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나 Sky Wind Stars and Me


김대수展 / KIMDAESOO / 金大洙 / photography

2017_0309 ▶ 2017_0401 / 월요일 휴관


김대수_sms2004135_젤라틴 실버 프린트_41×54.8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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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309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비케이Gallery BK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42길 56(한남동 683-38번지)

Tel. +82.(0)10.6790.7079

gallerybk.co.kr



땅과 하늘 사이에서 ● 『하늘』이라는 제하의 작품들은 『Colors of the Bamboo』, 『Trees from the People』, 그리고 『The New Wave』에 이은 김대수 작가의 네 번째 작품집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내가 의도한 특정적인 관점으로, 즉 서양철학자의 시각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김대수의 작품에 대한 내재적 해석이기보다는 그의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에서 그의 작품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봄으로써 그 작품 세계의 풍부함과 보편성을 파악하고자 함이다. ● 비록 작가가 직접적으로 그 길을 제안하지 않더라도, 김대수의 작품은 한국과 중국 문화의 심층적 전통 안에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땅으로부터 인간을 거쳐 하늘로 나아간다. 이러한 운동의 기반에는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 그렇지만 스스로를 간파하게 해 주는 것, 보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보이게 하는 것, 무의식이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의식적으로 자각하게 해주는 그 어떤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국철학의 근본적인 장소들 중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 철학의 사유는 서양적 사유와 달리 존재하는 것 이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적 사유가 태동한 그리스 철학에서는 만물의 근본은 불변부동의 존재이다.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만물이 거기서부터 유래하는 모태(matrix)와 같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태초에 존재가 아니라 운동(movement)이 있다. 운동은 비존재(non-being)에서 존재(being)로, 그리고 존재에서 비존재로 끝없이 나아간다. 그러므로 존재는 비존재 옆에 있다. 존재는 비존재로, 비존재는 존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늘은 땅 옆에 있다. 공(空)은 색 옆에 있다. 만질 수 없는 것이 만져지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구조 그 자체이다.


김대수_sky2004114_젤라틴 실버 프린트_41×54.8cm_2004


김대수_sms2011166_젤라틴 실버 프린트_120×120cm_2011


김대수_sms2008159_젤라틴 실버 프린트_41×54.8cm_2008



하지만 이것은 열림을 내포하는 작업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작품이 뿌리박은 문화보다는 그것이 내포하는 열림이다. 이러한 근원적인 열림을 통해서우리는 서양적 프리즘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완전히 동양적 세계 속에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서양은 그 근대성의 차원에서 인간을 아주 높은 곳에 위치시켰다. 아마도 너무 높은 곳에 놓은 것 같다. 서양 세계에서는 인간의 오만함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힘인 동시에 그 약점이 되기도 한다.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을 장식하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그림들이 보여주듯이 인간은 신의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김대수의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에 예속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에서 인간은 주인이자 소유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그곳에서 인간이 자연화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자연화는 『Colors of the Bamboo』로 부터『Trees from the People』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자연화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실제로 자연(nature) 안에 나의 본성(my nature)이 있고 나의 본성 안에도 자연이 있다. ● 이 운동은 단지 이미지들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각 작품의 이미지와 제목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상징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가지들이 얽혀 있는 나무가 「crazy woman」으로 둔갑했거나 작은 나무숲이 인간군상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관점을 역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나무는 더 이상 나무만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이 이 「white man」이며 이것이 또한 나무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곧 자신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나무의 이미지를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제 더 이상 나무보다 더 높이 있거나 그것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Fernando Pessoa) 가 내 마음이 호수이고, 내 허파는 숲이 아닌지 자문한 것처럼 김대수에 의하면 우리 영혼 자체가 「white paradise」가 된 것이다. 이 백색은 또한 모든 색의 모태이자 예술가의 고향을 지시한다. 반대로 나무들과 풍경들, 동물들은 인간에 접속되어 있다. 우리가 그것들을 바라보듯이 그것들도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가 자연적인 것만큼이나 그것들은 인간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페소아의 주요 작품인 『비평안의 서(非平安의 書, The Book of Intranquillity)』를 기꺼이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높이 솟은 풀들 위로 /놀란 눈들이 그런 것처럼 /외로운 해바라기들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우리를 응시하였다.'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상호접속, 이러한 소통가능성은 동양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서양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 동서양을 넘나들며 여행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을 인간 속에 그리고 인간을 자연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김대수_sky2004132_젤라틴 실버 프린트_120×220cm_2004


김대수_sky2004131_젤라틴 실버 프린트_41×54.8cm_2004


이제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열어보자. 이것은 노자의 『도덕경』에서처럼 우리를 땅에서 하늘로 여행 시킨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단순한 질문을 하려고 한다. 이 여행은 순환적인가? 우리가 땅 속에서 하늘을 발견한 것처럼 하늘 속에서 땅을 재발견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접속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인간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우리는 하늘로부터 인간을 거쳐 되돌아올 수 있을까? 마치 우리가 인간 덕분에 땅을 떠날 수 있었던 것처럼? ● 우선 이 여행은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지우고자 한다. 문제는 하늘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의심할 여지 없는 김대수만의 독창성이 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모든 국면을 이용한다.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사진이, 말하자면, 작품의 세 번째 눈을 드러내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기술의 눈이다. 하나의 그림은 화가에 의해 그려진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체험을 표현한다. 그러나 사진은 기술적 도구의 사용에 의해 비인격화되고 객관화 된다. 끌리셰(cliché)는 이와 같이 도구로부터 유래한다.



