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떠도는 작가 미상의 1950년대 장터 주막이다

정영신의 ‘한국의 장터’ 사진전이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오는 11 9일부터 1231일까지 열리는데,

한 달 더 연장될 수도 있단다.

 

정영신사진, 1990년 순창장

 

얼마전 인사동에서 열린 정영신의 어머니의 땅전시장에

눈빛출판사이규상대표와 돈의문박물관마을전시팀장 전영주씨가 오셨더라.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서 정영신의 한국의 장터사진전을 두 달간 열고 싶다는데,

작가 출품비까지 준다기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런데, 도대체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어디 있는 곳인가?

그동안 어지간히 졸랑거리며 다녔는데, 모른다는 게 남세스러웠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돈의문박물관마을은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

역사적 가치와 흘러간 근현대 서울의 삶과 기억들을 고스란히 품은 곳이었다.

서울형 도시재생 방식으로 재탄생한 도심 속 마을의 역사적 문화공간이라는 것이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이웃한 종로구 교남동 일대와 더불어 

2003 '돈의문 뉴타운지역으로 선정되면서

기존의 건물을 모두 허물어 근린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한양도성 서쪽 성문 안 첫 동네로서

새문안 동네의 역사적 가치를 알리고 마을의 삶과 기억이 보존된 작은 마을 그 자체를

박물관마을로 남겨 시민의 문화 자산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마을 건물은 최대한 살려 리모델링 했으나 

일부 집을 허문 자리에는 넓은 마당을 만들었다

 

근현대 건축물 및 도시형 한옥, 100년의 역사를 지닌 골목길 등

정겨운 마을의 모습을 그 자리에 남겼다.

많은 시민이 즐기고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장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박원순 시장 재임 시 만들었으나 홍보가 미흡했는지

아직 서울시민에게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현재 돈의문박물관마을은 ‘근현대 100기억의 보관소’ 컨셉으로

새롭게 단장을 마쳐 시민들을 맞이한 것이다.

40개 동의 기존 건물은 그대로 두면서 본래 조성 취지인 

'살아있는 박물관마을'이라는 정체성을 되살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 년 내내 전시체험공연마켓 등이 열리는 '참여형공간으로 채워

전면 재정비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찾아가는 길은 정동길 따라 올라가면 '경향신문사'가 있고

그 건너편 큰길 건너에 '강북삼성병원'이 보인다.
'강북삼성병원' 바로 옆행촌동 넘어가는 좁은 골목길 건너편이 돈의문박물관마을이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서대문이었던 돈의문이 있던 자리였다.
현재 강북삼성병원 자리는 1920년대 세워진 초기 유한양행 자리였고,

그곳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사셨던 경교장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강북삼성병원뒤쪽 주차장 입구에 초라하게 남아있다.

경교장은 1968년 고려병원(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이 그곳에 터를 잡았고

이후 2014그 일대는 돈의문 뉴타운이 건설되면서 재개발을 하게 된다.

 

돈의문박물관마을자리는 원래 근린공원 부지였으나

개발 계획이 바뀌어 박물관마을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돈의문은 새문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돈의문 안쪽 동네는 새문안동네로 불렸다고 한다.

 

네비의 안내에 따라 가보았더니,

주말이 아니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문득 북촌한옥마을이 떠 올랐는데, '돈의문 박물관' 마을 전체가 박물관이었다.

오래된 주택과 좁은 골목가파른 계단이 같은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을 여기저기에는 잊혀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목마가 반겼고, 간첩을 신고하는 딱지가 보였고,

한 번쯤 들려본 것 같은 극장간판도 보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어린이 하면 생각나는 인물, 방정환 선생님에 대한 스토리도 볼 수 있는 곳이다.

방정환 선생님이 태어난 곳과 생애 마지막을 보낸 곳은 돈의문 박물관에서 매우 가깝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는 '돈의문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역사관은 하나의 건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네 개 건물로 분산되어 있었다.

그리고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월요일이 휴관이란 걸 잊지 마시라.

 

돈의문 박물관 전시장을 찾아가니, 전시팀장 전영주씨가 반겼다.

