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이 서럽게 느껴지지 않는 서울 종로구의 낙원동 명소들

 ▲ 각자의 고향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식당들, 주인과 손님이 일행처럼 얘기를 나눈다.
ⓒ 김종성


서울에는 이름만 들어도 한 번 가보고 싶게 하는 흥미로운 이름의 동네 이름이 여럿 있다. 종로구 와룡동은 조선시대 태조 5년(1396년)부터 사용됐으며 '용(왕)이 누워 휴식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삼각산(북한산)자락에 있어 바위와 크고 작은 절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있다는 불광동··· 그런 동네 가운데 들러 보고 싶었던 곳이 '낙원동'이다.

관광객들로 늘 북적이는 인사동 바로 옆의 한적하게 보이는 이 동네는 한자이름도 천국, 파라다이스를 뜻하는 낙원(樂園)동 이다. 아마 서울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동네가 아닐까 싶다. 원래 이름은 탑동(塔洞)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낙원동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1890년대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었다는 탑골공원(당시엔 파고다 공원)담장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면 주머니가 팍팍하고, 세상 빠르기가 버거운 어르신들의 낙원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콩나물국밥 3000원, 동태찌개 3000원, 이발요금 3500원



▲ 할아버지들이 추천하는 수련집은 정말 집밥 같아 마음까지 푸근해진다.
ⓒ 김종성

 
대한민국에 이런 가격이 가능할까 싶지만 이런 가게가 즐비한 곳이 바로 이곳 낙원동이다. 일명 '먹자골목'으로 통하는 곳으로 들어서면 저렴한 가격표에 한 번 놀라고, 바로 옆 인사동과는 다른 식당 분위기에 또 한 번 놀란다. 주인과 손님들이 일행처럼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왁자지껄하다. 상인과 손님이 쉬이 구분되지 않는 건 찾아오는 할아버지들 대부분 오래된 단골이기 때문이리라.

'강원도집', '전주집', '충청도집' 등으로 지역 명을 쓰면서 할아버지들의 향수를 달래고 있는 것도, 소주나 막걸리를 우리가 흔하게 보는 맥주 컵 하나에 가득 담아 단돈 1000원에 파는 잔술도 낙원동에서 볼 수 있는 명물이다. '수련집'과 '부산집'은 할아버지들이 강추하는낙원동 제일의 밥집이다. 대표 메뉴는 가정집 백반과 동태백반. 가격은 3000원으로 똑같다.

낙원동엔 가게 이름만큼이나 소박하면서 정겨운 분위기를 식당들이 많은데 음식도 '집밥'과 가장 가깝다는 점이 참 좋다. 양껏 먹을 수 있어 배도 부르고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져 마음도 푸근해진다. 골목길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두 식당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중국산 김치와 재료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핫바' 등 암울한 식단에 지친 도시의 젊은이들이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단다.

탑골공원 뒤편 상가 입구에 자판기와 이동식 플라스틱 간이 의자가 놓여 있는 '노천카페'는 후식 커피를 마시기 좋은 곳이다. 커피 전용 자판기들이 재미있는데 '보통 진한 커피'와 '약간 쓴 커피'라고 써있는 자판기 커피 값이 각각 200원과 100원이다. 가격만큼이나 미묘한 커피 맛의 차이는 자주 먹어본 사람만 알 것 같다 .

클래식 실버 영화관, LP판 빼곡한 음악 감상실


 
▲ '클래식'한 분위기에 음식과 차값도 저렴해 젊은이들도 찾아오는 음악 카페.
ⓒ 김종성

 
55세 이상은 누구나 영화 한 편을 2000원에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낙원 상가안에 있는 '허리우드 클래식-실버영화관'이다. 하루 네 번 국내외 유명 고전영화를 틀어주어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꽤 높은데 특히 할아버지들로만 북적이는 주변과는 달리 이곳은 할머니들도 보여 반가운 마음이 든다.

낙원동에 온 할머니들이 제일 많이 찾아오는 곳으로 '추억 더하기'라는 음악 카페도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입구의 뮤직 박스 안에 있는 DJ의 부드럽고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곱슬머리를 길게 기른, 수십 년 경력의 신공이 물씬 풍기는 음악 DJ가 손님들의 신청곡과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낙원동에는 이렇게 1970년대 음악다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채로운 카페가 있다. 15만원을 주고 맞췄다는 옛날 교복을 입은 할아버지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으니 DJ가 틀어주는 감미로운 올드팝이 들려온다. 분위기도 깔끔하고 양은 도시락 등 식사는 3000원, 커피 등 차 종류는 2000원으로 저렴한 가격이라 건너편 학원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자주 찾아 온단다.

동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발소다. 기자가 돌아다니며 본 업소만 해도 열 개가 넘는다. 보는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발 가격도 눈길을 잡아끈다. 이발소 특유의 사인볼이 빙빙 돌아가는 가게 앞에는 하나같이 '이발 3500원, 염색 5000원'이라고 쓴 가격표가 나붙어 있다. 이 '착한 가격'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어르신들이 지하철을 갈아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낙원동 일대 이발소를 찾는다.

마음 한 구석이 짠한 내 아버지들, '꼰대'들


  ▲ 어르신들 누구나 얌전해지는 이발소, 낙원동에 열 개가 넘게 있다.
ⓒ 김종성

 
마침 기자도 머리가 많이 길어서 '장수 이용원'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순전히 가위로만 머리를 깎는 '가위손' 이발사 아저씨의 손끝에선 '사각사각' 경쾌한 소리가 들려온다. 거울너머로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고 일렬로 얌전히 앉아있는 할아버지들 모습이 말 잘 듣는 학생들 같아, 슬금슬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들 내 아버지뻘의 분들이라 그런지 어렵기도 하고 가슴 한 구석이 짠하기도 하다. 삶에 큰 트라우마를 남긴 전쟁과 피난, 배고픔을 겪고 (어떤 분은 월남전까지) 산업개발시대엔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만 한 덕택에 자식이나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친화하는데 서툰 어르신들. 결국 자식 세대와의 갈등과 불화로 원치 않던 '꼰대'가 돼버렸다. 전철 경로석이 다른 일반 좌석에서 뚝 떨어져 나있듯, 도시에서 노인은 가깝지만 먼, 낯익으면서도 낯선, 그래서 애잔하면서도 불편하기도 한 존재가 되었다. 어쩌다 나이 드는 일 자체가 문제이자 고통이 돼버렸는지···

더욱 큰 비극은 집 장만하느라 가족 부양하느라 정신없이 살다 보니 미처 '놀이'를 배우지 못했다는 것. 몰입할 놀이가 없는 남자들은 황혼기에 갑자기 생겨난 잉여시간이 버겁다. 이렇게 나이를 먹을수록 가정과 사회에서 마땅히 설 곳을 찾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도시에서 할아버지들이 한참을 방황하다 당도한 곳이 바로 낙원동이다. 이곳은 노인들의 허한 마음을 달래주는 도피처이자 안식처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 되면 포장마차의 안주인 김치 찜, 생선구이가 철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나면서 어르신들의 수다도 정점에 다다른다. 유난히 이곳엔 동네이름에서 따온 '낙원'이라는 이름의 식당과 업소 간판이 많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어르신들을 정답게 품어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정말 '낙원'의 모습과 닮아 보였다.

 

[오마이뉴스 / 김종성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