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총서 발간

덕수궁 정비 공사 풍경부터 ‘105인 사건’ 등 근대사 사료

서울역사박물관이 26일 발간한 학술총서 ‘100년 전 선교사의 서울살이에 담겨 있는 1890년 이전 중구 정동 일대(왼쪽 사진)와 1923년 이전 광화문과 월대(오른쪽 위), 1912년 105인 사건공판에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가운데), 1928년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 교수진과 간호사들 모습(오른쪽 아래).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890년대 전후는 대한제국 수립과 맞물려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도시를 개조하면서 서울의 모습이 급변하던 시기다. 1885년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한 초기 선교사들은 당시 변화의 목격자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이 26일 발간한 학술총서 ‘100년 전 선교사의 서울살이’에는 조선 개항 후 가장 오래 거주한 외국인 집단의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의 일상과 역사의 현장이 담겨 있다. 박물관 측이 확보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마펫 한국 컬렉션’ 4460건 가운데 163건을 추린 것이다. 미국 북장로회 초기, 한국 선교를 위해 서울에 왔던 사무엘 A 마펫 선교사와 가족·동료들이 수집한 자료다.

 

사진 가운데는 선교사들이 초기에 정착한 현재 중구 정동 지역 풍경이 많다. 러시아공사관 전망탑에서 바라본 1892년 서울 전경은 정동~광화문~종로대로~동대문 일대를 파노라마로 조망한다. 원수부(元帥府)가 보이는 경운궁(덕수궁) 풍경이나 경운궁 남쪽(인화문 방향) 담장 공사 모습 등은 1896년 아관파천 후 고종이 궁궐을 정비하고 개혁을 도모하려는 상황을 보여준다. 당시 종로 거리에는 도로 폭 개정 명령(내부령)에 따라 철거될 임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지금의 소공동 지역인 남별궁 일대 1894년 전후 모습이나 조선호텔에서 본 황궁우(원구단 부속 건물)는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1897년 건립된 원구단이 일제강점기 호텔 신축으로 다시 헐리는 과정을 담고 있다. 성벽 철거 전 흥인지문, 궁장 훼철 전 경복궁 동십자각, 월대가 보이는 광화문 사진 등에서는 도시 개조 사업 전 서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궁궐 앞에는 가마가 서 있고, 인력거가 지금의 홍은동 옥천암의 보도각 백불(마애보살좌상)로 향하는 일상 사진도 남아 있다. 한강 부근 용산에서 운행 중인 인차(人車) 철도, 청국 상인의 모습도 이색적이다.

 

한국 근대사를 담은 사료도 주목된다. 1911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로 이른바 ‘105인 사건’을 날조해 기독교계 반일 세력을 제거하려던 1912년 공판 사진이다. 당시 3개월 동안 지속된 1심 과정에서 용수를 쓰고 결박돼 끌려가는 사람들이 사진에 찍혔다. 배후세력으로 지목돼 감시당했던 선교사들이 종로 경성지방법원 공판 참관을 위해 모여 뉴욕 헤럴드 특파원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선교사들이나 선교사 2세들의 사진도 소개됐다. 가부장 사회였던 조선에서 여성 대상 활동은 선교의 매우 중요한 목표였다. 제중원 간호사 안나 제이콥슨,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의 주축이었던 에스더 쉴즈 등의 의료·간호 선교사들과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의 메리 헤이든, 수잔 도티, 캐서린 웜볼드 등 교육 선교사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신마리아, 김마리아, 김필례 등 근대 한국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했다.

 

김용석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선교사들에게 서울은 믿음을 전하는 현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며 “당시 그들이 바라보았던 풍경과 삶을 통해 도시 서울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느낄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지난 달 ‘골목 안 풍경’을 기록한 다큐사진가 김기찬 선생의 유품 일체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다시 한 번 선생의 따뜻한 인간애를 떠올리며 반가워했다.

 

사진과 필름, 카메라 등 십만 여점이 박물관에 소장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한 편으로 가난한 후배 사진가들의 한 가닥 희망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저런 소중한 작업도 아무런 보상 없이 기증 형식으로 소장하는데,

어찌 생계를 팽개쳐가며 하던 작업에 몰두하고 싶겠는가?

