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회 맛을 아니?“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다.

사진가 김수길씨, 시인 조해인씨와 함께 복에 없는 횟집에 간 이야기다.

네 사람이 회 한 접시를 남겼는데, 상대를 배려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주말 녹번동 정영신씨 집에 있는데, 김수길씨가 나오라고 했다.
은평구 주민끼리 만나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가 오래 전부터 나왔으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난, 주말만 녹번동에 오지만, 그마저 정선 가거나 없을 때가 많다.

마침 하루 전날 조해인씨와 연락이 되어 만나기로 작정했던 터다.

그것도 집 가까이 있는 최원호병원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나가 기다리니 조해인씨는 역촌역 방향에서, 반대 방향에서 김수길씨가 나타났다.

내가 역촌역 부근의 사정을 잘 알아 어디로 가면 좋겠냐고 물었지만, 좀 난처했다.

여지 것 따라가기만 했지 내가 주동이 되어 음식점 안내한 적도 없지만,

상대방 음식 취향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평소 정영신씨와 외식할 때도 실랑이하지만, 결국은 내가 따라간다.

늘상 뭘 먹을까?”하고 물어오면 사모님 드시고 싶은 곳에 가시죠  이런 식이다.

사실, 짠맛이나 매운 맛 같은 강한 맛을 제외한 예민한 맛은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이것저것 가리고 않고 남 따라 먹는 잡식성이 되어버렸는데,

어찌보면 맛도 제대로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다.

 

더구나 틀니를 끼면 더 맛을 알 수 없다.

맛은 혀로 감지해, 틀니 때문에 맛이 없다는 말은 기분에 의한 것이라지만,

실제 끼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말하는 논리일 뿐이다.

아무리 혀로 맛을 안다지만, 입안에 돌덩이가 들었다고 생각해 보라.

니 맛인지 내 맛인지 분간되겠나?


 

내가 잘 가는 곳은 짜장면 한 그릇에 2,500원이고,

제일 비싼 게 5,000원하는 역촌동 기사식당이지만, 그 곳은 술을 팔지 않아 안내할 수 없었다.


결정을 못 하니, 어디서 보았는지 회집 이야기를 꺼냈다.

정영신씨가 회를 좋아해 한 두 차례 따라갔지만, 별로 탐탁치는 않았다.

아마 김수길씨가 날 생각해 각별히 신경 쓰는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안내했다.



조해인씨는 술 끊은 지가 두 달 가까이 되었으나, 그 때까지 춘향이처럼 지조를 잘 지켰다.

나 역시 병원 다니느라 술 마시지 못한지가 한 달이 넘었는데, 갈보처럼 지조를 팽개쳤다.

먹고 죽은 귀신 화색도 좋다듯이 술 술 넘어갔다.

김수길씨 조차 평소 말이 적은 양반이라 주거니 받거니 술만 홀짝였다.

김수길씨가 친구 김일남씨를 불렀으나 마찬가지였다.


 

김수길씨는 정영신씨도 불렀으나, 나오지 않자 싸웠냐고 물었다.

싸운 게 아니라 요즘 노출되는 것을 꺼려 내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싫어해서다.

여자들은 자기 얼굴에 예민하기도 하지만, 주변 지인 중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이혼했으면 만나지 말라는 것이다. 왜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는지 모르겠다.

대충 짐작하는 년인데, 걸리면 가랑이를 찢어 버릴 작정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을 찍지만 상대를 배려해 가능하면 예쁘게 나온 사진만 쓴다.

두 번 찍어 그 중 예쁜 사진을 고르고, 그것도 본인이 싫어하면 즉각 내린다.

더러는 찌그러지거나 요상한 표정의 포트레이트만 즐겨 찍는 사진가도 있더라.

예술사진은 찌그러져야 하는가? 제발 남의 얼굴가지고 장난치지마라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 갈 일이 있다.

어제 지방에 있는 잘 아는 사람이 페북에 댓글을 달았는데, 별 것 아닌 말에 기분이 상했다.

난, 그 양반이 페친인줄도 몰랐는데, 내 글을 쭉 읽어 잘 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보기만 하고 흔적도 남기지 않았단 말인가?

그런 거야 있을 수 있겠으나, 처음으로 댓글 달며 충고하는 식이었다.


옛날의 미소가 그립다는 등 말년에 철든 것처럼 왜 그리 설치냐며, 뒤도 돌아보라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오랜만에 할 소리도 아니지만, 포스팅한 내용도 댓글과 상관없는 동자동 이야기였다.

하고 싶은 말을 엉뚱한데 풀어 놓은 것 같았는데, 오래 전의 악연으로 생각하기도 싫어 페친을 끊어버렸다.



 

사실, 긴 세월동안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두리뭉실 살아왔다.

술자리에서 좌중을 웃기려 실없는 소리까지 해가면서...

