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초상화 ('네이브' 황진이 이미지에서 스크랩)



난, 현모양처의 표상인 신사임당보다 풍류객 황진이를 더 존경한다.
조선시대를 통 털어 황진이만큼 풍류를 구가한 여걸이 어디 있었던가?
뒤숭숭한 시절의 봄바람에 황진이 같은 걸출한 풍류객이 그리운 것이다.


죽기 전에 통일이 되어야 황진이 무덤에도 한 번 가보고,

박연폭포 절경에 취해 머리채에 먹을 찍어 휘갈겨 썼다는 이백의 시를 볼 텐데...

 

飛流直下 三千尺  " 내를 흘러 곧바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물이 삼천자나 되니

疑視銀河 落九天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지 의심스럽구나."



박연폭포 ('네이브' 황진이 이미지에서 스크랩)


황진이는 뜨거운 가슴과 풍류를 즐기는 여걸의 기질을 타고 났다.

수양버들이 휘 널어진 우물가에서 나눈 물 한 바가지 인연에 태어나지 않았던가.

관습에 떠밀려 어미는 님을 기다리고, 딸은 아비를 기다리며 한 세월 보냈다.

그 한이 그리움의 애절함과 체념의 냉정함에 물들게 했을 것이다.

 

절세가인 황진이는 명기로서의 예술가나 시인만은 아니었다.

당대의 모순과 관습에 저항하여 남성들을 비웃은 저항의 여성만도 아니었다.

세상을 사랑과 예술로 버무려 낙원으로 만들려는 사랑의 화신인지도 모른다.

 

황진이의 미색에 대한 사건은 일찍부터 벌어졌다.

열다섯 살 때 이웃집 서생이 그녀를 연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것이다.

그 서생의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 다다르자 꼼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황진이가 속 적삼을 상여에 덮어주자 그때야 상여가 움직였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나이, 죽도록 자기를 연모한 사나이,

그 남자의 말 못할 사랑에 어찌 가슴이 미어지지 않겠는가?

황진이는 그러한 연유로 기적에 이름을 올리기로 작심했다.

 

황진이의 출현으로 송도 화류계는 발칵 뒤집혔고

그의 웃음과 교태에 점잖다는 수많은 양반들이 자빠졌다.

절세의 미모와 총명함에 침을 질질 흘리며 만나려 안달했다.

 

그녀는 기존 사회의 권위와 질서를 부정하고

자유연애와 남녀 평등의 실천 등 파격적 삶을 살았고,

탁월한 문학적 재능으로 사랑을 실은 명문들을 남겼다.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날 밤 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정말, 절창이다.

동지섣달 긴긴밤을 잘라내어 아랫목 이불아래 묻었다가

임이 오는 봄날 밤에 그 묻었던 시간을 꺼내 굽이굽이 펼쳐놓고

임과 함께 긴긴 봄 밤을 지세고 싶은 여인의 간절함을

어찌 이리 감칠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않는 장부 같은 기질 속에

이토록 고운 여성의 심성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곤륜산의 옥 그 뉘가 잘라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는고

 견우는 한번 간 뒤에 안 와

 수심에 겨워 허공에 던진 거라오

 

발상이 기발하다.

반달을 허공에 떠 있는 얼레빗에 비유해 형상화하지 않았는가?



황진이가 박연폭포 바위에 머리채로 쓴 글씨 ('네이브' 황진이 이미지에서 스크랩)



뜨거운 그녀의 가슴은 활활 불타올랐다.

난공불락의 남자, 박연폭포 같은 남자는 없을까

 

어느 날 황진이는 난공불락이라 여긴 어느 선사를 겨냥했다.

30년 동안 수도하여 생불이나 마찬가지라는 인간 부처 지족선사.

그러나 지족선사도 결국 한 사람의 남자일 뿐이었다.

 

고요한 산사의 깊은 밤, 황진이 유혹에 넘어가 그만 헉헉거리고 만 것이다.

그날 밤 지족선사는 30년 아성을 무너뜨리는 파계승이 되어 하산하고 말았다.

잘 내려왔다. 부처가 무엇이기에 사랑의 불길을 막는단 말인가.


황진이의 에 대한 시를 한 번 읽어보라.

꿈에서만 임을 만날 수 있는데, 꿈이 어긋나 만날 수 없으니

함께 떠나 길가에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다.

그 애틋함이 가슴 시리다

 

꿈을 꾸어야 서로 사모하고 만나리

 때맞춰 임 찾아가니 임은 날 찾는구랴

 원컨대 밤마다 서로 다른 꿈

 한 시에 떠나 노중서 만날지고

 

서울의 유명한 벼슬아치 소세양은 황진이 소문을 듣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장담하고 개성으로 떠났단다.

내가 그녀와 30일 동안 동거하되 하루라도 기한을 어기면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녀와 정을 통하며 30일의 기한을 채우고 헤어지는 날, 같이 술을 마셨단다.

이때 황진이가 시 한 편을 써서 바쳤다.

 

달빛 어린 뜨락에 오동잎 다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네

 누각이 높아 하늘이 한 척이고

 사람이 취해 술이 천 잔이라

 흐르는 물 거문고 가락에 맞춰 서늘하고

 매화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그리운 정 푸른 물결인 양 길게 뻗치리라


소세양이 이 시에 나는 사람이 아니다며 여러 날을 더 머물렀다 한다.

동료들과의 약속을 내 팽개친 것이다.


 개성 선적리 도로변에 있는 황진이 무덤 ('다음' 황진이 이미지에서 스크랩)


잘 알려진 벽계수이야기도 흥미롭다.

