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스 칸타타 NARCISSUS CANTATA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20_0311 ▶︎ 2020_0324


김상표_Nirvana-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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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0_0314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관훈동 100-5번지)

Tel. +82.(0)2.736.6669/737.6669

www.galleryis.com



얼의 무늬 - 김상표의 '얼굴성'을 위한 9개의 아포리즘

"오랫동안 나는 펜을 칼처럼 생각했다. 이제야 나는 우리의 무기력함을 알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책을 쓰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장 폴 사르트르  "붓을 칼처럼 휘두르며 발작적으로 그림그리기를 하는 나를 발견했다."- 김상표


● 이미지의 역사는 문자보다 오래다. 말의 상상을 덧대어 이미지는 생성되었고, 초상은 그 이미지들 사이에서 잉태되었다. 동굴벽화와 암각화에 새긴 초상은 날 것이어서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그 초상은 단순하고 소박해서 얼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수천 년이 지나 이제 회화는 극사실주의에서 표현주의는 물론, 개념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표현의 한계를 갖지 않는다. 김상표의 초상화는 그 무경계의 어디쯤에서 시작된 듯하다. 그는 시작과 함께 곧장 작품을 쏟아 냈으므로 시간의 연대기로 작가론/작품론을 구성하는 것은 부질없다. 또 미술의 형식을 학습한 적이 없어서 미술사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도 맞지 않아 보인다. 그는 그동안 제작하고 발표한 작품 이미지들을 보내왔고, 스스로 궁구하고 있는 '얼굴성'이란 글도 첨부했다. 그와 한 번 만났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각 끝에 아홉 개의 열쇠 말을 뽑아서 아포리즘 평론을 구성했다. 이 열쇠 말들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잇고 보완하는 김상표 회화론의 알고리즘이라 할 것이다. 각각의 아포리즘마다 그의 글을 붙였다.


1. 얼빛 자화상 ● 불현듯, 아니 느닷없이 그는 붓을 들어 자기 존재의 페르소나(persona)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얼굴, 페르소나를. 그러면서 '껍데기는 가라!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는 스스로의 언명을 외쳤다. 그는 제나(ego)를 벗고 얼나[眞我]를 회화로 궁리했다. 그림이 시작되자 마음의 깊은 우물에서 '나'의 얼빛이 솟구쳤다. "지극한 기운이여 내 안에 지피소서(至氣今至)" 마음속 얼빛 모신 자리가 밝달이었다. 얼빛 어린 얼굴이 너른 밝달에 솟았는데, 거기 '참나'가 있었다. 그는 '참나'를 붙잡았다. 그의 자화상(自畵像)은 그렇게 탄생했다. 배우고 익혀서 시나브로 깨달아 그린 게 아니라, 당돌하게도 바로 들어갔다. 지금, 여기, 얼빛 밝은 참나가 섰는데 무얼 고민한단 말인가! 그 실체를 엿보았는데 성긴 붓질이 무어 대수란 말인가! 그는 마치 맨몸으로 뛰어들 듯 붓을 들고 캔버스로 달려들었다. 캔버스는 광야였다. ● "본질에 대한 갈증으로 철학에 매달렸지만, 그래도 해소되지 않고 가슴에 얹혀 있는 무엇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절집 언저리를 서성이며 살아온 '나',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그 '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2. 정신의 실체 ● '나'를 회화로 온전히 모시기 위해서는 지극히 묘사하되(形似) 정신을 파고들어야 한다(神似). 정신이 닮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傳神寫照). 옛사람들은 얼굴의 묘사로 정신을 드러냈으나 그는 묘사의 기술을 학습한 바 없었다. 그는 회화에 길들여진 적이 없다. 붓을 든 순간 그의 회화는 야생의 사고로 치달았다. 수시로 변화하는 얼굴과 그 얼굴 뒤의 어떤 근본적인 내적 형상은 '잘 그리기[익힌 것]'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표현하기[날 것]'에 있었다. 그의 집요한 그리기는 그래서 야생의 회화였고 날 것의 구조로 드러난 '정신의 실체'였다. 그의 회화에서 때때로 어떤 프리미티비즘적인 이미지가 이글거리거나 거친 붓의 소란을 엿보는 것은 그런 이유일 테다. 그것이 창조성의 발현이다. 현대미술이 모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원시미술은 은유에 뿌리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그는 초상의 동일한 주체인 '나'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동안에도 그 스스로를 모방하지 않는다. ● "내 안에 우글거리는 자아들, 그런 수많은 놈이 그냥 계속 야생적으로 살아 있는 거예요. 날것으로 말이예요. 어렸을 적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퇴화하지 않고 내 안에 살고 있거든요."