김대수_sms1998101_젤라틴 실버 프린트_120×55cm_1998


김대수_sms1999109_젤라틴 실버 프린트_120×80cm_1999


그러나 끌리셰 안에 지각적이고 주관적인 유희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유희, 이 소실선들 (vantage points)을 통해 우리는 관찰자와 관찰된 것을 잇는 표상의 관계를 파악한다. 작가의 두 번째 작품집에서 「lady kyo」라는 제목의 사진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표상 관계는 상당히 드물다. 예를 들면 「countless grain」에 등장하는 나무와 열매들은 풍경 속의 대상인지 아니면 풍경 자체인지 알기 어렵다. 따라서 나무는 대상인 동시에 그것이 나타난 틀이나 공간이기도 하다. 나무는 단지 하늘이라는 배경 위에 있는 형태가 아니다. 그리고 이를 인간화 할 경우에는 더욱 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back to her」에서 나무들이 절단되는 공간은 동시에 한 여자의 육체를 그리고 있다. 이 점에서 김대수의 작품을 『루체른 근처 공원(Park bei Luzern)』이나 『신밧드의 항해(Sindbad der Seefahrer)』같은 파울 클레(Paul Klee)의 몇 몇 작품들에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언가가 배경과 형상 사이에, 또는 표면과 깊이 사이에 존재하는 전통적 대립들을 이미 넘어서서 작동하고 있다. 이로써 그의 작품은 더 이상'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 그러나 「하늘」 연작에서는 이보다 더 특별하게'가시화하는'방식이 드러나 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대상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대상들은 구름들이다. 그들은 흰 것일 수도, 회색빛 일수도, 색깔을 띤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구름은 다른 것들과 똑 같은 대상은 아니다. 그것은 우선 요소들로 분해할 수 없고 뉴튼 역학의 법칙들을 전혀 따르지 않는 복잡하고 유연하며 다양한 형상을 가진 대상이다. 노르베르트 비너(Norbert Wiener) 가 자신의 유명한 저서 『사이버네틱스』의 서두에 묘사한 구름에 대한 과학적 서술은 이 관점을 이해하는데 유의미한 도움을 준다. 그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구름은 하늘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하늘 자체가 흐리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에 하늘이 더 깨끗해질수록 우리는 이 대상들을 덜 보게 된다. 그때 우리는 푸른 하늘과 햇빛 사이에서 색깔, 색의 대조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구름이 있건 없건 간에, 번개불의 불연속적 형상들이 있건 없건 간에, 구름 위에 새들이 있건 없건 간에, 이 이미지들에는 어떠한 소실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며 작품에서 완전히 사라진 관찰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진은 더 이상 세계의 표상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순수한 색깔로 향해 감에 따라 점점 더 정화되는 세계이다.



김대수_trs2011103_젤라틴 실버 프린트_41×54.8cm_2011


김대수_trw2005646_젤라틴 실버 프린트_60×120cm_2005


이와 동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색깔은 결코 완전히 순수한 것이 못 된다. 공이 거기에 언제나 거주한다. 하늘의 푸른 색과 오렌지색의 태양빛 사이에도 최소한의 대조가 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최소한이다. 번개의 얼룩무늬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무한으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거기 살고 있는 바로 그 무한으로부터 하늘을 분노하게 하고 우리를 바라본다. 앙드레 브르똥(André Breton)은 『나지아(Nadja)』에서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내가 누구에게 사로잡혀 있는지를 아는 문제로 되돌아온다고 그는 대답한다. 김대수의 멋진 하늘들은 점차로 인간에 의해 사로잡히는 듯하다.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아마도 무감동(impassible)을 향해 더 멀리 나아가게 해주는 것 같다. 즉 불교적이고 도가적인 무위(inactivity)를 향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의 척도로 본 신들이다. 인간이 이러한 신들에게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것들은 동양적인 것 속에 거주하는 서양적 특징과 같다. 이러한 서양적 특징에 언제나 약간의 동양적인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 이 마지막 요소에 대해 덧붙이자면 그것은 소용돌이(vortex)이다. 어떤 끌리셰(cliché)들에서 하늘의 불은 소용돌이로 변한다. 김대수에게 고유한 이미지배치(cadrage)에서 이 과도한 소용돌이는 이따금 사진의 영역을 넘쳐난다. 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나무들이 솟아난다. 우리는 사진작가의 눈이 없이도 거기에 있다. 마치 기술적 도구라는 세 번째 눈으로부터 유래하는 우주 생성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 비인격적 이야기는 물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방향에서 이 이야기는 점차 인간적 기술의 산물을 관통한다. 그것은 인공이 재구성한 자연이다. 게다가 이 기술은 아마도 위협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술적 인간성 속에서 어떤 비인간성을 발견하기 위해 너무 멀리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서울 구도시의 궁전들을 신도시 남쪽 지역의 과도한 탑들과 공존하게 하는 바로 그 비인간성이다. 우리가 환기하는 소용돌이는 단지 놀라운 것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를 사물들의 극성(polarity)으로 되돌려 보낸다. 이 극성은 매 순간 역전될 수 있다. 선은 악으로, 인간적인 것은 비인간적인 것으로 역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시대와는 반대로 오늘날 책임의 주체는 바로 인간인 것이다. ■ 폴 앙투안 미켈(번역_황수영)



