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금은채로, 그곳에

 

허주혜展 / HEOJUHYE / 許朱惠 / painting 

2021_1208 ▶ 2021_1212 / 월요일 휴관

 

허주혜_anywhere3_한지에 수묵_53×45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충청북도_충북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아트센터

Hakgojae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1층

Tel. +82.(0)2.720.1524

artcenter.hakgojae.com

 

 

바라봄과 나타남  "5월 30일. 그 무엇에 비할 바 없이, 예사롭지 않게 파리의 하늘이 파랗다. 전나무를 올려다보며, 나는 전나무의 솔잎 뭉치들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자그마한 하늘의 파편들이 나무에 핀 파란 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참제비고깔의 꽃만큼이나 파란 빛깔의 꽃으로 환한 전나무들!" (존 버거, 장경렬 옮김, 『백내장 CATARACT』, 열화당, 2012, p. 28.) ● 본다는 것의 의미를 찾던 한 사람은 "백내장 제거 수술 이후의 몇몇 단상들"이라는 부제를 단 책에서 바라보기에 대한 또 다른 사유를 이어갔다. ● "경이롭게도, 존재하는 것들의 너무도 당연한 다양성이 나에게 되돌아왔다. 드리워진 내리닫이 창살이 제거된 다음 두 눈은 되풀이하여 계속 놀라움에 전율한다." (존 버거, 『백내장』, p. 62.) ● 바라보기의 행위가 지닌 진실한 의미는, 행위의 주체가 겪는 시각적인 것이 자명하나 세계 안의 존재에 대하여 "현상적 형태"를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다르게 말하자면 임의의 존재가 "앞으로 돌출하는" 사태를 그러한 시각적 행위가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각적 주체의) 바라봄은 (시각적 대상의) 나타남과 서로 동일시 하는/되는 것으로, 이는 변하지 않는 형태의 진리를 맹목적이고 오만하게 전제하지 않는다. 되레 모호하고 부정확한 "외양의 영역"인 "현상적 세계"를 이해하여 그 세계 안에 돌출하여 드러나는 존재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는다. (카자 실버만,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회 옮김, 『월드 스펙테이터』, 예경, 2010, pp. 8-11 참고.) ● 존 버거가 직접 경험한 "본다는 것의 의미"도 마찬가지로, 세계를 관찰하는 시각의 주체가 "존재하는 것들의 다양한 다양성"이 자신의 두 눈에 되돌아오는(돌출하는/나타나는) 경이로운 현상적 체험을 간증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는 백내장으로 시야가 가려진 이후에 수술로 시력을 되찾게 되면서, 예사롭지 않은 어느 한 날의 파란 하늘을 생생하게 "바라봄"과 전나무 솔잎 뭉치들 사이로 하늘의 파편들이 파란 꽃처럼 "나타남"을 세계 안에서 존재와의 경이로운 만남으로 서술했다.

 

허주혜_coexistence1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바라보기에 대한 일련의 단상과 사유를 일부러 다시 찾아서 떠올려 본 까닭은, 세계 안의 풍경들을 지속적으로 그려온 허주혜의 회화에 대해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다. 게다가, 무언가를 "머금은 채"의 순간과 "그곳"이라는 공간을 설정해 놓은 전시의 제목에서, "풍경"을 다루는 그의 사유에 대하여 그와 나 사이에 어떤 대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의 네번째 개인전 ⟪머금은 채로, 그곳에⟫는 임의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정황을 제목에서 흐릿하게 함의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늘 회화에서 다뤄온 "풍경"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그것의 지속을 의심없이 보여준다. ●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coexistence1,2,3,4」(2021)는 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화면에 빼곡하게 중첩시킨 그림으로, 그가 최근에 집중해 온 시공간에 대한 특유의 "이접" 효과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마치 서로 다른 것들을 거리낌 없이 병치하여 결합해 놓은 콜라주 화면처럼, 허주혜는 크기와 시점과 시간과 장소 등 각각 상이한 기원을 가지고 있는 형태들을 이어 붙여 그럴듯하게 꽉 찬 풍경화를 완성해 놓은 것이다. 이 빼곡한 도시 풍경은 그야말로 현실의 리얼리티처럼 비현실적인 것들의 스스럼 없는 "공존"을 보여주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거대한 도시 풍경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는 존재에 대한 (낯선) "보기"를 유도한다.