3. 마음우물 ● 나르키소스는 물면[거울]에 되비친 얼굴에 빠졌으나 김상표의 얼굴은 심연(深淵/마음우물)에서 솟났다. 물에 어려서 되비친 얼굴은 껍데기다. 마음우물에서 솟난 얼굴은 '속알(persona)'이다. 내 속의 씨알이다. 씨알을 엿보는 것이 중요하다. 윤동주는 「자화상」에서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고 했다. 또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되비치고 솟난 '한 사나이'의 얼굴을 그리며 성찰한다. 초상이란 그렇게 되비치고 솟난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로 기화(氣化)되었을 때 온전해진다[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얼을 담은 골(骨), 얼골, 얼굴. 김상표는 얼에 기대어 숱한 형(形)의 모양을 따졌다. '얼나'를 쫓아 본성의 그릇인 얼굴에 가닿는 '그리기'의 여정을 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리는 '얼나'를 회화로 모시는 과정이었으리라(侍天主). ● "구체적인 형상이 그림에 나타났을 때는 하나의 규정성만으로 특정되는 얼굴이 진짜 얼굴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같은 나선형 궤적의 마법에 걸려들어 양 극단을 오가며 저 멀리 발산되어 갔다.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고, 또 있음이기도 하고 없음이기도 하다."


4. 얼의 무늬 ● 시간은 몸에 무늬/결을 새긴다. 얼굴은 가장 진실한 몸의 나이테다. 초상화는 얼굴에 새긴 시간의 무늬를 몽타주 하는 것이며, 수십 개 가면의 변검(變瞼)에 가린 '무늬의 진면목'을 불러내는 것이다. 김상표는 그동안 얼굴만을 그렸고 특히 자화상에 집중했다. 스스로 그리는 스스로의 형상은 카오스다. 미궁이다. 나(화가)와 너(모델) 사이의 간격이 없어서 무늬를 확인하기 어렵고 어딘가에 되비친 모습은 좌우가 달라서 뒤틀리기에 십상이다. 그가 선택한 것은 눈을 감고 마음을 뜨는 것이었다. 보지 않아야 잘 보였으므로. 마음눈은 깨우기 어려우나 한 번 깨워서 뜨면 안팎이 환하다. 우리 안에 잠재된 생명과 영혼, 우주 에너지는 똘똘 감겨있다[Kundalini/산스크리트어]. 위아래로 쉼 없이 회오리치면서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것이 멈추면 죽는다. 무늬로 새긴 그의 초상들이 붓춤을 추듯 현란한 것은 바로 그 회오리, 쿤달리니 때문이다. ● "행위로서의 회화와 결과로서의 회화와 나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이 셋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은 글을 쓰고 칼을 휘두르고 몸을 그리고 마침내 붓을 쥐어 든 내가 쉬지 않고 겨냥할 '거기'이다."(양효실)


5. 구토 ● 소갈머리가 없으면 얼간이다. 얼이 빠져나갔다. 얼빛이 꺼져서 껍데기만 남았다. 그 빈껍데기에 쌓이는 것이 그늘이다. 탐욕이다. 잿더미다. 불씨 하나 찾을 수 없는 암흑이다. 삶도 죽음도 그 안에선 무의미하다. 마음보마저 말랐으니 본성의 씨알 하나 심을 수 없다. 초상을 그리는 것은 그런 그늘로 파고드는 것이다. 깊이 파고들어 탐욕을 뒤집고 잿더미를 흩으려 속을 완전히 배배 꼬아서 토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오장육부를 뒤틀어서 검붉은 핏빛 소갈머리의 허상을 토해내야 한다. 김상표의 몇몇 초상들은 거짓 없이 토해낸 어두운 실존의 일그러진 형상이다. 샤먼의 청동거울에 비친 민낯의 투명한 속내다. 사실 예술은 때로 황폐의 공간이고, 미술은 그런 폐허의 공간에서 시작된다. 그의 초상화들은 회화의 근대성이 쌓아 올렸던 미학의 이념 더미를 태우고 그 더미들이 타고 남은 잿더미를 보여준다. 아카데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초상들은 역설적으로 그 잿더미에서 피어 올린 작은 불씨인지 모른다. ● "내 안에서 우글거렸던 수많은 애벌레 주체들이 하나씩 토해지기 시작했다. 존재가 내 몸을 빌려 열리고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토록 채워지지 않던 결여의 공간에 드디어 충만함이 자리 잡기 시작했나 보다."


