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되어 숙제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 안창홍의 ‘유령패션’전이었다.

인터넷에서 대략의 작품이미지는 보았지만,

하나하나의 작품이 어울려 안겨주는 감흥이 기대되어서다.

더구나 전시장 가려다 코로나에 발목 잡힌 전시가 아니던가?

 

지난 16일 정동지와 은평구 진관동의 ‘사비나미술관‘을 찾아갔다.

때 마침 안창홍 작가와 이명옥 사비나관장 등 여러 명이

전시 보러 온 에콰도르 대사 일행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지난해 ‘한국과 에콰도르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안창홍의 ‘유령패션’이 초대되었는데,

에콰도르 최고의 미술관인 '과야사민미술관'과

'인류의 예배당'에서 성황리에 전시를 마친 귀국 보고 전이었다.

에콰도르와 교류의 물꼬를 턴 문화외교의 좋은 선례였다.

 

안창홍의 '유령패션'은 옷만 있고 사람은 없는 그야말로 유령 같은 작품이다.

삼개 층에 나누어 전시된 작품들은 물질문명에 병든 현대인의 자화상 같았다.

쇼윈도나 걸려있을 원색의 옷들이 난무하지만, 얼굴도 팔도 다리도 없다.

허공을 부유하듯 옷만 떠도는데, 더러는 옷깃에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자 부와 계급을 상징하는 패션을 통해

인간 존재 자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유령패션’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과 인간 허상의 단면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람 사는 것이 아니라 허깨비의 삶이라는 것이다.

 

'유령패션' 작업은 먼저 인터넷에서 그림의 바탕이 될 패션 이미지를 수집한다.

디지털 펜으로 사람의 형상은 지우고 옷만 남긴 위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이를 캔버스에 전신 크기의 유화로 옮기고, 입체 작업으로도 확장한다.

 

그리고 폭력적 억압에 의해 잃어버린 개인의 정체성과

현대 사회의 집단 최면 현상을 담은 ‘마스크’ 연작인상적이다.

눈을 가린 붕대와 이마에 뚫린 열쇠구멍은 상실된 자아와 무의식을 상징한다.

마스크는 최면에 걸린 듯 집단적 무의식에 빠져들게 한다.

 

안창홍 작업의 밑바탕에는 부패한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역사 속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울분의 시선이 깔려 있다.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을 통찰력 있게 꿰뚫어보며 까발린다.

 

이번 귀국전을 위해 평면에서 입체로 확장한 새로운 시도의 작품 3점도 선보였다.

스마트폰으로 '유령 패션'을 그린 디지털 펜화 약 150점은 OLED 디스플레이로 설치됐고,

디지털 펜화를 유화와 입체 작업으로 옮긴 작품 32점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4층 전시실에는 자화상을 비롯한 드로잉 85점을 내 걸었다.

 

자화상

안창홍은 1953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제도적인 미술 교육을 거부하고 화가로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현대 한국 사회를 비판하며 권력에 저항해온 작가다.

1970년대 중반 '위험한 놀이'연작을 시작으로 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을 주도한 ‘현실과 발언’도 참여했다.

가족 해체를 다룬 ‘가족사진’ 연작을 비롯하여 '봄날은 간다', '사이보그' 연작 등을 발표하며

50여 년간 ‘권력’이란 괴물의 속성을 꿰뚫어보며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거침없고 저돌적인 작업 방식에서 야성의 끼를 느낄 수 있듯이,

원초적 본능이 꿈틀거리는 강열함이 작품의 주조를 이룬다.

첨예한 비판 의식을 지니면서도 항상 새로운 시도로 돌파한다.

 

그는 1989년 카뉴 국제회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2009년 이인성 미술상에 이어

2013년 이중섭미술상과 부일미술대상을 수상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기획한 '2019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빙 자료수집·연구지원' 작가로 선정되는 등

국내 대표 작가로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잘 나가는 작가다.

 

이 전시는 5월 29일까지 이어진다.

 

사진, 글 / 조문호

 

 

성완경 선생(79)께서 지난 3월 18일 새벽 5시17분 코로나 합병증으로 운명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장례식장 : 화순 전남대학교병원 장례식장 제1분향실

 

발인 : 3월21일(월) 정오

 

전염병으로 방문하는 문상은 가급적 피해 주시길 원합니다.

