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나무화랑’에서 12일까지 열려

붓 대신 조각도를 들고 전국 팔도강산을 떠도는 김억(61세)은 가히 이 시대의 김정호라 할 만한 목판화가다.

그의 ‘남도풍색’ 목판화전이 오는 12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열린다.

김 억은 그동안 우리의 땅과 산, 바다를 30여 년 동안 목판에 담아왔다.


▲남도풍색, 부분도


서양화의 원근법과는 달리 멀던 가깝던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의 목판화는 한 폭의 산수화 같기도 하고, 마치 공중에서 내려다 본 도면 같기도 하다.


‘남도풍색’이란 자연풍경만이 아니라 대기와 기운, 그리고 그 곳에 사는 민초들의 문화적 풍모와 질긴 생명력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전시작은 “남도풍색‘을 비롯하여 만덕사의 다산초당, 백련사, 해남 땅 끝 마을, 덕룡산, 월출산, 보길도 등 10여점을 내놓았다.


특히 ’나무화랑‘ 전시장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10미터에 달하는 대작 ’남도풍색‘은 압권이었다. 남도 300리를 새긴 이 작품은 장쾌하고도 섬세하며 유장하다. 남도의 정서가 압축된 거대한 서사라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사와 삶의 문화, 그리고 정신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남도풍색, 한지에 목판화 60x959cm


다들 드럼으로 찍은 부감사진 같은 세밀화 작업을 어떻게 해냈을까 궁금해 하지만, 그는 오로지 걷고 걸어 국토미술의 독보성을 개척해 낸 사람이다.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미술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편의성에 대한 유혹을 철저하게 물리쳤다고 한다.


자동차는 풍경 바깥까지는 운반 수단이 될지언정, 일단 풍경 안으로 들어서면 기어이 자연경제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억척스레 걷고 또 걸으며 발품을 팔아가며 칼로 새겨낸 것이다.



▲남도풍색, 부분도


‘국토’를 소재로 진경(眞景) 목판 지리지 작업에 전념해 온 그의 작업은 바로 국토의 재발견이자 국토미술의 재발견이다. 그는 국토를 주유천하하며 무위를 관조하였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그릇이 가득 채워지는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끝 간 데 없는 산봉우리와 굽이치는 물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으로 물들이게 마련이다. 어느 시대나 예술가란 ‘여기’서 ‘저 너머’를 내다보는 몽상적인 존재들이 아니던가.



▲해남 땅끝마을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9,5


하이데거가 장소는 인간의 깊이를 위치시켜 준다 하였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적 공간과 사유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체득한다. 달나라에 진짜 토끼가 있을까라는 어릴 적 호기심 같은 것이 상상력을 키워 예술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초월의 계기도 되는 것이다.


김억의 국토미술 목판화는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새로운 로드맵이다. 그의 목판화는 이 땅의 문화 예술인들의 게으름을 나무라고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도대체 그 동안 국토에서 무슨 짓거리를 벌여온 것이냐고 꾸짖는 새로운 질문이고 메시지였다.



▲덕룡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5cm


김억은 작업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목판 위의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들은 하나의 실감으로 명증한 형태를 드러내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의 발원지와 경유지, 산맥의 뻗어가고 이어짐, 옛길과 도로들, 촌락들에 구체적 존재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목판 위에서 풍부한 사실감과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연 경관들은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장소이며, 우리의 도덕적, 지적, 정신적 토대가 만들어지는 근원적 자리이다.


▲만덕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9cm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지리를 보고, 생리(生利)를 얻으며 인심과 산수가 수려함을 살만한 곳의 으뜸이라 논하고 있다. 풍경은 마음속의 근원적인 형상과 상호 조응한다.”


작가 김억은 홍익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강단에 서기도 했지만, 주로 작업에 전념해 왔다. 우리 국토를 발로 따라가며 마음에 담아온 뒤 나무판을 촘촘히 깎고 그림을 찍어낸다.


▲월출산외, 한지에 목판 릴리프 136,5x57cm



1985년 관훈미술관에서 가진 ‘여름,가을,겨울,봄’이란 한국화전을 시작으로 수원화성, 한강 등 열여덟 차례의 개인 국토전을 가졌고, 국립현대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경기도립미술관, 제주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인사동 ‘나무화랑’(02-722-7760)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남도풍색, 한지에 목판화 60x959cm


'남도풍색' 부분도

'남도풍색' 부분도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12일까지 열려..