6. 가난한 자 ● 영혼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영혼이 가난한 자의 미학은 풍요롭다. 얼굴에 깃든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로 가난하지 못하니 복이 없다. 얼굴에 깃든 아내의 아들의 친구의 학생의 얼굴들로 가난하지 못하다. 가난은 굶주림일 터. 예수가 광야에서 굶주렸고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밑에서 굶주렸다. 굶주림 끝에서 그들은 진리를 깨달았다. 그들의 굶주림은 육체의 굶주림이 아니다. 싯다르타는 숱한 마귀들을 잠재우고 선정에 들었다. 예수는 숱한 유혹을 물리쳤다. 그 '숱한 마귀'는 내 안의 여러 얼굴이다. 내 안의 괴물들이다. 유령들이다. 그것을 비우고 잠재워야 진리에 가 닿을 터. 남편의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로 아들의 얼굴로 스승의 얼굴로 친구의 얼굴로 새겨진 얼굴의 무늬는 사실이고 한 삶의 역사이나, 오롯한 '나' 자신은 아닐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얼굴의 얼굴들을 그려내는 것. 그려서 비워내는 것. 바로 그것이 현재 김상표가 수행하는 방식이다. ●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고 불교의 법명은 여연이에요.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어떤 기억이나 아픔들이 다 이 그림에 담겨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살아온, 또 전생의 업들을 다 토해낸 것 같은 느낌이랄까."


7. 환(幻) ● 예술의 몸은 예(藝)가 본래 뜻하는 '심다 ․ 기예 ․ 궁극'의 생태적[심다], 창조적[기예], 철학적[궁극] 환(幻)의 술수(術數)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미학적 화두로 이뤄져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술이란 '예'의 생태성 ․ 창조성 ․ 철학성이 '술수'로 드러나는 실체적 환(幻)이라고 할 수 있다. 술수와 환의 사유는 도교의 방술[方術:방사(方士)가 행하는 신선의 술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옛 중국에서는 선인(仙人), 방사, 술사를 모두 진인(眞人)이라고 생각했다. 20세기 서구 모더니즘의 유입으로 동아시아의 예술은 '예'만 강조하고 '술/술수'는 괴이하게 생각하거나 미신 따위로 몰아버리는, 그러니까 유물론으로서 '작품'이라는 '예'의 물성에 사로잡힌 꼴이 되었다. 초현실과 비현실의 샤먼 미학은 완전히 저급하고 저속한 것 따위의 문화로 치부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술'이 없이 어떻게 작품의 판타지가 가능하고 영적 교감이 가능할 것인가? 김상표의 회화는 환(幻)의 술수(術數)로 가득하다. 물성 너머의 판타지를 보아야 한다. ● "물성을 통제한 후부터는 내 안의 자아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어요. 얘네들이 튀어나오면서부터 제가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어요. 숨을 쉬기 시작했어요. 뭐라 할까? 아름다움에 의해서 인간이 치유되고 구원될 수 있다는 것, 예술과 종교가 하나 될 수 있다는 것, 예술철학을 공부할 때 어려웠던 테제들이 체험적으로 이해가 됐어요."


