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LAY

김은진展 / KIMEUNJIN / 金銀珍 / painting 

 

2022_0518 ▶ 2022_0524

김은진_밤하늘_캔버스에 유채_145×336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37

Tel. +82.(0)2.737.4678

www.gallerydos.com

 

회화의 해부학 ● 전자기파가 투과된 육체의 살갗은 녹아 없어진 듯하다. 뼈 가지들과 장기들이 하얗고 앙상한 모습으로 검은색 배경지 위로 디졸브된다. 살가죽과 피와 조직들이 해제된 채 오직 육체의 핵심만 남아 있는 X-ray 사진은 사각 틀 안에서의 신체의 유한성과 무한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캔버스로 치환시켜 볼 수 있는 이 사각의 틀은 회화가 단순히 대상의 모방이나 재현에서 그치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회화는 단지 표현의 수단이나 방법으로만 활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물감을 여러 차례 덧칠할 수 있고 건조가 느린 유화의 경우 덧칠된 겉면의 안쪽에 화가가 처음으로 의도했던 바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작품의 해제와 해체를 통해 성립되는 이 유한적이고도 무한적인 행위들은 회화에 회화 그 자체로서의 목적성을 부여한다.

 

김은진_The Descent from the Cross_캔버스에 유채_91×72cm_2021
김은진_대화_캔버스에 유채_91×72cm_2021

한 화면이 사라지면서 다른 화면으로 서서히 전환되는 기법인 디졸브는 이전 화면의 밀도가 낮아짐에 따라 겹쳐지는 다른 화면의 밀도가 높아짐으로써 가능하다. 이 기법은 화면을 해제함으로써 구성하고 조립하는 것과 같다. 화면의 연속성을 위해서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장면을 연결 짓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이나 장소의 변화를 의미하거나 우연적이고 특수적인 효과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졸브를 통해 전환되는 화면은 동시성을 기반으로 시공간의 단순 구축이 아닌 융해와 혼합을 창출해낸다. 그 어디에도 위계와 한계는 없으며 새로운 연속과 연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이야말로 하나의 화면 내에서 벌어지는 유한하고도 무한한 동시성의 표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은진_갈대밭 기억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20
김은진_Light blossom_캔버스에 유채_112×145cm_2021

이 경계와 위계가 없는 동시성은 김은진이 창작활동을 함에 있어서 주목하는 부분이다. 김은진의 회화 작품은 디졸브와도 같은 오버랩을 표방하고 X선 사진과도 같은 사각의 틀인 캔버스를 신체와 결부시켜 보기도 한다. 작가는 현실에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일련의 감정들을 캔버스로 옮겨내 시각화함으로써 마주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새로운 감각을 얻어 점화된 이미지들은 다시 작가를 통해 밀려나고 편평해짐으로써 소화된다. 캔버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 치열하고도 무던한 과정은 마치 이미지가 죽음과 탄생을 맞이하는 것과도 같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각 개별적인 속성을 지닌 죽음과 탄생이라기보다는 연속적 속성을 내포하는 죽음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은진_Overlay 2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21

일차적으로 대상이 캔버스에 재현되는 것은 맞으나 김은진은 이 실재를 겨냥하여 층을 숨기거나 노출시키는 등의 변형을 가하면서 그리는 것과 동시에 지워나가는 행위를 충실히 반복한다. 따라서 캔버스 화면의 겉면에 살가죽처럼 흡착되어 있고 거스러미처럼 일어나 있던 감정의 단순 모방이나 재현은 사라지게 되고, 들키고 싶거나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감정 그 이상의 정서와 근본적인 메시지들이 디졸브되어 마치 육체의 핵심처럼 또렷하게 존재하게 된다. 즉 작가가 새로운 붓 터치로 쌓아올리는 화법 이전의 색채들을 덮어 버리는 것이 아닌 새로운 색채와의 혼합을 통해 우연적이면서도 밀접하게 관련짓는 창조와도 같으며, 나이프로 화면의 표면을 긁어내는 화법은 상처의 감촉저럼 피부로 느껴질 수 있는 선형적인 미감을 조성함과 결을 같이한다.

