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서 유물 공개전

3일부터 연말까지 전시

400년 땅 속 묻혔던 금속활자

정교한 모습 그대로 간직

1437년 세종 명령으로 만든

천문시계 '일성정시의' 부품 공개

개인화기 승자총통도 전시

ㅸ(순경음 비읍), ㆆ(여린히읗), ㅭ(리을여린히읗)…. 전시장에 들어서자 옛 한글 자모가 새겨진 손톱만한 금속 조각들이 관객을 맞았다. 지난 6월 서울 인사동 재개발구역에서 극적으로 발굴돼 화제를 모은 조선 전기 한글 금속활자들이다. 400여 년간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도 활자들은 주조 당시의 정교한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활자들을 품고 있던 깨진 항아리만이 그 옆 바닥에 놓여 낡은 모습으로 그간의 세월을 증언하는 듯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3일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인사동 출토 유물 공개전’을 개막한다. ‘인사동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 정비사업 부지 내 유적’에서 나온 한글 금속활자와 해시계 등 유물 1755점 전체를 출토 5개월 만에 일반에 공개하는 전시다. 유물을 발굴한 수도문물연구원이 박물관과 공동으로 마련했다.

전시 1부 ‘인사동 발굴로 드러난 조선 전기 금속활자’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법으로 만들어진 한글 금속활자 600여 점(사진)을 비롯한 1300여 점의 활자를 만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세종 연간 갑인년(1434년)에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 48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1796년 3월 17일자 정조실록에 정조가 “세종조에 주조한 갑인자를 사용한 지 300여 년이 됐다”는 구절이 나올 정도로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아 오랫동안 쓰인 글자지만, 현존 실물 활자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당시 인쇄한 책과 활자의 서체 및 크기를 비교해 유물 중 총 304자의 주조 시기를 확정했다”고 밝혔다. 예컨대 이번에 출토된 활자 중 ‘火(화)’자와 ‘陰(음)’자 등은 1435년 갑인자로 찍은 《근사록》과 모양이 같은데, 이를 통해 48점을 갑인자로 판명했다. 세조 연간에 만든 을해자(1455년) 42점과 을유자(1465년) 214점은 각각 《능엄경》(1461년)과 《원각경》(1465년)을 통해 연대를 확인했다는 설명이다.

전시장에서 직접 보는 활자들은 책을 찍어내기 위해 만든 만큼 육안으로는 세밀한 부분까지 확인하기 어렵다. 전시장 여러 곳에 비치된 확대경과 사진을 담은 휴대용 컴퓨터를 이용하면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활자 주조를 담당했던 주자소의 현판과 조선시대 활자를 주조한 연혁이 적혀 있는 ‘주자사실 현판’도 전시장에 나왔다.

소일영

2부 전시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조선 전기 천문학’에서는 해시계와 자동 물시계 부품 등 기록으로만 전하던 국보·보물급 유물이 관객을 반긴다. 1437년(세종 19년) 왕명으로 제작된 천문시계 일성정시의는 《조선왕조실록》에 제작됐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일부 모습을 드러냈다. 낮에는 해시계로,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한 시계로 쓰인 도구다. 고궁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해시계 ‘소일영(小日影)’이 그 옆에 있어 이를 참고하면 전체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다. 소일영의 전체 모습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밖에 자동 물시계 부품인 ‘일전(一箭)’도 전시장에 나왔다. 직사각형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린 부품인데, 물시계에서 시간을 알려주는 인형이 작동하도록 구슬을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 개인화기인 승자총통(1583년) 1점과 소승자총통(1588년) 7점 등도 전시됐다. 김인규 국립고궁박물관장은 “국민적 관심을 감안해 작은 조각까지 포함해 출토 유물 전체를 공개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12월 31일까지.

한국경제 /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숭례문에서 남산 정상으로 오르는 성곽길

서울은 1392년에 조선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600년 이상을 우리나라의 대표 도시로 자리해 왔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도 달라지고 특징도 새로워졌다. 조선 시대, 대한제국과 개화기, 근대, 현대에 이르는 모든 시간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뒤죽박죽 섞여있는 그곳, 그 시대를 어느 가을날 걸어보자.

