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감 The Gangwon Pictorial Book, 江原圖鑑

나광호/ NAKWANGHO / 羅鑛浩 / painting.printing

 

2023_0810 2023_0909

나광호_맨드라미_실크스크린, 아르쉬지에 아크릴채색_91×116.7cm_2023

 

개막식 / 2023_0810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공휴일 휴관

 

2023 OCI 어게인 : 귀한인연

후원 / 강원특별자치도_강원문화재단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수송동 46-15번지) 3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종이에 피어난 잡초 다작하기로 유명한 나광호는 평면 회화 범주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늘 색다른 시도를 선보인다. 물감의 맛이 농후한 그림들도 꾸준히 그렸고, 특히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처럼 판화 기법 또한 오래전부터 연구하고 활용해 왔다. 그에게 형식이나 매체를 구분 짓는 행위는 크게 유의미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작가적인 태도 혹은 목적이 그가 지금까지, 앞으로도 수많은 작품을 생산해 낼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광호_질경이_실크스크린, 아르쉬지에 아크릴채색_80.7×121cm_2023

강원도감 전시의 제목 강원도감(The Gangwon Pictorial Book, 江原圖鑑)은 나광호가 작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대학 출강을 위해 강원과 현재 거주지인 남양주를 오가며 길가에서 만났던 식물들의 '도감'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다. 지역을 넘나드는 고속도로 위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시야에 잡히는 풍경에 익숙해졌고, 매주 지나던 길의 자연이 날씨나 시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상황은 그를 차에서 내리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발밑에 즐비한 풀과 꽃에 눈을 마주쳤고, 보살핌과 관심을 받지 못했음에도 한여름의 무더위와 한겨울의 추위, 따가운 폭우와 매서운 눈보라를 묵묵하게 견디며 생경한 색채로써 생명력을 뽐내는, 그 무엇보다 꿋꿋한 모습을 보았다. 특별한 쓰임이나 효용이 없는, 소위 '잡초'라 불리는 식물들에 마음이 갔다. 그래서 그들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판화로 찍어 만든 이미지로 '도감'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 맨드라미, 질경이, 산딸기등 작품의 소재들은 모두 길에서 자생하는, 흔히 만날 수 있는 대상들이다. 사람에 의해 밟히고 발길에 따라 생존의 모습이 달라지는, 야속하지만 수동적인 삶이다. 그들을 종이에 옮긴다. 길가의 식물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 본래 도감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실용적 자료로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온갖 정보가 만연하고 접근이 쉬워진 오늘날의 사회에서 실용성을 상실한 도감을, 그것도 굳이 오랜 시간과 품을 들여 제작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아가 식물학이나 과학, 역사학 등의 학문에 기저를 두고 시작하는 것이 아닌, 미술 작가로서 식물들의 이미지와 조형성에 집중하여 현대판 도감을 제작하는 것은 기존의 도감이 갖고 있는 역할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인간의 관심 밖에 존재하던 길가의 잡초를 화폭으로 들여와 시간을 쏟는 다정한 (어찌 보면 무모한) 행위에 직접 개발한 독자적 판화 기법을 적용하여 외면받던, 쓸모없던 대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나광호는 이와 같은 태도를 자신의 작가노트를 통해 '침몰하던 타이타닉 호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연주자'에 비유한다. 무쓸모 자체가 쓸모가 될 수 있는,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는 일. 여기에 나광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의의가 있다. 실용의 영역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분야가 예술인 것은 어느 정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작품 제작에 있어 통상적이어 왔던 것과 안전할 수 있는 길을 의도적으로 거부해 왔다. 이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태도로, 작가가 지금까지 보여준 작품 활동의 근간이자 핵심이다. 언제나 존재했지만 쉽사리 주목받지 못한 식물에 몸을 낮춰 관심을 주고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림으로 재탄생시키는 방식, 나아가 그 작품들에 하나하나 액자를 맞춰 주고 전시실로 들여와 환한 조명을 선사하며 관객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눈을 맞추게 하는 형태를 통해 소외된 것의 존재감을 극대화하고, 그들을 '도감'의 형태로 기록하여 실재(實在)를 드러낸다. 소외된 대상을 '작품'의 지위로 끌어 올리는 것. 그들의 형태와 색감을 회화적으로 구현하고 조형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것. 이것이 나광호가 만들어 낸 '도감'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나광호_천인국_목판화, 아르쉬지에 옵셋잉크_90×106cm_2023