붓 대신 조각도를 들고 전국 팔도강산을 떠도는 김억(61세)은 가히 이 시대의 김정호라 할 만한 목판화가다.

그의 열 여덟번째 개인전 ‘남도풍색’ 목판화전이 오는 12일까지 인사동 ‘나무화랑’(02-722-7760)에서 열린다.

김 억은 우리의 땅과 산, 바다를 30여 년 동안 목판에 새겨왔다. 서양화의 원근법과는 달리 멀던 가깝던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의 목판화는 한 폭의 산수화 같기도 하고, 마치 공중에서 내려다 본 조감도 같기도 하다.

‘남도풍색’이란 자연풍경만이 아니라 대기와 기운, 그리고 그 곳에 사는 민초들의 문화적 풍모와

질긴 생명력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전시작은 만덕사의 다산초당, 백련사, 해남 땅 끝 마을, 덕룡산, 월출산, 보길도 등

10여점을 내놓았다. 특히 ’나무화랑‘ 전시장 한 쪽 벽면을 가득 메운 10미터에 달하는 대작 ’남도풍색‘은 압권이었다.

남도 300리를 새긴 이 작품은 장쾌하고도 섬세하며 유장하다. 남도의 정서가 압축된 거대한 서사라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사와 삶의 문화, 그리고 정신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다들 드럼으로 찍은 부감사진 같은 세밀화 작업을 어떻게 해냈을까 궁금해 하지만, 그는 오로지 걷고 걸어

국토미술의 독보성을 개척해 낸 사람이다.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미술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문명의 편의성에 대한 유혹을 철저하게 물리쳤다고 한다. 자동차는 풍경 바깥까지는 운반 수단이 될지언정,

일단 풍경 안으로 들어서면 기어이 자연경제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억척스레 걷고 또 걸으며 발품을 팔아가며 칼로 새겨낸 것이다.


‘국토’를 소재로 진경(眞景) 목판 지리지 작업에 전념한 그의 작업은 바로 국토의 재발견이자 국토미술의 재발견이다.





그는 국토를 주유천하하며 무위를 관조하였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그릇이 가득 채워지는 포만감을 느끼게 된다.

끝 간 데 없는 산봉우리와 굽이치는 물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으로 물들이게 마련이다.

어느 시대나 예술가란 ‘여기’서 ‘저 너머’를 내다보는 몽상적인 존재들이 아니던가.

하이데거가 장소는 인간의 깊이를 위치시켜 준다 하였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적 공간과

사유를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체득한다. 달나라에 진짜 토끼가 있을까라는 어릴 적 호기심 같은 것이 상상력을 키워

예술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초월의 계기도 되는 것이다.

김 억의 국토미술 목판화는 분명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새로운 로드맵이다.

그의 목판화는 이 땅의 문화 예술인들의 게으름을 나무라고 이 땅의 정치인들에게 도대체 그 동안 국토에서

무슨 짓거리를 벌여온 것이냐고 꾸짖는 새로운 질문이고 메시지였다.






김 억은 작업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목판 위의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들은 하나의 실감으로 명증한 형태를 드러내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의 발원지와 경유지, 산맥의 뻗어가고 이어짐, 옛길과 도로들, 촌락들에 구체적 존재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목판 위에서 풍부한 사실감과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연 경관들은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이 이어지는 장소이며, 우리의 도덕적, 지적, 정신적 토대가 만들어지는 근원적 자리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지리를 보고, 생리(生利)를 얻으며 인심과 산수가 수려함을 살만한 곳의 으뜸이라 논하고 있다. 풍경은 마음속의 근원적인 형상과 상호 조응한다.”






