8. 너/나, 우리, 서로주체 ● 어제, 오늘, 아제(來日)에서 어제는 과거, 오늘은 현재, 아제는 미래 시제를 갖는다. 'ㅓ'와 'ㅏ'에 시제가 있다는 사실. 어제처럼 '너'는 과거요, 아제처럼 '나'는 미래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어제가 아제의 과거이듯이 '너'는 '나'의 과거다. 아제가 어제의 미래이듯이 '나'는 '너'의 미래다. 우리말에서 '너나'는 구분되어서 말할 수 없는 연속 시제의 시간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을 쓴다. 너의 눈, 나의 눈에 서로가 어려 있는 모습을 '눈부처'라고 한다. 내 눈 속의 네가 나의 부처인 것처럼, 네 눈 속의 내가 너의 부처이니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의 부처인 셈이다. 이렇듯 너와 나, 나와 너라는 우리는 '서로주체'의 상징성을 갖는다. 철학자 김상봉은 이것을 '서로주체성'이라고 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만남'이다. 김상표의 초상은 '너/나'를 하나의 시선으로 그린 것이다. 내 안에 과거 현재 미래로 존재하는 얼굴들의 서로주체와 만났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 "나를 그린다는 것은 사실 너를 보는 것이고 너를 만나는 것이며 나와 너의 관계를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적 실존을 마주하는 문제이잖아요. 사회적 실존을 마주한다 할지라도 제 안에 있는 나, 누구나 자기 안에 자기를 응시하는 또 다른 자기를 갖고 있잖아요."


9. 미륵 ● 이무기가 용이 되는 것을 '기화'라고 하고 또 '운화(運化)'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말의 뿌리는 혜강 최한기(崔漢綺, 1803~1879)의 기학(氣學)에서 온 것이다. 그는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기(氣)로 보았다. 우주에 가득 찬 바로 그 기가 끊임없이 활동운화, 즉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기를 '천지지기', '운화지기'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또 그 기는 모든 존재의 형체와 질료를 이루고 있는 것이어서 '형질지기'라고도 하는데, 정리하면 "기학의 핵심은 만물의 근원적 존재이자 인간과 만물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이 기운인 운화기(運化氣)의 활동운화(活動運化)다. 활동운화란 살아 있는 기가 항상 움직이고 두루 돌아 크게 변화하는 것이다.(『신기통』)" 미륵은 미르에서 왔고 미르는 '용(龍)'의 순우리말이다. 김상표의 회화에서 주목할 것 중의 하나는 '나'의 술수적 변태로서의 자화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가 미륵을 그리면서 '미륵자화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미륵'과 '나'를 서로 빗대어 마주 보게 한 것인데,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의 표현대로 광대무변의 실체를 그리기 위해서일 터이다. ● "미륵 그림에 와서는 반추상 형태로 바뀐 거예요. 거기다가 미륵의 뒷모습을 그리면서부터는 저도 놀랍게도 완전히 추상적인 형태로 급격히 진행한 겁니다. … 어쩌면 미륵이라는 것이 결국 민중들의 수많은 아픔을 다 담아내야 하고 소망을 품어내야 하니까 광대무변한 모습으로 그려져야 되잖아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그려지면서 결과적으로 미륵자화상의 앞뒤 모습이 형태적으로도 닮게 되었어요."

김종길



김상표_Nirvana-보컬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9


히스테리증자의 의심슬픔그러므로평화 ● 지난 번 전시와 이번 전시까지 나는 김선생의 전시에 2회에 걸쳐 리뷰를 쓰게 되었다. 김선생은 미술 평론가인 내게 전시에 대한 평문을 부탁한 게 아니다. 그는 내 책, 『불구의 삶 사랑의 말』에 소개된 얼터너티브 록 밴드 너바나의 음악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그걸 연유로 내게 연락을 했다. 말하자면 그는 내가 먼저 매혹된 너바나에게 두 번째로 매혹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 전시 「나르시스 칸타타」에 들어갈 비평문을 위해 그가 전시 준비 중에 적어간 문장들을 읽게 되었고 나는 그걸 연유로 그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러한 서로가 서로를 알아봄을 나르시시즘적 투사라고 말해도 좋다. 우리는 둘 다 자기 분야의 전문가들, 선생들, 그럼에도 전문가들의 세계를 나름 못견뎌하면서 다른 것을 타진해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나는 그의 그림이 아닌 글에서 그를(나를?) 더 분명하게 알아보았고, 그렇게 일시적으로 '우리'가 발생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히스테리적 주체이다.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의심하고 해체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의식적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과의 대결이 전체 구조, 억압적 구조와의 대결이기도 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의 '화가-되기'가 자기-소진을 통한 타자에의 자기-허여라고 보았고, 그것은 나 역시 이미 하고 있는 실천, 노력, 수행이라고 생각했다. 무리한 동일시나 투사일 수 있겠지만, 서로를 알아봄―그가 먼저 나를, 이번에 내가 그를―에 근거한 이번 글쓰기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자기궤도를 열어 보이게 된다.


