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서초동 한정식 선생 댁을 방문했다.

선생의 연락을 정영신씨가 받았는데, 찾아 뵌 지가 석 달이 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선 집에 불이 나 정신없이 쫓아다니다 보니 세월 가는 줄 몰랐던 것 같다.

 

오랜만에 뵈어 그런지 안색이 좋아지셨다. 

전에는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는데, 삶의 의지가 느껴졌다.

또 하나 외형상 달라진 것은 제자 이일우씨가 사 주었다는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그 날은 가까운 식당들을 두고 자동차로 이동해 ‘늘봄’이란 고급 식당으로 안내했다.

얇게 자른 생고기에 야채를 곁들어 먹는데, 처음 먹는 음식이라 입 맛에 맞지 않았다.

 

선생께서도 귀가 어둡지만 나 역시 귀가 어두운 편이라

정영신씨가 통역을 해 주었는데, 선생께서 맛이 어떠냐?고 물었단다.

“촌놈이라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는데, 정영신씨가 통역을 잘 못했다.

“아주 맛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이 건 무슨 죄목으로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 날 반가운 소식도 전해 주었다.

작년 가을에 발간한 한정식선생의 산문집 ‘마구간 옆 고속도로’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단다.

그리고 새로 나온 사진집 ‘가을에서 겨울로’도 선물하셨다.

일전에 경의선 책거리에 있는 눈빛출판사 ‘예술산책’에서 얼핏 보기는 했으나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사진이 주는 울림이 선생의 오랜 주제였던 ‘고요’보다 큰 것 같았다.

 

일 년 전 사진을 보여 줄 때만해도 스물 장으로 사진집을 만드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았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사진은 량이 아니라 질이었다.

 

대부분의 사진집을 보면 쓸데없는(마음에 들지 않는)사진이 많아 대충 보게 되는데,

엄선된 사진은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볼 수 있어 사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책에 게재된 사진이라고는 열여덟 장뿐이고 글도 많지 않았다.

 

“가을이어서 쓸쓸한 게 아니라, 쓸쓸해서 가을임을 느낀다.

그리하여 내게는 봄도 가을이었다. 봄만 아니라 여름도 가을이고,

심지어 가을조차도 가을이었다.“

 

이 말이 선생의 글이고 마지막에는 경허스님 시로 대신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 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 손가

오호라 이내 몸이 풀끝의 이슬이요 바람속의 등불이라“

 

짧은 글이지만 선생의 심정을 대변한 것으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눈빛출판사’에서 발행한 ‘가을에서 겨울로’사진집 가격은 3만원이다.

한정식 선생의 마지막사진집이며 소량 한정본이라 소장할 가치가 높다.

 

사진을 보니 아옹다옹 다투고 욕심 부리며 살지만,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법문같았다.

 

사진, 글 / 조문호

 

한정식 선생님게서 정영신씨 전시 중에 집에 한 번 들리라는 전화를 몇 차례나 하셨으나.

틈이 나지 않아 전시가 끝난 지난주에야 들릴 수 있었다.

찾아 뵌 적이 한 달이 더 되었는데, 같이 식사하기 위해 부른 줄 알았다.

 

식사도 식사지만, 정영신 전시에 가보지 못해 축의금 전해주려 부른 것 같았다.

뻔한 형편에 전시하는 것이 마음 쓰였는지, 정영신씨께 봉투를 건네 주신 것이다.

항상 걱정만 끼치는 송구함에 차마 고개 들 수 없었다.

 

그 날은 선생께서 비빔밥을 드시는 요일이지만,

복국을 사주겠다며 서초동 초원 복집으로 데려갔다.

꾀죄죄한 행색에, 전 날 술 퍼마신 것을 눈치라도 챘을까?

선생의 세심한 배려에 코끝이 찡했다, 살아 생 전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댁으로 돌아오니, 사모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들릴 때마다 벽에 걸리고 탁자에 진열된 가족사진에 먼저 눈길이 가는데,

누군들 가족사진보다 더 애착 가는 사진이 있겠는가?

 

가족사진 틈에 징그러운 내 꼬락서니도 보였다.

오래 전 선생 생신 때 찍은 단체사진에 끼어 있었는데,

선생님 모습은 젊어 보이는데, 나는 왜 그때부터 늙어 보일까?

 

커피 한 잔 마시는 중에 선생께서 보관하고 계신 사진 파일을 보여주었다.

불면증에 시달리기 전 인사동 작업실을 오갈 때 기록한 사진이라는데,

내년 봄 쯤, 사진집으로 묶을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번에도 그 사진을 본 적은 있으나,

사진이 20여장 밖에 되지 않아 사진집 만든다는 말씀은 없었는데,

가을에서 겨울로란 사진집 제목까지 말씀하셨다.

하기야! 사진 내용이 중요하지 량이 무슨 소용이랴.

 

그 사진들은 이전에 발표된 '고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일상적인 도시풍경이 왜 그리 쓸쓸하고 슬퍼 보이는지 모르겠다.

마치 선생께서 투병으로 사진을 더 이상 못 찍게 될 걸 예견이라도 하신 것 같았다.

 

그 사진들은 선생의 허무하고 쓸쓸한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많은 사진인들에게 귀감이 될 좋은 사진집이 나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선생께서 마음의 병을 다스려 다시 작업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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