김억의 목판화, 南道風色
김억展 / KIMEOK / 金億 / printing
2016_0706 ▶ 2016_0719 / 일요일 휴관



김억_덕룡산 농산별업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5cm_2015

김억_덕룡산 용혈암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6cm_2015

김억_도암마을 소석문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7cm_2015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0927c | 김억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일요일 휴관


나무화랑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南道風色의 본향에서 ● 사람은 땅을 딛고 살며 몸과 정신, 그리고 감정과 기운은 그것에서 오는 영향을 받는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장소는 인간 실존이 외부와 맺는 유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실재성의 깊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위치시킨다"고 말한다. 나의 작품은 장소의 경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의 들과 산과 계곡, 수목, 그리고 휘돌고 감돌아 나가는 강의 체험과 불가분의 연관에서 나온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지리적 공간, 혹은 장소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의미를 머금고 있는 장소들이 드넓게 퍼져 있는 세상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 목판 위에서 산계(山系)와 수계(水系)들은 하나의 실감으로 명증한 형태를 드러내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의 발원지와 경유지, 산맥의 뻗어나가고 이어짐, 옛길과 도로들, 촌락들에 구체적 존재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목판 위에서 풍부한 사실감과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연 경관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장소이며, 우리의 도덕적·지적·정신적 토대가 만들어지는 근원적 자리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地理를 보고, 生利를 얻으며 人心과 山水가 수려함을 살만한 곳의 으뜸이라 논하고 있다. 풍경은 마음속의 근원적인 형상과 상호 조응한다.


김억_해남 땅끝마을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9.5cm_2016



목판으로 풍경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면서 호남의 원림에 대한 답사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잘 알려진 명소 위주의 겉모습만 보고 다녀 작업을 하였고, 윤고산이 경영했던 원림이나 다산의 유배시절 거처들의 외형적인 모습을 화면에 담기에 바빠 미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철학을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다. 그들의 삶의 모습들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 풍광을 세세히 보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실행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언젠가 해남과 강진에 있는 이들의 장소들을 다녀보고자 하는 생각과, 이들이 거처했던 곳의 민초들의 삶도 함께 보고 그 자연 환경이 가지고 있는 따스함도 몸으로 느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마음속 깊이 벼르며 해남답사를 꿈꾸고 있던 참에, 마침 행촌문화재단과 행촌미술관이 문을 열며 '풍류남도 만화방창'이라는 기획이 있다. 기회다 싶어 모든 일 제처 두고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섰다. 이번 기획은 예부터 문화예술을 즐기고 사랑했던 행촌 김제현박사님이 예술가들과 교유한 뜻을 기리고자 행촌문화재단을 설립하면서, 남도 예술의 자취를 재조명해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현대미술가들의 풍류를 남도에서 되살려 보자는 의도인 듯했다. ● 이때쯤이면 남도 동백과 매화 절정기이고, 또 봄 마중 하는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고 행촌문화재단에서 작가들의 창작공간을 제공하며 개막식을 겸하고 있으니, 여기에 동참한다는 것은 작가로선 반가운 일이다. '이마도' 창작공간은 원래 초등학교 분교가 폐교되면서 행촌문화재단에서 구입하여 작가들의 작업실로 활용되었다. 이마도는 주변 환경이 수려하고 우수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섬이다. 섬이라고는 하나 연륙교로 연결되어 육지화 되어있는, 인구가 40여 호가 채 안 되는 작은 섬으로 그 풍광이 이채롭다. 맞은편 바다 건너 진도가 한 눈에 들어오고 전복과 해산물의 양식장이 즐비하여 여느 어촌에 비할 바 없이 풍요롭다는 느낌이 든다. 그곳에 전국의 작가들이 초대되어 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도 뜻 깊은 일인데, 거기에 주민들과 어울리는 행사이니 그 분위기는 가히 넉넉하고 흥겹고 뜻 깊다. ● 가까이 '우수영'은 지금은 육로의 발달로 인해 '국도1호선'의 시작점이 목포로 옮겨졌으나, 과거에는 해상교통이 수월하여 국도 1호선에 해당되는 해남대로가 곧 국토의 시작점이자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 셈이다. 그래서인가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의 창구로 기능했던,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곳곳에 충무공의 명량해전 전적지가 그대로 남아있고, 이를 해남군이 우수영관광지로 개발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는 점이다.