1395년~1422년 조선 한양성 곽길

1395년, 조선 건국 3년만에 경복궁, 종묘, 사직단이 완성되자 이성계는 즉시 서울성곽 축조를 명령한다. 설계와 일정은 이미 정도전에 의해 완료된 상태였다. 평지는 토성, 산악지역은 석성으로 계획했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1396년 겨울 농한기와 가을 농한기 때 전국에서 차출된 총 20만여 명의 백성들은 불과 일년 만에 축조 작업을 마치고 사대문과 사소문까지 준공한다. 변변한 장비도 없이,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돌을 나르고 깎고 다듬어 성과 성문을 만든 것이다. 공사 기간은 1~2월, 8~9월로 일년 중 가장 춥고 더울 때였다. 준공 27년 후인 세종 때는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바꾸고 전면적인 규모 확장 사업을 감행, 12월 겨울 농한기 때 전국에서 32만명의 백성과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해서 오늘날의 골격을 완성했다. 당시 서울 지역 인구가 10만명이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왕조시대, 계급사회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대공사였다. 공사 현장에 투입된 백성 가운데 우리의 조상이 들어있을 확률도 높다. 성곽길 산책을 하며 어쩐지 고마운 마음이 드는 이유도 그것이다. 한양성곽은 이후 1700년대 숙종 때 재정비되었고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크고 작은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1300년대부터 2100년대까지 ‘진행중’인 토목의 현장이자 여행길이라 할 수 있다. 서울성곽길은 모두 4개 구간으로 나눠져 있다. 숭례문에서 남산 정상(1구간), 남산에서 낙산(2구간), 혜화문에서 창의문(3구간), 창의문에서 숭례문(4구간)이 그 코스들인데, 1구간이 비교적 쉽고 편안하다.


가벼운 산책길 백미는 숭례문-남산 1구간

숭례문은 일단 복원 작업을 끝내 1구간 출발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조선의 숭례문은 홍예 아래 문이 열려 있었다. 이 문으로 노량진, 용산 등 성문밖 백성들이 도성을 들락거리며 장사를 하거나 볼 일을 보았다. 숭례문의 문은 일제시대 때까지도 열려있었으나 해방 후 도시 정비 사업을 하면서 굳게 닫혔고 복원이 마무리된 지금까지도 사람이 통과할 수 없다. 숭례문에서 남산 정상으로 오르는 성곽길은 힐튼호텔 앞을 지나 남산공원을 거쳐 가파른 숲길로 연결되어 있다. 조선 때는 군사들이 주둔했을 이곳이 지금은 시장과 호텔과 도서관, 순환도로 등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1코스의 백미는 남산공원 구간이라 할 수 있다. 힐튼호텔 앞 삼거리에서 안중근기념관까지 이어지는 성곽길은 한마디로 눈부신 꿈의 길이다. 새로 축조한 성곽은 왼쪽으로 굽어지며 저 멀리 남산자락과 만나 오묘한 실루엣을 형성하고 있다. 성곽이 끝이나면 남산공원이 등장한다. 예전의 잡다했던 시설물들을 모두 없애고 이제는 백범 김구의 동상과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이시영 선생의 좌상, 그리고 넓은 뜰로 단순화 시켰다. 눈이 시원해지고 걷는 맛이 나는 구간이다. 남산순환도로인 소월로와 만나는 곳은 고가 보도를 만들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도 바로 남산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그야말로 보행 천국인 것이다. 고가 보도를 지나면 바로 안중근기념관이 있다. 산책길에 들어가 볼 만한 곳이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지나 광장을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남산 등산로 겸 성곽길로 이어진다. 이 길은 사계절 많은 사람들이 찾는 서울 최고의 전망 산책길이다. 오른쪽으로는 성곽과 깊은 숲이, 왼쪽으로는 점점 높아만 가는 서울의 마천루와 중심가가 한 눈에 잡힌다. 정상에 올라가면 왼쪽으로는 멀리 안산, 인왕산이, 가운데로는 북악산과 그 뒤로 북한산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낙산과 수락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남산 정상의 팔각정과 N서울타워는 서울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팔각정 앞 광장에서는 수시로 역동적인 공연이 열리고 있으며 N서울타워는 ‘하늘에서 보는 서울의 모습’을 그대로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전망 시설이다.