일반적 판화 공정을 거부하다 나광호는 기존의 판화 기법을 수용하되, 본인이 개발한 독자적 방식을 접목하여 보다 창의적인 과정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그가 이번 전시 출품작 제작을 위해 활용한 기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한 화면 위에 직접 물감을 덧칠하여 채색하는 방식이다. 검정 잉크로 찍어낸 1도 화면 위에 다른 판으로 2, 3도 이상의 색 면을 차례대로 찍어내는 대신 붓에 일정량의 색상 잉크를 머금고 채색을 원하는 해당 영역에 떨어트려 스트로크 없이 판판한 면을 만들어 마감한다. 그렇기에 고도의 집중력과 기술력이 요구되며 완성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수없이 반복하여 채색이 완료되면, 잉크가 올라간 표면 위에 마지막으로 다시 검정 잉크를 사용해 처음과 동일한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찍어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역시 망점은 생성되기 때문에 관람자로 하여금 그야말로 실크스크린 판화처럼 보이게 한다. 장점은 색채 사용에 있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기존의 한계점을 극복하여, 색의 사용이 무한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더욱 회화적일 수밖에 없는 화면을 구축해 낸다. 두 번째는 4도 목판화 기법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제작 방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MDF 합판에 세공용 드릴로 자연물의 사진들을 새겨낸다. 그 후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방식은 기존의 목판화 제작법과 유사하지만, 이 단계에서 결정적 차이가 생긴다. 판에 바르는 잉크의 양, 잉크의 건조 속도가 그것이다. 보통 목판화를 찍어낼 때는 잉크의 양이 중요하다고 배운다. 너무 많은 양을 바르면 찍어내는 과정에서 번지는 등 변수가 커지기 때문이다. 잉크의 양을 조절하여 찍어내면, 다음 판을 올리기 전 충분한 건조 시간이 필요하다. 완벽하게 건조시킨 종이 위에 새로운 판을 찍어낸다. 나광호는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기법을 구사하여 작품을 제작한다. 잉크는 최대한 두툼하게, 그리고 마르기 전에 빨리 찍어낸다. 물론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목판을 찍어내니 이전에 찍은 잉크와 새로 바른 것이 적절히 스미고 섞이면서 보다 극적인 화면이 만들어졌다. 색채는 더욱 다채로워지고, 명암이 극대화되고, 두터운 잉크의 두께로 마감된 표면은 플랫한 판화와는 명확히 다른 묘한 깊이감을 선사한다. 그렇게 찍어낸 이미지 밑에 부착된 이름표들이 눈에 띈다. 쓰인 이름들은 모두 해당 식물의 영문명이 아닌 학명이다. 모두 도감의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결정적 단서로 작용한다. 종이에 바로 적기도, 다른 종이에 써서 오려 붙이기도, 스탬프를 만들어 찍기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내기도 했다. 이름표를 붙여주는 방식에서도 쉽고 편한 길이 아닌, 굳이 어려운 길로, 수많은 갈림길로 돌아가려는 고행적 태도. 그러나 그 과정을 누구보다 즐기고, 누구보다 신나게 돌아가는 자세는 끝없는 시도를 통해 예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는 나광호의 작가적 면모를 체감할 수 있다.

 

나광호_참나물, 취나물, 머위, 조선배추_목판화, 한지에 석판화잉크_110×164cm_2023
나광호_산딸기 잎_목판화, 한지에 석판화잉크_60×162cm_2021

괴물 인간 나광호가 갖고 있는 정체성에 주목하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언제나 자신 있고 열성적으로 작품의 제작 과정이나 내용에 관해 설명해 주는 작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면의 치열했던 시간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한 학기마다 10개 내외의 강의를 거뜬히 출강하고, 여전히 신진작가의 자세로 공모전에 도전하는 전투적 태도에 여유로움까지 탑재한 그의 모습에서는 비범함까지 드러난다. 그의 내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작품의 밀도로 고스란히 환원된다. 어느 날의 대화에서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살면서 만난 많은 분이 제게 여러 별명을 지어 줬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별명이 있습니다. 바로 '괴물'입니다." '괴물'이라는 별명은 학창 시절 얻었다. 같은 실기실을 사용하던 동기들이 겪은 나광호는 일과시간 동안 조교로서 일하고, 퇴근 후 늦은 밤 실기실로 돌아와 동이 트기 직전까지 100호 크기의 유화 한 점을 뚝딱 완성하고 홀연히 사라지더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모두가 하나같이 혀를 내두르며 그를 '괴물'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괴물'. 얼핏 들으면 부정적 이미지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별명의 배경을 듣고 나면, 그리고 작가가 지금까지 작품에서, 나아가 그의 삶에서 보여왔던 자세와 태도를 이해한 후 받아들인다면 단연 최고의 칭찬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포기를 모르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기민하게 치환하는 그의 태도가 배어 있으니 말이다. 작가로서 지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체력이라면서 하루에 줄넘기를 5천여 개씩 뛴다는 그에게 도인의 아우라를 엿본다. 지금의 에너지가 멈추지 않기를, 넘치는 호기심과 변화에 대한 용기,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태도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며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미술 작품을 끝없이 생산해 내 주기를 바란다. 정유연

 

* 이 원고는 '2023 강원문화재단 강원작품개발지원 [강원다운]' 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나광호_맨드라미_목판화, 아르쉬지에 옵셋잉크_106×77cm_2023