# 1 ● 나는 의심한다. 의심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류다. 그 의심은 무엇보다 나에 대한 것인데, 가령 강연자로서 무대에 오르면 나는 앉아 있는 청중을 상대로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나를 상대로 싸우는 전사다. 내게는 일방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일종의 내 말의 '진리'를 이미 선점한 사람의 자격, 권위―나는 연단 위에 설 자격을 부여받았다―가 주어진 셈이고, 청중은 그런 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하는 의무, 태도가 있다. 동시에 나는 내 말이 너무 그럴듯해지지 않도록, 그 말이 절룩거리도록, 그 말이 거의 미친 상태에 이르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강연자(일반)의 진리와 그 진리를 부식시키려는 '나'(특수)의 진리가 대결한다. 전자를 위해서라면 나는 주어진 말의 논리에 복종해야 한다. 말은 나를 사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한다. 그래야 나는 강연자이다. 그럴 때 나는 말이 사용하는, 대체가능한, 누구나 들어와 앉을 수 있는 자리, 매체, 도구가 된다. 청중은 지식, 따라서 평온, 화해, 가능성을 얻기 위해 와 있다. 그럴 때 나는 진리를 전달하는, 이해와 소통을 위해 말의 권력에 복종하는 '대상'-주체가 된다. 말이 논리적일수록, 이해가능해질수록, 의미와 가치로 충만할수록 나는 언어의 권력을 이행하는 '노예'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해와 소통에 저항해야 하고, 논리적이며 이해가능한 언어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나는 지금 대체가능한 강연자이면서 동시에 유일무이한 한 사람이다. 나는 공감과 동일시를 거부해야 한다. 나는 말을 꺾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한낱 말의 노예가 되어 그 말이 덮어가리고 대체한 사물들, 존재들, 사건들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데 공모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말은 나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데 너무나 고도의 전략을 사용하기에(나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공감받고 박수를 받고 싶어하게끔 길러졌다!) 그런 말의 지배와 권력을 벗어나는 말하기를 수행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나는 이해와 공감과 동일시를 욕망하는 사람들/타자들의 박수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동시에 나는 강연자로서 말한다. 따라서 나는 입을 여는 순간 말의 대리자가 되어 있거나 되려고 할 것이기에, 필사적으로 그런 말의 욕망을 알아차리면서, 그러나 그 말의 욕망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내부의 외부자는 그래야 한다), 이해와 공감과 동일시에 대한 청중의 욕망을 완전히 꺾지는 않으면서 계속 말해야 한다. 말이 성취하려는 '의미'를 전달하는 척하면서 그 의미를 꺾고, 말을 따르는 척하면서 그 말을 지우는, 이러한 이중의 수행은 '주체'(subject)인 내게는 내 의식과 '내' 신체 간의 싸움이기도 하다. 나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내 말을 듣는, 내 말에 동의하면서 내 말에 저항하는 사람이다. 내 말은 내 말이 아니고 그렇게 나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내 말이 타자의 말임을 드러내면서 계속 말해야 한다. 내 말에 내가 속으면, 설득당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한낱 종속(subjection)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나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말하는 자인 나와 듣는 자인 청중 사이에서는 공감과 동일시에 불과한 (나르시시즘적)투사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동시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사람이다. 나는 말에 휘둘리면서 완전히 휘둘리지 않은 채로 말의 욕망과 싸운다. 나는 살아있다. 고로 나는 저항한다.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교훈이 없는 말을 어떻게든 불러내고 증명하려고 하면서 이미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는 끝―마침표와 결론과 교훈―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골목들, 우회로들, 급작스러운 암전, 침묵, 절규, 한탄을 계속 모색하고 수행한다. 그래서 가끔 어떤 청중은 나를 미친 사람 '같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내 욕망은 그때 무엇인가? 나는 내 말에 차이, 소음, 심지어 침묵이 들어와 있으면 좋겠다. 꽉 찬 말이 아니어서 비틀린 말이어서 비로소 다른 것들이 함께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건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 신체의, 내 감각의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를, 곧 의심하는 나를 소환한다. 나는 단지 말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나는 동시에 내 말을 듣는 사람, 잘못 듣는 사람, 많이 듣는 사람, 딴 데 정신이 팔린 사람이려고 한다. 이러한 두 개의 욕망, 전달과 전복의 동시성에 헌정된 내 퍼포먼스에 볼모는 내 신체다. 이런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나는 소진된다. 말에 복종하면서 말의 틈을 노리는 이 싸움에 나는 거의 쓰러질 정도가 된다. 입은 이미 너덜너덜하고 얼굴은 고열에 시달리고 몸은 방향과 중심을 상실한 상태이다. 〔…〕 이러한 자기-소진은 역설적이지만 자기-향유이다. 나는 살아있고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나는 완전히 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나는 지금 반복불가능한 단 한 번의 퍼포먼스를 펼쳤다. 나와의 싸움에서 나는 이겼는가 졌는가? 이것은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이것은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지 않은 나와 나, 둘의 싸움이다. 동시에 이것은 내가 내게 공손하면서 잔인한 세계와 벌이는 싸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소진이다. 나에 의한 나의 무화(無化)는 굳이 이야기하자면 도래할 나의 죽음이라는 어처구니없는(거기에는 '내'가 없다) 사건의 리허설이고, 이러한 나의 리허설들, 죽음을 길들이고 노래하고 방어하는 이러한 무대에서 나는 일종의 '신'적인/주권적인 지위까지 누리게 된다.


