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인사동을 지켜 온 ‘통인가게’ 관우선생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며칠 전에도 전화를 하신 모양인데, 일할 땐 전화기를 곁에 두지 않아 못 받았다.
해 바뀌었으니, 점심식사라도 한 끼하자며 날자를 잡았다.



이젠 나이 들어 몸이 신통찮으니벗들의 술 마시자는 연락도 잘 따르지 못한.

예전에는 술 마시자는 연락만 오면 쪼르르 달려갔으나, 일 끝내기 전엔 천하일색 양귀비가 꼬셔도 못 간다.


 

한 때는 일 보다 노는 것이 먼저였다

노세노세 살아 노세! 죽고 나면 못노나니“ 를 외쳤는, 힘이 따라주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지난 30, 점심시간 맞추어 통인가게상광루에 올라가니, 한겨레기자로 정념퇴임한 임종업씨가 와 있었다.

인사 나누기가 무섭게 진로포도주 한 잔 따라 주었는데, 옛날 생각나는 술로 맛도 괜찮더라.

빈속에 짜~리리리 내려가는 술기운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역시 술과 사랑은 배부르면 갓댐이다.


 

그날은 새해 복 받아라는 뜻인지, 낙원동 복집으로 데려갔다.

복지리에 막걸리 한 잔 걸치며, 애주가인 관우선생이 말을 꺼냈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 시원한 캔 맥주 하나 들이키는 게 최고의 재미야"

다들 건강 생각하느라 아무리 좋아도 몸에 해로우면 삼가지만, 관우선생은 못 말린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생전의 즐거움이 더 중요하다는데, 술도 말술이라 아무도 못 당한다.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며, 자기 죽으면 수의는 물론 쓸데없는 장례에 낭비하지 말라고 당부해 두었단다.

장의차도 필요 없고, 그냥 잠옷 입은 채 화장하여 강화 집터 주변에 뿌리라 했다는데, 역시 관우선생 다웠다.


 

돈 많은 사람들은 대개 돈에 중독되어 인간성을 잃는 경우가 많지만, 관우선생은 다르다.

일찍부터 부친이신 인제 김정환 옹으로 부터 통인가게를 물려받아 한 평생을 예술과 문화에 천착한 때문인지,

사람사는 근본을 중시하고, 풍류와 멋을 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마당도 쓸고 가구도 닦고 배달도 했다.

열 일곱 살에 부친께서 "오늘부터 고사를 네가 지내라"고 했단다. 수시로 지내는 고사는 장사꾼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화여대' 학생들이 가게에 왔단다. 본인에게는 항아리 때 닦는 일만 시키던 부친께서 학생들은 잘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 가게에 나가지 않고 "아버님 밑에서 안 배우겠습니다. 이대생들에게는 잘 가르쳐주시면서"라고 투정을 했단다.

"항아리 때를 빼거나 고가구를 닦다 보면 서랍의 크기와 위치 등 디테일을 배울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크게 나무랐는데,

말보다 손으로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스무 세살 되던, 어느 날 부친께서 통장과 도장을 주면서 "오늘부터 네가 통인 주인이다"라고 했단다.

그러고는 "어느 장사든 망하지 않는 장사가 없다. 네가 주인이기 때문에 망하던 흥하던 모든 건 너 하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망하면 동대문시장에서 다시 리어카를 끌고 시작하라"고 했다는데, 무서운 얘기였다.

어린 자식에게 사업을 물려줬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때 부친께서 "난 내 아들을 믿는다"고 했단다.

`아버지가 날 믿어주는데 실수하면 안 되겠다. 놀면 안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고미술상에서 시작하였으나, '통인익스프레스', '통인인터내셔날','통인안전보관','파쇄컴퍼니' 등

21개 자회사를 거느린 연매출 8000억원 대의 세계적 물류회사로 키운 것이다.

골동품을 취급하다 보니 고미술품을 국내외에 안전하게 운송하는 일을 생각했고, 운송 일을 하다 보니

서류 보관 업무도 하게 됐는데, 외국계 보험회사와 신용카드사들이 다 고객이란다.

사업과 연관된 고객이 필요한 걸 생각하다 보니 사업이 확장된 것이다.

어느 정도 사업이 자리 잡자, 젊은 시절 못다 한 미술 사업에 매달렸다고 한.



 

그렇지만 그의 명함에는 대표나 회장 대신 늘 통인가게주인 직함을 고집한다.

인사동 허름한 주막에서 예술인들과 어울려 술잔 기울기를 즐기는 낭만파로 살아간다.



'통인가게'가 바라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바른 문화에 바탕이 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우리 전통 문화와 미술의 가치를 높이고 보존하며, 우리 문화를 바르게 전달 정착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에 세워졌으니, 4년만 지나면 100주년이 되는 인사동 명물이 되었다.

