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을 찾아서 ⑨] 이수철론 -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레퀴엠


글 / 이광수 (사진비평가)

사진가 이수철은 일본에서 사진을 배웠다. 일본에서 사진을 배울 때 그는 '순수' 사진이라는 모순으로 가득한 어휘의 사진 범주를 전공했다. 왜 굳이 '순수'라는 말을 쓸까? 그 상대적 개념은 불순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 '순수'란 사회적 메시지나 시대 정신을 담지 않는 예술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시대의 불온함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지사적인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 '순수' 사진을 일본에서 배워 귀국한 그가 처음 작품을 발표한 것이 1998년의 일이고, 그가 잡은 주제는 기억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거시사의 종말을 공공연히 말하던 것이 무르익을 때, 개인과 복합과 감성이 인간 세계의 중심 화두로 떠오를 때 그 때의 일이다. 사진가는 이후 꾸준히 사진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사진을 그 자체의 본질을 갖지 않는 한낱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도구론적 입장으로 생각한다면, 문제는 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사진의 존재론적 범주의 최후의 조건인 뭔가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을 찍는 것이 사진이다, 라는 전제조차 허물 수 있다.

카메라로 대상을 찍어 필름에 담고 그것을 인화하는 것이 보통의 프로세스라면, 카메라와 필름이 없이 바로 인화로 들어가 버리는 것도 사진 프로세스 중의 하나가 된 것이 1924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예 뭔가를 찍지 않아도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그 창조된 이미지로 뭔가 작가만의 방식으로 말 하고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예술의 한 방식 아니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 질문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건 매우 궁색하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사진이냐, 정도이지 않을까. 그렇다. 그것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는다. 그것이 포토그라피(photography)면 어떻고, 그것이 이미지그라프(imagegraph)면 어떻고, 그것이 디지그라프(digigraph)면 어떠냐? 사진가 이수철에게 카메라는 현상을 포착하는 메커니즘의 하나일 뿐이다.

1. 디지그라프 : 저작권도 없고 장르 구분도 없는 세계



Hello Thomos-4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The Space for Renovation-1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The Space for Renovation-3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The Space for Renovation-4 archival pigment print (2007)ⓒ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이 2008년에 연 <환상의 에피파니>전은 사진에 관한 몇 가지 통념을 깬다. 우선 남의 것을 훔쳐오는 것에 대해 당당함을 부르짖는 것이다. 이수철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가 토마스 루프의 사진을 스캔해서 베껴 와 자신의 작품에서 다른 의도로 사용해버렸다. <환상의 에피파니>다.

그가 토마스 루프의 별을 가져온 이유는 비단 그가 말 한 바,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의 어렸을 적 추억이 담긴 그 별 헤는 밤, 그 꿈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작가로서 사진의 존재 담론에 대한 도발을 시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토마스 루프의 별을 베껴 왔지만, 사실은 토마스 루프 또한 어느 천문대 대원이 우주 관측용 망원 카메라로 찍은 천문 자료 사진을 가져와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있는 대상을 그대로 찍어 놓은 것을 이리 사용하고 저리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자연에 존재하는 돌과 나무와 흙을 이리 배치하고 저리 배치해서 작품을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저작권에 대한 강력한 도발이다. 그 안에서 조작이나 왜곡은 기존의 근대적 개념을 넘은 하나의 창조적 예술 행위가 된다.

사진가 이수철이 토마스 루프의 사진을 무단으로 가져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함으로써 던진 도발은 단지 저작권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사진의 성격상 또 다른 맥락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할 점이 있다.

전유다. 전유는 존재의 성격이 그것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본질도 없지만, 실존이라는 개념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의 별 사진은 문자 그대로 다큐멘트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사물에 대한 본인의 시각이나 재현의 의사를 전혀 갖지 않는 것으로 마치 물이나 거울이 하듯 사물의 반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무미건조한 과학의 산물이다.

그렇지만 그 이미지가 다른 위치에 전유되면,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원래 가졌던 성격은 무시하고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 사용하는 사람의 뜻대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때 원 저자의 허가는 필요 없다. 원래는 자료 사진이었던 것이 토마스 루프에 의해 흑과 백과 점들로 구성된 조형적 예술 사진으로 갔다. 그것을 이수철이 사랑하는 딸을 위한 아름다운 밤하늘 풍경 사진으로 만들어버렸다. 장르의 경계를 넘는 포토그라피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기억의 풍경-red archival pigment print (2006)ⓒ 이수철

기억의 풍경 industrial complex-4 archival pigment print (2006)ⓒ 이수철

기억의 풍경 industrial complex-3 archival pigment print (2006)ⓒ 이수철


<환상의 에피파니>나 그보다 먼저 발표되었던 <기억의 풍경>은 모두 복합 생성물이다.  <환상의 에피파니>의 경우, 각각의 이미지에서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미지 즉 다리나 들판 등은 모두 사진가가 직접 찍은 것이다. 카메라에 의한 전형적인 생산 방식에 의한 것이다. 거기에 독일 사진가 토마스 루프의 별을 무단으로 가져와 합성시켰다.