● "히스테리적 주체는 바로 그 존재가 근본적인 의심과 의문을 내포하는 주체이다. 그의 존재는 자신이 타자에게 있어 무엇인가에 관한 불확실성에 의해 지탱된다. 주체가 타자의 욕망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으로서 존재하는 한 히스테리적 주체는 탁월한 주체이다."(지젝)


# 2 ● 통상 지식인은 구체와 보편, 현실과 이론 사이에서 싸우는 사람이다. 지식인에게는 이미 항상 보편과 이론이 와 있기에 구체, 현실은 그런 총체화의 볼모나 알리바이일 경우가 농후하다. 지식인은 세계를 지식화하면서 상징계적 대타자, 혹은 질서를 보위한다. 지식인은 그래서 히스테리적 주체라기보다는 강박증자이기 쉬운데,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 작란하는 세계,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지식화에 저항하는 세계를 견딜 수 없어서 그 세계 위에 베일을 덮으려는 관성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세계를 평평하게 만드는데, 탈-감각화하는데 기여한다. 따라서 지식인이면서도 주변부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려는, 구체와 현실의 다양성이나 모순 혹은 힘을 보유하려는 태도를 견지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들은 그렇게 단지 보편도 단지 구체도 아닌 그 사이에서 어떤 유희, 어떤 실험, 어떤 삶을 모색하게 된다. '역설경영'이라든지 '기업공동체'라든지 '과정조직이론'과 같이, 경영학의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불가능한 이념으로 보이는 '사이'를 모색해온 연구자 김상표가 "회화"를 건드리는 방식은 오랫동안 화가를 선망해온 아마추어의 꿈, 투사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는 회화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 또 하나의 화가로 인정받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는 2차원의 평면 위에 탈-탈감각화된 세계를 출현시키려는, 그걸 위해 물감의 촉각적 물질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럼으로써 제도권 지식인 행세를 해온 자신이 배제하고 억압했던 이 세계의 '감각적 있음'에 다시 종속되려는, 말하자면 자신은 사실 주체였기에 종속이었음을 고백하면서 그 종속을 탈-종속화하려는 수행의 방편으로 회화를 사용·착취한다. 아는 주체, 즉 강박증적 주체인 그는 얼굴이 '주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그는 "히스테리와 강박증은 나의 자화상의 안과 밖이다"고 말한다). 그는 '나I'의 주체성은 "타자의 시선(욕망) 속에서 구성된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타자가/에 의해 찍힌 얼룩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우리가 정체성(동일성)으로서 알아보는 것은 잘못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잘못 본다는 것이고, 이는 나인 타자를 안보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러한 자아와 타자의 동시성, 혹은 중첩 혹은 타자의 선재성(先在性)을 이런 정체성의 수사 안에서 보유하려는 자, '얼굴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의심하는 자는 잘못보는 의식의 지배력을 최대한 잃어야 할 것이다. 김상표는 그러한 자기-소진, 자기-무화의 방편으로 "한 호흡에 그리기", "아무 생각이 없는 순간에 그리기"를 구사한다. 그는 칼로 긁건 막대기로 긋건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칠하건 극히 짧은 순간에 자신의 '얼굴성'을 수행한다. 그는 어쨌든 알아볼 수 있는 것, 얼굴, 자신과 자신의 가족, 혹은 자신을 투사한 장일순을 그린다. 그의 수행적 표면인 바 캔버스에서 우리는 그가 '무엇/누구'를 그렸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최소한 그가 아는'사람들을 닮아있다. 그들은 김상표의 나르시스트적 자아,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존경하는 구체적 이름과 '얼굴'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그가 튜브에서 짜내고 곧장 캔버스에 바르는 색의 무차별적 혼융과 병치에 의해 해체되어 있다. 