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松巖 탄신 100주년 기념展 

2017_0513 ▶ 2017_0701 / 일,월요일 휴관

.

큐레이터 토크2017_0531_수요일_07:00pm2017_0628_수요일_07:00pm


참여작가

석지 채용신_우청 황성하_박경종_박종호

양정욱_유근택_이우성_이현호_임택

은희_정재호_한상익_허수영_홍정욱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그 집: 미술관의 된 집 ● 서울 종로의 한복판, 호젓한 옛 골목에 단정한 미술관이 한 채 들어서 있다. 바로 OCI미술관이다. 주변에는 하루가 다르게 마천루가 치솟으며 세상은 이리 바뀌어가는 것이라고 채근하여도, 그래도 세상의 어떤 것은 여전히 가치 있지 않으냐고 되묻듯 빨간 벽돌과 뽀얀 대리석으로 튼튼하게 쌓아 올린 건물이다. 외벽에는 큼직하게 '松巖會館(송암회관)'이라 적혀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여기는 과거 송암 이회림(松巖 李會林, 1917~2007) 선생이 자신의 사저 터를 미술관으로 내어준 곳이다. ● 개성 출신의 송암이 이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은 동란이 막 끝나 부산 피난길에서 올라왔던 1954년이었다. 이 터를 유난히 아껴 오래된 양옥집에서 직접 살다가, 다시 5층짜리 송암문화재단 건물로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 건물을 지을 때는 송암이 손수 나무를 가꾸고, 벽돌을 쌓는 조적공(組積工)까지 직접 데려왔다고 하니 그 정성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된다. 매일 서류를 검토하고, 서예를 연마하던 여기에 그는 1989년 전시장을 만들었다. 자신이 모아온 소장품을 혼자 보는 게 아까워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처음에는 '송암미술관'의 이름으로 한학(漢學) 사료와 문인화(文人畫)를, 그리고 고향 땅을 그리며 모아온 북한 유화를 전시하여 연구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0년, 이곳은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OCI미술관'으로 다시 한번 탈바꿈을 하였다


그 집展_OCI 미술관 1층_2017 (Photo ⓒ 박성훈)


한때 송암의 '집'이었던 OCI미술관은 이제 한국 현대미술의 보금자리가 되어 가고 있다. 경쟁과 시장 원리로 각박한 미술계에서 작가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터전이 되고, 언제라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OCI미술관의 활발한 움직임 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것은 'OCI Young Creatives'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해마다 만 35세 이하의 신진 작가를 선발하여 창작지원금 1천만 원을 수여하고 개인전을 열어, 젊은 작가들의 높은 기대를 받고 있다. 공모 때마다 5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이고, 개관 이후 벌써 55명의 작가가 배출되었다. 또한, 작업 공간이 없는 작가들을 위하여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도 운영하고 있다. 인천 남구 학익동 소재의 사무동 건물 일부를 작업실로 개조한 것으로 매해 8명의 작가에게 '방'을 내어주고 있다. 그뿐이랴, 한 번 이렇게 작가들과 인연을 맺으면 그 정(情)이 행여라도 옅어질까, 작가들을 우리 "OCI 아들", "OCI 딸"이라고 부르며 알뜰살뜰 챙긴다. 수시로 안부를 묻는 건 물론, 격년제 지방 순회 전시인 『別★同行(별별동행)』을 기획해 전국에 알리기도 하고, 해외 교류 프로그램으로 국제무대에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작가들도 미술관을 제집처럼 불쑥 드나들고, 또 그렇게 스스럼없이 찾아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니 정말 '집'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집展_OCI 미술관 2층_2017 (Photo ⓒ 박성훈)