그런데 합성은 카메라나 필름 등 전통적 사진의 메커니즘을 통해 한 것이 아니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했다.  카메라로 시작했지만 컴퓨터로 완성한 것이다. 이런 생산물을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카메라가 종이 되고 컴퓨터가 주가 되어 만들어낸 그 이미지를 포토그라피 혹은 사진이라 부르지 않을 방도는 없다.

후보정이 종이 아닌 주가 된 것은 <기억의 풍경>에서 더 잘 드러난다. 대상을 정하고 그것을 촬영한 것이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하는 기록적 성격이 강한 사진이라면 그것에 후보정을 통해 색을 입히거나 톤을 바꿔 만들어내는 것은 예술적 성격이 강한 사진이다. 후보정이 보정이 아니고, 본 공정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진가 이수철에게 사진이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선 작업보다 후 작업이 더 우선이 된다면, 있는 대상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포토그라피이지만, 그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사진 후(後)적 존재 포스트 포토그라피라고나 할 수 있을까?

상황이 이렇더라도 사진가 이수철이 갖는 포스트 포토그라피에 대한 철학은 분명하다.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이 비록 컴퓨터라는 기술일지라도, 자신의 그 사진이 기술의 현란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면 안 된다. 기술이란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사용 목적은 개인의 감성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진은 말하기 방식의 차원에서 볼 때 지금까지 사진이 취해온 기존의 방식과 동일하다. 사실 혹은 리얼리티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닌, 이미지가 주는 어떤 느낌을 주려 하는 전통적 예술 방식 그대로다.

2. 전유 : 개인 감성을 위한 미시 이미지의 세계


<화몽중경> Over the Dream - 1ⓒ 이수철

<화몽중경> The Last Lady-1ⓒ 이수철

<화몽중경> The Last Lady-2ⓒ 이수철

<화몽중경> 신데렐라 나를 찾아 나서다-1ⓒ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의 <화몽중경(畵夢中景)>은 문자 그대로 꿈속 풍경을 그린 것이다. 물론 그린 것도 아니고 꿈속 풍경도 아니다. 현실을 카메라로 찍되 꿈속 풍경처럼 찍은 것이다. 컴퓨터로 작업한 것이 아닌 필름을 사용한 스트레이트 사진이다.

사진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 눈에는 마치 미니어처를 찍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을 미리 세팅해놓고 4"x5" 카메라로 초점을 조절해 몽환적인 분위기가 나도록 촬영한 사진들이다. 역시 기억 혹은 꿈에 관한 이야기다.

<환상의 에피파니>가 사진가가 속한 그 세대가 보았던 과거를 딸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기억 즉 집단의 기억으로서의 꿈이었다면, <화몽중경>은 사진가라는 한 개인이 경험했던 혹은 경험한 것으로 여기는 지극히 사적인 꿈이다. 내러티브가 있는 사진임에는 분명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그 내러티브를 정하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정해진 이야기에서 특정 메시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기억이 잘 나지 않은 세계로 돌아가 마치 물고기가 유영하듯 자유롭게 해석하고 느끼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화몽중경>은 작가가 2000년 중반 독일의 유형학 사진에 푹 빠졌을 때 그로부터 빠져 나오면서 새롭게 시도한 작품이다. 전작에서 디지털 작업을 통해 포스트 포토그라피를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다시 필름으로 돌아가되, 전통적인 스타일이 아닌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보고자 하는 작업이다. 식상함이라는 것은 싫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은 아무리 메시지가 좋아도 따라가기 싫다.

<환상의 에피파니>가 특별한 내러티브가 없는 유형학적 사진으로 토마스 루프의 사진들을 닮았다면 <화몽중경>은 일정한 내러티브를 미리 설정하고 장면을 세팅해서 찍었다는 차원에서 그가 좋아하는 또 다른 사진가 샌디 스코글런드의 사진들을 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화몽중경>이 스코글런드가 보여주는 일련의 사진과 같이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코글런드는 환경이나 여성 등 사회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만 이수철은 그런 목소리를 내려 하지 않는다.

스코글런드가 사회를 말할 때 이수철은 개인을 말하고, 스코글런드가 이성을 말 할 때 그는 감성을 말한다. 다만 그는 스코글런드가 견지하는 실체보다는 이미지, 실존의 세계보다는 가상의 세계를 더 소중하게 여길 뿐이다.