 

역사박물관의 사진 수집은 가난한 사진가들이 국가에서 보상 받을 마지막 바늘구멍 같은 곳인데,

기증하는 사례가 늘어나 그 좁은 구멍조차 막힐까 걱정하는 것이다.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돈과 거리가 먼 사진이라지만, 문둥이 코 구멍에 마늘 빼 먹는 치사한 언론사도 많다.

개인적 유명세를 노려 언론사에 원고료 없이 주는 버릇이 고착화되어

이제는 대형 언론사마저 공짜로 얻어 쓰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작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 대표 공영방송인 케이비에스에서 쪽방 촌을 취재하며

내가 찍어둔 빈민들의 스틸사진을 쓰고 싶다고 부탁해 왔다.

어떤 사진들이 필요한지 몰라 적합한 사진 100여장을 골라 보내며

사용한 원고에 대해서는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하라 했더니 그 이후로 감감소식이었다.

돈이 없다든지, 사진이 좆같거나 편집방향이 바뀌었다 던지, 연락을 해 줘야 알 것 아닌가?

얼마나 다큐멘터리사진가를 업신여겼으면 젊은 피디 까지 그러겠는가?

그런 형편이니 군소 언론사야 말해 뭐 하겠는가?

 

열흘 전 한정식선생과의 오찬약속으로 정영신씨와 서초동 자택을 방문했다.

새 해 문안 겸 들렸는데, 선생께서 건강 상태가 별로 호전되지 않아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계셨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선생의 마지막 사진집이 될 ‘가을에서 겨울로’의 원고를 출판사 넘겨

꽃피는 봄날이 오면 사진집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날 신년 오찬은 서초동 ‘초원 복집’에서 있었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며, 김기찬선생의 유품기증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 전 강단에서 하셨던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서다.

절대 다른 사진가를 위해 원고료 없이 그냥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셨다.

 

처음 듣는 기증소식이라 관심을 가지면서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구입이던 기증이던 가타부타할 처지가 못 되는 것 같았다.

유고작가는 그렇다 치고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진가마저

눈치나 살피며 그냥 주지 못해 안달하는 자가 있다는 현실이 더 안타까운 것이다.

 

왜 나라에서 역사적인 사진자료를 적극적으로 소장하지 않을까?

이제 국민들에게 구걸할 만큼 가난한 나라는 아니잖은가?

마치 작가가 세상을 떠나 기증하기만 바라는 것 같다.

유 무명을 떠나 가치 있는 사료들은 적극 발굴하여 응분의 보상을 해야한다.

 

‘역사박물관’에서 일부 알려진 작가 위주로 수집하며 소장 전을 열지만,

사진가들의 이전투구로 그마저 어려워졌다.

이런 지경이니 사진가들이 팔리지 않는 사진집이지만,

살아생전 책 한 권이라도 남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아무리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고 있으나, 오래된 사진의 기록적 가치는 다르다.

이미 수많은 무명사진가의 소중한 사진자료들이 집안의 애물단지처럼 굴러다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면 소멸되고 말지만, 누구하나 나서는 이 없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들의 삶이란 빈궁하기 짝이 없다.

예술계 전반의 빈곤 문제지만, 그중에서도 가난한 작가는 시인과 사진가고,

사진 중에서도 기록에 전념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다큐멘터리사진을 전공해도 사회에 나오면 다들 몇 년을 견뎌내지 못한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문학과 현장을 누벼야 하는 다큐멘터리사진과는

경제적 비용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보상과 보장도 없지만 오로지 사명감하나로 버텨내는 것이다.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아마추어 사진가들 모임인 ‘한국사진작가협회’라는 거대한 조직은

이권에만 눈이 뒤집혀 사진가들의 권익 따윈 관심도 없어 포기한지 수십 년이 넘었지만,

그 대안으로 창립한 ‘민족사진가회’마저 개인의 사유화로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니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사진계 구심점이 없으니 단합 할 수 없고, 단합할 수 없으니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모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다.

어느 예술매체보다 사회현실과 가까워야 할 다큐사진가들이 정치적 사회적 문제조차 침묵하니 ,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고 김기찬 선생의 유작, ‘골목안 풍경’에서

 

 

스스로 권익을 찾지 않으면 누가 권익을 찾아주겠는가?

정신 바짝 차리자.

배고픈 것은 참지만, 쪽 팔려 못 살겠다.

 

사진, 글 / 조문호

 

고 김기찬 선생의 생전 모습. 오른쪽 아래와 왼쪽 뒷편에 아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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