송암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특별전 『그 집』은 이렇게 미술관이 된 집에서, 미술품으로 지어보는 상상의 집이다. 송암이라는 한 사람이 뿌린 씨앗이 이처럼 무럭무럭 자랐다는, 그리고 지금은 그 집에서 미술 작품이 어엿이 주인공이 되어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보고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OCI미술관이 처음으로 그 집의 '곳간 보물'인 소장품을 내어 보인다. 송암이 모아왔던 고미술품과 북한 유화, 그리고 최근 수집한 현대미술품 중 14점을 엄선하였다. 더불어 OCI Young Creatives와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를 거쳐간, '그 집에 세 들었던' 작가 중 여덟 명의 최근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 전시의 구성은 건물의 1, 2, 3층의 계단을 오르며 바깥에서 점차 집안 깊숙이 들어와, 거기에 사는 사람을 만나고, 살림살이를 구경하고, 또 누군가의 방을 살펴볼 수 있는 순서로 꾸며보았다. 1층에서는 집 안으로 들여온 바깥세상, 즉 풍경화로 이루어졌다. 우청 황성하의 10폭 산수화를 중심으로 박종호, 유근택, 이현호, 임택, 허수영이 바라보는 하늘, 숲과 산, 호수의 풍광을 담았다. 또한 OCI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500여 점의 북한 유화 중 한상익이 그린 금강산 풍경 「삼선암에서」를 출품하였다.


그 집展_OCI 미술관 2층_2017 (Photo ⓒ 박성훈)


2층에서는 전은희와 정재호가 그린 오래된 집으로 거리를 만들고, 양정욱의 「어느 가게를 위한 간판」을 세워 보았다. 거기에 석지 채용신의 「팔도미인도」와 이우성의 'outdoor painting'으로 사람이 북적이게 하였다. 또, 그 집의 물건도 꺼내보았다. 책가도와 도자를, 여기에 홍정욱이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탁자와 작품을 함께 배치하여 세간을 갖추었다. ● 3층은 박경종의 '시공간 나그네'가 우연히 들러 모험을 펼치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과거 송암이 사용하던 붓, 지팡이, 골프채 등과 현대의 일상용품이 작가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뒤섞여 흥미로운 시공간을 빚어낸다.


 

그 집展_OCI 미술관 3층_2017 (Photo ⓒ 박성훈)


『그 집』은 벽돌 쌓듯 차곡차곡 모아온 시간과 정성, 그리고 인연으로 만들어낸 집이다. 별난 사람, 별난 사건이 넘쳐나는 미술계에서도 고미술품과 현대미술품이 함께 전시되는 경우는 드문데, 이번 전시에서는 과감하게 시대의 경계를 짓지 않았다. 미술품이 주는 즐거움과 상상의 기쁨은 시간에 국한될 수 없기에, 게다가 대(代)를 이어 아름다움을 감상하라고 송암이 내어준 '집'이기에, 형제자매가 많은 대가족처럼 작품 이미지들이 저마다 마주치며 만들어내는 다양한 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자 하였다. 잔칫날처럼 흥겹기를 바라며, 이번 전시는 OCI미술관이 관람객에게 보내는 '그 집으로의 초대'이다. ■ 김소라

 


   Vol.20170513c | 그 집-松巖 탄신 100주년 기념展






 

F.OUND ISSUE > #56 April, 2015   by F.OUND / 2015.04.15
에디터 > 최인희   포토 > 정재호 사진 제공 > 조문호  

 

 

그래도 사람
CHO, MUNHO

 
역사의 시작과 끝에는 조문호 작가가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홍등가 청량리 588번지와 87민주항쟁을 비롯하여 ‘동강백성들’,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 ‘두메산골 사람들’, ‘인사동 그 기억 풍경전’ 사진전 등을 열었고, 그 외에도 천상병 시인과 전국의 500여 개가 넘는 장터를 기록하기도 했다. 조문호 작가를 만나기 전, 친한 선배에게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진심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그때 그 사람들도 보고 싶고,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싶다. 이제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지금도 가난하지만, 그 시절 연인과 동생들이 오면 소주 한 잔 받아주고 싶다.” 이 글귀는 전시회장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사진을 보고 있을 무렵 한 신사가 다가와서 막대사탕을 건넸다고 한다. “이거 먹으면서 봐요” 따뜻한 미소에 달달한 사탕까지 ‘청량리 588’ 전시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법했지만, 이내 그녀 또한 사진에서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끝내 막대사탕을 건넨 신사가 작가님이라는 것을 알고 아쉬웠다고 감상을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막대사탕 맛이 궁금해 전시회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

