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페이스 애니꼴’ 초대전으로 열린 엄상빈의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이
지난 12일 오후3시 일산 ‘애니꼴’에서 개막되었다.



사진가 엄상빈씨를 닮았다. 20여 년 후의 모습같다.



일산인데다 첫길이라 정영신씨 똥차를 끌고 갔더니, 고급 승용차 속에 끼어들기 남세스러웠다.
전시장엔 축하객이 얼마나 많은지, 갤러리 개관 후 최고의 관객동원이 아닌가 싶었다.





반가운 사진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작품을 살펴보니, 마치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치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 온 한민족에 대한 울분이 치밀었기 때문이다.






동포들의 얼굴에 억측 서럽게 살아 온 흔적이 역역했지만, 따뜻한 인간애가 흘렀다.
문명 이기에 물든 우리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순박한 모습이었다.
물론, 오래된 사진들이라 지금은 생활상이 다소 바뀌었겠지만,
달아빠진 서울사람들 같이 빤질거리진 않을 게다.






난, 사진을 돌아보며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다시 절감했다.
남한바닥이야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으나, 연변은커녕 삼팔선도 넘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녘 땅을 밟지 못한 자가 나 뿐은 아니지만. 한 민족이 서로 나 몰라라 사는 현실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하기야! 요즘은 개인주의가 극에 달해 가까이 사는 이웃끼리도 닫고 사는 현실이니, 더 무슨 말을 하랴!






난, 사진가 엄상빈씨가 두만강 변을 기록해 온 걸 전혀 몰랐다.
지인들 전시회나 경조사에는 빠지지 않고 들리는 바쁜 분이 언제 저렇게 귀중한 사진을 찍어 놓았는지 존경감이 일었다.
그동안 속초 아바이마을 사람을 비롯하여 동해안 비무장지대 등 분단과 통일문제에 천착해 온 줄은 알았으나,

연변의 조선족 기록은 짐작도 못했다.






그는 2001년 속초에서 취항한 동춘호를 타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처음 방문했다고 한다.
그 이후 수차례 연변을 방문하며 연변의 시장과 농촌마을 그리고 조선족 학교를 담아왔단다.





그의 눈에 인상 깊게 박힌 것은 차창 밖으로 힐끗힐끗 보이는 두만강이었다고 한다.
엄상빈씨에게 보인 두만강은 민족 분단의 상처를 안고 흐르는 슬픈 강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에게는 유행가 제목처럼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만 각인되어 있다.
얼마나 우리 동포의 한이 서린 강이었으면, 눈물에 젖었겠는가?
삶의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연변 동포의 애환이 절절이 배인 강이다.





그가 보여 주는 두만강은 우리민족의 비애가 흘렀다.
그렇지만, 그의 시선이 머문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정겨웠고, 사람들 표정마다 살가웠다.
동포를 대하는 사진가의 애착과 따뜻한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을 보며 든 생각은 오로지 통일뿐이었다.
더 이상 민족을 갈라 놓을 수 없다는 절박감이 치밀어 올랐다.

"오! 통일이여~어서오라"






사진평론가 최연화씨 사회로 시작된 개막식에서는

연변에서 온 오인철 기자가 엄상빈씨에게 축하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두만강변 사람들'사진집에 서문을 쓴 인류학자 한상복씨와
사진집을 출판한 ‘눈빛출판사’ 이규상대표도 차례대로 축사를 했다.






사진집 제목도 전시명 처럼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이라 정했으나 탈북자를 연상시켜

‘두만강변 사람들’로 갑자기 제목을 바꾸게 되었다는 뒷얘기도 들려주었다.






애니꼴 정인영실장의 갤러리 소개에 이어 작가 엄상빈씨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두만강 변을 드나 던지 길게는 20여년의 여정이고, 짧게는 4박5일에 불과했지만,
자신에게는 애환이 담긴 훈춘이었다며, 간절한 통일의 염원을 사진에 담았다"고 했다. 



 

이 날 참석한 분은 김보섭, 박찬원, 이기명, 박찬호, 강제훈, 김봉규, 양시영, 남 준, 오현경,
제이안 리, 김용철, 장경석, 김지연, 한선영, 임성호, 양시영, 곽명우, 장 숙, 김 원, 김유리, 권 홍
안미숙, 정영신, 성윤미씨 등 성함도 잘 기억나지 않는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사진, 글 / 조문호




두만강변 사람들 / 엄상빈 사진집
-연변 조선족 동포와 두만강의 20년 전과 후
 눈빛 / 180쪽 / 값 25,000원
































































 




충무로 상권이 을지로를 비롯한 주변지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영화와 사진을 대표한 충무로였지만, 요즘은 밤만 되면 한산하단다.



 


지난 11일 충무로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김남진씨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술 한잔하자며 630분까지 갤러리로 오라기에, 전시 오프닝이 있는 줄 알았다.



 


전시장에 들렸더니, 박승만, 송석우, 정휘동씨 삼인전이 열렸는데, 작가들은 보이지 않고 반가운 분만 여럿 있었다.

오늘 오프닝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어제였다며 오늘은 술 한 잔 하기 위해 모였단다.




 

먼저 전시된 사진부터 돌아보았다.

박승만씨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사용했던, 사물에 대한 존재 이유를 나름으로 해석하고 있었고,

송석우씨는 살면서 겪는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정체성의 키워드로 풀어갔다.

바다를 찍어 화면을 분할시킨 정휘동씨는 삶의 공허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 보였다.