3. 크로스오버 : 넘나들기가 일어나는 무경계의 세계

인천여자 #02ⓒ 이수철

인천여자 #03ⓒ 이수철

인천여자 #05ⓒ 이수철

인천여자 #12ⓒ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은 한 때 상업 사진을 했다. 그러다가 컴퓨터로 하는 디지털 예술 사진으로 바꿨다. 그러다가 다시 필름 작업을 했다. 그렇게 오는 동안 그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메시지로 담은 작업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작업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하나 있다.  <인천 여자>다. 이 작업은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이미지보다는 사회적 의미에 방점을 찍은 사진이다.  <인천 여자>는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인 윤사비나를 모델로 해서 제작한 작업이다. 인천 여자라 말하지만, 인천의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상업적 틀에 맞추어 외형과 내면까지도 지배당하는 현실' 속의 여성을 말하는 것이다.

윤사비나씨는 전신탈모를 동반한 자가면역결핍이라는 희소병을 20대 초반부터 앓아오면서, 희소병, 그에 대한 사회의 편견, 연극에 대한 애착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여성스러움'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여성 혐오와 맞서 싸워 온 사람이다. 인천문화재단과 선광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해 온 이 작업은 먹고 살아야 하는 사진가로서 피할 수 없는 프로젝트 수주를 통해 제작한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러하다고 해서 주문자의 뜻을 받들어 작업한 영혼 없는 제품 생산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해 온 이미지를 위한 감성의 환상곡으로서의 사진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2008년에 발표한 <Architectural Photography>는 미완의 작품이다.

세콤이 된 건물ⓒ 이수철

피닉스모텔ⓒ 이수철

정체불명ⓒ 이수철



엄밀하게 말하면 완성했다고 해서 발표하였는데, 전시를 하는 동안 그 완성도에 대해 불만을 가져 스스로 미완을 선언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해 온 동안 줄기차게 이어 온 잊혀 져 간 것들에 대한 기억에 대한 작품이다.

작업의 대상은 이런 저런 여러 사연으로 건축물로서의 생명을 끝내고 죽어버린 그러나 여전히 눈앞에 존재하는 우리가 사는 집이다. 사람이 사는 집, 사람이 살기 위해 지은 집 그러나 버림받아 폐기 되어버린 그 집은 흉물스럽다. 버려지고 잊혀 졌으니 흉물스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숨을 거두고 생명을 다 한 채 몸뚱아리만 살아 있는 사람들 눈앞에 덩그렇게 남겨 둔 형상과 같다.

사진가는 우선 그 버림받은 집들을 반듯하게 위치시킨다. 아니, 조금 더 나아가 프레임의 정 중앙에 폼 나게 위치시킨다. 그리고 잡아 낸 그 이미지 위에 화사하게 색칠을 해줬다. 사라져 가 버렸던 것들에 대한 예우다. 타키타 요지로 감독이 만든 일본 영화 <굿바이 (Departure)>에서 장의사 주인공이 죽은 사람을 곱게,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예쁘게 화장을 해주는 장면이 떠오르는 일이다.

사진가가 택한 대상은 한 때나마 하나같이 웅장하고 세련되고 멋졌던 건물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보여주고 함이 아니고 말하고자 함이다. 사진가 이수철은 그 형식이 어떻든 간에, 그 경계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괘념치 않는다. 예술가는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다. 요란하지 않는 경계 넘나들기다.

상상외 風景-1ⓒ 이수철



사진가 이수철이 해 온 경계 넘나들기의 대표작은 화가 조미영과 협업한 <상상 外(외) 풍경>이다. 사진가가 찍은 이미지에 화가가 깃털을 그려 넣어 사진과 회화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존재하지 않은 풍경을 상상으로 만든 콜라보 작업이다.

사진가 이수철은 물질의 세계에서 얻은 구체적 풍경을 이미지로 만들어냈고, 화가는 그 위에 가벼운, 그래서 언제 어디서고 간에 그 존재를 무시하고, 망각해 버리는 것을 상징하는 깃털 하나를 그려 넣는다. 이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는 모든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해 부르는 레퀴엠이다.

글이든 사진이든 그것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사실 그대로'라고 하는 개념은 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세계는 그 자체가 불립문자일 수 있다. 세계는 이미지로 구성되고 이미지로 소통된다. 그것이 비현실이 지배하는 현실의 세계다. 그 안에서 사진은 결국 왜곡이고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조금 더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왜곡하고 '거짓말'로 말하게 한다는 것이 하등에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은가. 사진가 이수철이 사진으로 말하고자 하는 사진의 방식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때로는 합성을 통해, 때로는 덧칠을 통해, 때로는 타 매체와의 협업을 통해 그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레퀴엠(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 음악)을 바친다. 그가 노래하는 존재에 대한 노래는 그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포스트 모던 세계의 전유 안에서 불러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궁무진한 이미지의 세계를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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