(왼쪽)운현궁, (오른쪽)전통 혼례 시연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를 걷는 남산한옥마을-운현궁-북촌

일제시대는 있어서는 안되었을 모욕의 역사이지만 그 시대가 만든 근대문화는 그 자체로서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특히 아직도 현물로 남아있고 만져볼 수 있고, 기대어 서볼 수 있는 건축물들은 1800년대 중후반부터 1950년대를 기억하게 하는 문화 유산이다. 조선의 사대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남산 한옥마을, 충무로, 명동성당, 낙원동 천도교중앙대교당, 운현궁, 북촌한옥마을 등에서 만날 수 있는 건축물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충무로와 북촌한옥마을은 일제시대 때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 충무로는 일제시대 때 ‘혼마치’라 불리던 일본인 거주지였고 북촌한옥마을의 적지 않은 한옥들은 우리 전통 방식으로 지은 집이 아닌, 비용과 건축 공정을 단순화한 개량한옥들이다. 식민지가 고착화하는 듯한 1920년대 중반부터 30년대 후반까지는 조선인과 일본 민간인들이 그럭저럭 어우러지며, 때로는 충돌하며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문화적 충격은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뿐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핍박을 받아온 ‘천주교’가 드디어 조정의 인정을 받아내 중림동약현성당을 건축하고 십자가가 경복궁 근정전을 향해 있는 명동성당을 명동 언덕에 완공했다. 기와집과 초가집에만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서구의 건축물들은 생경하고 무서운, 때로는 거부감이 일어나는 괴물이기도 했다. 어디 성당뿐이랴, 구한말 덕수궁 주변은 서구에서 몰려온 기업인, 외교관, 선교사들의 활동 근거였다. 정동에는 서양식 학교가 들어서고 정동제일교회라는 낯선 건물도 올라갔다. 심지어 그 길에 가면 치즈와 커피, 와인과 파스타면을 파는 상점까지 있었으니 ‘어느날 눈 떠보니 세상이 뒤집어진’ 격이었다. 그 문화적 혼란기를 지나온 오늘, 남산 한옥마을에서 북촌으로 이어지는 근대의 동선은 서울 여행의 흥미진진한 볼거리가 되어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는 거리가 되었다.



(위에서 부터)명동성당, 고희동 가옥, 북촌한옥마을

근대 동선의 관람 포인트

남산한옥마을은 조선 시대 선비의 가옥과 문화를 재현해 놓은 곳으로 전통 혼례식도 수시로 열려 조선의 결혼 풍속을 구경하며 새날을 여는 신랑 각시의 미래를 축복해 줄 수 있는 기회의 마을이기도 하다. 남산 자락에 폭 쌓여 있어서 아득한 느낌이고 조선 사대부 저택과 생활상을 볼 수 있으며 2394년 개봉 예정인 ‘서울정도600년기념 타임캠슐’ 등 볼거리도 많다. 중국인들의 관광 필수 코스가 되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게 한적한 산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흠이라면 흠일 수도 있겠다. 명동성당은 ‘순수고딕양식’ 건축물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변형이란 없다. 오직 고딕뿐이다. 오래 머물기에는 무리가 있다. 성지 조성 공사로 다소 복잡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인사동 동쪽에 있는 운현궁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저였다. 당연히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이곳에서 성장했으며 끝내 왕이 되자 ‘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흥선에게 ‘대원군’, 그의 부인 민씨에게 ‘부대부인’이라는 작호가 주어진 것도 같은 시기이다. 당시 운현궁의 규모는 지금의 위치에서 창덕궁 돈화문 앞 사거리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했는데, 일제시대 때 황실의 재산을 몰수한 총독부에서 운현궁을 민간에게 처분, 우여곡절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해방 후 이하응의 후손이 되돌려 받았으나 운영할 돈이 없어 서울시에 매각, 현재는 서울시민 소유가 되었다. 천도교중앙대교당도 일제시대 때 지어진 건축물이다. 민족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지만 정작 설계는 일본인 건축가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맡았고 독일인 건축가인 ‘안톤 페레’의 실무 작업으로 완성되었다. 건축 양식은 ‘분리파 양식’으로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보기 힘든 디자인이다. 이 길의 마지막 코스인 북촌한옥마을은 8경 찾아가기 동선을 따르면 간단히 끝난다. 8경에는 북촌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북촌한옥마을에 가면 두 종류의 한옥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조선의 건축 양식을 답습한 전통한옥으로 창덕궁과 인접해 있는 원서동, 가회동 31번지 일대이다. 북촌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등장하곤 하는 ‘복촌5,6경’ 가회동 언덕에 있는 한옥은 총독부에 의해 건설된 개량 한옥들이다. 최근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고희동 가옥’은 북촌 여행 경험자들에게 새로운 여행 포인트로 인기 있다. 북촌한옥마을은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시민이 사는 주거지이기도 하다. 심하게 떠들거나 단체로 몰려가 핸드마이크로 떠드는 행위 등은 삼가는 게 예의다.