 

허주혜_coexistence2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스케일을 한껏 부각시키려는 듯 나란히 놓인 「coexistence1,2,3,4」의 경우, 세로로 긴 화폭에 담아 있는 도시 풍경에서 보는 이의 시선은 끊임없는 분절을 겪게 된다. 그것은 저 큰 풍경 속에서 예기치 않은 존재들이 스스로 "드러내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라봄"과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존재의 "나타냄"은 상이한 시공간의 풍경들이 이접된 경로에서 수수께끼 같은 시각의 긴장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카자 실버만(Kaja Silverman)이 "동굴 우화"를 가지고 "바라보기"의 능력에 대해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존재의) "드러내기"를 설명한 부분을 참고해 볼만 한데, "드러내기"는 (주체의) "시각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 자체의 근본적 특성"이라 말한 부분이다. 실버만에 따르면, 그것은 바라봄을 무효화 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 (카자 실버만, 『월드 스펙테이터』, p. 15.)

 

허주혜_coexistence3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허주혜는 시각적 바라보기와 존재 자체의 근본적 특성에 대한 드러내기를 동시에 환기시키듯 "현상적 형태"로서의 낯선 긴장감을 회화의 화면에서 보여준다. 그는 어느 시점부터 대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미묘한 시차(視差)들을 경험했고, 그것은 마치 숲과 나무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처럼 도시의 풍경과 개별적인 건축 혹은 기념비적 형태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이한 현상적 경험을 각인시켜 주었던 모양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회화는 화면의 모서리를 의도적으로 크게 인식하여 하나의 풍경으로서 접근해 보면, 도시의 스펙터클 이미지를 구축하는 수직‧수평의 직선들과 평평하고 매끈한 표면과 수직의 높이와 시선의 공백이 보이지 않는 효율적 공간 배치를 시각 이미지의 전제 조건 안에서 큰 무리 없이 찾아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그의 회화가 체감시키는 감각과 지각의 또 다른 긴장은, 시공간의 착오를 일깨우는 개별적인 형태들에서 회화적 기법과 매체의 물성이 이접된 형상들을 뚫고 낱낱이 돌출되는 순간에 발생한다.

 

허주혜_coexistence4_한지에 수묵_162×130cm_2021

그가 도시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경험하면서 현상적으로 지각했던 것들은 건축의 파사드나 아래에서 올려다 볼 때 그 끝이 허공으로 사라질 것 같은 과장된 수직성 같은 것이었다. 또한 멀리서 조망하는 도시의 과밀한 조감 풍경과 이따금 유령처럼 출몰하는 과거의 기념비 같은 것들도 익숙한 시각적 감수성을 자극하여 그것의 (식상한) 시각적 기원을 가늠해 보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허주혜는 그것을 화면에 옮겨 그리면서 그러한 풍경의 시지각적 클리셰를 개별적인 존재의 "돌출"과 맞닥뜨리게 했다. 그것은 몇 가지로 단순하게 규명하기도 어렵고 또 어떤 특정한 조건 안에 가두어 놓기도 어려운 것으로, 거대한 세계의 매우 개별적인 사태 안에서 "마주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또한 (동아시아) 회화에 있어서 현상적 경험의 가능성을 재차 강조한다.

 

허주혜_금요일이 지나고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허주혜_모퉁이를 돌면1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바라봄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나타남을 동반하여, 세계를 관찰하는 허주혜의 바라봄은 몇 번의 현상적 경험의 절차를 갱신함으로써 회화 안에서 형상의 돌출이라는 나타남과 동일시 될 수 있다. 그는 특히 먹과 붓을 한지에 운용하는 숙련된 기술과 매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현실의 이접된 "풍경"이 제 존재를 드러낼 회화적 조건들을 개입시킨 셈이다. 이를테면, 먹의 스밈과 농담, 붓의 크기와 무게, 종이의 두께와 질감 등을 기술적으로 조율하여 바라봄의 형태가 나타남의 형상으로 변환되는 지점을 탐구한 흔적이 역력하다. 수많은 형상들이 교차하며 이접된 회화의 공간 안에서 도시 풍경의 스펙터클이라는 장막을 지나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뜻밖에도 개별적인 형태들을 구축하고 있는 회화적 행위와 재료의 물성과 그것을 운용한 작가의 행위인 것이며, 그것이 다시 거대한 세계 속 존재의 나타남과 공명한다고 할 수 있겠다.