역행의 도감(圖鑑) 매일 마주하고 나를 감싸고 있는 자연이 작업의 검은 이미지이다. 밀도 있는 자연의 모습을 목판화로 제작하여 흔하디흔한 식물을 새로 발견하거나 걸음을 멈추고 보게 된다. 색채를 배제하면 형태의 구체성이 부각되는 검은 도감[圖鑑]이 된다. 구체적으로 재현하면 실물 대신 주목한다. 소소한 일상이어서 지나치던 하찮은 풀잎, 무심히 밟고 지나치던 질경이가 프레임에 박제되고 각인되어 프레스의 압[]을 통해 촉감이 된다. 무엇이든 검색하면 세세하게 자연과 식물에 대한 사진과 설명이 나열되는 오늘 날 발품을 팔아 도감을 제작한다는 것은 어쩌면 타이타닉호가 침몰 할 때, 탈출 할 작은 배에 자신들의 탈 자리가 없자 생존을 포기하고 마지막까지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연주자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어떻게 보면 '가장 쓸데없음'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는데 이것이 어쩌면 예술의 역할이자 위치 할 곳, 예술의 태도라 생각한다. 어쩌면 가장 쓸데없어 보이는 소재와 역행하는 태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작품을 제작한다. 내 작업에 있어서 본질, 근원, 오리지널리티, 나의 것은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나의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오랜 시간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의 것은 나의 실제 경험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내가 풍경을 마주하며 느낀 분위기, 뉘앙스, 달아오름, 닭살, 쭈뼛쭈뼛 스는 털, , 시원함, 진짜 풍경을 마주한 감탄사. 이 직관적 느낌과 감각적인 신체적 경험은 바로 고유함이며 오리지널이라는 증거를 뒷받침한다. 작품의 소재가 된 것은 풀, , 나물, 잡초, 시든 식물, 나무들이다. 이 자연의 소재들이 한데 뒤엉켜 '평화'로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질긴 생명력으로 해와 비를 견디며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모습이 무척이나 내 눈길을 끌었다. 이 익숙하면서도 흔하고 평범한 도감의 소재들이 걸음을 멈추게 하고 눈에 각인되고 프레이밍 되고 편집되며 화면에 기록이 된다. 이 익숙하고도 동시에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일상의 모습이 단순하고 강렬하게 새로운 감각의 층위로 이동하고 위치하길 원한다. 내 작업의 최종목표는 그림을 모아 도감[圖鑑]을 제작하는 것이다. 전시와 출판은 미술을 낮은 문턱으로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며 전문가 혹은 미술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목판화, 실크스크린, 에칭으로 제작된 작품을 통해 새로운 미감을 일깨우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나광호

 
 
 
 

matters

김소정展 / KIMSOJEONG / 金昭廷 / painting

2023_0615 2023_0715 / ,,공휴일 휴관

김소정_IYKYK_한지에 먹, 3단화_75×146.5cm_2023

                                                           

                                                                                                                                       2023 OCI YOUNG CREATIVES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공휴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김소정은 사물의 온전한 형태만을 그릴 뿐, 그것의 본질은 설명하지 않는다. 집결한 군중을 그리지만 표정은 그리지 않고, 그들이 쥐고 있는 깃발과 현수막은 그리되 외침과 주장은 비운다. 그의 헌신적인 먹 선은 구체적인 현실로 향하지 않는다. ● 아무도 기억에 남기지 않을 것들,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일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되짚어보는 이유는 내가 목도한 것들이 어딘가 어긋나 보이고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로잡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기에 그저 형태를 분해하고 다시 배치하고 가려보며 이 흥미로운 불편함을 작품이라는 창을 통해 내보일 뿐이다. ● 강한 전달은 이해와 해석의 범위를 좁힐 수 있다. 때로는 은유적인 것이 더 예리하게 새겨지고 오래 기억되곤 한다. 없어도 그만인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무엇'이라 기록하는 행위는 이 시대에 대한 김소정의 나지막한 발언이다. ■ 이영지

 

김소정_Cien Asuntos_한지에 먹, 채색_100×410cm_2023_부분

김소정의 군상 ● 참사와 재난, 전쟁과 분쟁, 긴장과 무장, 범죄와 비리, 차별과 착취, 고독과 중독, 빈곤과 격차. 우리 삶의 망가진 곳은 늘어만 가는데, 고치는 사람보다 망가뜨리는 사람이 많다. 내버려 두면 영영 망가지기에 고치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 군중을 이룬다. 마음속에 의지를 품고, 머릿속에 문제를 채우며, 귓속에 목소리를 담고, 손안에 해법을 쥔 채, 입으로 해결을 말하며, 몸으로 실천을 행한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말과 우리 사회는 몸과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이 발전시킨다는 말에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군중은 곧 우리 조국과 사회를 사랑하여 발전시키는 사람들인 것이다. 1894년 동학 농민과 1919년 조선 민족 그리고 1948년 제주 도민과 1980년 광주 시민은 모두 그런 군중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반란이나 소요를 일으키는 세력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서로 다른 때와 다른 곳에 살았지만,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시선은 한결같았다. 이 한결같은 시선은 지금도 여전하다. 여전하며 강력하다. 강력하게 외면하고 왜곡한다. 법률로 죄를 씌우고 벌금으로 짐을 지운다. 배척하고 고립시킨다. 그래서 김소정의 군상 속 인물은 얼굴을 가렸다. 자칫하면 고치기는커녕 죄와 짐만 얻은 채, 배척과 고립 속에 쉬이 놓이고 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군중은 계속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김소정은 그런 군중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일은 슬픔과 노여움을 가진 이유를 살피는 일이자, 몸과 마음이 무너진 이유를 살피는 일이며, 망가진 곳을 고치기 위해 내딛는 첫걸음이다. 김소정은 바라보았기에 첫걸음을 내디뎠고, 그림으로 옮겼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계속 나아간다면 틀어진 시선을 바로 잡을 것이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과 경청해야 할 소리를 짚어줄 것이다.