그러나 내 뜻과는 달리 돌아서서는 욕하며 바보 취급 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지는 더러운 세상이 되었고...

 

다들 나를 호구로 생각하는지, 댓가도 없이 사진을 부탁하고 사진도 그냥 사용했다.

대개 아는 사람들이라 그냥 넘어갔는데, 오죽하면 40여 년 동안 열심히 사진 찍어 거지처럼 살겠는가?


 

그래서 마누라와 이혼하고 쪽방에 들어가며 다르게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잘 못한 것은 그냥두지 않고 바로 잡겠다고 나섰다.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남은 세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좆되고 싶으니 

더 이상 씹소리 하지마라.


 


페친 끊은 놈 이야기하다 열 받아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술자리가 재미없으니 조해인씨는 살아생전 마광수씨의 숨겨진 이야기를 술안주로 내놓기도 했고,

얼마 전에 인사동에서 전시한 소설가 이외수씨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 당시 사정이 있어 개막식에 가지 못했는데, 조해인씨가 이혼한 부인도 왔더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하기야! 나도 정영신씨와 이혼했지만, 정영신씨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지 않던가?

나처럼, 사람을 옭아매는 결혼이란 틀 자체를 깨고 싶은 마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난 본래부터 음식을 많이 먹지 않지만, 다들 회를 먹지 않았다.

소주 안주로는 얼큰한 매운탕이 더 좋았는데, 비싼 회집을 말리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결국 그 회를 싸가지고 정영신씨 갖다 주었지만, 돈만 쓴 김수길씨에게 미안했다.

 

난, 돈 맛도 모르는데다 음식 맛까지 모르니, 끝난 인생이다.

그래도 아는 맛이 하나 있긴한데, 알랑가 모르겠다. 

 

사진, / 조문호





















 


“다른 장르로 인정받는 게 어렵다는 선입견 깨고 싶다”

국내 포크록의 대부인 한대수씨(66·사진)가 다음달 7~1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리서울 갤러리’에서 소설가 마광수씨(63), 팝아티스트 변우식씨(43)와 함께 ‘꿈꾸는 삼총사’라는 작품전을 선보인다. 10일 오후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대수씨는 “내가 사진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2000년 개인 사진전 ‘작은 평화’ 이후 14년 만”이라고 말했다.

‘꿈꾸는 삼총사’에서 가수인 한씨는 사진 15점을, 소설가인 마씨는 그림 9점을, 비보이 등의 경력을 지닌 변씨는 팝아트 작품 7~10여점을 각각 전시한다. 각기 달리 꿔온 꿈의 단면을 이번 전시회를 통해 소개하는 방식이다. 한씨는 “7년 전 마 교수의 그림전에 우연히 갔다가 그의 작품세계에 놀랐던 적이 있다”며 “최근 마 교수, 변우식씨와 만나 서로 다른 이상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해보자고 해 이번 전시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씨는 고독이 주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사진 작품을 선별해 전시할 예정이다. 아내의 누드 사진 등도 포함돼 있다.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을 뿐, 음악을 하면서도 사진 작업을 꾸준히 했습니다. 사진과 음악은 통하는 것이 많거든요. 그림과 음악도 마찬가지고요.”




한대수씨는 이날 인터뷰 자리에도 오래된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었다. 얼마 전 남대문에서 건진 1948년식 수동 필름 카메라였다. 한씨는 1975년 자신의 2집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돼 활동이 막히면서 10여년간 미국에서 머물렀는데, 그때도 사진 스튜디오에서 작가로 생업을 이었다고 한다.

한씨는 향후 ‘사진작가’의 면모를 적극 보여줄 계획이다. 사실 한씨는 1967년 미국 뉴욕의 사진 전문학교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를 나왔다. 1974년 귀국해 코리아헤럴드에서 사진기자를 하기도 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찍어 집에 보관해오고 있는 것이 50만장에 이른다”며 “1960년대 미국 히피 문화의 순간을 찍어두었고, 1970년대 이후부터는 한국의 변천을 꼼꼼히 담아왔다”고 소개했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불리던 시절의 모습이나, 앳된 스무살의 송창식과 윤형주씨, 시대별 거리와 사람들의 편린 등 남겨둘 만한 가치가 있는 순간도 기록했다.


그는 “지난달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병원에 실려가 4일간 입원을 한 적이 있는데, 사람이 죽는 게 간단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면서 “늦지 않았을 때 간직해온 사진을 정리하고 내보여야 한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그는 소장 작품들을 책으로 출간하거나, 특정한 기획전을 통해 소개할 계획이다.

한씨는 “엘비스 프레슬리는 수십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사람들은 모두 가수로만 기억하고 있다”며 “서로 다른 장르로 인정받는 것이 어렵다는 그 선입견을 한번 깨보고 싶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 강수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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