 

허주혜_불필요해진 것들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허주혜는 자신이 본 도시 풍경을 회화의 공간 안에 담아내는 그러한 변환에 대해, 일련의 모필 드로잉의 결과물로서 거대한 건축물의 파사드를 먹의 농담을 머금은 추상적인 "시간의 흔적"이나 "밀림"과 같은 임의의 장소성을 연상시키면서 그 속에서 "바글거리는 작은 생명의 울부짖음"을 상상하기도 했다. (2020년 작업노트) 비슷한 시기 오래된 도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공아파트나 구식 아파트 옥상의 부분에 주목해 수묵으로 그렸던 그림 「repeat1」(2020), 「repeat2」(2020), 「unknown1」(2019), 「unknown2」(2019) 등을 보면, 도시 풍경이라는 일련의 외부 세계를 관찰하던 그의 시선이 풍경의 대상이 현존하는 감각으로 제 형태를 나타내는 경험과 교차시켜 그것을 회화적 수법으로 시각화 했던 것을 더 진솔하게 가늠해 볼 수 있다.

 

허주혜_화단이었지만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15117117」(2017)과 「1617247」(2017) 같은 매우 추상적인 결과물의 회화에서도 꾸준히 세계를 관찰하던 그의 현상적 경험을 엿볼 수 있는데, 이때 그는 "농묵과 담묵의 대비를 이루고 있는 이 두 작품은 나무가 빼곡하게 펼쳐진 밀림처럼 보인다. 밀림 군데군데 보이는 여백은 하늘의 뭉게구름인지, 숲 속 사이사이 자리 잡고 있는 호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것은 도시가 자연으로, 자연이 도시로 융화되어 보이는 나의 작품 세계관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2017년 작업노트) 작가의 이러한 속내는 앞서 존 버거의 경험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전나무의 솔잎 뭉치들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자그마한 하늘의 파편들이 나무에 핀 파란 꽃"으로 나타나는 그 순간의 현상적 형태에 대한 경이로운 경험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존재하는 것들의 너무도 당영한 다양성"이며, 나의 "바라봄"의 응시로 되돌아 오는 존재의 "나타남"을 수수께끼처럼 풀어낸다.

 

허주혜_흔적만1_한지에 수묵담채_53×45cm_2021

한편, 검은색 수묵화의 무게와 침묵을 뚫고 빛과 같이 다양한 색을 머금은 풍경의 형태들이 보인다. 빛은 우리의 두 눈을 "볼 수 있음"과 "볼 수 없음" 사이에서 끊임 없이 동요하게 한다. 마치 동굴의 어둠을 빠져 나온 이가 빛으로 인해 세계가 다시 비가시성의 "은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을 몸으로 경험했던 것처럼, 빛은 여전히 "바라봄"에 대한 끝없는 회의를 유도한다. 하지만 세계 안의 존재에게 비춰지는 빛은 제 형태의 "나타남"을 가시화 하며 은폐된 것을 현존하도록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 허주혜는 그동안 외부 세계를 관찰하던 자신의 응시에 "색"을 넣어 개별적인 풍경에 대한 인간의 "바라봄"과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존재의 근본적 특성"을 사유하게 하는 사건과 마주하게 했다. ■ 안소연

 

Vol.20211208e | 허주혜展 / HEOJUHYE / 許朱惠 / painting

보라색 언덕 너머 Beyond the purple hill

박영균展 / PARKYOUNGGYUN / 朴永均 / painting

 

2021_0928 ▶ 2021_1012 / 월요일 휴관

 

박영균_오후 4시 완벽한 여름 햇빛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74×300cm_202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01121h | 박영균展으로 갑니다.