 

김은진_Festival_캔버스에 유채_145×112cm_2020
김은진_밤하늘 갈대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21

그러나 김은진의 작품에 치밀한 계산은 없다. 단지 캔버스를 배경으로 하는 회화라는 매체에 덧칠함으로써 밀어내고 긁어냄으로써 생성하는 화법을 구사하여, 새롭게 발생하는 화면의 우연성과 유기성을 통해 드러내지 않았으나 존재하는 것들로 화면을 전환하는 것이다. 이 계산되지 않아서 불온전하지만 디졸브됨으로써 연속성을 부여받는 화면상의 각 에피소드들은 인간의 경험들과 그것을 통해 이어지는 삶과 연결된다. 이처럼 작가가 회화를 해제하고 해체하며 변형시키는, 회화에 대한 해부와도 같은 이 과정들은 회화를 새로이 재생하게 만든다. 회화가 온전히 회화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갖게 되는 셈이다. 김은진의 작품을 마주한 순간 어느 한 회화의 연대기가 당신 앞에 오버랩될 것이다. ■ 김혜린

 

 

Vol.20220518f | 김은진展 / KIMEUNJIN / 金銀珍 / painting

관계의 경계

김은진展 / KIMEUNJIN/ 金恩瞋 / painting 

 

2021_0616 ▶ 2021_0622

 

김은진_가려진 숲_한지에 채색_80.3×130.3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김은진의 회화-오묘하고 미묘한 숲  "자연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본다. 인간과 인간 간 관계의 오묘하고 미묘한 경계 지점은 어디일까. 인간과 인간이 서로 부딪히며 어울려 사는 관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이처럼 구체적이지 않은 관계의 경계 지점에 대한 고민을 자연 이미지를 통해 표현해본다." (김은진) ● 숲에서 보면 하늘과 맞닿아있는 능선을 경계로 하나의 풍경이 둘로 나뉜다. 하늘을 배경으로 밝게 빛나는 부분과 능선 아래쪽의 어둑한 부분으로. 배경으로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부분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나뭇잎에 난반사되는 빛의 희롱이 보일 만큼 섬세하다면, 능선 아래쪽에서 나뭇잎은 어둠의 일부로 스며든다. 그리고 그 속에 하늘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최소한의 밝은 기운을 품고 있는 어둑한 숲을 배경으로 시커먼 나무들만 보인다(가려진 숲). 그리고 무채색으로 그려져 관념적으로 보이는 곧추선, 어쩌면 앙상한 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그들의 관계). 그리고 눈꽃으로 하얗게 빛나는 나무가(눈꽃), 하늘에 난반사된 빛 조각으로 수런거리는 숲이(시선), 마치 칠흑 같은 밤이 밀어 올린 듯 자기 본연의 빛으로 발광하는, 스스로 발광하는 숲이(어울림) 보인다.

 

 

김은진_그들의 관계_한지에 채색_145.5×97cm_2021

 

그렇게 작가가 보기에 숲은 가려져 보인다. 숲은 뭘 가리는가. 그러므로 뭘 숨기는가. 아니면 뭘 자기 속에 품는가. 나뭇잎의 섬세한 떨림을 가리고, 바람을 숨기고, 빛의 희미한 기미를 품는다.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숲을 일구는 것이지만, 그 관계를 측량할 수도, 그 경계를 가름할 수도 없다. 숲을 볼 때(시선), 숲도 나를 본다(응시). 그렇게 나를 볼 때, 숲은 사물 인격체가 된다. 어쩌면 나에게서 건너간, 내가 부여해준, 그러므로 내가 투사된, 다시 그러므로 전적으로 나에게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를 보는 숲은 타자가 된다. 타자가 된 숲? 타자로서의 숲? 그렇게 숲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처럼도 보이고,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도 보인다. 친근하게도 보이고, 낯설게도 보인다. 과연 나는 그 관계를, 그 경계를, 그 이유를, 그 차이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보통 자연은 치유와 위로의 대상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게 전부인가. 그것은 어쩌면 인간 중심의 일방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인간을 다만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고 했다. 인간을 비하하는 얘기가 아니라, 인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인간과 상관이 없는 자연? 그것은 어쩌면 자연의 본성을 인정하는 일이며, 자연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자연은 치유와 위로의 대상인 만큼이나, 낯선 타자이기도 한 것이다. 좀 과장해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했다. 이제 자연은 다만 풍문으로나 떠돌 뿐이다. 그렇게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은 사실은 자연의 본성 그러므로 타자성을 상실한 것이다. 결국 상실된 자연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복구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인식의 문제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이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자체 망실된 자연의 인식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김은진_나무 달 사이_한지에 채색_162.2×112.1cm_2019

 

