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인가게’에서 세종대왕 탄신623돌을 맞아 잔치를 벌인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그 날이 스승의 날이라,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 두었다. 세종대왕이야 말로 영원한 우리의 스승이 아니던가?

스승의 날은 일찍부터 마음이 바빴다. 스승 찾아 저승 갈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모르겠다.

서울역으로 거리의 철학자 부터 만나러갔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새로운 스승이다.

그는 막걸리 한 잔에 어린애처럼 즐거워한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란다.

몇 잔의 낮술에 천하를 얻은 듯 하다. 축축하게 비에젖은 인사동조차 술 맛 땡기게 한다.

‘통인화랑’에는 반가운 분들이 모여 있었다.
'통인' 김완규, 이계선 내외를 비롯하여 권재일, 이윤영, 오치우, 배일동, 이동환, 송재엽씨 등 많은 분들이 와 있었다.

인사 나누랴! 사진 찍으랴! 술 마시랴! 혼자 바빴다.
그런데, 관우선생이 나만 알리지 않고, 참석하는 분은 자기 먹을 안주를 챙겨오라 했던 모양이다.
인사동 거리 악사까지 불러 잔치에 풍악을 울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차별한다면 거지같은 나를 친구로 여기겠는가?

전시장에는 화가 최승호씨의 ‘일지’가 전시되고 있었다.

회화와 조각의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으로, 차가운 철판에 인간 내면 심리를 서정적으로 드러냈다.

전시는 6월7일까지 열린다.

‘통인가게’ 김완규 대표를 비롯하여 권재일 한글학회장,
‘훈민정음은 없다“는 영화 제작자 오치우씨 등 여러 명이 나와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배일동씨의 절창은 숨 쉴 틈조차 안 주는 무서운 폭풍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일찍부터 술이 취해 실수는 안 했는지 모르겠다. 명색이 기자란 자가 정신을 놓아 기억도 잘 안 난다.

세종대왕께서 노비의 출산 휴가를 넉넉하게 주었다며, 정치로 인문정신을 구현했다는 권회장 이야기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리고 세종대왕, 이순신, 제갈공명, 이 세 분의 공통점을 묻는 퀴즈도 나왔는데, 답은 모두 54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분들에 비하면 징그럽게도 오래 산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지하철 타러가다 만다라 화가 전인경씨를 만났다. 스승이신 이인섭선생 만나러 ‘유목민’ 간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으며 스승의 날을 마무리했다.

사진, 글 / 조문호







‘통인가게’ 관우선생 만나러 인사동에 갔는데, 김이하시인 사진전부터 들리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어 버렸다.




늦었지만 발길을 재촉했는데, ‘상광루’에 있어야 할 관우선생 일행이 인사동 거리에서 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배일동 명창과 권재일 한글학회장, 변작가 등 여러 명이 낙원동 ‘다리밑 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관우선생이 발굴한 단골집 ‘다리밑 집’은 이제 낙원동 명물이 되어버렸다.
다른 집은 손님이 없어도 포차나 다름없는 그 집은 항상 손님이 넘쳐난다.
그 날도 손님이 많아 길가에 자리 잡았는데, 바람은 또 얼마나 시원한지 코로나도 도망칠 것 같았다.




관우선생이 조제한 막맥에다 감자부침, 닭발 등의 일품 안주가 나왔다.
난, 통풍 때문에 한 번도 막맥은 마셔보지 못했지만, 맛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생맥주에 막걸리를 회석하는 막맥은 냉동시켜 차게 만든 생맥주 잔도 한 몫 한다.
결국은 생맥주와 막걸리의 회석 비율이 맛을 좌우하는데, 관우선생의 칵테일 비결은 아무도 따를 자 없다.




관우선생은 ‘통인가게’를 찾는 벗들을 대부분 이곳으로 안내한다.
처음엔 돈 많은 재벌이 코 구멍만 한 가게를 찾아 의아해 하지만,
막맥과 안주를 맛보고는 다들 역시를 연발하며 단골이 되어버린다.




그 날은 얼마 전에 일어났던 웃지 못 할 헤프닝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패션과 아트, 음악, 그림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울러 독특하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팝아티스 까스텔 바작이 통인가게를 방문하여 이 집으로 안내했단다.
그 역시 막맥의 독특한 맛과 포차 같은 술집 분위기에 반해버린 것이다.
기분이 좋았던 그는 낙원상가 계단 벽에 멋진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 장소가 아니면 어울 릴 수 없는 대단한 작품이 탄생해 다들 인사동 명물하나 생겼다고 좋아했다는데,
다음 날 가보니 깨끗하게 지워지고 없더라는 것이다.




알아보니, 건물관리인이 고생스럽게 지웠다는데,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명작이 무지한 관리인의 실수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척 보면 똥인지 된장인지는 분별해야 할 것 아닌가?




작가도 그 때 기분이 아니면 다시 그릴 수 없는 그림이라며 아쉬워했다는데,
직무에 충실했다는 건물 관리인만 탓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권재일회장은 그 벽화를 지운 이야기 자체가 예술로 더 오래 회자될 수 있을 것이라며 위안했다.



이차를 가자는 관우선생 말에 다들 일어났다.
잘 가던 ‘유진식당’ 가는 줄 알았는데, 경운동 방향으로 이끌었다.
흥선대원군 집터 골목으로 한 참 끌고 가서는 허름한 식당으로 안내했는데,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싸고 맛있는 집만 찾아다닌다.




그런데, 이차로 간 음식점에서 아쉽게도 음식 맛을 보지 못했다.
전 날 밤 컴퓨터와 노느라 날밤을 깠는데, 취기가 오르니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배일동 명창이 부르는 ‘사철가’ 소리에 화들짝 잠을 깬 것이다.
관우선생이 술만 한 잔 들어가면, 이산 저산 찾는 노래가 아니던가.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은 우람한 소리와 애간장 녹이는 절절한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 것이다.




언제 이런 술집에서 대명창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까스텔 바작의 벽화는 하루라도 버텼지만, 배명창 소리는 그 자리서 날아갔다.
어차피 예술이나 인생이나 사라지는 것은 매일반이니, 어디 한 번 멋지게 놀아 보자구나.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이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고
여름이 오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도 어떠헌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 한천 찬 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려
은세계가 되고 보면
월백 설백 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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