박영균 홈페이지_www.mygrim.net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아트센터

Hakgojae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삼청로 48-4 1층

Tel. +82.(0)2.720.1524~6보라색 언덕 너머, 하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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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언덕 너머, 하늘 까지 따르리라 ●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 세계,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대상의 존재 방식을 회화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가. 박영균은 현실을 바라보는 경험의 공간이자 관계성을 확인하려는 측면에서 2021년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 작가는 『보라색 언덕 너머』라는 이번 전시 명을 두고 "골목, 현실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저 너머에 있는 어떤 희망"이라고 말한다. 코로나 시대에 사는 사람들, 작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도시 공간, 과거의 시간, 보이지 않는 관계, 드러나지 않는 연결...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보라색 풍경이다. ● 먼동이 틀 무렵, 집을 나선 작가는 좁은 골목 사이를 터벅터벅 거닐다 자신의 작업실을 향한다. 15년을 거의 매일 같이 오가는 길목을 걷다 보면, 낡은 연립주택의 비좁은 계단에 앉아 있는 낯익은 할머니의 모습과 담장 너머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가로질러... 문이 굳게 닫힌 채 적막감이 흐르는 교회 앞 모퉁이에 다다른다. 작가는 어김없이 하늘 향해 곧게 뻗은 언덕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잠시 차오르는 숨소리를 고르고 비탈진 언덕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고요한 아침을 깨우는 '군중의 함성'이 귓전에 맴돈다. ● "오랜 시련에 헐벗은 저 높은 산 위로, 오르려 외치는 군중들의 함성이 / 하늘을 우러러보다 그만 지쳐 버렸네(중략) / 저 높은 산에 언덕 너머 나는 갈래요, 저 용솟음치는 함성을 쫓아갈래요. / 하늘만 바라다 시들어진 젊음에, 한없는 지혜와 용기를 지니게 하옵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라면 하늘 끝까지 따르리라 1)

 

박영균_푸른색 터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337cm_2021

 

박영균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1980대 민주화 투쟁의 현장을 가로질러 교회 안 '구국기도회'에서 울려 퍼졌던 '군중의 함성'이라는 노랫소리를 내내 중얼거렸다. '군주의 함성'은 고난 속에 피어난 민주주의 노래이자, 억압과 착취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이다. 작가의 바람은 보라색 언덕 너머 하늘까지 온전히 닿을 수 있을까. ● 독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에 따르면 참 믿음,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혹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궁극적인 관점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하나'로 통합하려면 만인과 만유(萬有)의 조화, 대립물(對立物)의 일치를 논증함으로써 자신의 사명감과 존재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대상의 본질적 관계를 파악하고 동시에 현실을 직관하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보랏빛 색채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박영균_보라색 언덕 너머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354cm_2021

빨강과 파랑의 대립, 모순의 조화 ● 제목에서 암시하듯 총 7점의 작품은 생명력을 상징하는 빨강과 냉정하고 이성적인 파랑이 적절하게 혼합한 보라색 풍경이다. 화면 전반에 주조된 보라색은 원색인 빨강과 파랑이 섞인 색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빨강과 파랑은 극단적으로 대립하지만, 빨강과 파랑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색이다. 즉 '모순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박영균은 일상으로의 회귀, 일상을 가능케 하는 '공존'의 가치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유기적 관계,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빨강과 파랑을 섞은 보라색으로 화면 전체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여기서 작가가 팔레트 위에서 배합한 색(色)은 분별과 관념으로 대상에 채색하는 의식작용을 의미한다. 이로써 보라색은 작가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대상이 된다. 박영균이 캔버스에 구사한 '빨강과 파랑의 혼합'으로 생성되는 보라색은 '대립물의 일치', '모순의 조화'와 상응한다. ● "스무 살의 기억은 되게 크고, 그때의 짧은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것 같아요.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 자기 삶의 방식을 만들어 줬어요. 색채로 표현하자면 밝고 맑은 (혁명적 낙관) (...) 그래서 이렇게 흘러오지 않았나 싶어요" 2) ● "2014년, 15년, 17년에 우리가 느꼈던, 그 시대의 공기? / 그 시대의 흐르는 어떤 것들이 비닐과 보라색이 아니었을까? / 보라색은 '여기를 보라', '여기를 보세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 뭐 아니면 '내가 있어요'. 그런 의미의 보라도 있고, 그냥 색 자체의 보라. / 아, 그래서 보라색으로 광장의 이야기,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 그런 것들을 나 혼자 그리지 않았을까?" 3) ● 작가는 2021년 비로소 무한한 하늘, 언덕 너머의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연결 고리를 화폭에 담고자 밝은 햇빛, 맑고 신선한 공기의 색과 상응하는 보라색을 펼쳐낸다. 어린 시절의 그리움, 향수, 혁명, 투쟁, 저항, 슬픔, 불안, 두려움, 신비로움... 이 모든 것들은 작가의 자의식 속에 배합되어 꿈틀거리는 붓 터치와 함께 약동하는 생명력을 발현한다. 작가에게 보라색 너머의 풍경은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물들어가는, 바로 노을이 질 무렵의 하늘빛, 또는 새벽을 여는 맑은 공기의 빛이다. 보라색이야말로 아득한 언덕너머 하늘 끝에 닿을 수 있도록 물질과 영적 세계의 경계선을 초월할 뿐 아니라 현실과 미지의 공간을 넘나들게 한다.