배우자 공선옥 연락처 : 010-3389-7563

[국민은행 535501-04-079978 공선옥]

 

성완경선생은 민중미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우리시대의 대표적 평론가다.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수료하고,

파리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파리제8대학 조형예술학부를 수학했다.

 

1979년 최민, 윤범모, 오윤 등과 함께 미술그룹 '현실과 발언'을 창립해 민중미술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982년부터 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광주비엔날레국제전 커미셔너(1995년),

부천만화정보센터 이사장(1999~2001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2001년)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레제와 기계시대의 미학' '민중미술을 향하여-현실과 발언 10년사'

'민중미술 모더니즘 시각문화-새로운 현대를 위한 성찰' '성완경의 세계만화탐험' 등을 남겼다.

 

미술과 관련있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사진가들도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1989년 지젤 프로인트의 ‘사진과 사회’라는 책을 번역하여 일찍부터 사진가들에게도 친숙한 분이다.

 

모든 직책에서 물러 나 담양에 정착한 후에도 지인들의 전람회나 모임만 있으면 빠짐 없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선생의 느닷없는 비보에 몸 둘바를 모르겠다,

 

사진으로나마 지난날을 추억하며 선생의 명복을 빌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진보미술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신 김윤수 초대 한국민예총 이사장께서 지난 29일 향년 82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업씨와 동생 김익수(영남대 명예교수), 김두해(재미음악가)씨가 있다.






지난 1일 오후5시에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식을 갖고,

그 이틀 날 오전 9시30분 발인하여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민족예술인장으로 치러진 장례위원장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맡았고,

집행위원장에 박불똥(민예총이사장), 이종헌, 강일우, 이영욱씨,
장례위원에 백낙청, 백기완, 신학철, 김정헌, 임옥상, 김상철, 윤범모, 채희완, 김민기, 심광현,

강성원, 강요배, 김봉준, 홍성담, 박진화, 고세현씨 등 많은 미술계 인사들로 구성했다.






고인은 경북 영일 출신으로 서울대 미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영남대 교수를 역임했다.
1980년대 민족미술인협회(민미협) 회장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

창작과비평사 대표이사 등을 거쳐 2003부터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냈다.
201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오피시에)을 받았으며,

‘민족미술과 리얼리즘’,‘한국현대회화사’,‘한국미술 100년’ 등의 저서와 번역서를 펴냈다.





선생께서는 70년대부터 반 유신운동에 참여했고 80년대에는 진보적인 리얼리즘 미술운동의 이론가로서,
특히 당시 국내 제도권 화단을 주도했던 추상주의 미술 사조에 맞서 현실 참여적인 리얼리즘 미술을

국내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으로 정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선생의 부음을 전해들은 날은 통인가게에서 배일동명창의 판소리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 심봉사 통곡 대목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는데, 배일동씨의 절절한 소리가 마음을 울렸기도 하지만,

어쩌면 김윤수선생 생각에 울었는지도 모른다.



 


뒤풀이에서 대취하여 장례식장을 찾았는데, 민예총 식구들이 총 출동해 있었다.

빈소는 미망인 김정업 여사가 지켰고,

민예총박불똥 이사장, 서인형 사무국장, 정영신 조직국장, 박세라 총무팀장이 손님을 맞았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니 슬픔도 잠깐이었다.

주재환선생을 비롯하여 유홍준 장례위원장, 박종관 문화예술위원장, 박현수, 심정수, 임정희, 장순향,

박흥순, 곽대원, 김영중씨 등 많은 분들이 와 계셨다.



 


추모식이 있는 그 이틀 날은 공교롭게도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와 겹쳤다.

이흥덕, 조신호, 이민종씨 전시 오프닝과 시간이 같아 어느 한 곳을 포기해야 했으나 양다리 걸친 것이다.

전시된 작품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류연복씨가 서둘러야 한단다.

많은 분들을 남겨두고 정복수, 류연복씨와 먼저 나왔는데, 추모식장에 도착하니 끝나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마산에서 온 고승하씨, 경주에서 온 정비파씨 내외 등 반가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장지에 가는 그 다음날 아침엔 약속이 있어 나설 형편이 못되지만, 떠나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장례식장에 갔다.

민미협회원들은 가까운 곳에서 잤는지 다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신학철선생도 계셨다.

선생께서는 집안에 우환이 있어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무어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안타까웠는데, 정말 세상이 원망스럽더라.







