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현, 신작 장편 '누가 개를 쏘았나' 출간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소설가 김영현(59) 씨가 한국작가회의 부회장, 실천문학 대표 등 문단 활동을 접고 경기도 양평의 시골에 내려가 집필에만 몰두한 지 벌써 2년째다.

 

그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곳에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양평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흑천'을 걷고 또 걸으며 사색에 잠겼다.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이 사회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고 한다.

 

그가 2007년 '낯선 사람들'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소설 '누가 개를 쏘았나'(시간여행 펴냄)는 그 고민의 결과물이다.

 

책을 내고 2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사람에 대한 분노보다는 위로를 전하고 싶었고 될 수 있으면 서정적이고 순한 언어를 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제는 한물간 검객인데, 녹슨 칼 들고 세상에 나서는 게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그는 말했다.

 

이른바 '민족문학의 대표작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그의 문학에는 고문, 감옥, 분노 등 고통의 언어들로 가득했다. 1984년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한 이래 민족문학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였다.

 

그러나 이번 신작에서 그는 그러한 '녹슨 칼'을 버리고 '치유'와 '희망'이라는 새로운 '칼'을 들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그는 이에 대해 나이가 들면서 세상에 대한 미련도 버리게 되고 "불꽃 덩어리"인 서울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자신 내부의 "불길"을 잠재운 결과라고 말했지만 정작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제가 처음에 시끄럽게 나왔잖아요. 문학을 하는 사람은 싸움꾼과 구도자 둘 중의 하나가 돼야 한다는 화두를 던졌죠. 그 시대에는 그게 맞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문학을 통해서 싸움한다는 것은 허망한 일이 돼버렸죠."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나 단단하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그는 소설 속 여인의 말을 빌려 "이 세상에 탐욕을 이길 힘은 없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그는 절망하기보다는 희망을 노래한다. 소설 속에서는 '사랑'에 방점을 찍어놓았다. "문학이라는 게 엄중한 도덕성이 자기 속에 있더라고요. 99개의 절망을 노래해도 1개의 희망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게 문학인 것 같습니다."

 

소설은 평온하던 한 시골 마을 바람골에 개들이 의문의 총상으로 연달아 숨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로 인해 마을에 수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이 사건이 계기가 돼 주인공 장하림도 바람골에 찾아들게 된다.

 

개를 죽인 범인과 그 이유를 찾는 과정이 소설의 한 축을 담당하며 소설 전체에 팽팽한 장력을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한국 현대사의 무게 있는 주제들을 골고루 녹여낸다.

 

김씨는 이 작품을 신문에 연재할 당시 소설 속에 사회과학적인 얘기를 다 풀어내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이 삭제됐지만 그래도 작품 속에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에 깊게 팬 갈등, 베트남전 참전, 개발이익만을 탐하는 힘있는 세력들의 폭력과 같은 주제들이 담겨 있다.

 

그는 "소설의 영역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단순히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를 골격으로 해서 인문적인 논의, 사회적인 고민이 많이 어우러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문학이 위엄과 영향력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작가가 그 지위를 박탈당하고 천한 엔터테인먼트의 무기로 전락했죠. 예전에는 작가가 한마디 하면 상당한 메시지가 됐는데 이제는 옛날 얘기죠. 글쟁이가 아닌 문인이란 것은 엄중한 이름이죠. 교양인을 뜻하는데, 교양인의 위치에 있는 문인이 많지 않아요. 요즘 시절에는 난망한 일이죠."

 

그는 최근 '죽음에 관한 유쾌한 명상'(가제)이라는 제목으로 넘어설 수 없는 주제인 죽음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한다. 죽음이라는 게 어떤 건가, 죽음에 부닥칠 때의 두려움 등을 유쾌하게 써보려고 한다고 소개했다.

 

더불어 그는 차라리 청동기 시대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며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너무 잔인하고 위험한 시대에요. 세월호 참사로 숨진 학생들을 비롯해 젊은 세대들을 생각하면 무슨 조언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 세대는 성장할 때 살았으니까 그나마 꿈을 꾸면서 살았지만 억눌린 사회구조에서 꿈조차 사라진 그들에게는 뭐라고 해줄 말이 없어요."