Vol.20170309a | 김대수展 / KIMDAESOO / 金大洙 / photography




정초부터 좋은 사진과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스페이스22’에서 개막된 권태균씨의 유작전에서다.

 

기다린 전시였으나 인사동에서 강 민 선생님을 만나 지체되었다.

부리나케 달려갔으나 30분이나 늦었다.

    



생전의 약속 따라 첫 유고사진집을 펴낸 눈빛출판사이규상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많아 운신이 어려웠지만, 곳곳에 반가운 사람들이었다.

    







몇 번이고 전시된 사진들을 돌아보았다.

보았던 작품도 몇 장 있었으나, 대부분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잊고 있던 80년대 추억들을 얼마나 끌어내는지 가슴이 애렸다.

나른한 자세로 앉아있는 세 가족의 모습에서, 그 시절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 땐 몸은 피곤했지만, 곳곳에 화롯불 같은 온정이 있어 행복했다.






어찌할꼬! 이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이건 곡마단 광고판에 적힌 문구다.

우린 그런 기구한 삶을 보며 웃고, 울었다.

행여 누가 볼가, 곁눈질하며 눈물도 훔쳤다.






사진들이 너무 좋았다.

난 권태균씨가 의령 촌놈이라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런 맛을 낼 수 없다.

우연히 한 두 컷이면 모를까모든 사진에 특유의 애수가 묻어 있었다.

시골다방에서 담배피우는 남정네 표정이나 다방분위기 한 번 보라.



집에서 자판기를 두드리다, 또 열불이 터졌다.

그 흔한 사진상, 이런 사람한테 안주고 대체 누굴 주었나?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끼리끼리 돌려먹다, 이젠 그 제자들이 돌려 먹는다.

시류에 눈치 안보고, 초지일관 떠돌며 찍은, 이토록 진솔한 언어가

어떻게  빤짝 생각들에 밀려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저승에서 잠시 내려와, 우리에게 말 걸고 있는 것이다.

이게 진짜 사진이라고...





다행스럽게 눈빛출판사의 이규상씨가 생전의 약속대로 근사한 책을 펴냈다.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마치 오리지널 프린트 같았다.

내 가난함을 불쌍히 여긴 한정식선생께서 책을 사 주셔서

이제 보물 상자 하나 두게 되었다.


'눈빛출판사'에서 주요작 100여점을 실어 펴낸 사진집 <노마드> 값은 70,000원

2월22일까지 서울 강남역 1번출구에 있는 '스페이스22'에서 작품들을 볼 수 있고, 사진집도  살 수 있다.






개막식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다.

대구서 올라 온 양성철씨와 석재현씨도 만났고,

부산의 이광수씨, 광주에 사는 오상조씨, 장흥의 마동욱씨도 만났다.

그 외에도 한정식, 전민조, 엄상빈, 김보섭, 성남훈, 김남진, 이기명, 안해룡, 이갑철, 이상엽,

장 숙, 김상현, 마기철, 강재욱, 남 준, 김동희, 이재갑, 견석기, 이한구, 정진호, 최재균, 김영호,

박종우, 김대수, 구본상, 안미숙, 이순심, 정영신, 이은숙, 성윤미, 노형석, 고정남, 권양수씨를 만났다.

마치 심봉사 딸년 잔치 집에 온 듯 기분 좋았다.

















































전시를 주관한 눈빛출판사 이규상, 안미숙 내외 따라 뒤풀이 장소로 옮겼다.

술집 북촌에서 술꾼들만 남아 더 마셨다.


! 서울 이빨과 부산 이빨이 주고받는데, 막상막하더라.

경상도와 전라도 말이 짬뽕된 이광수교수 구라도 대단했다.


술좌석에서 '사진예술'이기명씨가 이렇게 물었다.

"젊은 마누라와 살 수 있는 비결이 뭡니까?"

할 말이 없어 이렇게 말했다. "몸 안 아끼고, 최선을 다 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나중엔 총알이 떨어져 사진도 찍을 수 없었지만, 김보섭씨가 먼저 가라고 눈치주네.


 

촬영 : 2016.1.4. /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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