그렇게 작가는 시종 나무를 그리고 숲을 그렸다. 꽤 오랫동안 나무를 그리고 숲을 그렸지만 그리면 그릴수록 오히려 그만큼 더 실체를 붙잡을 수가 없다. 비유로 치자면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오히려 숲의 실체에서 더 멀어지는 것만 같다. 숲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 나머지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숲의 실체? 아마도 바람과 대기, 햇빛과 대기가 머금은 습윤한 기운, 헐벗었거나 물이 오른 나무와 나뭇잎, 낙엽이 썩어서 만들어진 흙과 하늘, 순간의 기분과 감정, 바이오리듬 그러므로 생체리듬과 특정의 관점이 그리고 여기에 시종 움직이면서 변화하는 운동성과 실제 혹은 내면에서 공명하는 소리가 어우러진 상호작용의 결과물인 유기적인 화합물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 그렇다면 작가는 숲을 그리면서 아마도 숲의 모든 것, 숲 자체, 그러므로 어쩌면 숲에서 결정적이랄 수 있는 그 상호작용을 붙잡는 데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대개 한가지 소재에 집중한다는 것은 최소한 그것에 관한 한 익숙해지고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강조할 것인지 정하고 가린다는 것이다. 아마도 작가에게는 그 과정이 없다. 익숙해진다는 것, 길들여진다는 것, 생략한다는 것, 강조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실재를 왜곡하는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실재와는 다른 무엇, 다만 실재와 상당하게 비슷해 보이는 무엇,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이미 숲이 아닌 무엇을 그려놓고야 만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김은진_눈 꽃_삼베에 채색_100×100cm_2021

 

숲에 어떻게 익숙해지는가. 숲 그리기에 어떻게 길들여질 수가 있는가. 실재는 결코 붙잡을 수도 가닿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파고들 수 있을 뿐. 그러므로 숲은, 실재는 꼭 그렇게 파고든 만큼만 자기를 내어줄 뿐이다. 그러니 더 많이 파고들 수밖에. 더 깊게 천착할 수밖에. 그러므로 어쩌면 더 자주 헤맬 수밖에. 매번 새롭고 순간순간 다른 실재를 그리는(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현마저 넘어선), 그리고 그 실재에 가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파고드는 것, 파고들면서 자발적으로 헤매는 것, 그것도 매번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없다. 그런 연후에라야 관성적인 그리기에서 벗어날 수 있고, 관념적이고 관습적인 그리기를 넘어설 수 있다. 매번 변하고 순간순간 다른 것을 비로소 그릴 수 있는 일이다. ● 꽤 오랫동안 나무와 숲 그리기에 집중해온 그동안 작가의 그리기를 보면 적어도 이러한 헤매면서 그리기에 성공하고 있는 것 같고, 이로부터 점차 작가만의 그러므로 어쩌면 숲 고유의 아우라가 점차 그 속살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종래에는 내가 숲이 되고 숲이 내가 되는, 나와 숲 사이에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자신과 숲을 주와 객으로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비로소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김은진_시선_삼베에 채색_50×50cm_2021

 

상징주의도 그렇지만, 낭만주의에서 풍경은 상징이었다. 폐허의 상징이고, 시간의 상징이고, 향수의 상징이고, 내세의 상징이고, 죽음의 상징이었다. 죽음으로 삶을 넘어서는 상징이 아니라면, 풍경 자체로는 의미가 없었다. 그 상징의 종류에 차이가 있지만, 동양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무릉도원과 무위자연, 물아일체와 소요유가 그렇다. 모든 그림은 일종의 자기표현의 한 형식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화상이 변주되고 변형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 그렇다면 작가에게 숲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러므로 작가의 어떤 인격을 대리하는가. 작가에게 숲은 가려져 있다. 파고들면 들수록 더 깊이 가려져서 마침내 자기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든다. 그렇게 숲을 일구는 구성 요소들의 관계를 측량할 수도 그 경계를 가름할 수도 없다. 여기서 작가는 자연과 자연과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 간 관계를 본다. 그래서 주제도 관계의 경계다. 관계가 성립하려면 나와 네가 있어야 하고, 주와 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처럼 나와 너의 관계는 전제고 존재론적 조건인 만큼 피할 수가 없지만 도무지 그 관계를 측량할 수도 그 경계를 가름할 수도 없다. 숲이 양가적인 만큼이나 인간 간 관계도 그럴 것이다. 숲이 자기 속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것처럼 인간관계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숲이 자기 속살을 내어주어 품듯 인간관계도 속내를 보여줄 것이다. ● 어쩌면 작가가 보기에 인간관계만큼이나 어려운 일도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숲이 자기를 내어주지 않는 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관성적인 관계에 자기를 내어주지 않고, 관념적이고 관습적인 관계에 타협하지 않는 일이다. 작가 스스로 인간관계가 오묘하고 미묘하다고 했다. 숲이 꼭 그럴 것이다. ■ 고충환

 

 

Vol.20210616f | 김은진展 / KIMEUNJIN/ 金恩瞋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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