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광장을 뒤덮을 때마다 앞장서서 축제의 마당으로 이끄는 예술가들이 있다.

바로 민중미술가들이 주축이 된 ‘광화문미술행동’이다.



‘시민나팔부대’가 나팔과 풍물로 신명을 끌어 낸다면,
‘광화문미술행동’은 예술 행위로 집회의 격을 높이며 시민 행동에 자긍심을 심어준다.



시민들에게 찍어 주는 판화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역사적 사료로 자리 할 것이고,

예술가들의 다양한 퍼포먼스는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며 용기와 힘을 불어넣는다.




3년 전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서 시작된 ‘광화문미술행동’은 참가 작가가 정해진 것도 아니다.

정치적 논쟁만 터지면 자발적으로 형성되었다 사태가 마무리되면 흩어진다.

회비도 회칙도 없는 자생조직이다.



핵심적인 일은 판화가 김준권씨와 미술평론가 김진하씨가 맡지만.
80년대 민주항쟁 시절부터 온 몸으로 싸워 온 민중미술가들이 주축이 되었다.




1980년대 미술을 통해 현실에 저항해 온 노력은 우리나라 민주화와 괘를 같이한다.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민중미술은 역동적이라 온 몸에 피가 솟구친다.
삶의 현실과 직결된 그들의 작품들은 기존의 심미적 작품과는 격이 다르다.




지난 12일 열린 제9차 ‘검찰개혁’ 촛불집회는 평소보다 빨리 나갔다.
광화문과는 달리 장소가 협소하여 군중 속에 파묻히면 찿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전1시 무렵 서초역에 도착하여 2번 출구로 나가는데, 뜻 밖에 반가운 분을 만났다.
우리들의 영원한 우상 방동규선생께서 사모님과 계셨는데, 첫 일진이 좋았다.

며칠 전 과도한 중량의 역도를 하다 근육이 파열되었다는 걱정스러운 말씀도 하셨다.


정영신 사진


방동규선생은 팔순을 넘긴 연세에도 아직까지 일하러 다니며 근육운동까지 하는 강골이시다.

백기환, 황석영씨와 함께 우리나라 삼대구라로 꼽히는 협객이다.
존경하는 선생을 촛불현장에서 만났는데, 어찌 인증 샷이 없을소냐.




서초 사거리 중앙에는 ‘광화문미술행동’ 팀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붓글 퍼포먼스를 벌일 대형 현수막 외에도 많은 깃발과 그림 현수막까지 준비해 두었다.

김준권, 김진하, 김 구, 김 억, 이광군, 송용민, 김영배씨가 이른 시간 부터 나와 있었고,

뒤이어 정복수, 김진열, 이흥덕, 김건희씨 등 많은 분들이 나타났다.



여지것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류연복씨는 진천에서 열린 개인전 때문에 나오지 못했지만,

장경호씨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살기에 다들 아파 누웠을까 걱정하더라.



참여 작가들 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검찰개혁을 향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최후통첩’, ‘악질검사 대청소’, ‘다음은 없다’ 등 다양한 글귀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독수리들이 처절하게 싸우는 경주 정비파씨의 판화를 바탕으로

김 구, 김진하, 송용민씨가 덧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림막 뒤편에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아니라 김진열 대학총장이 판화를 찍어주었다.

그 판화 작품들은 역사적 무게까지 더하니,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판화를 얻으려는 시민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이 날 사진가들도 여럿 참여하였다.

정영신, 하형우, 양시영, 박윤호, 권 홍, 성유나, 임헌수, 김대희씨가 차례대로 나왔고,

뒤늦게는 전민조, 박옥수, 김문호씨도 나왔다. 다들 서초대첩의 종군기자들이다.



몇 시간을 돌아다니다 보니 허기가 몰려왔다.

‘광화문미술행동’에서 준비한 김밥 한 줄 얻어 먹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구씨 따라 갔더니, 다들 생맥주 집으로 들어갔다.

통풍에는 맥주가 쥐약이라 콜라나 마셨는데, 마침 김문호씨 연락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가 김문호, 박윤호, 정영신, 하형우씨와 어울려 지난 주 식사했던 식당으로 들어갔다.

간만에 막걸리를 마시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는데, 밥 값을 하형우씨가 계산해 버렸다.



덕분에 다른 분이 사는 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나니, 촛불광장은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들 현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총알이 떨어져버렸다.

보조 건전지가 깡통이라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무기 없는 병사는 시체나 마찬가지다.

다음에는 기관총을 가져 올 각오였지만, 이 날이 최후통첩 보내는 마지막 집회가 아니던가?



대전에서 온 이석필씨를 만나기도 했으나, 함께한 동지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눈도 어두운데다 귀 까지 어두워 핸드폰도 무용지물이었다.

인파를 헤집고 다니며 얼마나 헤맸는지, 진이 빠져 버렸다.

자리잡고 앉아 검찰개혁이나 외쳤으면 좋으련만, 돌아다니는 찍사의 팔자 아닌 습관을 어쩌랴!



최후통첩 날린 검찰개혁은 이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후통첩도 종료가 아니라 잠정중단으로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납득할 만큼의 검찰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검찰이 저항하면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언론개혁과 정치개혁에 이르기 까지 적폐청산의 길은 아직 멀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이 올 때까지 ‘광화문미술행동’은 함께 한다.


사진, 글 / 조문호













































































































한국현대사 6 - 달, 불을 삼키다.

송용민展 / SONGYONGMIN / 宋容旻 / painting
2019_0306 ▶︎ 2019_0319




송용민_김종태_합판에 아크릴채색_84×122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1116m | 송용민展으로 갑니다.


