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미술품 2만3천여점 송현동으로…문화계 기대·우려 교차

"장르·시대별 분화 흐름과 안맞아…서둘지 말고 내실 있게 준비해야"

 

(서울=연합뉴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들이 상속세 납부 시한을 앞두고 공개한 사회공헌 계획에 따라 이건희 회장이 평생 수집한 개인소장 미술품 1만1천여건, 2만3천여점은 국가 박물관 등에 기증된다. 사진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하는 수집작품 중 일부. 2021.4.28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박상현 기자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기증한 문화재와 미술품 등 2만3천여 점의 종착지가 서울시 종로구 송현동으로 정해졌다.

국보와 보물부터 근현대 미술 명작까지 아우르는 '이건희 컬렉션'을 한곳에 모은 새로운 개념의 기관이 서울 한복판에 들어서게 됐다.

문화예술계에서는 기대와 환영,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동시에 나오고 있다.

◇ 이건희 컬렉션, 논란 끝에 송현동행

지난해 10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별세하면서 '이건희 컬렉션'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소문난 미술애호가였던 이 회장이 국보급 문화재와 고가의 근현대 미술품을 대거 소장했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이 회장이 남긴 고미술품과 근현대미술 작품 1만1천여 건, 2만3천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한다고 지난 4월 발표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 국보와 보물을 포함해 총 2만1천600여 점의 고미술품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갔다.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클로드 모네,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을 비롯한 국내외 거장들의 작품 1천600여 점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됐다.

'세기의 기증'에 문화예술계는 환호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별도 전시실을 마련하거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언급했다. 이후 정부는 기증품 2만3천여 점을 통합적으로 소장·관리할 별도 기증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부지를 검토했다.

미술계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근대 미술품 등을 활용한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요구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서울과 지역 간 문화 불균형을 지적하며 이건희 기증관 유치 경쟁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는 문화재를 포함한 모든 기증품을 모은 전시관을 송현동에 짓기로 했다.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언론설명회가 열린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참석자가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를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이건희 기증관, 한국 대표 뮤지엄 될까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있던 송현동 부지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옛 풍문여고 부지에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 등과 연결돼 문화예술중심지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삼성생명이 미술관 건립을 위해 매입했던 곳이기도 한 송현동 부지는 서울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문화예술 랜드마크 입지로 꼽힌다.

'이건희 컬렉션'은 그곳을 채울 콘텐츠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이건희 컬렉션' 대표 작품 일부는 이미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선보여 찬사를 받았다. 당대 최고 명작들을 모은 전시에 관람객들이 몰려 연일 매진 행렬을 이뤘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장은 "인근에 국립현대미술관과 인사동이 있는 송현동에 이건희 기증관이 지어지게 된 것을 환영한다"며 "일대가 더 짜임새 있는 문화지구가 될 것이다. 세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미술관을 지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송현동은 오래전부터 미술관 부지로 거론된 곳인데 리움의 또 다른 버전인 이건희 기증관이 들어서게 됐다"며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공예박물관이 지척에 있고, 전통미술 중심지인 인사동과도 연결돼 굉장히 큰 미술 인프라가 만들어지게 된다"고 평가했다.

'이건희 기증관'의 건축에도 많은 신경을 쏟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민병훈 전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은 "인사동에 복합 문화시설이 부족한데, 전시는 물론 공연도 보고 휴식도 취할 공간이 되길 바란다"며 "건물만 보기 위해서도 여행을 가는 세상이니 목조로 멋지게 지었으면 한다. 지역성에 어울리는 건물을 지으면 주변 공간도 다 살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진연수 기자 = 2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언론 공개회에 주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기대만큼 큰 우려도…해결할 과제 산적

'이건희 기증관' 설립에 대한 기대도 크지만 우려와 비판도 나온다.

일부 전문가들은 고미술과 근현대 미술, 한국 미술과 서양 미술을 망라하는 소장품을 하나의 체계에서 보여준다는 시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 공동간사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기증관 건립은 장르·시대별로 분화하는 세계 박물관·미술관 흐름과 맞지 않는다"며 "제대로 된 이해나 성찰 없이 국민 염원이나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고 내린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당국은 시대와 장르를 초월한 창의적인 융·복합 전시를 선보이겠다는 계획이지만, 소장품을 제대로 관리하고 연구하려면 많은 인력과 예산이 필요하다.

양 교수는 "이건희 기증관이 독립적으로 운영될지, 국립현대미술관 등의 산하 기관으로 운영될지도 관건"이라며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소프트웨어 측면의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7년 개관 목표를 밝힌 정부가 시간에 얽매이지 말고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학계 관계자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충분히 연구한 뒤 전시를 하고 건물도 지어야 한다"며 "굳이 2027년이라고 못 박지 말고 여유 있게 준비해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용산으로 이전할 때도 시간이 더 걸렸다"고 덧붙였다.

