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만지산에 가려고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텃밭에 남은 무도 뽑아야 하고, 더 춥기 전에 겨울 채비를 위해서다.


양평을 지나갈 즈음인데, 강 위에 피어 오른 물안개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가끔 지나치다 만나는 풍경이긴 하나, 이 날은 곳곳에서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급격한 기온차로 강 전체가 구름에 휩싸인 것 같았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사진 찍을 태세를 갖췄으나 갑자기 카메라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한 컷만 찍히고 꺼져버리기에 전지를 갈아 끼웠더니, 이번에도 한 컷만 찍히고 꺼졌다.
분명 충천해 둔 전지였는데, 두 개 모두 방전되었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닭 쫒던 개처럼’ 우두커니 밀려다니는 물안개만 지켜봐야 했다. 스마트폰도 없고...
카메라가 망가져 아내의 보조카메라를 빌려 쓰고 있는데, 기가 막혔다.
난 사진 찍다 이런 얼토당토 않는 일에 제동이 걸리면, 사진으로 뭔가 잘 못했다는 암시로 받아들인다.

오늘 뿐만 아니라 카메라가 망가졌던 것까지 생각하니 사진 찍지 말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사진으로 뭘 잘 못했을까 곰곰이 되돌아 봤다.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몇일 전 페북에 올린 사진가 조성호씨의 사진촬영대행 광고를 보며,

내가 하는 일련의 일들이 후배사진가들 생업에 지장을주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20여 년 전 신문사나 잡시사에 원고료 받지 않고 넘겨주는 선생님께 따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선샘이 사진을 그냥 주니까 우리가 일해묵기 힘들다 아입니꺼?”라고 몰아쳤더니

“줄 줄 알고 넘겼는데,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라마 달라 캐야지 예!”라며 투덜댔다.

그 분이 바로 사진을 시작하게 만든 최민식선생이셨다. 아마 저승에서 꾸짖고 계실 것만 같았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는 원고료나 사진 찍어주는 댓가가 유일한 생명줄이고,

힘들게나마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방편인데, 내가 시장질서를 문란케 한 것이다. 

그 걸 뼈저리게 느꼈던 내가 후배사진가들에게 방해꾼 노릇을 했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오랫동안 인사동을 기록하다보니, 인사동에서 열리는 전시나 여러 형태의 모임 사진을 찍어 왔다.

심지어 지인들의 일이라면 인사동 아닌 지역까지 찾아다니며 찍었는데, 공짜를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찍는 것에서 끝나면 아무 탈이 없는데, 6년 전부터 인터넷에 접속해 카페나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하며 여러 가지 부작용도 따랐다. 문제점을 지적한 글은 당사자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어떤 사진은 내려 달라는 전화가 올 때도 있었다.


그러한 제동은 가끔 있는 일이지만, 대개가 고마워하는 양면성을 가진 일이지만,

한 두 장도 아니고, 수없이 찍어 50장을 추려 올린다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사진에 찍힌 사람들을 위해 한 장이라도 많이 올리려고, 밤 늦도록 컴퓨터 앞에서 낑낑거리다

아내에게 핀잔 받은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빨리 보게 하려는 생각이 앞섰지만, 일이 밀리면 마음이 편치 않은 습성도 한 몫 했다.

인사동을 기록하는 작업에 비롯되었으나, 사진의 생활화라는 스스로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대부분이 원하는 일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 되어 버렸다.

사정이 있어 못가기라도 하면 대개 섭섭하게 생각하고, 친구의 경우라면 난리난다.

사진촬영대행 광고를 폐북에 올린 조성호씨는 작년7월 인사동의 ‘아라아트’에서 열린 ‘페인티안’초대전

개막식에서 처음 만났다. 조성호씨는 주최 측과 계약해 작업하고 있었고, 나는 주변사람들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올 8월 구와바라시세이 선생의 사진전에서 만나 함께한 적도 있었다.

그 이후, 폐친으로 그 후배의 생각들을 꼼꼼이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참 괜찮은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이름도 그렇지만, 나이도 아들과 비슷했다.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 했겠냐 말이다.

비록 조성호씨에 한 한 일만도 아닐 것이다.

상업사진을 하는 후배는 물론, 돈 안 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대부분이 부업으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카메라고장이 준 암시를 겸허히 받아드리기로 했다.
이제부터 계약에 의한 일이 아니라면 찍지도, 인터넷에 올리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필요한 사진들은 선별하여 촬영하고, 블로그에 올려도 이야기가 있는 사진 한 장만 올릴 생각이다.

당장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가 이어지겠지만, 양해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다큐사진가들의 어려운 삶은 우리세대로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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