 

가난이 지겨워 무작정 상경한 서울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돈을 벌고자 곳곳을 떠돌았지만, 결국 떠밀리듯 사창가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빈부 격차는 날로 심해졌고, 없는 집에서 자란 죄 없는 여성들은 빚을 갚기 위해 몸을 팔았다. 전농동 588번지는 대표적인 홍등가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민낯이 투영된 곳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암흑기였던 군사독재 시절 그들은 정화되어야 할 1순위의 인간들이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녀들의 꿈은 빨간빛에 으스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난달 25일부터 3월 10일까지 아라아트센터에서 ‘청량리 588’ 전시가 열렸다. 이는 1990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초대전을 연 후, 조문호 작가의 두 번째 전시다. 당시 매춘에만 관심을 가지는 언론의 행태에 화가 난 작가는 다시는 이 필름을 꺼내지 말자고 다짐했다. 자극적인 소재로 소비돼 그녀들의 삶이 왜곡되는 게 싫어서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지만, 그것 또한 반드시 넘어서야 할 우리 시대의 민낯이라고 말했다.

 

 

 

필름을 영영 공개하지 않으려고 하셨다구요. 
불태워 버리려고 했어요. 안 태우길 천만다행이지. 

공개하길 잘한 거 같으세요? 
예, 언젠가는 발표되어야 할 사진이었어요. 

전시회를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셨어요? 
이번 전시는 처음 전시보다 좀 달랐다는 걸 느꼈어요. 기성세대의 편견 가득한 시선은 바꿀 수 없었지만, 오히려 젊은 친구들이 긍정적으로 보더라구요. 성노동자 모임이나 그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왔어요. 와서 성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만든 책을 주면서 자기 이야기도 하고. 그런 걸 보면서 정말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싶었어요. 아쉽긴 하지. 자기도 서먹서먹하고, 나도 서먹서먹해서 책 받고 기념사진 찍어주고 끝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았을걸. 

작가님 말씀을 들으니 세상이 좀 변한 것 같은데요. 사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는 이전보다 더 보수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막는다고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보면 우리나라처럼 폐쇄적인 나라도 없어요. 지구 상에 인간이 있는 한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제거든요. 의도적으로 막는다고 될 일도 아니고, 일하는 사람들을 범죄자처럼 취급하는 시선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날로 소재주의가 심해지고 있잖아요. ‘성노동자’라는 타이틀만 보고 외설적으로 보는 시선이 생기기도 해요. 
그 당시에도 그랬어요. 너무 소재주의 아니냐고. “맞다, 이게 소재주의라서 안되면 누가 기록 할 거냐?” 그랬죠.

누가 기록했으면 모르겠는데, 아무도 안 하잖아요. 


사진을 찍기 위해 588번지로 들어가서 함께 생활하셨잖아요.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청량리를 담으려는 이유는 뭐였어요? 
처음에 작정을 하고 가봤어요. 근데 찍을 상황이 아니더라고. 살벌해서 접근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근데 마침 동아일보 신문에 사진 공모가 났는데, 주제가 직업인이었어요. 아, 그럼 이걸로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찍기 시작했죠. 처음 들어갔을 때 건달들한테 맞기도 하고, 필름도 뺏기고, 소통하기 위해 몸까지 섞다 보니까 성병도 걸리고 그랬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1985년도에 공교롭게도 대상(동아미술상)을 받았어요. 참 난감하더라고요. 정작 그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거든요. 그 후에 100만 원 상금을 가지고 아예 588로 들어갔죠. 부산에서 빈털터리로 올라와서 <월간 사진> 편집장 할 때였는데, 요즘 잡지사는 어떤지 모르지만 말이 편집장이지 돈을 조금 줘서 살 수가 없었어요. 청량리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마누라가 부산 내려간다고 이삿짐을 싸는데 그날따라 비가 오는 거예요. 근데 옆에서 자식 놈이 한쪽에서 가기 싫어서 울고 있더라고. 그 얼굴이 잊히지 않네…. 저는 좀 사진에 미친 놈이에요. 인본주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으면서 어떻게 처자식을 버릴 수 있냐, 그런 이야기를 하지….  

