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7월하순경 출간하게 될 정영신씨의 '한국의 장터'사진집에 실린

한정식선생의 서문을 옮겼습니다.

 

장터에 관한 인문학적 보고서

----- 정 영신의 사진

 

한정식 (사진가, 중앙대 명예교수)

 

정 영신 씨는 성실한 사람이다. 거짓을 모르고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재주 부리려 들지 않고 그저 순수하고 수수하게 사는 사람이다.

이들『한국의 장터』는 그러한 그녀의 심성이 그렇게 수수하게 엮어 낸 사진집이다.

한 오륙 년 전쯤 되었을까, 사진가 조 문호 형을 통해 처음 소개받은 그녀는 소설가라고 했다. 그녀의 사진처럼 장터를 소재로 한 아동용 산문집을 한 권 받기도 했다. 그 얼마 후 받아본 사진이 이들 장터 사진인데, 이들 사진은 소설가가 여가 선용으로 찍은 ‘작품 사진’이 아니었다. 소설가가 아닌 전문적인 사진가의 작업이라는 인상이었다. 나름으로의 목적과 의식이 뚜렷한 장면 장면들이었다. 장터에 관한 깊은 관심과 애정에 내공까지 느껴졌다.

우선, 장터 하나만을 이십여 년 간 찍어왔다는 그녀의 그 성실함에 일단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그렇지, 한 소재만을 이십여 년 간 찍는다는 것은 웬만해서는 못하는 일이다. 이렇게 이십 여 년 간을 꾸준히 한 가지 일에 전념해 왔다는 것은 그녀의 성실성과 집념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도 감탄스러웠지만, 대상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따뜻한 애정까지 느껴졌다.

이들 사진이 정겨운 것이 그래서이다. 단순히 장터나 장터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고달픈 삶의 외형적 관찰이 아니라, 그들의 애환에 그녀가 귀를 기울이고 있음이 보인다. 물론 장터를 찾는 사람들이 대체로 우리 전통적 정서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러다보니 그런 따뜻한 정경은 저절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터에서 펼쳐지는 정경에 특별한 애정이 없으면 그저 무심히 지나쳐 버리기 쉬운 풍경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간 장터를 찍은 사진가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사진이 별로 주목받지 못한 것은 전문성의 부족과 함께 ‘작품’을 만들려는 아마추어리즘이 장터의 외형을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장터에 매달려 이십여 년을 지속적으로 찍고 있는 정 영신 씨의 애정과 열정이 그들에게는 없어서일 것이다.

정 영신 씨 사진은 시야가 넓다. 전문가적 입장에서 장터를 광범위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이것이 중요한 것인데, 소위 ‘작품’이라는 데 신경을 쓰다 보면 신기한 장면에 묶여 장터라는 대상의 본질을 놓치기 마련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것을 ‘작품’으로 미화시키려 들면 한 장의 아름다운 영상은 얻을지 몰라도 사물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약화되기 쉽다. 그뿐 아니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사물을 한두 장의 ‘작품’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애초에 될 일이 아니다. 폭 넓고 깊이 있게 관찰하고 기록할 때 그 기록이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게 된다. 정 영신 씨의 넓은 시야가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실 다큐멘터리 사진의 의미는 이런 데 있다.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에 묶이지 않고 기록에 충실할 때 다큐멘터리 사진은 올바른 입지를 얻는다. 그리고 사진의 진정한 예술성은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형성된다. 모든 예술이 인간의 생활과 유리되어서는 별 의미가 없지만 특히 인간과 그 삶의 기록에서 벗어나서는 의미를 얻기 어려운 것이 사진이다. 그리고 기록이 바탕이 될 때, 그것이 ‘작품’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문학적 가치에서 남다른 성과로 평가되기도 하는 것이 사진이다. 사실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 바탕이 인문학이라 해서 틀리지 않는다. 그것이 소위 예술성보다 중요한 사진적 덕목으로, 프랑스의 석학 롤랑 바르트가 “역설적으로 말해서, 예술 사진만 제외하고 나머지가 다 예술이다.”라 한 말이 바로 위와 같은 뜻이었다. 사진의 예술성이라는 것도 기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때 자칫하면 무지개처럼 금방 사라질 신기루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한 말로, 사진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은 시간이 갈수록 의미가 더해진다. 기록이라는 것은 현장이 사라져 없어졌을 때에 대한 대비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현장이 사라진 다음에 더욱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 사진이다. 따라서 이들 장터 사진은 지금 현 시점에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시간이 지나 이들 장터가 많이 변하거나 혹 사라지고 만다면 그 때 이들 사진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역시 롤랑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을 ‘죽음’이라고 갈파했던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였던 것이다.