젊은이들의 아픔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공통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진 작업에 고민이 많은 분이나, 매너리즘에 빠진 사진가들은 꼭 한번 볼만한 전시였다.




 

이 날 전시장에 모인 분은 브레송김남진 관장을 비롯하여 비움갤러리김상균씨, ‘꽃피다갤러리 김유리관장 등

충무로에서 사진갤러리를 운영하는 세 분이 모여, 의외로 생각되었다.

그 외에도 눈빛출판사이규상씨와 사진가 김문호, 김영호, 이수철씨도 와 있었다.



 


다들 충무로에 있는 중국집 서동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동관은 오랜만에 갔지만, 20여 년 전에는 자주 들린 단골집이다.

삼성카메라클럽에서 현대사진가회로 바뀌며서 옮겼던 사무실이

지금의 해물탕집인 조방낙지 맞은편에 있었기에 종종 들린 것이다.



 


주인도 그대로였지만, 오래된 집기까지 눈에 익었다. 골동품에 가까운 금성에어컨이 아직까지 붙어 있었다.

모든 게 수시로 바뀌는 세태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오래된 것들은 가게나 물건이나 모두 정겨웠다.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니 정영신씨도 왔는데, 충무로에서 50여년을 살았다는 손필수씨가 나타났다.

중부거북상조회회장이라 적힌 명함을 돌렸는데, 충무로 상권을 살리기 위해 애쓰시는 분이었다.



 


아마, 김남진씨에게 충무로 사진축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자리를 주선한 것 같았다.

그래서 충무로에서 사진갤러리 운영하는 분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사진 인들이 힘을 뭉쳐 충무로에 사진바람을 다시 일으켰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때는 충무로가 사진인들의 메카가 아니었던가?

필름현상에서부터 전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이 충무로에서 이루어졌는데, 사진이 디지털화되며 사진인들 발길이 점차 줄었다,

예전에는 길거리에서 반가운 사진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으나, 요즘은 가뭄에 콩나기 수준이다.



201512월 이해선사진상을 수상한 구와바라 시세이선생과 함께한 김한용선생, 오른쪽은 윤주영선생

 


충무로 사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돌아가신 김한용선생 이야기가 나왔다.

그분이 누구인가?

한 평생을 충무로에서 광고사진을 위해 몸 바친 분이다.

선생께서 사용하신 연구소 자체가 우리나라 광고사진의 역사며, 충무로 역사다.



 20147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이명동선생 개인전에서.. 좌로부터 김한용, 정범태, 이명동선생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집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으시던 선생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그러나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며 건물이 매각된다는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었는데,

김남진씨 말에 의하면, 45억에 팔려 철거되었고, 이미 신축건물 완공이 목전에 있다는 것이다.

예상은 했으나 막상 현실로 닥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20147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이명동선생 개인전에서.. 좌로부터 최봉림, 김한용, 강운구, 이명동, 한정식선생

 


그런데 서동관식사비를 손필수씨가 모두 계산해 버려 부담스러웠다.

그 밥 값을 위해서가 아니라, 충무로 사진축제를 비롯하여 충무로가 다시 사진의 메카로 발돋움하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자리가 파하여 김남진씨가 생맥주 한 잔씩만 더 하자지만 사양했다.

통풍으로 맥주는 못 마시지만, 과음하면 숨이 가빠 가급적 자제하는 편이다.




 

집에 돌아왔으나, 사라진 김한용선생 스튜디오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일찍 서울시에 청원을 넣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상황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 살펴보려, 이튿날 아침 다시 충무로에 나갔다.





큰 길 가의 건축물은 마무리 중이었고, 선생의 스튜디오가 있던 골목도 마찬가지였다.

꿈의 공장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곳에 있던 집기나 장식물은 다 어디 갔는지,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김한용선생께서 임종할 무렵에 스튜디오가 있었던 골목길


 

그 곳은 광고사진의 대부이신 김한용 선생께서 60여 년 동안 희망을 키워온 꿈의 공장이며,

우리나라 광고사진의 요람이었다.

선생의 사진 속에는 추억의 스타들과 함께한 추억이 있고, 우리나라 산업 발전사가 담겨있다.

사실, 그 건물은 서울시에서 구입해 광고사진 박물관으로 영구 보존해야 했다.



 


돈 앞에는 역사고 인륜이고 모두 무너지는 현실이 너무 슬펐다.

이제부터라도 사진 인들이 똘똘 뭉쳐야 한다.

사진가들의 권익을 찾는 것은 물론, 우리 사진의 역사는 우리가 지키자.

 

사진, / 조문호

    

















김한용 선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 몇 장을 찿아 보았다.


2016년 5월29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김한용선생께서 운명하신 해 겨울, 충무로 스튜디오를 찾았다.

굳게 닫긴 정문 앞에는 낙엽만 딩굴었는데, 김남진,이규상, 엄상빈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정영신


20147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이명동선생 개인전에서..

20147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이명동선생 개인전에서 장사익씨와 환담을 나누는 김한용선생

20133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홍순태선생 개인전에서..

좌로부터 주명덕,강운구,이완교,황규태,홍순태.김한용,구본창,한정식선생

20133월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홍순태선생 개인전에서..

김녕만씨가 찍은 사진으로  왼쪽부터 윤세영, 권태균, 김남신, 이완교, 조문호, 강운구,

황규태, 송영숙. 민병헌, 홍순태, 김한용, 주명덕, 한정식, 구본창, 박영숙, 최봉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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