창덕궁 달빛기행&인정전 개방 행사

로맨틱 나이트의 최고봉으로 자리잡은 창덕궁 달빛기행의 2014년 시즌이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지난 4월에 시작한 달빛기행은 11월까지 한시적으로 지정된 날짜(주로 음력 보름 즈음으로 10월 9,10,11일 / 11월 6,7,8일)에 운영되며 밤 8시에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으로 입장, 인정전, 낙선재 후원을 돌아 나온다. 매회 20일 전부터 한국문화재보호재단(02-566-6300) 홈페이지(www.chf.or.kr)에서 예약을 받는다.

낮 관람객을 위한 인정전 내부 개방 행사도 눈여겨 볼 만 하다. 10월 31일까지 매주 목, 금, 토, 1일 4회, 11시, 11시 30분, 오후 2시, 2시 30분에 개방하며 비가 오면 중단된다. 해설사 안내를 받아야 하며 매회 인정전 앞에서 선착순 50명만 참가시킨다.

1960년대 격동기 한국의 민낯 동숭동-종로통-청계천

경복궁 교태전

혜화동, 명륜동, 동숭동 일대가 1990년대부터 대학로라 불리게 된 근거는 이곳과 주변에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한성대학교, 고려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등 많은 대학이 밀집해 있었다는 것과 결정적으로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 등이 서울대 캠퍼스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당시 대학생들의 정신은 온통 민주화와 사회정의 등 개인보다는 공공의 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각 대학교에서 거리로 쏟아져나온 시위대열이 혜화동로터리에서 만나 세력을 넓히고 두 세 배 많아진 행렬은 다시 이화동(대학로 남쪽 사거리)와 원남동(서울대병원 후문 사거리) 등을 거쳐 종로통을 지나 세종로 국회의사당에 집결하거나 경복궁 뒤 청와대를 향하기도 했었다. 동숭동–혜화동–종로통–청계천 등은 시위대열의 단골 동선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동숭동과 혜화동에는 당시 청년 문화를 이끌던 문학과 사회학과 연극의 메카로 자리했고 젊음의 뜨거움과 미래에 대한 고민, 세상에 대한 낯선 분노 등을 삭혀줄 선술집도 이 곳에 유난히 많았다. 종로통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연극 등 문화 공간은 대학로에 비해 적었지만 서울의 대표적인 거리로 기업, 시장, 백화점, 학원, 음식점, 술집, 나이트클럽 등이 줄지어 있었고 상권 또한 이 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하기야 당시에는 강남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았고 신촌이 유일한 부도심 역할을 했을 뿐 문화의 중심은 역시 명동과 종로에 밀집해 있던 시절이었다. 1960~70년대는 서울이 온통 젊은이들로 가득했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청년기에 진입하고 있었던, 가난했지만 나라는 젊은이로 넘치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 시절 그 세대는 이제 50대 이상의 중장년으로 변해 몸은 노쇠해지고 열정의 방향도 달려져 있지만 여전히 높은 인구 분포와 경제력을 기반으로 사회의 중심임을 자처하고 있다. 


