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개관 5주년 기념전 때 화랑 앞에 선 이현숙 / 국제갤러리 제공
◇"공부보다 돈벌이가 중요하다"는 억척 엄마
어떤 질문을 던져도 이현숙은 고민하지 않고 즉답(卽答)했다. 언어는 거칠었다. 그래도 명쾌해서 알아듣긴 쉬웠다. '단순한 직설화법'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는 "거부감 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외국 상대로 큰 거래를 할 때는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했다.'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작품을 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 상대가 오히려 잘 알아듣더라는 것이다.
이현숙은 조기유학 보냈던 세 자녀를 모두 화상(畵商)으로 키웠다. 맏딸 김태희(43)씨는 뉴욕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둘째딸 수희(40)씨는 국제갤러리 이사, 아들 창한(37)씨는 사장을 맡고 있다. 해외 아트페어에 참가할 때면 자식들이 따라가 어머니를 돕는다.
―맏딸이 고등학생 때 다음날 시험이라며 읍소해도 끝내 일하는 데 데리고 가 통역을 시켰다고 들었다.
"애들한테 그랬다. '야, 시험보다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해. 공부 대충해.' 우리 큰 딸이 그런다. '내가 만일 나 같은 엄마 만났으면 하버드 갔을 거야.' 그러면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너 하버드 갔으면 지금처럼 성장 못 했어. 엄마 밑에서 짬밥 먹었으니까 네 밥벌이하고 사는 거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내가 집안을 꾸려나가기 시작한 후엔 아이들 공부도 대충 시켰다. 그래도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고 자라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생활력 강한 건 천성인가.
"밀어붙일 땐 앞뒤 안 본다. 젊었을 때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게 오히려 힘이 되는 것 같다. 어려운 게 뭔질 모르니 겁 없이 '그냥 해 보자'고 달려드는 거다. 애들도 그렇게 키웠다. 큰딸이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유럽 여행을 갔는데, 헝가리 입국 허가가 안 나 혼자 독일에 떨어졌다는 거다. 전화로 하소연하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니. 네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했다. 딸은 아직도 그때 서운했던 얘길 한다."
―화랑 경영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인가.
"화랑 열고 얼마 안 돼 남편이 사업에 실패했을 때였다. 고생 모르고 살다가 취미로 시작한 화랑이었는데, 갑자기 그걸로 먹고살아야 했다. 가장 노릇을 해야 하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나니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내 고객들이 다 망했다. 일하던 직원도 나가 버렸다. 그래서 자식들을 불러들였다."
―금융위기 때 불황 타개책으로 카페를 겸한 식당 '더 레스토랑'을 열었다.
"찻집이라도 열면 사람들이 좀 찾아올까 싶어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비난이 쏟아졌다. 갤러리 하는 사람이 음식점 하는 게 흉이 되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웬걸, 레스토랑 덕에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니까 너도나도 식당을 차리기 시작했다."
―일부 화랑이 기업 비자금 세탁의 통로 역할을 한다는 얘기가 가끔 나온다. 국제갤러리도 이 문제로 조사 받은 적이 있지 않나.
"우리 화랑으로선 정말 억울하고 분한 일이다. 결국 무혐의로 끝났다. 그런 인식 때문에 미술 시장이 죽는다. 그림을 사면 난리가 나는데 미술품 시장이 활성화가 되겠나. 그러니 국내에 변변한 작품 하나가 없지 않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물만 지어놓으면 뭐 하나. 걸 작품이 없는데. K팝 못지않게 한국 미술도 중요하다. 가수 싸이 이상으로 겸재, 이우환 작품이 오래 남는다."
◇화랑업이 우아하다는 건 '착각'
이현숙은 4년 전부터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다. 그래도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연 10회 이상 세계 최대규모 아트페어인 스위스 아트바젤을 포함한 국제 아트페어에 참여한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휠체어를 타고, 아트페어도 휠체어 타고 돌아본다. 그는 "뭐 어떤가, 살살 달래가면서 걸어다니다 급할 때는 휠체어 타면 되지" 했다. 무리해서라도 직접 아트페어장에 가는 건 고객과의 관계가 중요한 화랑업의 특성상 화랑의 '간판'인 그가 얼굴을 내밀어야 손님들이 믿고 거래를 하기 때문이다.