 

박영균_박하사탕을 머금은 언덕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259cm_2021

시대와 현실의 간극, 예술과 현실 사이 ● 박영균은 1980년대 후반부터 줄곧 치열한 현장 활동을 통해 선전 선동의 도구였던 민중미술을 몸소 실천한 까닭에 한국화단에서 리얼리즘을 구현한 중견작가로 손꼽힌다. 스무 살 무렵 시작된 경희대 벽화작업을 시작으로 교육현장, 대추리, 촛불집회, 통일, 4대강, 한진중공업, 강정마을, 소녀상, 세월호 집회, 광화문 광장, 환경문제 등 현실에 직면한 문제에 따른 명백한 진상 규명을 위해 참여자, 관찰자로서 역사적 현장을 기록해 왔다. ● 그러나 언제부터일까. 박영균은 직접적인 현장 활동과 생생한 자신의 증언을 지속해서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두고 스스로 현장의 관찰자였을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한 그림"을 그린다고 확고한 신념을 밝혔던 박영균은 행동의 주체적 체험과 관찰자로서 매개한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시대'와 '현실'이라는 틈, 메울 수 없는 간극에 부딪히고 만다. 직접적인 체험에서 파생되는 사회 속 미술가의 활동과 현장에서 벌어지는 격차에서 비롯되는 실제적인 역할의 거리는 작가에게 자기 성찰적 모순을 안겨주었다. ● 그렇다면 작가는 주체자인가. 매개자인가. 박영균은 역사적 현장에 대한 다층적인 경험의 주체이자 미술가로서 '사회적 역할'의 거리, 상호 관계성에 주목하고 자율적인 사고를 통해 현실을 새롭게 조망하기 시작한다. ● 「2016년 보라 Ⅱ」는 그림을 그리는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 명의 색채인 보라색에 관한 해석의 단초를 제공한다. ● 「2016년 보라 Ⅱ」와 「벽보 선전전」(1990)의 경우 제작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연결 선상에 있다. 1990년도에 발표했던 「벽보 선전전」은 골목 모퉁이에서 벽보를 붙이는 순간의 긴장감을 포착한 작품인데 당시 '망을 보았던' 20대 자신의 모습을 차용해서 2016년 '망보는' 50대의 박영균의 모습으로 다시 소환했기 때문이다. ● 박영균은 화가의 작업실(현장)과 과거의 역사적 현장, 즉 양쪽의 시점을 결합하는 방식을 적용하여 주체자인 자신의 작업실 내부와 긴박했던 투쟁 현장의 시선을 서사적으로 연결했다. 「2016년 보라 Ⅱ」는 작가의 존재성을 다시 획득함으로써 상반되고 모순되는 시점을 포착하고 색채를 통해 반발하고 부정하려는 변증법적인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즉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결합함으로써 생겨나는 변화를 보랏빛 색채로 포용함으로써 시대와 현실을 대변하는 새로운 미학적 리얼리티를 제시하였다. 이제 작가는 단절된 시대적 사건이 아니라 삶의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시대성을 담보한 존재의 연관관계를 그릴 수 있는 자율적인 주체가 된다. 박영균의 작업공간은 주체적인 경험의 장소이자 현실의 실천적인 장이다.