 

changyong@yna.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유알아트’ 김영현 대표


고기 잡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물이 부족해 샤워시설도 없는 섬마을 작은 부두에는 배에서 내리는 관광객보다 민박 손님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더 많았다. 일 없는 할아버지는 할머니랑 다툼이 잦았다. 유일한 낙이 있다면 바닷가에 떠내려오는 낚싯대를 건져 손질을 해서 멀쩡한 낚싯대로 만드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고친 낚싯대를 들고 나가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물때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고 사시사철 어떤 고기가 어디에 몰리는지, 어떤 미끼를 쓸지 훤하게 꿰고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 집 담벼락에 운치 있는 간판들이 내걸렸다. 헌 빨래판에 고기잡이 모빌을 덧대어 만든 ‘고기 잡는 집’이란 문패 뒤로 집 안팎에 ‘숭어떼 기다리는 곳’, ‘물고기 말리는 곳’ 같은 팻말도 붙었다.


“할아버지가 주는 낚싯대와 미끼만 있으면 절대로 꽝 치는 일이 없다”는 소문이 나면서 하나둘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물도 부족하고 시설도 낡았지만 “실제 섬사람처럼 하루라도 지내보자”는 슬로건에 육지 사람들은 매료되었다. 대박이었다. 할머니에게도 이제 할아버지는 예전의 일 없는 노인네가 아니다. 노부부 요즘 깨가 쏟아진다.


이들에게 동화 같은 반전을 선사한 사람은 동양화를 전공한 예술가다. 그는 화선지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신, 마을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삶을 따뜻한 ‘이야기’(스토리텔링)와 ‘디자인’으로 채색해낸다. 한 달 동안 섬 주민과 먹고 자고 부대끼면서, 변방으로 밀쳐진 그들의 삶에 이름표를 달아준다. 통영시 매물도의 ‘꽃 짓는 할머니집’, ‘바다마당을 가진 집’, ‘마을을 한눈에 담는 집’들도 그렇게 탄생했다. 문화기획집단 ‘유알아트’의 김영현(49) 대표,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에 가치와 정체성을 되살리는 작업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3월21일 찾아간 유알아트 사무실은 서울 정릉천변 시장통 건물 4층에 있었다.


“어떤 할머니가 시계 만들었는데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가 2/3였다
잠자는 시간은 좁게 만든 거다
이분들은 오히려 학습받지 않은
예술적 감성들을 갖고 계셨다”

통영시 매물도의 작은 부둣가,
하동의 시골 골목길 빗자루가
멋진 예술작품으로 변신한다
동양화 전공자로 시작한 그는
모든 사람을 예술가로 모신다


수천명이 만든 아기장승, 20억 조각보다 빛나


 

-‘유알아트’란 무슨 뜻인가? ‘당신이 예술’이란 뜻인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란 뜻이다. 1998년 뜻 맞는 친구들과 유알아트 만들고 이듬해부터 (화가) 임옥상 선생님과 ‘당신도 예술가’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처음부터 특별한 의미나 개념을 가지고 시작한 건 아니었고 당시에 인사동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드는데 좋은 이벤트 같은 게 없을까 하다가 용감하게 시작한 거였다. 근데 하다 보니 진짜 재밌어졌다.”


‘당신도 예술가’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커뮤니티 아트’ 프로그램으로 불린다. 길거리와 공원, 일상의 공간에서 주민들이 직접 창작에 참여하는 대규모 예술 프로그램인데 그 형식도 다양하고 기발하다. 20m 길이의 광목천 위에 ‘하늘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참가자들이 함께 그려 넣기도 하고, 대형 그물망을 세운 뒤 오색 한지에 각자의 소망을 써서 매달기도 하고, 긴 빨랫줄 위에 매듭과 구슬을 이용해서 인형을 만들어 걸기도 한다.


-참가자들에게는 재미있는 퍼포먼스겠지만 미학적 가치를 매길 만한 예술작품은 아니잖은가?


 

“시민창작자들이 만드는 게 작가들 것보다 훌륭할 때도 많다. 같이 작업하는 친구들(전문작가들)이 행사 초반에 샘플 작업을 열심히 해서 걸어두는데 한 시간쯤 지나면 그걸 다 떼야 하는 상황이 온다. 사람들이 한 500명쯤 모이면 시간이 흐르면서 작가들 작품보다 훨씬 더 재밌는 게 나오기 시작하니까….”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유알아트의 모든 사업을 관통하는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바로 ‘상호학습’과 ‘상호작용’이다. 현장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서로에게 학습되고 서로에게 작용한다는 걸,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나도 실감하게 되었다. 과거가 천재들의 창작 시대였다면 지금은 집단창작 시대다. 시민창작자들이 판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 그 에너지가 진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너무 이념적, 관념적인 의미 부여 아닌가?