그의 사진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아니,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독특하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동시대에 윤락가를 촬영했던 외국 작가들은 화려한 촬영 기법과 렌즈를 이용하여 윤락가를 왜곡시켜서 촬영했다. 구미를 당길 만한 소재고, 더 특별하게 포장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조문호 사진에는 어떠한 왜곡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사진 속 여성들은 전혀 불편한 표정 없이 일상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놀라운 건 이 모든 사진들이 50mm 표준 렌즈로 촬영됐다는 거다. 

마음을 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 같아요. 
작업을 하려면 그들하고 동화되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다가 정숙이란 애를 참 좋아하게 됐어요. 혼자 있을 때기도 했고. 그 친구가 마음을 열어줬으니까 작업이 가능했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설득도 해줬고. 

‘본인은 알아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때가 된 것 같다’라는 사진집의 소개 글귀가 이번 전시의 의미를 잘 나타낸 것 같았어요. 
출판사에서 꾸준히 책을 만들자고 했었어요. 근데 안 된다 그랬죠. 출판사에서도 20년만 지나면 초상권 문제도 없어져서 괜찮다고 하는데, 초상권은 둘째 치고 인간적인 문제잖아요. 근데 정숙이는 그때도 워낙 의식이 뚜렷한 아이여서 지금도 당당할 거예요. 오히려 그들은 당당한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괜히 불쌍하게 보고 그러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죠.     

사진에도 그런 시선이 담겼던 것 같아요.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느낌이 들지 않았거든요. 
외국 작가들은 사창가를 찍으면 왜곡시켜서 찍고 그래요. 근데 저는 50mm 표준렌즈로만 촬영을 했어요. 표준렌즈는 우리의 시선하고 가장 비슷한 렌즈거든요. 과장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지. 사진은 재미가 없겠지만.  

그분들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일부러 프린트를 한 컷에 두 장씩 했어요. 한 장은 본인들 오면 주려고. 특히 정숙이 사진은 다 뽑아놨는데 안 왔어. (웃음) 사람들이 나이 들면 티브이나 보고 있지 신문은 안 보거든요. 그래도 지금 588 가니까 다 알고 있더라고. 아저씨가 그 사람이구나, 하고.  

 

 

 

 

[사람, 사랑]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숙명과도 같은 ‘기록’은 온전히 타인을 향한다.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사진기를 품 안에서 떼어 놓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세월이 가는 것에는 무심하기 그지없다. 그런 조문호에게 정영신 작가는 삶을 기록해주는 또 하나의 매개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고 1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500여 개의 장을 기록했다. 그는 운전을 하지 못하는 부인의 수족이 되어 파김치가 되도록 촬영을 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고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며 평생 타인을 기록해온 그의 삶을 기록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같이 촬영 다니시면 외롭지 않으시겠어요. 
그렇죠. 지금 만난 마누라는 10년 됐는데, 나한테는 그 10년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우리 둘은 생각이 똑같거든. 다 빈털터리 개털이에요. 오늘만 살지, 내일은 없다 그래요. 우리는 주머니에 돈 10만 원만 생기면 촬영하러 가요. 대부분이 아내가 동조를 안 하잖아요. 근데 아내가 나랑 생각이 똑같으니까. 참 살 맛 나네. (웃음)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사동에 흑백 암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같이 동아리 활동을 했어요. 내가 계속 프로포즈를 했는데 안 먹히더라고.

저놈은 워낙 잡놈이다 그러면서. (웃음) 근데 세월이 지나니까 그게 아니란 걸 알았던 거 같아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낌없이 주는 거… 


아낌없이 주고 계세요? 
줄 게 없으니까. 허허허. 얼마 전에 내가 니한테 줄 건 없고, 세월이 지나면 사진첩 하나 멋지게 만들어줄게 그랬어요. 

사진 찍으면서 서로 작품을 평하기도 해요? 
이야기 절대 안 합니다. 자기도 장에서 30년 사진을 찍은 전문간데, 내가 감히 언급하진 못하지.