정 영신 씨의 사진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앞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장터 자체의 현상이라든가 변화의 추이가 아니라 거기 모이는 사람들 하나하나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이라는 점이다. 이 작가는 사진이 아니라 사람 냄새를 맡으러 장터를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5일장과 그 장터라고 하는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들 장터를 기록하게 해 준 동기였겠지만, 그러한 사명감에 앞서 거기 모인 사람들, 우리 전통 문화를 형성해 품어온 기층 민중에 대한 진한 애정이, 그 일관성이, 이들 사진을 꿰뚫고 있는 정신이고 뼈대를 이루고 있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선 한 개 훈훈한 휴먼 드라마, 정 영신 씨 장터 사진의 또 하나의 의미이다.

사실 기록이라고 해서 외형 재현에만 충실한 표층적이고 건조한 기록은 단순한 재료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사진이 한 작가의 작품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깊은 관심과 진한 애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기계 예술인 사진에 작가의 감정이 드러난다는 사실에 곧잘 의구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렌즈 뒤에서 대상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마음은 그 차가운 광학 기구를 뚫고 대상으로 직접 투영된다. 이것이 사진을 예술로 만들어 내는 핵으로, 기계 영상이기 때문에 누가 찍으나 같은 형태로 끝날 듯한 이 기계 예술이 작가의 서로 다른 체취를 뿜는다든가 인간미 가득한 영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 그 때문인 것이다. 이들 장터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면 그것은 바로 작가가 미소롭게 이들을 대했기 때문이라 보면 틀림이 없다. 작가의 감정이 그대로 보는 이에게 전해지는 이 신비한 마력. 정 영신 씨의 사진이 그를 보여 주고 있다.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이들 장터에 관한 제대로 된 종합적 기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사진집만이 아니라 논문이나 저술로도 제대로 된 기록이 전혀 없다고 들었다. 이는 이 사진집이 장터에 대한 종합적 기록으로서의 첫 노작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물론 아마추어 작가들에 의한 작품집이 몇 있는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흥미로운 장면에 대한 단순 반응들이었다. 이에 비해서 정 영신 씨의 사진은 재래식 장터에 관한 종합적 관찰 기록의 복합체이다. 더구나 이 사진집에는 사진과 함께 정 영신 씨 자신의 글까지 들어 있다. 개념적이고 복합적인 글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진을 겸한 기록물은 아마 이것이 최초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진 작품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우리 문화에 대한 진지한 기록으로서의 남다른 가치를 지닌, 장터에 관한 최초의 인문학적 보고서라는 판단이 그래서 선다.

정 영신 씨는 잘 알려진 전문적인 사진가는 아니다. 그러나 장터만 이십여 년을 찍어 왔다면, 알려지지만 않았지 누구보다도 진지한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던 것이다. 이제야 알려져 늦은 감이 있지만 일찍 알려지고 늦게 알려지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이만한 진지한 작업을 한 작가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에 덧붙여 정 영신 씨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이번의 발표로 이 작업을 끝내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이것으로 끝을 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들 장터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기록은 정 영신 씨의 라이프 워크로서의 의미가 크다. 그러나 그보다도 장기간에 걸친 종합적 관찰 기록을 통해 장터가 어떻게 바뀌어 갔는가 하는 추이까지 포함해서 우리 문화의 한 축을 집대성해 놓는다면 그 이상의 보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들 사진이 이룬 성과가 이 정도라면 이는 소설보다도 사진으로 업을 삼는 것이 옳음을 보여 주는 증언 같다는 생각에서이다. 사실은 이들 장터 사진이 그대로 그녀의 서사시요 소설인 것이다. 소설을 꼭 글로 써야만 한다는 법도 없다. 어떤 면에서 사진이 소설보다 더 현실적이요 감동적일 수 있는데 사진에는 픽션으로는 담을 수 없는 진실이 눈을 번득이고 살아 있기 때문이다.

꼭 이처럼 이유를 밝히고 세워서 이들 사진을 계속하라는 것만도 아니다.

고향 함평을 떠난 지 오래 된 지금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서울에 뼈를 묻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처럼, 이제 현실적으로 정 영신 씨는 소설가로 돌아가기도 어렵게 되었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사진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보낸 세월로 보나 나이로 보나 이제는 소설가로 돌아가기도 늦은 인생. 사진가로 아니, 사진으로 후반기 인생의 보람을 엮어 보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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