 

“2007년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연과 미술창작 프로그램을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때 프랑스 조각가가 만든 20억원짜리 작품이 야외에 전시되고 있었는데, 우리도 ‘당신도 예술가’에서 만든 작품을 그 곁에 쫙 늘어놨었다. ‘아기장승 만들기’ 프로그램에 몇천명이 참여해서 색깔 칠해 만든 거였는데 그걸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장승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 거다. 20억짜리가 아니고.”


-상품화된 예술품의 시장가치와 그것의 문화적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얘긴데.


“20억짜리라고 20억짜리만큼 감동을 주는 건 아니다. 그것보다 몇백만원짜리 예산 가지고 몇천명이 만들었던 작품의 에너지가 훨씬 엄청났던 거다.”

 
-이런 프로젝트의 재원은 어떻게 마련했나?


“초창기인 2000년도에는 예술가 지원금을 300만원 받았다. 하루에 500명 내지 1000명 참여해서 매주 일요일마다 인사동에서 했는데….”


 

-한 회에 300만원?


 

“아니, 1년에 300만원. 그때 지원심사를 맡은 기관이 문예진흥원이었는데 심사위원들이 ‘밥 먹고 종일 그림만 그리는 사람 지원하기도 바쁜데 당신처럼 사람들하고 노닥거리는 데에 돈을 줘야 하냐?’고 하더라. 당시엔 우리가 하는 일들, 커뮤니티 아트, 사람들에게 문화 향유, 창작의 기회를 준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거다. 그러다가 참여정부 들어서면서 내가 하고 있던 일이 ‘참여’의 전형으로 보이게 되고 이후 지원금이 대폭 늘었다. 하루 1000만원씩. 지역에 있는 문예회관을 찾아가 프로그램을 세 개씩 돌렸다.”


 

-엄청난 비즈니스다.


“버스를 대절해서 한 번에 40명 정도 같이 움직였다. 프로그램 한 번 할 때. 버스 한 대, 트럭 한 대, 카니발 한 대를 가지고 가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할머니들은 왜 이장님을 혼내달라 했을까


-그렇게 잘나가는 일을 왜 접었나? 2008년도에 ‘당신도 예술가’ 프로젝트를 돌연 중단했는데.

 
“경남 함안에 프로그램을 하러 내려갔을 때였다. 군 전체 인구가 2만3000 정도 되는 작은 지역이었는데 다른 시골도 그렇지만 조손가정이 많았다. 엄마·아빠 서울 살고 아이만 할머니한테 맡겨놓는…. 보통 그러면 할머니는 애들 ‘밥’이다. 그때 마침 ‘한지 공책 만들기’를 하는데, 손주랑 같이 온 할머니 한 분이 너무너무 잘 만드시는 거다. 옛날 소학교 다닐 때 해보셨다면서. 그래서 아예 메인강사를 보조로 앉히고 할머니가 메인강사를 맡게 하니 꼼꼼하게 잘하시더라. 그 순간 손주의 표정이 바뀌는 걸 봤다. 자기 ‘밥’이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한테 ‘선생님, 선생님’ 하니까. 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 선생님 얘기 잘 들으셔야 돼요, 여기 앉으시고 저기 앉으시고’ 하면서 사람들을 챙겼다. 그러다가 날이 어둑어둑해지니까 애가 갑자기 시무룩해지는 거다.”


-가기 싫었나 보다. 할머니를 더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게. 나한테 다가오더니 ‘대장 선생님, 다음주에 또 오면 안 돼요?’ 하더라. 근데 나를 부르려면 1000만원이 있어야 하질 않나. 가슴이 먹먹했다. 가는 데마다 그런 아이들을 만났다. 그게 계속 누적이 되다가 ‘안 되겠다, 방식을 바꾸자’ 생각했다. 지역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들면 내가 가서 교육을 해주고 그들이 지역 동아리를 꾸리는 식으로…. 어느 정도 교육을 하다 보니까 우리가 안 가도 될 정도가 되더라. 그래서 아예 그만뒀다.”