 

김소정_Cien Asuntos_한지에 먹, 채색_100×410cm_2023_부분

이러한 태도는 정조와 닮았다. 정조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다. 어른일 때는 아이를 잃고 연인도 잃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거나 변화를 반대하는 세력.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 한 가운데서 오랜 시간 살아남았다. 배척과 고립 속에 살았을 것이다. 슬픔도 알고 분노도 알았을 것이며, 몸도 마음도 무너진 적 있을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망가진 세상이었을 것이다. 나라의 주인인 양 행세하지만, 제 도리는 못하는 수많은 관료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나의 나라를 뜻하는 아국이 아닌 백성의 나라를 뜻하는 민국이란 말을 썼다. 나라의 주인을 고쳐 잡는 말이었다. 재위 기간 대비 가장 많은 능행을 하며 어떤 임금보다 백성을 자주 만났다. 과거와 달리 행차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했고, 억울한 일이 있다면 길을 막고 호소할 수 있게 했다. 군주로서 정조는 자신과 같은 군중을 보았다. 그렇기에 망가진 곳을 발견할 수 있었고 또 고칠 수 있었다. 국가가 아이를 돌보게 했고 노비와 차별을 없앴다. 상권을 독점하지 못하게 했고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게 했다. 학문만큼 무예를 중시하여 방어에 능한 성을 짓고 전투에 능한 군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많고 다양한 백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김소정_Korean Church Christmas_한지에 먹_75.5×60.6cm_2023

과거의 전승과 시대의 변주 ● 김소정은 정조 때 그림을 참고한다. 바라보는 대상이 같기 때문이다. 이때 묘사나 장황 방법은 참고하기 쉽다.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족자, 책자, 병풍'으로 나누어 장황한 '초상, 도상, 군상'이 가지는 구성의 이점은 집중하지 않으면 참고하기 어렵다. 이 점에 집중해 보자. 정조 때 그림은 화성 능행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어진, 의궤, 계병'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그렸다. 어진으로 군주의 의지를 나타내고, 의궤로 행차의 방식을 전달하며, 계병으로 행사를 기념한다. 목적이 다르기에 방식도 달랐다. 덕분에 우리는 화성 능행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여러 관점으로 살필 수 있다. 어진으로 중심 인물을 깊고 섬세하게 살필 수 있고, 의궤로 주변 인물과 여러 사물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살필 수 있으며, 계병으로 모든 '인물, 동물, 사물, 건물, 지형, 산세'를 다양하고 실감 나게 살필 수 있다. 하나의 주제와 그림 간 수직적 연결이 긴밀하고, 세 가지 다른 방식 간 수평적 연결도 긴밀하다. 김소정은 현재 대주제가 넓고 소주제가 약하다. 그래서 낱장과 병풍으로 나눈 그림 간 연결이 비교적 긴밀하지 않다. 어진 속 임금은 의궤와 계병에 나타나고, 의궤 속 행렬은 계병에 나타난다. 세 가지 그림은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 덕에 서로 연결된다. 이 점을 참고한다면 구성이 조화로운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양식의 전승뿐 아니라 구성의 이점까지 취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소정_똑바로만 앉으세요 Sit Straight Only_한지에 먹_76×60cm_2023

이어 다른 선례와 비교해 보자. 조선시대 채색 안료의 수는 26색이다. 정조 때 〈화성능행도〉는 이 중 12색을 썼다. 인물의 형태는 80종류다. 당대 최고의 화원이 7명 이상 붙어 1년 넘게 그렸기에 다채롭고 다양하다. 하지만 관료만 그렇다. 백성은 겨우 넷으로 추릴 만큼 단일하다. 이응노의 군상 〈3·1 만세운동〉은 1945년의 그림인데, 150년이 지나도 백성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들에게 다채로움과 다양함을 안긴 화가는 서세옥이다. 1986년에 그린 〈3·1 만세운동〉으로 14가지 색채와 57종류의 형태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군상은 점차 하나의 색채로 동종의 형태를 반복해 그리는 방식으로 변한다. 일본의 침략과 미소의 냉전이 민족을 말살하고 분열시킨 때를 겪었기 때문이다. 하얀 바탕에 검은 묵색으로 엮은 수많은 인물. 이는 사라지고 갈라진 민족을 되살리고 엮어내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단일성은 정권을 찬탈한 군인에 의해 획일성으로 바뀌었다. 이에 하성흡은 〈화성능행도〉를 참고하여 박승희 열사의 장례 행렬을 그렸다. 이는 단색으로 그린 수묵화가 아닌 여러 형태와 다색으로 그린 채색화였고, 획일화에 시달리는 군중에게 다채로움과 다양함을 주는 회화적 시도였다. 이러한 선례는 후대에 좋은 참고이자 기준이다. 하지만 이르지 못하면 그에 준하는 평이 뒤따른다. 김소정은 서세옥이나 하성흡과 달리 군중에게 색을 입히지 않았다. 군상 속 인물이 얼굴을 가린 이유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칠해야 한다. 단일성을 강조할 시대가 아니며, 선례에 비해 묘사 수준이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현재 안료의 수는 최소 60종이다. 이러한 이점을 살려 색채를 늘려야 한다. 그러면 두 가지 변별력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속한 사회 구성원은 저마다 각양각색의 지향을 가졌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군중으로 뭉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결국 뭉친다. 뭉쳐야만 풀 수 있는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 때문이다. 형태의 다양함에 색채의 다채로움을 얹힌다면 선례에 준하는 표현력을 지닐 것이고, 나아가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만큼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전달력을 지닐 것이다. 추가로 보존력이 필요하다. 어렵게 얻은 표현력과 전달력을 지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낱장은 책이나 첩으로 장황해야 하고 병풍은 더욱 튼튼해야 한다.