김억_만덕산 다산초당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9cm_2016

김억_만덕산 백련사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9cm_2016



행사를 뒤로하고 매화 답사를 위해 농원을 찾았다. 선비들이 가까이하며 마음을 수양했던 사군자 중 하나인 매화는 그 매혹적인 자태뿐 아니라 한겨울 눈 속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는 봄의 전령사이기도 하다. 지금의 매화농원에서는 이런 관상용보다는 비록 매실을 얻기 위한 소득 작물이라 하더라도 매화의 그 기품과 향기가 어찌 사라지랴. 그곳에서 매화의 향취와 자태에 마음을 놓고 그만 아득해져 버렸다. 선암사의 '선암매'나 운림산방의 '일지매' 등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매화는 아니지만, 이곳 매실농원의 과수매화는 이와는 또 다른 풍요함을 준다. 멀리서 보면 마치 눈 쌓인 모습처럼 보이는 그 풍광은, 주변의 황토밭과 대조를 이루며 가히 장관이다. 참석한 작가들이 이곳저곳에서 매화에 취해 스케치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화첩을 펼친다.


김억_월출산 백운동 별서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7cm_2016


백련사에 도착하니 일담 스님께서 우리 화가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백련사는 고려시대 백련결사의 장소로 지금도 白蓮社의 사가 절 '寺'가 아니라 단체 '社'자를 쓰고 있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주신 일담스님께서 차를 내 놓으시며 백련결사와 백련사 사적기에 나오는 사찰의 유래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가는 줄 모르게 들려 주신다. ● 산사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이 되어 일찍 동백숲을 산책한다. 청량한 아침기운이 온 몸에 와닿자 어제 저녁 숙취가 말끔이 가신다. 백련사 동백은 나무의 수령도 있어 동백꽃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 뿐만 아니라 그 기품이 예사롭지 않다. 이 동백나무는 다산과 아암 혜장선사와의 대담을 엿들었을 목격자가 아니었을까. 이들에게서 그런 옛 이야기를 들으며, 선인들의 기품과 풍모를 상상해 본다. 즐겁다. ● 아침공양을 마치고 아암과 다산이 거닐었던 다산초당에 이르는 오솔길을 스님과 함께 걸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길은 동백과 차밭, 길섶 덤불을 헤치고 피어나기 시작하는 난초가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다산초당에 이르러 천일각에서 따사로운 봄기운을 느끼며 강진만의 풍광에 젖어 화흥을 펼치고 있는 화가들의 모습이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들의 스케치를 곁눈으로 즐기면서 스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간 형을 그리워하며 구강포를 내려다 보았을 심경을 유추하면서 말이다. ● 이어 해남의 녹우당과 두륜산 대흥사를 거쳐 달마산 미황사로 향한다. 미황사 주지스님인 금강스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금강스님께서는 그림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화가들과도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으신 듯 일행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바쁜 일정임에도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오신 스님의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마치 달마산의 풍모를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달마산의 위용이 미황사를 감싸고 있으며 앞으로는 멀리 진도까지 시야에 들러오니 이 장엄한 풍광이 답사객을 압도 한다. 사원내의 매화가 절정을 이루어 다투어 피고, 거기에 아름들이 동백나무 군락의 만개한 동백꽃도 화창하다. 이번 답사의 백미가 남도의 꽃을 향한 봄마중이니, 그것을 마음껏 누려본다. 호사다. 이 어찌 상춘객의 호사가 아니겠는가.


김억_보길도 부용동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9.5cm_2016


일행들은 서울로 향하고, 나는 해남 강진의 못다한 이야기를 더듬으며 며칠을 더 돌아다니기로 마음먹고 광주비엔날레에서 학예사를 거쳐 명발당의 주인인 윤정현선생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기꺼이 응해 주신다. 명발당은 해남윤씨 윤광택이(1732~1804)이 기거했던 가옥으로 다산과의 인연이 깊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과 두터운 친분을 가진 분으로 그분의 아들이 윤서유다. 윤서유는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다산의 외동딸과 윤서유의 아들인 윤영희가 혼인하여 사돈이 되니 양대 가문의 교류가 이 명발당에서 이루어졌다. 옛 건물들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고 지금은 본채와 입구쪽으로 누정이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큰 소나무가 위용을 보이고 동백 매화도 그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루에 앉으니 덕룡산과 주작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장관을 넋을 놓고 바라본다. 남도는 온통 꽃잔치다. 황홀하다. ● 다음날 소석문을 거쳐 덕룡산에 올라 동쪽으로 펼쳐지는 강진만과 서쪽으로 해남을 조망한다. 남쪽으로는 두륜산 흑석산 등이 마치 공룡의 등 같은 험한 바위의 산세로 눈앞에 펼쳐진다. 명발당이 있는 도암면 소재지가 가까이 눈에 들어오고 윤개보가 운영했던 '농산별업'도 발아래 보인다.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으로부터 석문, 소석문, 덕룡산 주작산, 두륜산, 흑석산으로 이어지는 땅끝기맥은 백두대간의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내려오는데 이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위용이 장엄하다.