벽계수가 황진이 집 근처 정자에서 노래를 불러 유혹해 놓고는,

황진이가 따라와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갔단다.

자기만은 절대로 황진이한테 지지 않는다고 자신한 벽계수였다.

그때 황진이가 시 한수를 읊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그 소리에 벽계수가 뒤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라며, 그냥 가 버렸다고 한다.

사랑에 무슨 자존심이 필요하단 말인가?

황진이는 시로 용렬한 벽계수를 조롱하였는데,

벽계수는 아름다운 장미를 꺾으려다, 가시에 찔린 셈이다.

 

황진이의 사랑 행각 중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은 선전관 이사종이다.

그도 노래를 잘 부르는 풍류객인데, 황진이를 만나기 위해 송도로 찾아 갔다.

이사종 노래 소리를 황진이가 엿듣고는 당대의 풍류객 이사종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황진이는 이사종을 자기 집으로 끌어 들여 며칠을 같이 지냈다.

정염을 불태운 나날들이 꿈결 같았는데, 아마 찰떡궁합이었던 모양이다.

사랑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해 육년 동안만 같이 살기를 프로포즈한 것이다.

처음 삼년은 이사종의 집에서 남자가 생활비를 대고

그 후 삼년은 황진이 집에서 여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으로 살림을 했다.

육년을 함께 지낸 후 요즘 말로 쿨 하게 헤어졌단다.


또 하나의 사랑 행각은 재상의 아들 이생과의 만남으로,이생과 금강산 유람을 떠났다.

식량을 걸머지고 나선 두 사람은 양식이 떨어지자 금강산을 찾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거나 시를 읊으며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고,

심지어 노자 돈 마련을 위해 황진이가 몸까지 팔았지만, 이생은 개의치 않았다.


황진이 초상화 (네이브 황진이 이미지에서 스크랩)


그러나 황진이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바로 화담 서경덕이었다.

서경덕의 학문이 높음을 알고 여러 차례 유혹했으나 꼼짝도 안했다.

오랫동안 함께 지냈으나 서경덕은 의연했다.

그 기개에 감탄해, 제자로 받아 줄 것을 청한 것이다.


속세에서 더럽힌 몸 고견을 듣고자 찾아왔사옵니다.

화담은 위엄도 체면도 세우지 않고 태연하게 맞아들였다.

 

화담의 담론은 도도히 흐르는 물과 같았다.

시를 짓고, 문학을 논하고, 인생을 이야기했다.

노래와 춤, 술과 농담을 주고 받으며 함께 어울렸다.

며칠 밤낮을 함께 보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가 쏟아져 내리는 어느 날, 황진이는 빗속을 걸어 온몸을 적셨다.

젖은 속 적삼에 매끄러운 알몸의 곡선이 부풀어 올랐다.

화담에게 다가가 춥다며 어리광을 부렸으나, 옷을 벗겨 차근차근 말려주었다.

같이 잤지만 아무 일 없었다. 고자였을까?

 

황진이는 유혹이 먹히지 않았으나, 억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든든하고 흐뭇했다.

이 세상에 정신적 지주가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화담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흔적을 찾아 떠돌기도 했다




연속극에서 황진이로 분한 하지원 ('네이브' 황진이 이미지에서 스크랩)



짧지만 뜨거운 삶을 살았던 황진이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평생 많은 남자들이 나를 만나려 애를 태웠으니 죽어서라도 

 내 몸을 밟고 지날 수 있도록 송도 성문 밖 큰 길 가에 묻어 달라."했다.

이 또한 육보시 정신이 아니겠는가?

 

임제 백호가 평안도 부사 부임길에 송도 성문 밖에 있는

그녀의 무덤 앞에서 술을 따라 슬피 울며 시조 한 수를 읊었으니,

그건 그 녀에 대한 진정한 존경심이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만 뭇쳤난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프 하노라

 

/ 조문호



연속극 황진이의 출연진 ('네이브' 황진이 이미지에서 스크랩)









 

 

[이데일리 스타in 고규대 기자]

배우 조재현과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30일 오후 7시 30분부터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제4회 ‘막걸리의 날’을 맞아 막걸리 홍보에 나선다.

‘막걸리 유랑단’이라는 이름의 이번 프로모션은 지난 4월 송일국과 함께 유명 전통시장을 방문하여 막걸리와 전통안주를 시장 방문객들과 함께 나눠 먹으며 각계 유명인사들을 초청하여 토크쇼를 함께 벌이면서 시작됐다. 이번 프로모션을 기획한 서 교수는 “막걸리 해외 홍보도 중요하지만, 막걸리 국내 시장 붐이 많이 사그라졌다. 우리 스스로 먼저 막걸리를 사랑하고 전통시장을 많이 방문하는 것이 우리 전통주를 살리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 생각했다”고 전했다. 조재현은 “사실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애주가다. 저렴한 비용으로 누구나 다 즐길수 있는 전통주라는 것이 특징인데 이번 행사를 통해 막걸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더 소개할 수 있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 후원하며 앞으로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등 각 분야 유명 인사들이 동참하여 막걸리 붐 조성에 힘을 보탤 예정이다.

앞서 서 교수는 2011년부터 ‘비빔밥 유랑단’을 결성하여 전 세계를 다니며 현지인들에게 비빔밥을 직접 시식하게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번 ‘막걸리 유랑단’도 내년부터는 전 세계를 돌며 외국인들에게 직접 홍보를 할 계획이다. XM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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