그들은 몇 번의 칠하기나 긁기, 긋기에 의해 자기-해체와 자기-구성에 포획되어 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진 이들에게 김상표가 예의를 갖추는 방식은 그가 그들에게 덧씌운 의식적 이미지를 비우고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소환하고 그들을 기괴하게, 강렬하게, 흉측하게 만듦으로써 혹여 그가 알아보고 이해하고 사랑하느라 오해하고 억압했을지 모르는 타자들을 다시 사랑하려고 한다(그는 "나약한 존재자인 나는 먼저 아내와 딸 아이에서부터 동일화하지 않고 타자를 영접하는 것을 배워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가족만큼 이 세상에 내가 알면서 끝내 모르는 타인들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고 행복하기 위해 타자의 '얼굴'(레비나스가 말하는!)을 지워야했던 그 폭력극장의 슬픔이나 고통 같은 것. 그는 자신의 자아의 폭력으로 인한 슬픔, 그와 그의 사랑하는 가족의 '행복'과 무사함이 요구한 폭력을 위로하려고, 자신의 끝 모를 슬픔을 비우려고 그린다. 그래서 그는 너무 많은 땀을 흘리고 유사 실신 상태에 이르는, 내가 자기-소진이라 불렀던 수행을 계속 이어갔다. 100호 크기의 캔버스를 한 호흡에 의한 칠하기·긁기·긋기로 채우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글자그대로 고통이다. 이러한 마조히스트의 고통은 그러나 '자기'-창조의 행복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의식이 개입하지 않은 채로 한 호흡에 의해 이뤄지는 이 퍼포먼스에 자신을 내맡기는 '학대'를 통해 '나르시시즘'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한다. 자기 이미지와 사랑에 빠진 나르시스에게 이 세계의 차이, 모순, 역설, 틈으로 인한 히스테리적 주체의 고통(의 실존)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순간의 행복은 곧 도래할 의식에 의해 더없는 고통으로 화하게 된다. 그는 의심하는 자의 자기-분열에 또 노출된다. 그래서 그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던 기존의 삶에서 일탈하여 새롭게 창조한 '화가되기' 조차도 주체와 동일성의 그늘에 놓여 있던 나르시스적 욕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책이 찾아들었다"고 한탄한다. 행복은 일순간이고 고통은 영원하다. 그는 자신이 그린 장일순이 결국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투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무위당 장일순을 그리면서도 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의 기대를 그에게 기대어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면, 과연 나르시시즘과 타자성은 서로 분리될 수 있을까? 모든 욕망은 나르시시즘에서 출발해서 나르시시즘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으로서의 얼굴성을 확보·획득하는 데 실패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자인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 제목 「나르시스 칸타타」는 자신의 이번 여정이 결국 동일한 것의 회귀에 먹혀버렸음을, 그럼에도 그런 실패를 고백하고 표식하는 자아의 '주권성'을 고지하는 이중적 운동을 공표한다. 그는 나르시시즘을 넘어서 절대적 타자에 이르려는 불가능한 시도에서 일시적 성공의 감각과 지속적 실패의 인식을 획득했고, 이러한 실패인지 성공인지 모르는 여정을 칸타타로서 긍정한다. "내 그림이 분리된 유한자가 절대적 타자성을 품어안고 쏟아내는 구원의 눈물방울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나르시스 칸타타'로서 음악처럼 향유되었으면 좋겠다. 나르시시즘과 절대적 타자성이 서로를 배반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는 不二의 나르시스 칸타타." 물론 이것은 실패한 자의 문장, 예술가-되기에 실패한 지식인의 문장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나처럼 청중이 보는 데서 실패를 무대에 올린 자가 아니라 독방에서 캔버스를 놓고 자신의 지식과 나르시시트적 자아와 싸운 자의 문장이기에 체현된(embodied), 아니 물질성이 찍힌 문장이다. 그는 허약하면서도 단련된 신체, 무차별적인 수십 개의 캔버스, 되는대로 짜고 묻힌/찍은 물감, 그날그날의 슬픔과 공허와 상태, 자기자신을 포함해서 자신의 자아의 확장인 사랑하는 사람들을 섞어서 자신의 칸타타를 지휘했다. 