김억_주작산 사초리마을_E.d 7_한지에 목판 릴리프_136.5×59.5cm_2016


다산이 기거했던 초당으로부터 윤개보의 별업인 농산까지의 다산의 행장을 다산은 '여유당전서 조석루기'에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니 이를 윤정현 선생의 글에서 발췌해 본다. "조석루(朝夕樓)는 윤개보(尹皆甫)의 서루(書樓)이다. 내가 다산(茶山)에 우거한 지 이제 4년이 되는데, 언제든지 꽃피는 때면 산보를 하였다. 산에서 오른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고 시내 하나를 건너 석문(石門)에서 바람을 쐬며, 용혈(龍穴)에서 쉬고 청라곡(靑蘿谷)에서 물마시며, 농산(農山)에 있는 농막에서 묵은 뒤에 말을 타고 다산으로 돌아오는 것이 예이다. 개보(皆甫)와 그의 사촌 아우 군보(群甫)가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와서 어떤 때에는 석문(石門)에서 기다리고, 어떤 때에는 용혈(龍穴)에서 기다리고 어떤 때에는 청라곡(靑蘿谷)에서 기다린다. 이미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은 뒤에는 그와 함께 농산에 있는 농막에서 잠을 자는 것 또한 예이다". 용혈암은 백련결사의 주축이었던 천인, 천책, 정오 3국사(려말)의 정령이 깃든 수도원으로, 현재는 그 절터만 남아있다. 2013년에 지표 발굴조사를 통해 다량의 기와파편과 청자 불상의 파편이 발견되어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 능선을 따라 주작산 정상에 이르니 강진의 해맞이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연출되는 마량항과 고금도에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이기에 강진군에서도 여기를 일출명소로 선택 했으리라. 앞뒤 좌우로 펼쳐지는 풍경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북쪽으로는 윤개보의 서루인 농산 별업자리가 눈에 들어오고 그 주변으로 펼쳐지는 야트막한 구릉과 평야지대, 그리고 간척사업을 통해 반듯하게 펼쳐진 논의 펼쳐짐이 평화롭다. 하산길의 동네를 지나며, 아직 농사를 시작하기는 이른 시기이나 가끔씩 농사 준비로 분주한 농부들을 본다. 남도의 부지런한 민초들 또한 그 풍경과 더불어 어찌 아름답지 않을 것인가. 해안선을 따라 포구와 어촌들의 풍경을 보기 위해 하루를 더 명발당에서 묵기로 했다. 장작으로 불을 땐 온돌방에서 윤선생의 호의에 호사를 따뜻하게 누린다. 아늑하다.