 

박영균_연결(서귀포 골목에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521cm_2021
박영균_얼음의 눈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600cm_2020

보라색 언덕 너머의 풍경 ● 이번 전시에 선보인 「보라색 언덕너머Ⅰ」, 「보라색 언덕 넘어Ⅱ」는 산업화 도시화 속에 삶의 구석진 자리, 사각지대에 놓인 계층의 삶, 사회적 취약구조로 단절되어가는 삶의 거리를 담은 풍경화이다. 작가의 일상과 밀접한 삶의 터전이 직접적인 그림의 화제로 등장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미술가로서 시대와 현실의 갈래에서 더 이상 갈등하지 않고 '모순의 조화'에 천착하고 있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 「오후 4시 완벽한 여름 햇빛」, 「푸른색 터널」에서는 개별적 존재성을 확고히 하면서 사물과 사물, 대상과 대상의 면밀한 균형감을 구축하고 있다. 보라색으로 물든 풍경은 사물 간의 거리, 대상의 위치를 앞에 두거나 뒤에 간격을 두고 배치함에 따라 원근의 깊이와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대상을 채색하려던 의식의 상호 작용 때문에 하나의 사물을 이동시키면 나머지 부분이 흐트러질 것처럼 화면의 중심을 어디에 두었는지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이는 화면 속에서 하나의 대상을 집어 당기면 나머지 부분이 다 끌려 나오는 것처럼 서로 치밀한 연계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대상은 오히려 '중심의 부재'로 인해 개별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하나하나 유기적인 연결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더욱이 보라색의 향연과 붓의 자유로운 감각은 선과 색의 경계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모순의 조화'를 극대화한다.

 

박영균_보라색 언덕 너머展_학고재 아트센터_2021
박영균_보라색 언덕 너머展_학고재 아트센터_2021
박영균_보라색 언덕 너머展_학고재 아트센터_2021

영균은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자 긴밀한 연계, 관계구조를 해석하는데 집착하고 있다. ● 2020년 11월, 비대면 가운데 발표한 「얼음의 눈물」은 바로 예술가의 고민과 우려가 담긴 현실· 사회참여적인 발언이기에 더욱 주목 받았다. 「얼음의 눈물」은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너머 타이가 숲에 사는 몽골리안 샤먼의 문양 날개를 가진 늑대의 얼굴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여 창조한 수호신이다. 유라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아직도 원시상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바이칼은 설산에 둘러싸인 채 시리도록 푸른 물빛을 띠기에 우주 위성에서 보면 반쯤 감긴 푸른 눈처럼 보인다고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담수의 5분의 1이 이 호수에 모일 만큼 수심도 깊고 수량도 풍부하다. 더불어 수직과 수평의 물이 교차하면서 호수의 가장 깊은 곳까지 산소를 운반하기 때문에 서식하는 수중생물들로 연중 활기를 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구의 온난화, 환경오염의 영향으로 점차 푸른빛을 잃어가고 있다. 작가는 생태계의 낙원인 바이칼 호를 통해 전 인류와 지구가 처한 치명적인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이상기온,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녹아내린 지구,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연상되는 원전사고의 모습도 보인다. 다가올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줄 수호신은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가 살아온 생활방식, 무지의 각성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던진다. ● 1990년대 박영균은 붓을 들고 현장에 뛰어들어 전투적인 투쟁을 했다면 2021년은 예술과 현실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모순의 조화'를 시도하고 있다. 현실 세계의 대상을 포함한 인간의 존재 방식, 나아가 인류의 역사, 전 지구적인 공간을 주시함으로써 그곳이 아닌 이곳에서, 보라색 언덕너머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 박영균은 오늘도 보라색 언덕 너머, 맞닿을 하늘을 응시하며 어김없이 행보를 잇는다. 미래의 희망과 변화를 소망하는 '군중의 함성'이 닿을 때까지... "당신의 뜻이라면 하늘 끝까지 따르리라"라고. ■ 김허경

* 각주

1) 「군중의 함성」, 글·곡, 김의철

2) 박영균, 11월 11일 『박영균개인전: 들여다 듣는 언덕』, 부산 민주공원, 인터뷰

3) 박영균 작가노트 중에서, 2018년 『그곳에서 이곳으로』展 참고.

Vol.20210928c | 박영균展 / PARKYOUNGGYUN / 朴永均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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