'가 있기 까지는 우리나라 사물놀이를 주름잡았던 김운태 단장이 있다.
그는 김덕수·이광수 등과 함께 80-90년대 사물놀이 붐을 일으킨 원년 멤버로서 활동했다.
1969년 호남여성 농악단 단장이었던 부친인 김칠선씨의 영향으로 유년시절부터 사물놀이를 접했다.

김 단장은 72년 제2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농악부 장원을 시작으로 여러 대회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다.
1982년 ‘김덕수 사물놀이’에 입단했고 1990년에는 김덕수씨와 함께 북한 평양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어 미국과 유럽 8개국 등의 순회공연을 통해 우리나라의 춤사위를 선보여 각광을 받았다.

김 단장은 채상소고춤의 명인으로 국내 사물놀이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이번에 펼쳐진 연희단 팔산대의 정선순회공연은 오는 10월 4일부터 5일까지 정선아라리공원에서 열리는
제55회 한국민속예술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마련된 '십일홍 프로젝트'이다.

사라져 가는 우리 민속예술을 발굴·복원해 세계적 문화유산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민속예술축제가
올 가을 정선에서 화려하게 막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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