 

-그래서 그만뒀다고? 하루 1000만원 벌던 사업을?


“활동 영역이 자꾸 늘어나다 보니 함께 일하는 친구들도 힘들어했다. ‘유알아트에 비전맨(vision man)이 되려고 들어왔는데 하다 보니 실무를 치러내는 스태프가 되더라’는 고백들이 나오고. 그래서 참 아팠다. 일도 많아지고 지원도 대폭 확대될 시점이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문을 닫기로 했다. 안식년이 필요하니 1년 동안 각자 살고 싶은 대로 살고 다시 모이자 하고….”


스스로 설정한 안식년 동안 발길 내키는 대로 전국을 유랑했다. 차 트렁크에 낚싯대 싣고 달리다가 배를 타고 돌기도 하고, 명승지 아닌 평범한 마을들을 헤집으며 동서남북 쏘다녔다. 10년간의 유알아트 활동을 반추하면서 삶이란, 예술이란 무엇일까 부단히 되묻는 여정이었다. 그렇게 얻은 해답은 ‘지역’이었다. 일상적 삶이 펼쳐지는 현장, 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채롭게 하는 일. 2010년 유알아트는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후 김영현은 서산과 매물도, 담양의 창평, 칠곡, 하동 등지에서 지역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유알아트를 설명하는 문구가 이전에는 ‘공공문화 개발센터’였다가 ‘삶의 기술 발전소’로 바뀌었다. ‘문화, 예술’과 ‘기술’은 대비되는 개념 아닌가?


 

“기술도 문화의 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삶의 현장에서 전해져 내려온 일상의 기술은 우리의 훌륭한 문화다. 우리가 담양에서 했던 달팽이학당도 동네 사람들의 전통적인 삶의 지혜를 바탕으로 만든 거다.”


-달팽이학당이 뭐하는 곳인가?


“담양 창평이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는데 달팽이는 슬로시티의 상징이다. 보통 지역에서 뭘 배우려면 센터에 가서 배우지 않나. 그런데 우리는 센터가 아니라 동네분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할 수 있는 걸 가르치게 했다. 바느질하는 분은 바느질을, 막걸리 잘 담그는 분은 막걸리를, 자기 집에서 자기가 해왔던 대로 가르치는 거다.”

-달팽이학당 주민교사란 이런 분들을 가리키는 말인가?


“그렇다. ‘산골밥상’이라고 산동네 사시는 할머니 스무 분이 4개 조로 나뉘어서 외지인들이 단체로 오면 밥해 먹이는 걸 하고 있는데 이분들도 다 선생님이다.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몇달 있다가 할머니들이 우릴 찾아왔다. 이장님 혼내줘야 된다고.”

 

-무슨 일이 있었나?


“사람들이 30명 와서 밥해 먹는 프로그램을 한 뒤 재료비 빼고 할머니 한 분당 4만원씩 나눠드렸다는데 화가 나셔서….”


-왜 화가 나셨나?


 

“왜 그런지 맞혀보라. 다섯 분한테 4만원씩 나눠줬는데 화가 났다고, 나더러 이장님 혼내주라고 오신 이유.”


-액수가 작았나?


“그게 아니다. 우리는 이분들을 ‘달팽이학당 교사’라고 불렀고 우리가 할 때는 그 돈을 봉투에 넣어 드렸다. 그러면 할머니들이 며느리나 손주한테 신나서 전화하신다. 놀러오라고, 용돈 주시겠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드릴 때는 봉투에 ‘강사비’라고 써서 드렸거든. 할머니들은 그걸 자식들한테 보이고 싶으셨던 거다. ‘내가 여기서 번 돈이 일당이 아니라 선생님 노릇해서 번 돈이야’ 얘기하고 싶으셨던 건데….”


 

-아하, 그런데 이장님이 그냥 돈만 주셨으니….(웃음)


“자존심이 상하셨던 거지. 이분들이 얘기하는 게 뭐냐면, 이게 똑같은 돈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돈의 가치를 얘기할 때 액수를 가지고 얘기하는데, 이 할머니들에게 돈의 가치는 액수가 아니다. ‘어떤 돈인가’가 중요했던 거다. 일당 받듯이 받는 거 말고, ‘내가 이걸 어떻게 번 돈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사회적 경제니 공유경제니 말들 하는데 중요한 건 돈의 액수가 아니고 그 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가치이다.