 

김소정_환영한다니까요 Guys, I Do Welcome You fr_한지에 먹_75.5×60.6cm_2023

탕탕평평 평평탕탕 ● 이쪽 아니면 저쪽, 민생이 아닌 정권, 승자 독식과 패자 절멸. 우리는 탕평을 잃은 조선시대 붕당 정치가 세도 정치로 변하여 백성의 삶을 영영 망가뜨렸음을 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정당은 거대 양당으로 나뉘고 정책은 사람보다 자리를 우선하며 정권은 승자의 목에 화환을 걸고 패자의 손에 수갑을 채운다. 김소정의 눈은 어느 한쪽 군중만 바라보지 않는다. 둘이면 둘을 보고 셋이면 셋을 바라본다. 지금 우리나라는 김소정처럼 눈이 귀한 사람과 균형 잡힌 발언이 필요하다. 작가의 발언은 작품이다. 작품의 표현력과 전달력은 곧 발언의 힘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선례의 온전한 전승과 이점을 취한 시대적 변주를 바랐다. 두 가지 색채와 형태만 남은 우리에게 작가의 작품이 다시금 다채로움과 다양함을 안겨주길 기대하며. 이상으로 김소정의 군상 비평을 마친다. ■ 김준혁

김을파손죄

김을展 / KIMEULL / 金乙 / mixed media

2022_0407 ▶ 2022_0604 / 일,월요일 휴관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OCI 미술관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

(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틀을 깨는 망치 뻥을 잡는 감옥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 거야 (장기하와 얼굴들 5집 타이틀곡 「그건 니 생각이고」 中) 있는 줄도 몰랐던 길 어쩌다 걸으면서 사명인 척, 어영부영 짜깁던 걸 남다른 맥락인 척, 집히는 대로 욱여넣고 깊이가 아득한 척… 구석구석 덧붙이고 부풀리고 포장하며 인생 살다 보면 질소 과자 욕하기도 뭐하다. 성공한 사족은 '신화', 그르치면 '뻥'이라 부른다. 극적인 일화, 각별한 영감, 근사한 작업관… 뻔한 기대에 김을은, 저서 어딘가에 박힌 글귀로 답했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내가 그린 건 맞긴 한데…기억이 없다. 에스프레소나 한 잔 마셔야겠다." ● 갈 길 간다. 거짓말 한 켤레, 신화 한 벌 없는 벌거숭이로. 의도, 필요, 정치, 계산, 담합? 미주알고주알 누가 뭐라든 우직하게. 우직한 벌거숭이. 그가 김을이고, 그게 드로잉이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작업의 예행', '과정', '에스키스', 드로잉의 지위는 한동안 그랬다. 시험 삼아 해 본 게, 뜻밖에 근사한 경우가 있다. 신다 버릴 작정으로 산 신발, 욱해서 쏘아붙인 별명, 급히 휘갈긴 글씨인데. 팔 걷고 각 잡고 용쓸 땐 나오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연습 삼아 그렸는데 본론보다 나으면? 그럼 그게 본론이다. 드로잉은 그렇게 광복한다. 자세 풀고 힘 빼고 각오를 놓아야 비로소 고개를 내미는, 또 다른 매력과 맥락을 인정받은 것. 너울대는 갑판에서 칼끝으로 두어 점 떠 혀끝이나 달래던 생선 살이, 마침내 '활어회'라는 이름을 달고 차림표에 정식으로 오른 셈이다. 그래서 김을의 드로잉은 우선 '싱싱한 날것'이다. 힘주어 다듬기 전이다. 포장도 미처 못 했다. 거짓을 바를 겨를도 없다. 이 태도를 그는 '솔직', '정직'이라 한다. ● 흰 종이에 건식 재료로 선을 그어야 드로잉인가? 글씨, 조각, 움직이는 놀이 기구, 너덜너덜 곳곳이 찢긴 캔버스… 그에겐 정해진 꼴도, 도무지 딱 맞는 상자도 없다. 회화, 조각, 사진, 영상, 다른 틀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아 억지로 끼울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이미지/텍스트/입체/평면? 죄다 수단일 뿐, 특정 화법에 집착하는 건 바보"라고. ● 예쁘고 멋진 선을 그어야 수십 년 경력의 대가인가? 삐뚤빼뚤한 글씨 "나는 그림을 정말 못 그리는 화가다". 그의 어느 드로잉 속 글귀이다. 잘 그린 드로잉? 드로잉은 '어느 틀에도 종속되지 않기'인데, '규격을 두르고 잣대에 아첨하는 드로잉'이라니. '뜨거운 냉커피'같은 건가? 예쁘게 쌓는 솜씨보다 쌓은 걸 깰 깡에 반한다. 바삭하게 잘 구운 도자를 살피며 새벽녘 흐뭇했던 늙은 도공이, 도로 몽땅 꺼내어 오밤중 망치질이다. 생각이 바뀐 모양. 늘 새롭게 생각하기. 틀 깨기. 타성 깨기. 작품을 망치 삼아. 그게 김을의 드로잉이다. ● '예비', '실험', '유예'와 같은 드로잉의 속성은 본래 '보조', '과정', '미완성'과 늘 맞닿았다. 차라리 그 어떤 형식과 생각의 틀에도 호락호락 팔짱 끼지 않고, '밀당'과 '어장관리'를 거듭한다. 신기하게도 그제야 영원한 '썸'을 타며 자립한다. 태도, 형식, 내용 삼면으로 그가 매일 자유로우려는 이유이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

