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락(黃落) 
                         김종길(1926∼)

 

 



추분(秋分)이 지나자,
아침 저녁은 한결
서늘해지고,

내 뜰 한 귀퉁이
자그마한 연못에서는
연밤이 두어 개 고개 숙이고,

널따란 연잎들이
누렇게 말라
쪼그라든다.

내 뜰의 황락을
눈여겨 살피면서,
나는 문득 쓸쓸해진다.

나 자신이 바로
황락의 처지에
놓여 있질 않은가!

내 뜰엔 눈 내리고
얼음이 얼어도, 다시
봄은 오련만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
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
봄도 없는 것을!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그 붉은 산수유 열매//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서늘한 감각으로 그 옛날 문학청년들 가슴에 뜨거운 선망과 감탄을 불러일으킨 ‘성탄제’의 시인 김종길. 미수(米壽)에 이르신 선생이 시 전문지 ‘유심’에 최근 발표한 작품이다.

황락(黃落)은 한 해의 성장을 마친 식물이 누렇게 물든 잎을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가을이 깊어져 황락의 풍경을 보이는 뜰을 둘러보다가 문득 ‘나 자신이 바로/황락의 처지에/놓여 있질 않은가!’, 새삼 깨닫는 화자다. 이제 곧 겨울이 오겠지. ‘내 뜰엔 눈 내리고/얼음이’ 얼겠지. 그래도 뜰엔 다시 봄이 오련만, 인생의 봄은 다시 오지 않아라.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봄도 없는 것을’…. 선생이 이 시의 시작노트에서 밝혔듯 ‘인생의 일회성이 인생 황락기의 애수의 근원’일 테다. 하지만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소중한 나날들이다. 봄도 한 번이지만 가을도 한 번, 겨울도 한 번이다! 계절은 저마다 아름답다. 쓸쓸하게, 그러나 거칠지 않게 맞이하는 시인의 황락의 계절.

선생님, 몇 해 전 얼핏 뵌 선생님은 머리카락이 숱지시더군요. 제 주위에는 ‘흰머리라도 많이만 있었으면 좋겠네!’ 하는 친구가 한둘이 아니랍니다. 건강과 건필을 빕니다!

[스크랩: 동아일보] 황인숙 시인

 

 

인사동으로 가며

―김종해(1941∼)

인사동에 눈이 올 것 같아서
궐(闕) 밖을 빠져나오는데
누군가 퍼다 버린 그리움 같은 눈발
외로움이 잠시 어깨 위에 얹힌다.

눈발을 털지 않은 채
저녁 등이 내걸리고
우모(羽毛)보다 부드럽게
하늘이 잠시 그 위에 걸터앉는다.

누군가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를
눈 속에 파묻는다.
궐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내 생의 그리움
오늘은 인사동에 퍼다 버린다.

 

 

인사동은 옛 궁궐로 둘러싸인 구역에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운현궁, 그리고 좀 떨어진 덕수궁. 화자는 그중 한 곳에 있었던 것일까? 아닐 테다. 눈 내리는 고궁의 아치(雅致)를 만끽할 모처럼의 행운을 마다할 사람은 드물 테다. 시인은 화자의 집을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이라고 농담을 건네며 시를 연다. 아마 화자의 집은 인사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대문 안, 성채 같은 아파트일 테다. 요즘은 웬만한 아파트도 옛날 왕의 거처보다 더 안락하고, 어떤 아파트는 더 호화롭기까지 하다.

곧 눈이 쏟아질 것 같으면 퇴근길을 걱정하고 얼른 귀가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에 있다가도 밖에 나가고 싶어 들썽거리는 사람이 있다. 창밖을 보니 눈이 올 것 같다. 이런 날 집에 있을 수 없지. 화자는 가슴 설레며 집을 나서는데, 아니나 다를까 눈이 퍼붓기 시작한다. ‘누군가 퍼다 버린 그리움 같은 눈발’ 날리는데 가로등이 하나둘 켜진다. 문득 ‘외로움이 잠시 어깨 위에 얹힌다’. 달콤한 외로움이. 화자는 로맨틱한 감성의 사람이다. 외로움도 잘 타고 그리움도 많다. 눈 와서 좋은 날, 화자가 불러낸 친구들이 인사동으로 하나둘 모일 테다. 밤 깊도록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눈발 같은 회포를 풀 테다. 근처 고궁에도 켜켜이 눈이 쌓이겠지. 서경에 서정을 섬세하게 포갠 시다. 김종해 시인의 다른 시 ‘눈’의 한 구절을 읊어본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눈이 내릴 동안/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황인숙 시인


[동아일보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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