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시인 민영 아홉 번째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시의 외길이란 말이 있다. 원로시인 민영(79·사진)의 경우다. 1934년 강원도 철원 태생. 네 살 때 부모와 함께 만주 간도성 화룡현에서 살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두만강 건너 귀국. 1959년 미당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 이력이 이러하니 그는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몸에 새겨져 있다. 그의 아홉 번째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창비)는 ‘나이 듦’에 대한 표식이 저절로 우리 시문학사의 이정표로 내걸리는 풍경을 보여준다. 아니, 해방 전 만주에 대한 기억은 이제 민영 시인이 유일하다고 할 것이다.

“남평역에서 이삿짐 실은 트럭을 타고/ 두만강 기슭까지 달려오자/ 눈앞에 우뚝 솟은 벼랑이 나타났다.// 절벽 위 큰길에서는/ 쏘련군 병사들이 어깨에 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대장처럼 보이는 젊은 장교가/ 입에 문 담배를 탁! 뱉어버리고/ 손을 들었다.// (중략) 흰옷 입은 조선사람을 처음 보는 건 아닐 텐데/ 로스께들은 ‘까레이스끼, 까레이스끼…’/ 손가락질을 하며 너털웃음을 웃었다.”(‘1946년 초여름 두만강에서’ 부분)

67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눈에 밟히는 기억 속 풍경은 고스란히 시가 되고 있다. 남평역은 중국 화룡에서 남쪽 십리 밖에 있는 역참. 일제 당시 만주에서 살다가 조선으로 가는 귀향민들은 남평에서 중국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트럭을 타고 두만강에 도착, 뗏목을 타고 도강을 했다. 열두 살 소년 민영은 해방되던 해,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를 해란강 언덕에 묻고 쉰이 넘은 어머니와 함께 이 땅에 들어온다. 이제 어머니마저 경기도 용인 땅에 누워 있으니 몽매간에도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의 들머리는 또다시 화룡으로 향한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휑뎅그렁한 대합실에는/ 낯선 중국 여자가 난로 옆에서/ 발을 구르며 서 있었고/ 하루에 한번밖에 오지 않는 기차는/ 하루가 지나야 올 것이므로/ 이 을씨년스러운 역사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무모한 노릇,/ 다시 걸어서 마을로 돌아가야 하나?”(‘1946년 봄 만주 화룡역에서’ 부분)

이 두 편의 시만으로 민영은 대륙의 시인이다. 눈동자에선 1946년 봄과 초여름을 번갈아 비추는 영사기가 촤르르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아니, 1946년부터 시인이었던 민영. 시집을 펼치면 만주벌 가을 억새가 춤추고 만주의 거센 바람이 그의 흰 머리를 마구 흔들어대고 있다.

(국민일보)정철훈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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