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미 작가가 6월 3일부터 9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2층에서 전정미 개인전 박사청구전을 연다. ‘생명나무’란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전정미 작가의 박사학위 청구전이다.

 

전정미 작가가 박사학위 청구전에서 보여주는 <생명나무, Tree of Life> 연작은 연원으로 말해 십여 년을 헤아린다. 이번 청구전은 종래의 흔적과 시간을 중심으로 제작했던 단순 구조를 밀집과 중첩에 기초한 스펙타클양식을 시도한다.

 

이는 작가 자신의 개인사는 물론이거니와 ‘생명나무’라는 테제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신선한 업커런트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전정미의 ‘생명나무’는 엄격히 말해, ‘상징’(symbol)과 ‘알레고리’(allegory, 寓喩)의 접점을 겨냥한다. 상징이라는 측면에서는 생명의 신비를 ‘나무’라는 기표를 빌리되 기표로서 나무가 발하는 기의의 일원적 통일성을 보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주의의 추상 양식을 일컬어 ‘상징적’이라 할 때가 그렇다. ‘여러 가지 기표를 모아서’(sym- ) ‘하나의 뜻을 발하게 한다’(ballein)는 상징의 어원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알레고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작가는 복잡한 기표들의 다원적 분립(分立, segregation)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그녀가 기표들의 유사와 통일이 아니라 ‘하나를 말하면서’(gorein) ‘또다른 하나’(alle-)를 말하는 이중 삼중의 기의를 시도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는 ‘탈근대기’(postmodern era)의 문화적 복합상을 ‘알레고리’라 칭하는 논리와 상통한다. 이 맥락에서, 그녀의 이전 <생명나무>가 순수한 상징을 구사했다면, 근자의 그것은 구조적인 면에서 알레고리를 특성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회갈색을 바탕에 두고 나무와 그 열매라는 동종의 것들을 다루었던 데 반해, 이번 청구전의 그것들은 보색 컬러의 무수한 파편들을 배경에 깔고 생명의 열매 뿐 아니라 열매와는 전혀 다른, 이를테면 품목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이종(異種)의 것들마저 동시에 등장시키는 작위들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인간과 그가 갖고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부품으로 조합하는 <생명나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보색대비의 컬러를 드로잉의 라인으로 삼아 이미지를 그리는 한편 조각들로 파편화해서 가까스로 형상을 환기하는 환영법을 구사한다. 여기에는 컴퓨터 일러스트레이션 기술인 ‘아트웍’(art work)이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대중이미지를 상업적으로 다루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이미지들은 화려한 팝 회화의 진상을 과시할 뿐 아니라 이른 바 원본을 상실한 시뮬라크르들이 부유(浮游) 하는 스펙타클을 부각시킨다. 아트웍에 의해 이미지의 우연성이 증폭되고 이미지와 이미지가 충돌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전체는 라캉의 상징계를 떠나 상상계(imaginary world)에서나 가능한 원초의 생동감을 분출시킨다.

 

전정미의 근작 <생명나무>는 이렇게 해서 해묵은 기독교 상징을 등장시켜 이를 전적으로 그 자신의 것으로 ‘전유’(專有, appropriation)한다.

 

그럼으로써 그녀의 생명나무는 “대지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나무요” “우주의 강건한 받침이자 사람이 사는 온 땅의 버팀목이며 우주를 엮는 고리로서, 인간의 온갖 잡동사니를 그 안에 품는 세계목”(미르치아 엘리아데)에 대한 신앙고백에 머므르지 않고 이를 뛰어넘는다. 아니 그럼으로써, 우리 시대의 상징적 팝 아트의 한 장(章)을 열고자 한다. 상징형식을 이용한 팝 아트의 시도는 작가가 ‘세계목’(world tree)을 빌려 이 시대의 스펙타클을 열기위해 ‘온갖 잡동사니’라고 하는, 서로 연대가 불가능한 이미지의 파편들을 하나의 상징 집단 안에 귀속시키는, 이른 바 ‘캐니벌라이징’(cannibalizing)을 빌림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징 안에서 상징을 알레고리화하는(allegorizing) 다중상징화(multiple symbolizing)를 실시해야 한다. 이는 분명히 말해, 우리 시대의 ‘상징 팝’(symbol pop)의 가능성을 여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전정미가 그 자신의 박사학위 청구전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종래의 자신의 상징 기표들을 해체하고 재조합한다.

 

작가는 이렇게 해서 다룬 결과를 조르쥬 바타이유의 용어를 빌려 ‘비정형의 예술’ 또는 ‘이중예술’로 규정한다. 이에 대해서는 디지털 변형이 기호의 고정 기표를 끊임없이 전복하고 기표체계를 뒤흔듦으로써 가능하다는 걸 자임한다.

 

기존의 미적 카논을 뛰어 넘어 메타미학(meta-aesthetics)의 가능성을 말하고 또 강조한다. 작가의 메타미학은 궁극적으로 지난 십여 년간 스스로 일구어온 자신의 상징체계를 해체하는 데서 시작했다. 지난 날의 경직된 서사구조의 기표들을 유동하는 기표로 전환함으로써, 확정적인 기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부동하는 이미지들을 몰핑(morphing)함으로써 이를 달성하고자 했다. 기표들의 교환과 대체를 시도하고 그럼으로써 고정된 의미계(fixed semantic system)로서의 생명나무를 부동(浮動, floating)의 생명나무로 전치시켰다.

 

이번 청구전은 그 하나의 시범적 케이스를 제시한다. 이번 전시는 기존의 상징체계를 알레고리화함으로써 좀 더 유연하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해체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다중 상징계의 스펙타클 양식으로서 ‘생명나무’를 그려볼 수 있다는 걸 입증한다.

 

이코노믹리뷰 / 허재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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