김억_南道風色_E.d 7_한지에 목판화_60×959cm_2016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며 작은 어촌 풍경과 사초리를 지나 완도대교가 있는 북평면에 다다른다. 사초리 마을은 아직 대보름날의 달집태우기와 풍어제를 지내는 동제가 남아있으며, 이른 봄 한철에만 진행되는 개불잡이가 이 마을의 특별한 행사이니 언제 다시한번 찾으리라 마음 먹어 본다. 완도대교를 지나 이진마을에 다다르면 지금은 작은 포구와 마을이 여느 어촌과 다르지 않다.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관두포)와 북평면 이진마을은 한양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지점이자 한양에 오르는 첫 길이었다. 관두포항이 관리들이 주로 이용한 '관로'였다면 이진항은 민·관이 두루 활용했다. 이곳은 강진 마량항에서 고마도를 지나 완도와 해협을 이루는 길목으로 통한다. 이진 역시 수군 만 호가 주둔했던 주요 군사 거점의 하나이다. 이곳은 성을 쌓는데 제주사람이 동원될 만큼 한양∼제주를 오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지금은 성터와 마을 한가운데 우물터가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 관두포는 조선시대 제주로 향하는 관청 '물목'이었다. 1653년 제주에 표류한 네덜란드 하멜 일행 36명이 이듬해 관두포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됐다. 이 마을 오른쪽에 솟아 있는 관두산은 해발 178m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수 돌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봉수터였다 한다. 한때 관리와 군졸·짐꾼·상인들로 북적였던 관동마을은 지금은 한적한 농어촌으로 변했고, 관동 방조제 방죽이 만들어지면서 옛 흔적은 찾을 길이 없어 보인다.


김억_南道風色_E.d 7_한지에 목판화_60×959cm_2016_부분


호남길 시발지인 관두포를 뒤로 하고 현산면 하구시 마을에 다다른다. 구시 저수지 뒤쪽으론 고산 윤선도가 54세(1640년)부터 9년간 머물렸던 금쇄동(金鎖洞) 산장이 자리하고 있다. 금쇄동 입구에 도착하니 출입금지 차단기가 막혀있다. 마침 서울에서 금쇄동 촬영을 위해 내려왔던 일행이 있어 윤정현선생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윤선생의 아제인 문인 윤재걸님 이란다. 윤재걸 선생은 해남윤씨 가문의 후손으로 언론인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와 집필과 시를 쓰며 지내고 계신다 하여 해남에 가면 꼭 한번 찾아보려 하였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선생님 덕분에 차단기를 열고 재각이며 묘소를 들려 참배를 하고 산으로 오르니 구시저수시가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두륜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 산 정상부에 있는 금쇄동 일대에는 고산이 주로 기거한 것으로 추측되는 교의제 터를 비롯하여, 고산이 고기를 키우고 연꽃을 심었다는 연못터와 정자를 짓기 위해 석축을 쌓아 올린 터가 있는데, 마침 이곳엔 유적 발굴작업이 한창인 듯 하다. 고산이 보길도에서 지었던 어부사시사가 어촌을 배경으로 한 대표작이라면, 산중인 임천(林泉)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에서 지었던 '산중신곡'과 '금쇄동기'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아직도 명확한 시기와 성격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성터가 금쇄동을 싸고 남아있어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 모두 둘러보고 내려오니 윤재걸 선생님과 마침 촬영을 위해 내려온 황헌만 선생을 만났다. 황헌만 선생은 국토에 대한 열정과 시선으로 산하의 서정과 장쾌함을 담아내는 사진가다. 서울에서 뵌 적이 있는데, 여기서 또 뵈니 더욱 반갑다. 대흥사 입구의 산채집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맛있는 점심을 하니 그동안의 피로가 말끔이 가시는 듯하다. 저녁에 다시 선생님 서재에서 직접 담그신 술과 안주를 곁들여 밤 가는 줄 모르게 늦은 시간까지 정겨운 담소를 나누었다. 손수 군불을 때어 방을 덥혀 놓으시니, 객지에서 나그네의 잠자리가 이보다 편할 수는 없다. 홍복이다. 따스한 인심에 고맙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 이번 해남기행은 의미있는 답사였다. 그러나 스쳐 지나쳤던 기억의 모퉁이에는 여러 미련이 남아, 또 다시 나를 유혹 할 것이다. 그곳에서 풍경으로 들어가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쌓고, 마침내는 마음을 넉넉하게 열면서 국토의 근원적 생명성을 몸으로 새롭게 만나고 기록하고 표현하는 과정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그것은 재주가 박한 내게는 힘든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보고 겪은 좋은 이미지와 마음들을 어찌 그냥 둘 수가 있을 건가. 또 떠나고 또 만나고 또 판각할 것이다, 우리 국토와 거기에 살고 있는 민중들의 질긴 생명성을. 그게 아름다움이다. ■ 김억



Vol.20160706g | 김억展 / KIMEOK / 金億 / pr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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