청계천으로 이동한 문화 동선

대학로에서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서울산책여행길의 동선은 과거 종로통에서 청계천으로 이동했다. 대학로를 떠나 창경궁 앞 길과 원남동을 지나 종로통으로 나가면 광장시장이 등장하고 청계천은 바로 그 옆으로 흐르고 있다. 발걸음은 대부분 광장시장에서 멈추게 된다. 시장 먹자골목이 이미 유명한 여행지가 되어버렸고, 그 사실을 몰랐다 해도 골목에서 흘러나오는 빈대떡 냄새를 외면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장인(등록상으로는 남대문시장이 최초지만 실제로는 광장시장이 먼저 생겼다) 광장시장에서 먹고 구경하다 청계천으로 내려가면 동선을 정해야 한다. 서쪽으로 걸어가 바로 광화문 광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동쪽으로 걸어 황학동 구간까지 갔다 다시 광화문을 향할 것인지 말이다. 청계천 산책 경험이 없는 여행자라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동쪽의 청계천 문화관이 있는 고산자교 아래까지 갔다 광화문으로 되돌아가는 코스를 권한다. 청계천은 옛날에는 빈곤과 혼잡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서울 여행의 중심이자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명소 밀집지가 되었다. 그래서 청계천 자체만을 걷는 것은 지루하고 재미없을 수 있다. 신설동 서울풍물시장, 황학동 벼룩시장, 동대문패션거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방산시장, 세운상가 일대 공구 거리, 무교동 맛집 거리 등은 산책 중간중간에 오르락내리락할 만한 서울의 명소들이다. 대학로에서 광화문까지의 산책 거리가 불과 6km로 한눈 팔지 않고 걸으면 한 시간이면 주파가 가능하지만, 구경거리 먹거리를 다 들여다보며 걸으려면 6시간 이상 걸리는 이유가 그것이다.

오로지 산책만을 목적으로 걷는다면 광장시장 앞 청계천으로 내려와 곧장 청계광장을 향하고 광화문광장을 거쳐 경복궁까지의 동선을 권한다. 가을 경복궁의 정취가 아름답고 궁궐 산책과 함께 고궁박물관, 민속박물관 등 특별한 볼거리도 많기 때문이다. 고궁박물관은 조선 왕족의 라이프스타일을 체계적으로 볼 수 있는 상설전시가 압권이다. 2층의 1,2,3 전시실에서는 각각 조선의 국왕, 궁궐,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1층에서는 왕실의 의례, 대한제국과 황실, 천문과학 전시가, 지하에서는 왕실의 회화, 궁중 음악, 행차 등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지하 관람실은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 기념 특별전으로 기간 동안 관람 불가).

고궁박물관 ‘천국의 문-평화의 위로의 선물’ 특별 전시

현재 고궁박물관 지하 전시실에서는 현재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 기념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타이틀인 ‘천국의 문-평화와 위로의 선물’에서의 ‘천국의 문’은 피렌체의 ‘산 조반니 세례당’의 제3청동문의 이름으로 기베르티가 1425년부터 1452년까지 제작한 작품이다. 피렌체에 가지 않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이 작품은 2개의 대문을 각각 5구획으로 나눠, 10구획 속에 ‘구약성서’ 이야기를 부조로 나타냈다. 소재는 청동에 금도금. 배경의 건물과 풍경에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회화적 구성과 화려한 장식성을 나타냈는데,’조각을 회화화 했다’는 당대 비난은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으로서도 손색없다’라고 말한 이후 사라졌고 ‘천국의 문(Porta del Paradiso)’ 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확정되었다. 1966년 피렌체 대홍수로 망가졌던 것을 27년의 복원 과정을 거쳐 재현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2개의 세트 중 한 세트(3rd 에디션)가 이번 교황 방한을 계기로 위로와 평화의 선물로 공개된 것이다.


문의 02-3701-7500 / www.gogung.go.kr/
위치 서울시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

매일경제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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