그의 주관이 누가 이야기한다고 바뀔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가끔 칭찬받으면 기분 좋으시죠? 
네, 잘 찍은 사진을 보면 서로 질투도 느껴요. (웃음)

 

 

 

사람을 통해 배운다고 하잖아요. 장터에서 사람들을 기록하면서 뭘 배우셨어요? 
사람이 제일 중요해요. 부산에서 장사할 때는 돈도 좀 벌었었거든요. 근데 어느 날 우리 가게에 사진가 최민식 씨가 왔었어요. 그분이 동아일보에서 나온 <휴먼>이란 책을 한 권 주더라고. 백 마디 말보다 사진 한 장이 주는 힘이 강하는 걸 느꼈어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일관되게, 하다못해 스마트폰으로라도 꾸준히 기록해나가는 게 중요한 거거든요. 중간에 그만해버리면 안돼요. 

천상병 시인을 추모한 사진집도 인상적이었어요. 참 소년 같으시더라구요. 
부산에서 처음 올라왔을 때 저의 유일한 탈출구가 인사동이었어요. 일 끝나고 인사동 가면 천상병 시인이 앉아 계시거든요. 그 양반은 만나면 노잣돈으로 천 원을 내라 그래요. 천 원 있어서 주면 그렇게 행복해하세요. 주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거죠. 그분 책을 내면서도 참 아쉬운 게 많았어요. 책을 만들 줄 알았으면 계산해서 찍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어. 책을 보여주면 두고두고 욕 얻어먹겠다 싶었지. (웃음) 

기록 뒤에는 사라진다는 의미가 내재돼 있어요.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는 이유가 있으세요? 
지금은 돌아가신 이경모 선생님이 있어요. 그분이 옛날에 호남신문에서 일하면서 여수, 순천사건을 다 찍었어요. 근데 그 당시만 해도 그분이 기록 사진의 소중함을 몰랐던 거예요. 원로 사진가들이 아름다운 사진에만 빠져있었거든. 모델을 찍거나 텅 빈 공원의 사진을 찍으면서 그런 게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 책을 만들기 위해 필름을 끄집어내면서 기록사진이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지금 보면 1960년~1980년대 사이의 우리 기록들이 제일 없거든요. 그 당시에 카메라는 아무나 가질 수 없었잖아요. 소중함을 몰랐기에 남겨지지 않았던 거지.

 

 

 

[다큐멘터리 사진의 힘]
1985년 연작 ‘홍등가’로 동아미술제 대상을 수상한 조문호는 다음해 ‘아시안게임 기록사진 공모전’에서 같은 상을 받았다. 이후 <월간 사진> 편집장을 역임하고, 한국 환경사진가회 회장을 지내면서 사라지는 수많은 것들을 기록했다. 그가 기록 사진을 찍는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를 알아야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미래를 알 수 있다. 단순하지만, 당연한 이 논리 속에서도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동강댐 건설 논란이 한참이던 1999년, 조문호는 정선군 귤암리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며 산골 사람들의 모습을 6년간 기록했다. 생태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도록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촬영을 계속해나갔다. 흑백 사진 속 말없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가 故 최민식 선생의 사진을 봤던 때의 감상이 저절로 떠오른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주는 힘이 강하다는 것. 이것이 기록 사진이 가진 힘이 아닐까.   
 
사진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월간 사진> 있을 때 공부를 많이 했죠. 집에서는 엄청 반대했지. 딴따라 될 거냐고. 처음에는 혼자  올라와서 책 외판원을 했어요. 뭐 됩니까. 책 갖다 주고 나면 회사가 사라지고 없어져서 돈을 띠이기도 하고요. 결국 누나가 연락해서 잡혀 내려갔지. 잡혀 내려가서 마음에도 없는 공부를 했었어요.  

<월간 사진> 편집장 생활은 어떠셨어요? 
그 당시에는 먹고 살길이 없었어요. <월간 사진> 사장을 아니까 어려우니 일 좀 달라고 했죠. 그러더니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편집장을 하라는 거예요. 막상하니까 자기가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나보고 편집장 하라는 거였지. 이 잡지가 외국 포토그래피지를 번역해서 만든 책이어서 모르는 정보를 많이 알게 됐어요. 근데 너무 베끼니까 문제지. (웃음) 

아드님도 사진을 전공하셨죠? 반대 안 하셨어요? 
전혀 반대할 이유가 없죠. 