검정 쇠창살에 가둔 흰 캔버스. "억울해. 그저 '하얀 거짓말'인데." 푸념하듯 삐딱한 자세가 사뭇 능청스러우면서도, 맥락 어딘가 뼈가 씹힌다. 감옥에 갇힌 그림? 죄와 벌엔 성역이 없다. 거짓을 일삼고 양심과 순수성을 훼손하는 양치기 예술, 피노키오 예술은 「Jail」, 감옥행이렷다. ● 전시장 복판에 솟은 오두막 「Twilight Zone Studio」. 그의 작업실이다. 쉰 개가 넘는 '틀을 깨는 망치'가 벽면 하나 가득 들어찼다. 이번 전시의 대표 아이콘이긴 한데, 그래도 저걸 다 쓰려면 그는 꽤나 오래 살아야 할 듯싶다. ● 오락실에 어울릴 듯 심상찮은 모양새의 「Drawing Machine」. 관객이 힘차게 페달을 구를 때마다 팡팡! 종이에 그림을 찍는다. 옆구리의 작은 창 너머로 분골쇄신하는 일꾼 김을 인형이 엿보인다. 이어 나무망치를 두들기고 손바닥만 한 도장을 쿵쿵 찍어본다. 드로잉 완성. 다만 놀이터의 분위기와 호쾌한 타격감이 전부가 아니다. 김을의 머리 실루엣을 따라 박힌 글귀 "Drawing is Hammering". 그리지 않아도 드로잉, 흰 종이(묵은 틀)에 망치질(깨기)도 드로잉이다. '꼭 그려야만 하는 게 아니구나', '고정관념을 쳐부수는 거구나'. 드로잉의 의미와 범위를 아울러 겪는다. 묵은 생각의 틀 '파손'하기. '틀을 망치는 망치'. 그게 바로 김을의 드로잉이다. ● 뿐만 아니다. 전시장 곳곳에 '김을'이 도사린다. 목마와 수레의 머리, 인형의 얼굴, 그림과 조각 곳곳에 등장하는 남자. 눈길을 사로잡는 쏙 빼닮은 민머리와 미소. 여유와 당당함이 반씩 맺힌 입가의 두 줄 주름. 때론 앙증맞고 귀엽게, 가끔은 조자룡 헌 창 쓰듯 매섭게 붓을 찔러대는 성난 아티스트로. 부연이 필요 없는 김을의 분신이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

'심각 vs 익살' 밸런스 게임. 능청스레 둘을 버무린 이 균형은 그의 작업 전반을 꿰는 주요한 리듬이다. 작품 하나하나, 각 섹션의 구성, 전시 전체에 걸쳐 프랙털처럼 등장을 거듭한다. 아기자기한 수레에 달린 해골 나사가 눈길을 끈다. 망치와 감옥은 장난감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요란한 놀이터와 일 년 치 사색을 나직이 내건 벽이 공존한다. ● 줄타기는 단순한 유희이면서 김을의 화법이고, 또한 관객의 몰입 창구이다. "네~에. 그냥 장난이에요-오. 그림 그리기 싫을 때. 이놈¹을 끌면, 그림 그려주니까. 하하-" 붙들고 캐물어도 그의 작업 설명은 대개 한 줄 내외. 나머지는 작업과의 오붓한 동행이 갈음한다. 귀엽고 사납다. 북적북적 황량하다. 초롱초롱 멍하다. 당당히 숨는다. 천진난만 골똘하다. 매몰차게 포근하다. 포복절도 숙연하다. 눈길로 리듬을 타다 어느새 첨벙! 상상 웅덩이에 담근 발을 빼며 뒤늦게 정신이 든다. '쥐락펴락', '롤러코스터', '일희일비'야말로 김을의 대서사에 몸을 싣는 드럼비트이다. 줄곧 무겁고 진중하거나 그저 키치하고 장난스러운 태도는 결국 뻣뻣하고 단조롭기 마련. 오래가지 못한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