이분들에게 이 돈은 자존감이고 스스로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창립 이후 유알아트의 일관된 모토는 ‘사람 중심의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매물도 사람들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해 관광자원화하고, 담양 창평의 지역 장인을 양성해서 토속 문화를 복원하고, 칠곡의 인문학마을공동체 사업을 진행할 때, 가장 근간이 되는 요소는 “당사자성, 지역성, 공동체성”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지역성, 공동체성은 알겠는데 당사자성은 무슨 뜻인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셀프 메이드(self-made). 매물도에 갔을 때도 처음 1년차는 우리랑 작가들이 같이 가서 (설치)작업을 했지만 2년차부터는 주민들이 ‘할 만하네, 만만하네’ 생각하면서 직접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게 진행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북동 오리에 꽂힌 ‘동네형 영현 아씨’


-그런데 사실 이것도 어느 정도 눈썰미, 손재주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내가 태어난 집도 우리 부모가 직접 지으셨다. 근데 요즘은 자기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제 손으로 밥해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점점 준다. 스스로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시대다. 법 없이도 살던 세상이었다가 언젠가부터 법이 법률가들의 전문 영역이 돼버린 것처럼, 일상적이던 예술도 어느 순간 전문가의 영역이 되면서 우리 삶은 더이상 예술적이지도 문화적이지도 않은 것처럼 돼버렸다. 시골 가서 할머니들하고 워크숍하면 되게 재밌는데, 이분들은 오히려 학습받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표현력을 갖고 계시다. 어떤 할머니가 시계를 만들었는데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가 시계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눈금 사이 간격이 일정하지 않단 건가?

“그렇다. 할머니에게 중요한 시간은 넓게, 잠자는 시간은 좁게….”


-재미있는 발상이다.


“요즘 하동에서 ‘골목 갤러리’ 사업을 하고 있다. 거기선 집집마다 할머니들이 빗자루를 만들어 쓰시는데 그 빗자루가 크기부터 모양까지 다 다르더라. 키 작은 할머니들은 조그맣게, 키 큰 사람은 크게…. 그걸 골목에 쭉 늘어놓으니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다. 누구나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고 창작할 권리가 있다. 일상적 삶의 가치가 가장 두드러질 때, 문화가 꽃피고 그 문화를 자양분으로 살아나는 게 예술인데, 이게 권력구조가 되어서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김영현은 공생과 공유의 문화를 통해 사람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다. 조용하고 따뜻하지만 강력한 혁명이다. 동양화 전공자로 출발해 무대미술 감독이었다가 유알아트 설립과 함께 문화운동가, 마을운동가가 되었던 그는 요즘도 새로운 일을 벌이느라 바쁘다. 햇빛온수기와 건조기, 절약형 난로와 화덕을 개발하고 보급하기 위해 ‘자연의 부엌, 마음먹기’라는 전시장 겸 카페도 최근 개점했다.


-당신의 직업은 뭔가?


“16년째 남들이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면 답을 못하고 있는데….(웃음) 어떤 친구가 나한테 ‘트렌드세터’(trendsetter)라고 그래서, 그런가… 하고 있다.”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진행하고 있는데 이 기회에 특별히 홍보하고 싶은 프로젝트는 없나?


“요 사무실 앞 정릉천에 오리들이 사는데, 동네 사람들이랑 그 오리도 보호하고 하천 주변도 살피자고 ‘성북오리’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계속 지방으로 다니다 보니까 내가 사는 동네에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동네에서 놀고 싶다. 동네 좋은 형이 되고 싶다.”


-하하하, ‘동네 형’이 되려면 ‘추리닝’에 슬리퍼부터 장만하셔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네에서 내 닉네임도 정해졌다. ‘영현 아씨’라고….(웃음) 다들 날 그렇게 부른다.”


그의 사무실 창 너머로 석양빛을 받은 정릉천이 내려다보였다. 오리 몇마리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따스한 봄날, 헐렁한 체육복에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담고 천변을 어슬렁거릴 동네 형 영현 아씨의 모습을 조만간 저 오리들도 마주치게 될 것이다.

 

한겨레신문 /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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