―화랑 운영의 성공 비법은 뭔가.
"좋은 작가 보는 안목. 초보 컬렉터들이 안목 없이 예쁜 작품만 찾을 때 화랑주가 장래성 있는 작품을 추천해줘야 하는데, 안목 없이 팔다 보면 작품 값도 떨어지고 손님도 끊어진다. 나 같은 비전공자가 갤러리를 할 때는 미술 전공자를 꼭 멘토로 둬야 한다. 그리고 작가가 계속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다."
―화랑을 한다고 하면 돈 많은 집 며느리들이 '우아한 취미 생활' 하는 걸로 보는 시선이 있는데.
"남들 눈에는 편해 보일지 모르지.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젊은 작가 한 명을 키우려면 보통 3~4년 걸린다. 전시도 하고 아트페어에도 나가도록 지원해줘야 한다. 제작비, 운송료, 보험료 등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든다. 갤러리가 작품 팔러 아트페어에 한 번 나가려면 비용이 20만~30만 달러 든다. 1년에 열 번 나가면 200만~300만 달러를 벌어야 마이너스가 안 되고 '똔똔'인 거다. 발에 땀이 마를 날이 없는 거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우아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화랑업도 '장사'다. 우아한 전시회장의 이면엔 수면 아래 숨은 백조의 물갈퀴처럼 끊임없이 몸을 놀리는 갤러리스트들의 노고가 있다는 얘기다.
―고객들에게 그림을 팔면 어디에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도 알려주나.
"많이 조언한다. 아트페어 때도 컬렉터와 함께 가게 되면 외국 손님 집을 방문하도록 주선한다. 그 사람들이 작품을 어떻게 배치하는가를 보는 게 도움이 많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방에 걸려 있는 마이클 주 작품을 가리키며) 저 작대기 같은 작품을 어떻게 놓을지 아이디어가 있겠나. 우리가 식탁이라도 놓고 연출하면 그걸 고객들이 배운다. 집에 어울리는 그림을 얘기해 주고, 가구가 안 어울리면 그에 대해서도 조언한다."
―그렇게 컬렉터 집을 드나들고 고객들과 내밀한 관계를 맺으니 화랑주와 재벌 간의 관계에 대해 오해가 생기는 게 아닌가.
"그런 예가 많지 않다. 내가 직접 가서 걸어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직원들 있지 않나. 고객들도 부담스러워한다."
―국제갤러리가 상대적으로 한국 작가에 소홀하다는 지적이 있다. 해외 작가도 이미 '뜬' 작가만 안전하게 취급한다는 평이다.
"오해다.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였던 김수자, 2012년 카셀 도큐멘타 초청작가인 양혜규가 다 우리 작가다. 해외 작가는 알려진 작가를 가지고 올 수밖에 없다. 해외의 무명작가를 우리가 키우는 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까다로운 예술가들을 상대로 일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예술가들은 자기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라 남과 타협을 잘 하지 않는다. 생각해 봐라. (방 안 작품을 가리키며) 이런 걸 '예술'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만만하겠나. 그래도 원칙만 잘 지키면 문제없다. 작가의 의도에 맞게 작품만 잘 홍보하면 된다."
―잘 팔릴 것 같은 작가가 감이 오나.
"온다. 아트페어 나갈 때 손님들이 지난번에 못 샀는데 다음번에 사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서 가지고 나가면 딱 맞는다. 해외 작가들은 더 간단하다. 옥션에서 값이 좋으면 잘 팔린다. 올해 이우환 베르사유 전시처럼 큰 이벤트가 있으면 작품 값이 들썩인다."
―앞으로 꼭 함께 전시해보고 싶은 작가가 있나.
"리히터. 못 해봤다. 그게 내 한계다. 내가, 우리 갤러리가 아무리 잘났어도, 거기까진 힘이 못 미치는 거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지난해 생존 작가 경매 낙찰 총액(1억6588만5409 달러·약 1703억원) 1위를 차지한 독일 화가의 이름이 나오고서야, 이 거침없는 여자는 인터뷰 시작 3시간여 만에 처음으로 멈칫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