"그림 이 새끼" ● 작업 곳곳에 등장하는 글귀가 심상찮다. 뿐인가? 그림을 집어던지는 사람, 날아가다 철퍼덕 처박혀 벽 타고 흘러내리는 그림, 그림과 아웅다웅 핏발 선 눈겨룸, 잘 마무리하다 냅다 긋고 찢은 캔버스까지…유독 그림에 모질고 야멸차다. 노골적인 푸대접에 대놓고 찬밥이다. '화가 맞아?' 싶다. "작품을 망치 삼아", 앞서 김을의 드로잉을 이렇게 소개했다. 작품은 그에게 신줏단지도, 열 손가락 자식도 아니다. 외려 쓰다 내던지곤 툭하면 또 찾는 늙은 망치이다. 실컷 써먹으면 그뿐. 애지중지 품고 안달복달 목맬 이유가 없다. 귀중과 유용은 다르다. 그림은 수단이다. 도구이다. 부산물이다. 확실히 '내 그림은 맞는데 기억이 없을' 법하다.

 

김을_김을파손죄展_OCI 미술관_2022 ​

"PAINTING is PAIN" ● 왜 하필 드로잉인지 알 만하다. '생각은 깊게, 그림은 대충' 하려고. 목표는 발목 잡고, 집착하면 매몰되니까. 괴로우니까. 새빨간 바탕의 경고문 "아트조심"을 작업실 한복판에 떡 걸어둔다. 하루의 절반을 그림과 진하게 끌어안고선, 나머지 절반을 새삼 내외하며 안전거리를 지키는 태도야말로 무엇보다 드로잉스럽다. ■ 김영기 ¹ 끌면, 그림 그리는 동작을 반복하는 자동차 장난감

Vol.20220403c | 김을展 / KIMEULL / 金乙 / mixed media

 

막의 막 Facade In Facade

 

황원해展 / HWANGWONHAE / 黃原海 / painting 

2021_0722 ▶ 2021_0814 / 일,월요일 휴관

 

황원해_Cross Process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10cm_2021

 

작가와의 대화 / 2021_0731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 건축현장을 떠올려본다. 건물의 골조, 겉면을 덮어가는 여러 자재들, 천막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어릿한 형상 등 별개로 확립된 소재들이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밀접히 연관된다. 각각의 역량을 올바르게 적용한, 융합의 물리적 모습이다. ● 황원해는 도심 속 건축물에서 관찰한 장면을 캔버스로 옮긴다. 거대한 조합체 안에서 각각의 요소를 발견해 중첩하고, 비틀어 보고, 녹여내고, 파편화 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수많은 이미지들을 횡단하며 가려진 부피를 가늠해보고, 얕은 단면 속에서 분명한 입체감을 포착한다. ● 평면과 입체의 경계에서 발견한 '막'은 그물망같이 얽히고설키며 조우하는 통섭의 기능을 가진다. 단면의 패턴이 모여 덩어리를 이루는 스크린톤으로 나타나 유영하고, 파사드를 닮은 캔버스 안에서 낯선 세계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며 회화로서의 새로운 융합을 시도한다. ■ 이영지

 

황원해_Cross Process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10cm_2021

지구(인공) 물질의 그림 ; 황원해. 막의 막(Facade In Facade) ● 매끈한 유리 파사드의 반사와 투과, 이와 대비되는 불완전한 건축적 구조 그리고 그 위에 스민 조각난 스크린 톤(screen tone) 1) 은 최근 황원해의 그림에 중요한 재료들이다. 이것은 캔버스 위에서 분해, 재조합되며 새로운 물질적 풍경을 제시한다. 이런 반복적 결과물은 푸르게 일렁이는 화면의 복잡성을 만든다. 하지만 실제 작가가 취하는 장면적 실험은 꽤 명료하다. 화면 안에서 재료 간의 조합을 발견하고 이를 그려나가는 것 그리고 다시 그 상징과 물리적 연결성을 해체하는 것이 현재 그가 회화라는 형식 안에서 몰두하며 일궈 나가는 일이다. 작가는 이 방법을 일종의 크로스 프로세싱(Cross Processing) 2) 에 비유하기도 한다. 3차원의 실제 환경이 지닌 굴곡을 무시한 채 건물의 표피에서 얻은 패턴과 스크린 톤을 결합해 만든 이미지들은 본래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구조를 덧입고 있다. ● 작품의 초기 구성은 이렇듯 추적 가능한 투명성을 지니지만, 이에 비해 그 최종적 상태를 결정 짓는 기준과 절차들은 결코 단순하지 못하다. 그것은 기존에 작가가 주목해온 풍경들이 어떤 변화를 겪어 냈는지를 살펴볼 때 여실히 드러난다. 역사적 층위에서의 시공간을 포착한 「Phantasmagoria(판타스마고리아)」(통의동 보안여관, 2018)는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Crack-ing / Reconstruction / Flake' 등의 단어처럼 줄곧 작가의 시선을 빼앗아온 건축적 구조물의 생성과 소멸의 언어가 이미지를 결정짓는 주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작가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과 더불어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흔적, 기억, 축적, 상충 등에 관한 시각적 기록물이다. 이렇게 발견된 이미지들은 프레임을 비껴가며 중첩되거나 심지어는 부스러지는 벽 틈 사이를 파고들지만 여전히 평평한 세계 위의 회화적 수사법을 놓지 않는다. 캔버스라는 프레임을 통해 현실과 가상적 공간에서의 경계를 흐리고자 하는 시도는 「제 4의 벽(The Forth Wall)」(공간 형, 2020)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황원해_Emul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90cm_2021
황원해_Emul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90cm_2021