현실도 무시 못 할 조건이잖아요. 
처음에는 웨딩샵에 들어가기도 하고, 패션사진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생활이 안 됐던 거 같아요. 헤어진 마누라하고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사니까 더 어렵지. 아직 장가도 못 갔어요. 사진과에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니까 학비를 줘야 될 거 아니에요. 편집장도 그만둘 때여서 돈이 없었거든. 그때 삼성 카메라에서 사진 사업부를 만들어서 이것저것 했었거든요. 거기에 계약직으로 들어가서 자식 졸업할 때까지 4년 동안 있었어요. 

사진 찍고 싶어서 어떻게 참으셨어요. 
책임감이지.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더라도 사진을 찍으실 거예요? 
이름 알려지는 거 그거 아무 소용도 없어요. 오히려 알려지면 더 불편해요. 결국은 이 인터뷰도 마찬가지거든. 

이 전시를 하면서 수시로 인터뷰 하자고 그래. 그래서 마누라보고 니가 좀 막아주라 그랬어요. 

<파운드 매거진>도 결국은 기록의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인터뷰는 왜 응해주신 거예요? 
책을 봤어요. 보니까 그런 여성잡지는 아니구나 그랬지. 1990년도에 내 전시를 주로 다뤘던 매체들이 스포츠지나 월간 여성지가 많았어요. 홍등가 이야기니까 선정적으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심지어는 스포츠지에서 헤드라인을 ‘창녀들을 찍는 찰칵 사진사’ 이런 식으로 뽑았어요. 그래서 결국 걔들이 전시회에 안 온 거예요. 인터뷰하면서도 누누이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려고 하는데도 그런 건 다 묻혀버리니까  안 하려고 했죠. 

사진을 찍으면서 만족했다는 순간도 오세요? 
만족이 있을 수 없지.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일까요? 
정의하기가 애매해요. 자기는 좋은데 딴사람이 볼 때 안 좋은 사진이 있고, 반대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세월이 지나봐야 아는 것 같아요. 세월이 가면 가치가 드러날 거예요. 전시회에 통인가게 회장이 부인하고 온 적이 있어요. 그분 부인도 콜렉터니까 나한테 와서 “조 선생님, 꽃 사진처럼 예쁜 것 좀 찍지. 왜 이런 거만 찍으세요”하면서 꽃 사진 찍으면 많이 팔아준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아지매 그런 소리마소. 꽃 사진은 세월이 지나면 쓰레기가 될지 모르지만, 이런 사진은 지나면 지날수록 가치가 올라갈 거예요” 그랬지. (웃음) 

저 같아도 샀을 거 같아요. (웃음) 언제쯤이 돼야 작가로서 만족하는 날이 올까요? 
나는 아직 말단이야. 나이만 먹었지 잘하는 작가들이 너무 많아요. 요즘 하도 좋은 사진들이 많아, 그런 사진보면 입이 안 다물어지더라고. 나이가 내일 모레면 70이에요. 사진은 다리 힘 없으면 못하잖아요. 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찍고 싶어요. 인사동을 왜 잊지 못하냐면 내가 거기서 많은 것들을 배웠거든요. 안타까운 건 사람들이 몰리니까 정서가 바뀐다는 거죠. 낮에는 지나가는 사람들뿐인데 저녁에 골목길 들어가 보면 옛날 사람들이 많아요. 이제는 누구든 만나면 카메라를 들어요. 

사진 찍는 걸 다 허락해주시나 봐요? 
이제 너무 오래돼서 별 신경도 안 써요.  