당장은 서울과 지역의 문화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도 찾아야 한다. 지자체 미술관과의 협력 강화 등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이건희 기증관' 송현동 건립 확정 (서울=연합뉴스) 이른바 '이건희 기증관'(가칭)이 유력 후보지였던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 세워지는 것으로 결론 났다. 문화체육관광부는 9일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가 송현동 48-9번지 일대 3만7천141.6㎡ 중 일부(9,787㎡)를 기증관 건립 부지로 심의·의결했다고 밝혔다. 2021.11.9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산수화 하면? 정선!… 다른 사람 작품은 관심 없죠-평론가 정준모 작심 쓴소리

▲ ‘한국 근대 미술을 빛낸 그림들’을 펴낸 정준모 미술평론가. 그는 “국내 미술계가 침체의

길을 걷는 이유는 명품 편식증에 걸려 다양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출신인 정준모(57) 평론가가 미술계에 쓴소리를 던졌다. 다양성을 상실한 채 과도한 명품 강박증에 빠진 미술시장이 스스로 침체의 길을 걷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난 14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정 평론가는 “미술시장에선 ‘이제 팔 것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박수근·이중섭 등의 작품이 아니면 다루려 하지 않는 데다, 이 작품들이 재벌가 등 ‘좋은 집’에 들어가면 좀처럼 (시장에) 다시 나오지 않아 작품을 볼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반면 ‘안 불러주니까 못 나섰던’ 훌륭한 작가의 작품들은 새로운 기풍과 시대정신을 반영했음에도 사장되고 있다고 자조했다. 그는 김경, 김주경, 안상철, 이규상, 이종무, 장운상, 정규 등 91명의 작품 108점을 간추려 최근 ‘한국 근대 미술을 빛낸 그림들’(컬처북스)을 펴냈다. 박수근, 이중섭 등의 작품도 포함됐지만 어디까지나 초점은 미술사적 ‘맥락’을 이룬 잊혀진 작가들에 맞췄다.

정 평론가가 바라보는 국내 미술계는 구매자와 컬렉터 모두 명품 편식증에 빠진 비정상적 구도를 띠고 있다. 그는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이 알려준 국내의 절경처럼, 국내 미술품에도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 많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예컨대 서화계의 대부인 김규진(1863~1933년)의 ‘총석정’은 구한말 조선황실의 위엄을 드러낸 수작이지만 창덕궁 희정당에 벽화 형태로 걸려 있어 일반인은 접근조차 어렵다. 또 지난해 타계한 한국화가 박노수(1927~2013년)의 ‘선소운’은 일반 수묵화와 달리 옷의 주름을 흰 여백으로 표현하는 등 새 기풍을 드러낸 작품이다. 여인의 엉덩이가 의자 끝에 살짝 걸려있는 비정형적 구도로 화제가 됐지만 요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안상철(1927~1933년)의 ‘전’의 경우 작가의 초기 특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지만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작품은 개인 소장자의 방에 신문지처럼 둘둘 말려 보관돼 자칫 세상에서 잊혀질 뻔했다.

책은 국립현대미술관 재직 시절 근대미술 100점을 선정해 전시한 ‘한국 근대회화 100선, 1900~1960’이 바탕이 됐다. 그는 “우리나라도 미국의 모마나 영국의 테이트모던 같이 특색 있는 미술관을 가져야 하는데, 아직 경영자의 의식이 여기까지 이르지 못한 것 같다”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이 관람객을 위한 소장품 도록조차 발간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공인중개사·감정평가사와 같은 미술사 자격증 도입과 미술품 기부 세제 혜택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의견을 개진했다. “저도 예전에 집에 식모가 있었지만, 화랑가 아주머니들(사장들)은 정말 심합디다. (중소 화랑에서) 일하는 큐레이터들을 종 부리듯 합니다. 관련 자격증을 만들고 의무고용하도록 해야 실업난도 해결하고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지요.”

아울러 박물관과 미술관이 기부금품을 모집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기부 미술품을 법정기부금으로 인정해 감세 혜택을 줘야 한다는 주장은 그간 미술계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미국 등에서 왜 기부가 활성화된 줄 아십니까. 세금 혜택이 정답입니다. 현행법상 국내 국공립미술관은 기부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관련 규정이 복잡해 실제 혜택받는 기증자 사례가 전무합니다.”

미술교육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김환기 화백의 이름조차 모르는 미대생들이 국내외 유명 미술관 몇 군데만 돌면 미술을 다 알게 된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작품에 담긴 시대의 미감과 역사적 맥락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더군요.” 정 평론가는 “누구나 ‘첫사랑’을 찾는 심정으로 스스로 그림을 보도록 노력해야 창의적인 눈을 갖게 된다”고 강조했다.

[서울신문]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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