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동에서 ‘뮤아트’를 운영하는 김상현씨가 청담동에 ‘Salon de Mu/art 청담’을 열었다.

지난 26일 오후 7시 무렵 청담동 '뮤아트'를 찾아갔는데,

거리두기로 많은 분을 초청할 수 없는 사정이라 가면서도 마음은 편치않았다.

 

지하철 분당선 압구정 로데오역에 내려 4번 출구 부근의 '옴므빌딩'6층이었다.

 

들어서니, 흥겨운 재즈음악이 살롱을 흥청였다.

띄엄띄엄 앉은 좌석에 반가운 분도 더러 보였다,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김명성, 하양수, 이상원씨 등 반가운 분을 여럿 만났다.

 

메인공간을 장식한 신사동 '뮤아트' 실내사진에서 공통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난, 뮤지션 김상현씨를 볼 때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집념과 열정에 탄복한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삶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니, 음악 자체가 그에게 삶의 원천이다.

재능 있는 가수를 발굴하여 가르치고 아껴주는 후배사랑 또한 가슴 뭉클하다.

 

수십 년 동안 ‘뮤아트’를 끌어 온 아집과 자존심도 대단하지만,

오뚜기 처럼 버텨 온 삶의 여정에 절로 고개 숙여진다.

 

얼마 전에는 암 투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적도 있었으나,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그는 다시 일어섰다.

 

주변 지인의 전시나 문화행사에는 어김없이 무거운 장비를 챙겨들고

축하 연주를 기꺼이 해 주는 그의 예술 사랑이 암담한 현실에 한 줄기 빛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날 연주회는 하양수씨가 부른 ‘달링’이 예전과 달리 마음 속 깊이 다가왔다.

그리고 일본 첼리스트 카마코양의 ‘아베마리아’ 연주에 가슴이 시리더라.

그토록 애절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첼로 아래 원피스에는 수많은 벚꽃이 수 놓여 있었다.

여지 것 반일정서에 일본을 싫어했으나, 예술의 힘은 모든 걸 녹일 수 있었다.

 

음악에 취하고 술에 취해 신사동 ‘뮤아트’로 자리를 옮겼으나, 도착하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눈을 떠보니, 새벽 두시였다.

 

옆에는 김상현씨를 비롯하여 김명성, 하양수, 카마코양 등 여러 명이 있었다.

김명성씨와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화두 하나가 있었다.

 

바로 “돈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정신을 망치는 돈이지만, 멀리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풀리지 않는 숙제다.

 

사진, 글 / 조문호

 




'뮤 아트' 봄 페스티벌이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열렸다.
매년 봄가을 두 차례 페스티벌을 벌이지만, 가 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자유로운 분위기는 좋지만, 늙은이가 끼일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다.

회원제라 회비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매번 술만 축내고 왔으니...






지난 번 인사동 ‘유목민’ 모임에서 ‘뮤아트’의 김상현씨를 만났다.
갑작스런 병마로 죽을 고비까지 넘겼지만, 건강을 되찾아 반갑기 그지없었다.
14일부터 ‘뮤아트’ 봄 페스티벌을 연다는 초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뮤아트’가 궁금해 조준영시인과 가기로 했으나 약속한 날을 잘 못 기억하고 있었다.
14일 오후 10시로 알고 정영신씨와 들렸는데, 조준영씨는 그 다음 날 약속했단다.





'뮤아트'에 들어서니, 어두컴컴한 쿠바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고, 다들 술보다 음악에 취해 있었다.
이름 모를 재즈 가수의 볼륨 있는 성량이 '뮤아트'를 압도했다.





빼곡하게 들어찬 실내장식은 ‘뮤아트’의 역사며 김상현의 기억 창고였다.

'뮤아트'는 바뀐 게 없었지만 뮤지션은 대부분 바뀌었더라.
아는 분이라고는 김상현씨를 돕는 친구 이한성씨와 가수 장군과 하양수씨 뿐이었다.




 


하기야! 몇 년이 지났는데, 유랑 음악인들이 한 자리에 머물 수가 있겠나.

Jay, Dee&Sean, 그레이스 등 새로운 뮤지션들의 연주를 들어야 했다.






‘뮤아트’는 1992년 이태원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14년 동안 운영하다 소송에 휘말려 지금의 신사동으로 옮겼다.
그 당시 수중에 남은 돈은 140만원밖에 없었지만, 후배들의 도움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어느 누군들 우여곡절이 없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 역시 산전수전 다 겪었다.
긴 세월동안 어떻게 '뮤아트'를 지키며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죽음을 생각한 적도 있다지만, 음악으로 위로 받았으니 음악이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김상현에게 음악은 삶의 전부다.
애잔한 우수에 젖은 듯 토해내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 슬프다.
목소리에서 낙엽 냄새가 풍기는 것은 그가 가을을 좋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인사동 사람들 전시회마다 후배와 함께 공연 해주는 것도 음악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서다.

음악을 통해 예술의 에너지를 나누는 것이다.






몇 달 전 중병에 걸려 고통 받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 밀폐된 공간이 그에게 병을 안겨주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으나, 그건 아니었다.
연주하는 그의 몸에서 에너지가 철철 흘러 넘쳤다. 



 



피아노는 물방울이 튀었고, 드럼은 소나기가 몰아쳤다.
애잔하게 가라앉은 기타 소리는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다며 속삭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코디언을 좋아해 아코디온을 배웠다는 그다.
아버지 무덤 앞에서 아코디온을 연주할 때면, 아버지가 지켜보는 모습을 느낀다고도 했다.
아버지도 아들도 그의 자식도 음악에 하나가 된다.






‘뮤아트’는 음악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축제는 새벽까지 이어지지만, 지하철이 끊어지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 날 수 밖에 없었다.

폭풍같은 열정을 뒤로하며...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 사진



정영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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