사진 찍어야 하는 모습을 놓치면 아까우시겠어요. 
그래서 항상 가슴에 끼고 있어요. 그제 인사동에서 친구들 만나면서 술을 한 잔 마셨어요. 15명이 모였다고, 사발에 술을 막 부어재끼는 통에 많이 취했거든요. 사람이 술에 취하면 용기가 생겨요. 청량리가서 대담하게 찍었더니 건달한테 걸린 거예요. 카메라 내놔라 그래서 지우라고 줬지. 자기가 일일이 다 지우더라고. 집에 와서 다시 복원했어. (웃음)  

 

 

 

 

 

 

[그래도 사람, 결국은 사람]
조문호의 사진은 늘 뜨거운 감자다. 오랜 끈기로 이루어낸 것이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의 사진은 담아내기 어려운 현실 속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셔터만 눌러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시대의 명암이 공존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로서의 욕심과 욕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기술적으로 과시하거나, 화면을 왜곡시키지 않고 현실 그대로를 전하는데 의미를 둔다. 

인간은 늘 아름다운 순간만을 기억하길 바란다.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놓고, 찬란한 순간만을 남겨두려는 습성이 그렇다. 이러한 습성에 오래 길들여진 탓인지 조문호의 사진은 누군가에겐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두운 민낯을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그의 화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편견을 바로 잡으려고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 깨기에는 그 벽이 너무나 두꺼웠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말한다. 그의 꾸준한 발자취는 그가 기록해온 사진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먹먹하다.  

인터뷰가 끝난 후,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작가는 가방에 놓여있던 카메라를 들었다. 몰래 등 뒤로 숨긴 후, 우리가 사진 찍는 틈을 타 셔터를 빠르게 몇 번 눌렀다. 그리고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그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전 “저쪽에 서 보이소”라고 말하며 에디터와 포토그래퍼를 한쪽에 세우곤 다리를 구부려 사진을 찍었다.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귀에서 멀어지기도 전이었다. 
“이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게예…”그가 말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그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의 사진에 담긴 사람들의 표정이 그토록 편해 보이던 것이 이해가 됐다. 부디 그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더 오랜 시간 동안 찍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본 기사를 취재한 'F.OUND'의 최인희, 정재호기자

 

 

경야 經夜 Wake, 2014, 한지에 채색, 194×130cm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라는 소설이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지 못했다. 아니 못 읽을 것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20세기에 쓰인 작품 가운데 완독하기가 가장 어려운 문학작품으로 꼽히는 이 소설은 경야(經夜)라는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제목으로 달고 있다. ‘경야’는 죽은 이를 장사지내기 위해 밤을 새우는 일을 말한다. 지난 6월에 있었던 개인전의 막바지에 작품들의 제목을 지으면서 문득 이 소설의 제목이 떠올랐다.

‘경야’라는 제목의 그림은 안국동에 있는 한 오래된 건물을 그린 것이다. 낡았기도 하거니와 전혀 관리한 흔적도 그럴 의지도 없어 보이는 건물이다. 마치 유령이 나올 것 같다. 특이한 것은 3층까지의 건축양식과 4층, 5층이 다른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중에 한 지인으로부터 이 건물의 기이한 양식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5.16 이후 대통령에서 물러난 윤보선의 집을 감시하기 위해 기존의 건물을 증축하여 올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죽은 이를 장사지 내기 위해 경야하듯이 정치적으로 죽은 이를 감시하기 위해 이 건물을 올리고 경야한 셈이다. 도시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이렇듯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죽은 자의 일이 말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 될 것이나 그럴 수 없다면 그건 전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설이 된 이야기는 역사가 된 이야기 보다 강력하게 살아남아서 현재를 떠돈다.

나는 주로 밤을 새워서 그림을 그린다. 이번 그림들은 6, 70년대를 다룬 것들인데 그렇다면 나는 그 시대를 작업실에 불러놓고 경야했던 셈이다. 회화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회화의 태도는 그래서 과거라는 죽음의 상태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이기도 하다. 어떤 회화는 죽은 것을 영원히 과거의 것으로 봉인하는가하면 어떤 회화는 죽은 것을 끊임없이 현재로 불러내기도 한다. 그건 유령의 회화이다



- 정재호(1971- ) 서울대 동양화과 및 동대학원 석사. 2014년 갤러리현대 개인전 ‘먼지의 날들’ 외 7회의 개인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작품소장. 현 세종대 회화과 교수.

[스크랩/김달진미술연구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