시대의 스승이신 고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보자.
“예술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아래 사진은 '민예총' 페북에 올라 온 정영신씨 사진을 스크랩했다.












이종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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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떠한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림을 버리고 싶은 생각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좀더 좋은 그림을 남들이 모방할 수 없는 나의 그림을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 친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애써왔다”

–양달석, 자서전에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양달석은 한국의 대표적인 목가적 풍경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와 목동,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초원은 동심과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의 화업(畵業) 인생을 살펴보면, 그가 이 땅에 민중화(民衆畵)를 제일 먼저 그려낸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40년대 일제치하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조선 민중의 고달픈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당시 농촌 생활의 일상을 그린 ‘휴식’은 거친 필선으로 강인한 민초들의 일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50-60년대는 부산 판자촌에서 생활하는 피난민들의 곤궁한 모습을 주로 그렸는데, 항구의 일꾼들과 리어카에서 좌판을 펼친 거리장사꾼들이 그 대상 이었다. ‘생선장수’에서 보듯이 여인의 억센 표정에서 우리는 고단하지만 강인한 민중들의 생명력을 읽을 수 있다.

민중을 보는 양달석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따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그림은 민중들의 생활이 나아지고 희망을 보여주는 밝고 평온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한국화단의 화풍은 해방이전에는 국내화가들 대부분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그림을 배워오던 시기였기로 어떻게 그리느냐가 주된 문제였고, 해방 이후에는 무엇을 그릴까 하는 주제가 문제였다. 양달석은 독학으로 이 두 문제를 모두 소화하여 서양화를 동양화처럼 그려내는 자신의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함으로써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서 위안을 얻고 소장하도록 만들었다.

                            휴식, 38x28cm, 1942 : 점심을 먹는 장면.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지게와 가족 같은 황소가 나무 사이로 내다보는 모습이 정겹다.


거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백부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소를 치는 목동으로 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전 일본 중등학교 미전에 <농가>로 특선하고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 후 조선미술전람회에(11,17,18회) 세 차례나 입선하고 고학으로 일본유학을 하여 동경 독립미술협회전(11, 12회)에서도 두 차례 입선했다. 귀국해서는 부산 경남 지역에서 활동하다 6.25전쟁 이후 좌익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으며 국전작품을 준비하던 중 아들을 잃고도 작업에 매진하여 입선(6회)하였다. 그 후 국전 추천작가(23,24,25,26,27회), 국전초대작가(29회)로 활발히 활동했다.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도 손에 붓을 묶어 화혼을 불태운 그의 일대기는 한편의 드라마 같다.

붓 한 자루로 가족생계를 책임지고, 작업한 작품 3천여점을 모두 판매한 한국화단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여주는 양달석은 그의 고집대로 ‘나는 그림을 전시하는 목적은 반드시 그림을 팔기 위해서다’라는 철저한 프로의식을 가진 진정한 민중화가였다. 예나 지금이나 양달석의 그 많은 그림이 시중에서 보기 어려운 것은 소장가들이 그의 그림을 통해 어린 시절 고향모습을 그리워하며 외부에 유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민중화가란 어느 특정집단이나 특정지역에 편중되는 그림이 아닌 모든 민중이 그 그림들을 좋아하고 함께 호흡하며 자신의 사무실이나 가정에 꼭 걸고 싶어하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민중미술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군부독재를 비판하고 사회의 불의에 항거하는 특정집단이나 특정지역의 전유물로 비쳐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당시의 암울했던 과거가 지나고 누구나 현실에 참여하고 비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는데, 아직도 과거에 갇혀있는 민중화가, 미술사가 그리고 비평가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그들이 그 당시 시대상황과 사회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거리낌 없이 표현 했듯이 이젠 그들도 후배들로부터 비평을 받는 기성세대가 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진정한 민중미술은 공산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북녘 동포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이 시대를 공감하는 모든 이에게 사랑 받고, 우리 국민들 모두가 이해하는 미술이어야 되지 않을까?


- 김의균(1964- ) ㈜카이로켐 대표이사, 서강대, 동대학원 유기합성화학 전공, 독일 Th.Goldschmidt AG 중앙연구소와 프랑스 Rhone-Poulenc 중앙연구소에서 계면화학 연구. LG기술원 연구원과 프랑스 CLC Technologie 연구소 한국법인 대표이사를 역임 후, 화학 벤처기업인 ㈜카이로켐(ChiroChem)을 창업. 양달석 화백 평전작업을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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