인사동에서 동헌필방’, ‘통문관’, ‘이문설농탕’, ‘통인화랑등이 서울문화유산에 지정되었으나,

찻집으로 바뀐 동헌필방이나 문 닫은 날이 더 많은 통문관에 비한다면, ‘통인화랑은 인사동 꽃중에 꽃인 셈이다.

통인가게70년 부터 문화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해왔다.


 

지하1층에 있는 '통인화랑'은 올해로 42년이 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화랑이다. 당시 분청작가인 윤광조씨 전시가 첫 전시였다.

통인화랑이 공예 부문이라면, 5층에 있는 통인옥션갤러리는 모던 아트 쪽으로, 2주마다 초대전을 연.

"팔리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우리가 그 작품을 사준다. 다행히 나는 선친에게 물려받아 집세를 내지 않아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사들인 작품들이 지금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통인화랑에서 전시한 현대미술 화가로는 박서보씨가 대표적이다. 그1976`묘법` 화풍의 첫 개인전을 '통인화랑'에서 열었다.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 2010년 이후 `단색화` 열풍이 불면서 지금은 호당 단가가 가장 비싼 인기 작가가 됐다.

이동엽씨도 '통인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당시 전시된 작품이 모두 팔려 전체 판을 두 번 바꾸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이동엽씨가  생애 최초로 큰 돈을 만져봤다고 자랑 했지만, 죽고니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김구림, 황성준, 강경구 등 수 많은 유명작가들이 '통인화랑'을 거쳐갔다.




그리고 '통인가게'1층은 생활도자기와 규방공예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다류와 청자, 나전칠기 제품이 즐비하다.

3층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되살림 가구를 전시하는데, 되살림 가구란 옛 선조들이 사용했던 가구를 재현하는 것이다.

오래된 한옥에서 나온 고재를 사용해 새로 만든 가구를 말한다. 4층은 백자와 17세기 후반의 앤틱가구가 전시되고 있다.

 


또 한 가지 통인가게의 자랑은 외교사절을 비롯한 각 분야 내로라하는 분들을 초청하는 사교의 장으로도 활용된다.

두 달에 한 번씩 통인오페라를 열고, 일 년에 서너 번 판소리와 국악 공연도 한다.

판소리나 오페라 공연을 정기적으로 여는 것은 고객을 위한 서비스 차원이기도 한데,

주한 미대사는 테러를 당해 얼굴에 상처를 입은 후에도 오페라 공연을 찾았을 정도로 인기다.


 

나는 음악과 미술은 한 통속이라 음악이 미술을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문화예술 수준이 그 나라 품격이고 선진화의 기준이다. 예술인과 예술 애호가들이 많은 나라가 선진국이다.

통인 판소리와 오페라가 우리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관우선생은 말한.


 

그는 거상 임상옥이 말한 상인이 아니라 상도를 지키라는 말을 항상 마음에 담고 산다.

내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널리 베풀어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작가들의 작품을 사서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통인가게' 주인은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

통인가게’ 100주년을 맞이하여 통인도자연구소가 있는 강화 고려산 자락에 1, 2200평 규모의 10개 미술관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박물관 아래 절집’, ‘미술관 속 예배당’, 통인현대도자박물관, 청자박물관, 섬유박물관 등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거대한 박물관을 만들기보다

각각의 이야기가 있는 전시공간을 조성하는 게 목적이다.

그동안 그가 수집해온 한국 고가구, 청자, 백자, 미술품 등을 일반에게 보여줄 생각으로, 건축가 김동주씨의 설계로 추진되고 있다.


 


미술관에서 불공 드릴 수 있는 불당은 첨단 영상 등으로 꾸며 평소엔 오페라 공연도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이 될 것이라 한다.

2탄은 미술관 속 예배당이다. ‘박물관 아래 절집과 같은 콘셉트다. 스님과 목사도 큐레이터처럼 근무하게 된단다.


 

관우 김완규씨는 돈을 쫓는 거상이라기보다 예술가 기질을 가졌다.

고급 요정이 아니라 간판도 없는 인사동 다리밑 선술집을 즐겨 드나들며 주당자리를 꿰차고 있다.