전시 공간은 작가들 전시장으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주고받으며 효과적으로 우리 장터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점으로 남은 것은 주말마다 작가가 나와

엽서에 서명해주는 시간을 만들려 했으나 코로나 때문에 서울시와 협의를 해야 하고.

장터 사진집은 물론, 이야기 그림책조차 판매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 말라면 안 하면 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운영자들의 생각이 안타까웠다.

 

아무튼, 전시 기간에는 사진인 보다 부모들이 자식들 손 잡고 와 주시면,

자식들에게 엄마 아빠가 살았던 예전 모습을 자식들에게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기대하시라!

사라져 가는 장터의 추억을...

 

사진, / 조문호

 

 

종묘·별궁 행차하던 돈화문로
청계천까지 1㎞ 문화지구로
시작점 주유소 자리 국악원 건립
경복궁~동대문과 T자 연결
조선시대 역사적 거리 복원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에는 2012년까지 대형 주유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시대 임금이 돈화문을 나와 이용하던 어도(御道, 현재 돈화문로)의 시작점을 수십년 간 주유소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가 한데 모여 있는 역사적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서울시는 2008년 ‘돈화문지역 전통문화 보존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예산이 잡힌 건 2012년에 이르러서였다. 시는 그곳을 전통문화예술 보호지역으로 지정하고 200억원을 들여 땅을 수용해 주유소를 철거했다. 그 자리엔 ‘국악예술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돈화문에서 청계천에 이르는 약 1㎞의 2차선 도로 ‘돈화문로’가 문화지구로 보존·육성된다. 돈화문로는 조선시대 대로(大路) 중 유일하게 옛 폭과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길이다. 종묘행차와 별궁행차는 물론 사신을 마중할 때 쓰던 ‘왕의 길’이다. 남북으로 뚫린 어도는 돈화문로와 세종대로, 두 길뿐이다.

 주유소 자리에 국악예술원을, 바로 옆엔 ‘전통문화전시관’을 짓는 건 이런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서다. 서울시 관계자는 “두 시설은 돈화문 문화지구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악예술원은 현재 공사가 진행 중으로 2016년 완공된다. 전시관도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 계획이다. 두 시설의 사업비는 총 456억원이다.

 

 

임금과 백성이 만나던 돈화문로는 시전행랑(시전상인들의 점포)이 번성했다. 임금은 이 길을 통해 백성의 삶을 들여다봤다. 그래서 서울시는 전통문화전시관에 왕과 백성의 삶을 담으려고 한다. 시 관계자는 “전시관이 단순한 전시뿐 아니라 조선왕조와 백성의 민속사까지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에 국악예술원이 들어서는 건 이 지역이 원래 ‘국악’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돈화문로는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왕립음악기관)가 있던 곳이다. 또한 조선성악연구소가 위치해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산업화를 거치면서도 국악의 명맥이 끊기지 않았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인사동을 포함한 종로 일대는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지만 국악을 들을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며 "이곳에서 창덕궁과 어울리는 정악의 대표곡인 여민락(與民樂)과 영산회상(靈山會相) 등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로구는 인사동처럼 차량 통행을 부분 통제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돈화문로의 잠재력은 대단히 크다. 창경궁과 종묘를 이을뿐 아니라 청계천과도 맞닿아 있다. ‘2층 보행로’로 리모델링될 세운상가와는 남북으로 연결된다. 동쪽으론 대학로와 동대문, 서쪽으로 경복궁과 인사동·삼청동·북촌이 연결된다. 명동과도 가깝다. 서울 도심 관광클러스터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셈이다. 경기대 이상구(건축학) 교수는 “21세기 서울 도심에 과거의 동선을 따라 역사적 풍경이 복원된다는 점에서 돈화문로의 가치는 매우 높다”고 말했다.

◆돈화문(敦化門)=창덕궁 정문. 1412년(태종 12년) 창건됐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8년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돈화문도 다시 세워졌다. 광화문 앞 세종대로에 나라를 다스리는 기반이 된 육조(六曹)가 있었다면 돈화문로엔 시전행랑이 있었다. 일제는 돈화문로의 의미를 없애기 위해 창덕궁·창경궁과 종묘를 동서로 가르는 율곡로를 뚫었다. 이로 인해 궁과 어도가 바로 연결되지 못하고 끊기게 됐다

 

중앙일보 / 강인식·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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