송용민 블로그_blog.naver.com/kollwitz91

초대일시 / 2019_0306_수요일_05:00pm

관람료 / 8,000원

관람시간 / 01:00p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김종태(1958. 6. 7 ~ 1980. 6. 9) ●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김종태 동지는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공사판과 공장을 떠돌며, 노동자의 처참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한 동지는 77년부터 교회 청년들과 함께 전태일 추모회를 하는 등 동일방직사건에 지원세력이 되었으며,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79년 9월 12일 YH 사건 이후 "한울 야간학교" 교사들이 경찰서로 연행되고, 학생들이 강제 해산되고, 그렇게 기다리던 민주주의가 광주학살로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분연히 일어나 신촌 이대 앞 사거리에서 "우리는 어떠한 책동도 용납할 수 없음을 경고 한다",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면서 분신하여 광주영령들의 민주화 투쟁에 온몸으로 함께 했다.



송용민_김시자_합판에 아크릴채색_84×122cm_2019


김시자(1961. 10. 8 ~ 1996. 1. 13) ● 노동조합의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일 해나가면서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순리적으로 하나씩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갔던 김시자 동지. 그런 동지에게 최태일 어용노동조합 집행부는 1월 7일 '규약위반'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사유를 내걸고 징계위원회 개최와 출석을 통보하였다. 1월12일 오후 2시경, 경주 보문단지 내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전력노동조합 54차 중앙위원회는 첫번째 안건으로 김시자 동지와 오경호 동지(광주전력지부 위원장) 2인에 대한 징계를 결의할 예정이었다. 최태일 집행부의 짜여 진 각본대로 징계가 이루어지기 직전, 김시자 동지는 변론을 통해 "징계는 부당하다", "이런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 "이런 상태로 그냥 있으면 노동조합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못 한다"는 말을 남긴 채 아무도 모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동지는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채 불덩어리가 되어 회의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고, 운명하였다.



송용민_이문철_합판에 아크릴채색_84×122cm_2019


이문철(1954 ~ 1988. 11. 6) ● 88년 6월 27일 대원여객의 노동자들이 연장근로수당 지급을 요구하며 운행을 거부하자, 회사 측은 승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동지를 부당 해고시켰다. 이에 동지는 부당 해고에 항의하며 삭발을 결의하고 연장근로수당 지급과 사장면담을 요구하던 중, 부당한 해고조치에 격분하여 신나를 온몸에 붓고 분신을 감행하였다. 병원에서도 "업주들이 기사들을 속여먹고 노예취급을 한다. 돈 몇 푼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대접을 받고 싶다. 노동자를 하인이나 종 취급하는 사용자들의 정신상태를 뜯어 고쳐야 한다. 주종관계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부인과 세 명의 자식들을 남기고 산화하여 갔다.



송용민_이영일_합판에 아크릴채색_84×122cm_2019


이영일(1962 ~ 1990. 5. 3) ● 평소 내성적이었던 이영일 동지는 89년 11월 조사통계부 차장과 90년 2월 노동조합 대의원이 되면서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강한 애착을 갖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주)통일 측과 경찰은 노동조합에 대한 끊임없는 탄압을 해왔는데 노모에게 노동운동을 그만 하게 하라는 협박을 통해 고통을 주었다. 90년 5월 3일 동지는 식당 옥상에서 악랄한 노동조합 탄압에 분노, 항의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내용과 어머님에 대한 따뜻한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는 내용과 통일이 되면 아버님 고향에 가보고 싶었는데, 어머님 뼈라도 고향에 묻어 드리고 싶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였다. 이후 이날 10시 50분경 창원병원에서 운명하였다.



송용민_박영진_합판에 혼합재료_84×122cm_2019


박영진(1960 ~ 1986. 3. 17) ● 동일제강 민주노동조합 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해낸 동지는 신흥정밀에 입사하여 부당노동행위 및 임금착취에 대한 항의 중해고 철회 투쟁을 벌이다가 공권력이 투입되자 경찰과 회사 측의 폭압에 맞서 "근로기준법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하였다. 동지는 병원에서도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 1천만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경찰은 동지의 시신을 탈취하고 유가족을 협박, 화장을 감행하여 한줌의 재로 변해 인근 야산에 유해를 뿌렸으나 그 직후 동료들이 수거하여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하였다.



송용민_성완희_합판에 혼합재료_84×122cm_2019


성완희(1959. 6. 24 ~ 1988. 7. 8) ● 성완희 동지는 1987년 8월, 강원탄광에서 파업을 주동한 후 회사 측의 계속적인 탄압에 맞서 싸워왔으며 87년 12월과 88년 2월 두 차례나 부당해고를 당했으나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 복직을 쟁취한 바 있었다. 그러나 동료가 자신의 복직투쟁을 도와준 혐의로 해고되자 자신의 일보다 더 열심히 복직투쟁을 전개하였고, 결국 노동부와 지방 노동위원회에서도 복직판정과 복직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강원탄광 측이 이를 거부하자 동지는 동료들과 함께 복직을 위한 단식투쟁에 참여하였다. 단식 8일째인 6월 29일 동지는 동료 5명과 함께 휘발유 1통, 석유 1통을 들고 노동조합사무실에 들어가 사무실을 폐쇄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곧이어 구사대원들이 사무실로 진입을 시도하자 동지는 "들어오기만 하면 분신 하겠다"고 말하였으나 구사대원은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하였고 동지는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을 그었다. 결국 죽음과 싸우다 7월8일 아침 7시20분 끝내 운명하였다. ■ 송용민



Vol.20190306c | 송용민展 / SONGYONGMIN / 宋容旻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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