집에선 수시로 난을치는 서화를 즐기기도 하지만화가나 글쟁이들이 모여 막걸리 한 사발 하는 풍류를 더 즐긴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예술가들의 참새 방앗간이나 다름없는 '통인가게'에 문화예술인들은 꾸준히 드나들 것이며,

대폿집 어디에선가는 그가 즐겨 부르는 단가 이 산 저 산이 구성지게 흘러나올 것이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나


사진, / 조문호




















 

 

30여 년 동안 사라져가는 서울의 골목풍정을 기록한 김기찬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께서 10주기를 맞는 지난 8월 27일,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란 제목의 책을 펴내며,

중학동에 있는 '한일관'에서 김기찬선생을 추모하는 조촐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 자리에는 미망인 최경자여사를 비롯하여 사진가 한정식, 황규태, 이완교, 전민조, 엄상빈, 김보섭, 정영신,

윤한수씨, ‘눈빛’ 편집장 안미숙씨, 한겨레신문 임종업기자 등 생전에 가까운 지인들과 글을 쓴 필자들이 모였다.

안미숙편집장은 인사말에서 “이 책을 지궁스럽게 만들었다”며 잘 쓰지 않는 말부터 끄집어냈다.

이번에 나온 사진 에세이에 김기찬선생께서 ‘지궁스럽다’는 말을 썼는데,

그 뜻이 책을 만든 우리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낸 것 같다는 것이다.
윤한수씨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극진한데가 있다“로 찍혀 나왔다.

정말 ‘눈빛출판사’의 이규상, 안미숙 두 내외는 김기찬선생을 지극하다 못해 끔찍히도 모셔왔다.

한정식선생께서도 그의 지극한 마음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규상씨가 “지난 번 김기찬선생의 ‘골목안 풍경’사진집이 재판되었을 때,
고인의 무덤까지 사진집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김기찬 사진에세이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제본소에서 책 나오기를 안절부절 기다리던 이규상씨가, 뒤늦게 책을 안고 허겁지겁 나타났다.

내 놓은 책들은 금방 구워낸 붕어빵처럼 따끈따끈했다.

10주기에 맞추어 선보이려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그의 지극한 마음이 전해졌다.

그 마음이야 김기찬선생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오래전부터 싹터 온 인간적 정리도 한 몫 한 듯하다.

그 분에게만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진을 위해 그만큼 애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뻔히 안 팔릴 줄 알면서도 기록적 가치만 있으면 무조건 출판하는 그의 뚝심에 모두들 걱정이 대단하지만.

그의 집념은 아무도 꺾을 수 없다.

우리가 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일은 한 권의 책이라도 더 많이 사 보는 방법뿐이다.

결국 스스로를 기름지게 하는 자양분이지만...

 

 

 

책에 실린 김기찬선생의 생전 모습 / 한정식선생께서 찍었다.


 

책을 펼쳐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선생의 주옥같은 사진과 글들이 마치 당시의 상황과 애잔한 마음을 직접 들려주는 것처럼 다정하고 생생했다.
그리고 사진가 한정식선생과 전민조씨는 평소에 지켜 보았던 작가의 따뜻한 인간적 면모를 적었고,

사진가이자 건축가인 윤한수씨는 선생께서 다녔던 골목 골목을 답사하며 사진과 함께 글을 썼다.

사회학교수 김호기씨와 사진평론가 정진국씨, 역사학교수 이광수씨, 한겨레신문 임종업기자,

‘사진책도서관’대표 최종규씨 등 여러 필진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김기찬선생의 작가론과 골목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부산대 사회학 교수 윤일성씨의 ‘도시 빈곤에 대한 두가지 시선’

-최민식과 김기찬의 사진연구-란 논문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를 하찮게 여기는, 서양귀신 씬 사진가들은 꼭 읽어야 한다.

“최민식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작가이고 김기찬은 ‘따사로운 온기’의 작가이다.”
그 논문에 쓰인 이 한마디가 양대 다큐멘터리 대가의 성격을 잘 말해 준다.



 

 

 

각설하고, 이야기를 다시 추모 만찬장으로 돌린다.
추모사를 겸한 이규상씨의 인사말과 이완교선생의 추억담 등 고인을 기리는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김기찬선생을 그립게 만들었다. 그토록 골목을 사랑한 분이 어디 있었는가?

 

그리고 어려운 형편에 음식은 얼마나 푸짐하게 차렸는지, 너무 황송스러웠다.

고맙게도 누가 몰래 밥값을 냈으나  계산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짐작컨데 황규태선생께서 내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짐을 들어주고 싶은 따듯한 마음이 이심전심 전해졌다.

이차로 자리를 옮긴 맥주집에는 이규상, 안미숙 내외와 엄상빈, 김보섭, 정영신, 임종업씨가

자리를 함께 했는데, 한 잔 마신김에 좀 과음했다.

뒤늦게 '한겨레신문'의 김봉규씨가 온 것으로 기억되나 카메라에 그의 흔적이 담겨있지 않았다. 너무 취했나?
아무튼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는 ‘눈빛출판사’ 이규상씨의 기개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 글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