 

# 3 ● 김상표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내 삶의 스승"으로 모셔온 장일순을 "가장 높은 뜻을 지녔으면서도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 머물렀던" 분으로 묘사한다. 자신을 늘 내어준 사람 장일순을 화가-되기를 통해 반복하려는 김상표의 수행은 자아를 내어주는, 그럼으로써 타자를 품는 그리기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김상표의 회화 (재)전유는 수행, 반복, 신체성, 레비나스의 '얼굴'과 같은 키워드들을 통해 계속될 것이다. 우리와 같은 지식인의 얼굴을 한 사람들, 동시에 주변부에 머무르려는 지식인들에게 더이상 관념이나 의식의 폭정이 '없는' 사태, 사건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김상표가 평화라는 단어를 말할 때, 거기에는 굳이 자기-소진의 과정이나 매개가 없이도 일어나는 만남에의 희망이 내포되어 있을 것 같다. 분리도 의심도 차이도 건너뛰는 예술가의 평화, 사랑. 아마 이런 희망이 충족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의심의 주체에게 평화는 슬픔이나 사랑의 감정을 매개로 찍혀 있을지 모른다. 타자의 얼룩으로. ■ 양효실



Vol.20200311a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황락(黃落) 
                         김종길(1926∼)

 

 



추분(秋分)이 지나자,
아침 저녁은 한결
서늘해지고,

내 뜰 한 귀퉁이
자그마한 연못에서는
연밤이 두어 개 고개 숙이고,

널따란 연잎들이
누렇게 말라
쪼그라든다.

내 뜰의 황락을
눈여겨 살피면서,
나는 문득 쓸쓸해진다.

나 자신이 바로
황락의 처지에
놓여 있질 않은가!

내 뜰엔 눈 내리고
얼음이 얼어도, 다시
봄은 오련만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
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
봄도 없는 것을!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그 붉은 산수유 열매//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서늘한 감각으로 그 옛날 문학청년들 가슴에 뜨거운 선망과 감탄을 불러일으킨 ‘성탄제’의 시인 김종길. 미수(米壽)에 이르신 선생이 시 전문지 ‘유심’에 최근 발표한 작품이다.

황락(黃落)은 한 해의 성장을 마친 식물이 누렇게 물든 잎을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가을이 깊어져 황락의 풍경을 보이는 뜰을 둘러보다가 문득 ‘나 자신이 바로/황락의 처지에/놓여 있질 않은가!’, 새삼 깨닫는 화자다. 이제 곧 겨울이 오겠지. ‘내 뜰엔 눈 내리고/얼음이’ 얼겠지. 그래도 뜰엔 다시 봄이 오련만, 인생의 봄은 다시 오지 않아라.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봄도 없는 것을’…. 선생이 이 시의 시작노트에서 밝혔듯 ‘인생의 일회성이 인생 황락기의 애수의 근원’일 테다. 하지만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소중한 나날들이다. 봄도 한 번이지만 가을도 한 번, 겨울도 한 번이다! 계절은 저마다 아름답다. 쓸쓸하게, 그러나 거칠지 않게 맞이하는 시인의 황락의 계절.

선생님, 몇 해 전 얼핏 뵌 선생님은 머리카락이 숱지시더군요. 제 주위에는 ‘흰머리라도 많이만 있었으면 좋겠네!’ 하는 친구가 한둘이 아니랍니다. 건강과 건필을 빕니다!

[스크랩: 동아일보]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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