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things shining

이진원展 / YIJINWON / 李眞元 / painting

2014_0115 ▶ 2014_0129

 

이진원_untitled_리넨에 혼합재료_38×45.5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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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11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2번지)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cafe.daum.net/galleryda


이진원 작가의 작품 속의 예술, 정신성과 자연 (부분발췌) Art, Spirituality and Nature in Yi Jinwon's Works ● 한국 화가 이진원 최근 작품은 모두 예술과 정신성, 자연 상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작가가 그려낸 정적과 절대적 고요함에는 다분한 의도가 내제 되어있다. 작가가 그려낸 '잔잔함'과 '고요함'의 느낌은 靜 이라는 한자로 표현할 수 있다. 이진원 작가의 이 그림은, 바로 잔잔함과 고요함의 마음, 즉 합일(合一)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인 靜을 드러내는 매우 정신적인 작품이다. 이것은 장자가 齊物論이라고 이르는 것, 즉 바로 "하나도 아니면서도 둘도 아니라"고 의미하는 불교의 관념인 不一不二이다. 다시 말해, 천지만물은 상호의존적이고 서로 두루 관통한다; 장자의 나비의 꿈처럼 나비 같은 벌레조차 장자 같은 사람과 어떤 본질적인 연관이 있다. 어쩌면 이진원 작가는 온 몸으로 자연과의 밀접하고 완전한 관계를 맺으며, 이런 관계에서 앞서 말한 '잔잔하게' 고요하고 더할 수 없이 평화로운 그림들이 흘러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그림들은 작가의 눈이라는 하나뿐인 기관을 통한 자연의 시각의 지각적인 경험이 아니라 작가와 자연(또는 기(氣))의 상호적 존재론적 관통에서 비롯된다. 이진원 작가가 그리는 그림은 시각의 지각만으로 표현할 수 없다. 작가는 자연과의 명상적인 관계에 빠져들어 靜을 찾아내며, 이러한 풍경 속에 靜의 마음이나 상태를 드러낸다.

 


이진원_The Forest_리넨에 혼합재료_90.9×72.7cm_2013

 

이진원_untitled_리넨에 혼합재료_90.9×72.7cm_2013

 

이진원_untitled_리넨에 혼합재료_90.9×72.7cm_2013

이진원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동양의 정신적 주제를 다루면서 동양의 전통적인 필법과 한지의 독특한 물성, 동양화 안료같이 두꺼운 종이에 스며드는 먹물 등을 이용한다. . 식물들은 사이 좋은 조화 속에서, 장자의 齊物論의 뜻으로 서로 얽히거나 관통한 것이다. 이것은 혼란한 얽힘은 아니고 상호간에 공명되고 서로 호흡이 맞추어진 관통이기 때문에 식물과 길게 늘어뜨린 뿌리 주변의 물방울 조차 식물과 윗부분처럼의 끝없는 얽힘과 율동적인 춤의 결과물처럼 보이는, 길게 늘어뜨린 뿌리 주변의 작은 물방울을 둘러싸는 쾌적한 기운이 난다. 그림의 윗부분이 어떤 힘찬 상호간의 공명을 지적하는 것 같지 않는가? 이것도 역시 각종 명상이 추구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자연과의 합일(合一), 어떤 완전한 연관성 등을 드러낸다. 이진원 작가는 그러한 정신적 지복을 소박하게, 우아하게, 그리고 진정성 있게 표현한다 더없이 행복한 합일감이 화면을 지배하면서 화면 사각의 가장자리를 넘쳐 우주 속으로 번져 나간다. 인류의 정신적 탐구의 진수를 이렇게 소박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정신적 아름다움에 부치는 송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과학기술을 위주로 하는 현대 문명에서는 자연이 우리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마음껏 이용하는 물건이나 되어 버린 것이다.

 


이진원_untitled_리넨에 혼합재료_72.7×90.9cm_2013

 

이진원_The forest_리넨에 혼합재료_144×111cm_2013

 

이진원_landscape_장지에 채색_162.2×130.3cm_2012

정신 세계의 위기는 인문주의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지식층의 정신적 갈망의 현상; 즉 함부르크나 파리, 베를린, 보스턴, 뉴욕 등 서양의 주요 도시에 스타벅스보다 명상원, 선 수련원 등이 더 많은 현상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서양 사회의 5% 내외의 소수의 사람들만 일요일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 잘 보여 주듯이 개신교나 천주교 등 서양의 전통적인 종교는 서양인들의 정신적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서양의 현대 미술도 역시 근대 인류에게 아무런 정신적인 도움이 안 된다. 그래도 칸트가 생전의 마지막 대표작에서 말했듯이 예술은 인류의 정신적 탐구와 무관하지는 않다. "예술은 완전한 공동체을 향한 매우 기본적인 인간의 열망의 표현이다. 바로 이런 열망은 인간의 정신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바탕이다." 서양의 현대 미술과 아방가르드 미술, (아서 단토가 말한) 탈역사적 미술 등은 (인간이라고 불릴 만한) 인간마다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교육을 받은 서양인들이 교회는 물론, 미술관이나 비엔날레도 안 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서양의 미술계는 완전히 자립적이고 독재적이며 주변 사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서양 미술계의 하나인 존재 이유는 탈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적인 책동을 하기 위해서다. 이진원 작가 같은 작가는 부패한 파리, 뉴욕, 베를린 등 이른바 국제적 미술의 중심지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런 중심들의 최신 유행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일에 몰두해 왔다. 서양의 헛된 화려함의 그림자 속에서 작가들의 꾸준한 노력은 가까운 미래에 보상을 거두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작가들의 (동양식 회화를 통한) 정신적 탐구를 담은 작품은 바로 전세계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 홍가이

Vol.20140115b | 이진원展 / YIJINWON / 李眞元 /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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