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숨결 살리기, 규제보다 장려가 효험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북촌 한옥마을. 골목 너머 서울 도심과 남산이 보인다. [중앙포토]

 

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 서강(西江)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6·25 전쟁에 전북으로 피란을 갔지만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 내 기억은 서울 곳곳과 얽혀 있다. 1988년 12월 서울시장으로 임명됐을 때 감회가 남달랐던 이유다. 시장으로 일하며 서울 곳곳을 둘러봤다. 아쉬웠다. 내 기억 속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동네가 거의 없었다. 전쟁의 포화로 무너졌고 그나마 남은 지역도 재개발과 도로 건설로 원래 모습을 잃었다.

 경복궁·창덕궁 사이의 북촌과 인사동에 그나마 전통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북촌을 중심으로 안국동 윤보선가, 가회동 백인제가 등 문화적 가치가 높은 한옥이 모여 있었다. 인사동에도 개화파 정객 박영효의 생가, 명성황후의 조카 민익두의 고택 등 아름다운 옛 가옥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대로 뒀다가는 북촌과 인사동마저 개발 열풍에 휘말릴 수 있겠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콘크리트 빌딩 숲으로부터 지켜내야겠다는 생각에 각종 건축 규제 정책을 썼다.

 98년 7월 민선 서울시장으로 돌아왔을 때 북촌과 인사동을 다시 찾았다. 좌절했다. 규제 일변도의 정책은 통하지 않았다. 인사동에 고층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할 순 있어도 스파게티 집이 들어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창덕궁 근처 골목엔 국적 불명의 4~5층 가옥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북촌 한옥마을은 겨우 유지됐지만 일방적인 행정 규제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컸다. 한옥 숫자도 800여 채로 크게 줄어 있었다.

 북촌 한옥마을 복원에 나섰다. 규제 일변도 정책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게 급선무였다. 주민과 대화를 통해 한옥 등록제를 시행했다. 강제적 조치는 아니었다. 등록하면 한옥을 개·보수하거나 신축할 때 자금을 지원하고 재산세도 면제해줬다. 공동 정화조와 주차장 등 주민생활편의시설을 확충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한옥을 보존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필요한 경우 한옥을 서울시에서 사들였다. 처음으로 시에서 매입한 한옥는 북촌 관광안내소로 탈바꿈했다.

 인사동도 고민이었다. 시에서 손을 대고 투자를 하면 지가는 오르고 임대료도 따라 오른다. 임대료가 높아지면 필방, 표구점, 한복점 등 전통공방은 밀려나고 대형 체인점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보호하려고 시행한 정책이 도리어 파괴하는 정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실패한 규제 위주 정책을 다시 쓸 순 없었다. 부동산 시장의 흐름에 맡겨둬서도 안 됐다. 위험을 잘 알았지만 시 주도로 지원 정책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인사동의 노후한 인프라를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사동 밑으로는 삼청동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길이 있었다. 하수관로가 낡고 용량이 적어 비만 오면 침수됐다. 오래된 하수관로를 다 파내고 대용량의 콘크리트 하수관로를 깔았다. 도시가스망도 새로 만들었다. 돌가루로 구워 만든 흑색 전돌을 보도에 깔고, 불법 주차를 막기 위해 돌방석을 설치했다. ‘인사동 문화환경보전 기금’을 만들고 서울시가 5억원을 출연했다. 2000년 도시설계지구, 2002년 문화지구로 지정해 인사동 분위기에 맞지 않는 가게나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막았다. 전통업소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방세를 감면해주고 운영비와 건물수리비를 낮은 금리로 융자해주기도 했다. 규제보다는 인센티브(장려책)에 초점을 맞췄다.

 인사동과 북촌 한옥마을을 보존하는 과정에서 처음 임명직 시장 때는 규제 위주 정책으로 실패를 맛봤다. 두 번째 민선 시장을 하며 인센티브 시스템으로 바꿨고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 지금의 북촌은 살아 숨 쉬는 한옥마을이 됐다. 한옥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긴 했지만 말이다. 북촌의 분위기는 이제 서촌으로도 확산 중이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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