이전 작품들이 건축물이 지닌 역사적 특성과 독특한 시각적 요소를 함께 보여줬다면 최근에는 그 표면을 이루는 물리적 작용 그 자체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번 작품을 'Suspension / Slurry / Emulsion' 이라는 물질의 상태적 특성으로 지칭하고자한 작가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표현의 변화는 이미지 수집과 선별의 기준점이 화자의 의도를 지닌 동사형에서 사물 간의 수동적 작용을 그대로 포착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자연을 포함한 인공적 사물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덧붙이기보다는 그것의 작용과 반작용을 지켜보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작은 유리 플라스크 안의 물질들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순간, 혹은 도심 속 거대한 파사드와 광고용 전광판이 모니터 위로 반사되며 뒤엉키는 광경을 바라보는 일 따위를 연상시킨다. 현재 황원해의 시선 역시 이런 관찰과 관망의 사이를 맴돌고 있는 듯하다. 인간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고 재현하는 일은 사실 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습관과 같다. 지극히 사소하고 자연스러운, 그러므로 절대 거대한 사건과 결말을 예언해 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황원해_Shee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1
황원해_Slurr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1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  "지금 이 시점부터 우리에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이 단어는 어쩐지 손 기술에 불과한 것을 의미하는 듯해서 나의 온몸이 거부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단어를 제안한다. 지구생명, 지구생명의 그림." 3) ● 과거 풍경화는 성인이나 영웅이 등장하는 역사화에 비해 단순히 시각적 유희를 만족시키는 낮은 수준의 그림으로 여겨졌다. 그나마 종교나 신화의 인물과 사건의 등장을 암시하는 풍경화 정도가 겨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렇게 미술 아카데미즘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 장르는 한편으론 기존의 규칙과 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 받게된다. 이는 고전 미술 이후 모더니즘의 출발점이 풍경이란 대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도심의 환영은 이제 생물의 자연보다 더 가까이 접하는 또 다른 자연의 개념이 된 상황에서, 황원해의 그림은 다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이 아닌 지구생명이라는 유기체적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본 고전 예술가 4) 의 시도는 어쩌면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새로운 세대로 뭉뚱그려 설명되는 일련의 이미지들에 각자의 열린 결말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가 포착한 일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일에 역사적 사건을 투과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구 환경의 새로운 유기적 성질을 관찰하며 개인의 미적 실험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과거 주류적인 역사화를 넘어 풍경화를 기반으로 취했던 예술가들의 독립적 태도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황원해_Suspen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60cm_2021

콜라주와 매시업, 간과되는 테크닉 ● 회화의 장르적 분류라는 넓은 개념으로 작품을 살펴보았다면 화면을 이루고 있는 구체적 표현 기술은 어떤 양식을 띄고 있을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입체적인 건축물과 가상적 음영 효과인 스크린 톤 사이의 2차원적 결합일 것이다. 이 결합은 실제와 디지털을 오가는 콜라주 형식으로 구현된다. 최초의 콜라주가 재현의 반대인 부재를 겨냥했다면 이것을 이제 하나의 스킬처럼 회화의 구상과 제작, 배치의 과정 전반에 녹아 있다. 이는 현대미술의 이미지 생산에 큰 축을 담당하는 매시업(mash-up) 5) 과 같은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혼용되어 이미지 생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이런 기술의 흔적은(특히 회화에서) 다시 '손기술'을 통해 삭제되기도 한다. 공공연히 하대 받던 '손기술'은 재현의 도구로 간과되는 테크닉이라기보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의도적인 '모호성'을 확보해 주는 요소가 된다. 황원해의 작품 역시 기술과 개념의 적절한 연결 고리를 찾는 이런 디지털 융합의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상의 환경에서 계획된 이미지들 사이에 작가가 만들어낸 붓질과 여백은 화면에 적절한 추상성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작품이 표현하고자 한 물리적 상호작용과 표현성을 강조 시킨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절충적인 시선과 프레임의 모호한 경계를 가로지르며 캔버스라는 인공적 사물을 직면하는 관람자의 지각을 통해 회화의 평면성을 자신의 방식으로 온전히 확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오늘도 우리가 지나쳐온 풍경의 실체적 질료를 파헤치며 또 다른 성질의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가고 있다. ■ 송고은

 

* 각주1) 영상 만화 제작 등에서 회색조 명암이나 무늬, 패턴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도구. 여기서는 과거 종이 원고용으로 사용된 톤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컴퓨터 원고용 톤이 있다. 국립국어원 참조.2) 사진 현상에 사용되는 필름의 제조사와 유형, 빛의 양, 화학 물질 등과 같이 여러 요인을 통해 이미 결정된 표준값 외에 사용자가 의도적으로 그 표준값을 조작하여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뜻한다.3)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 Neun Briefe über Landschaftsmalerei』(1831) 참조. 이화진, 2018, 미술사학연구회, C. G. 카루스의 『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와 지질학적 풍경.4) 앞의 자료. 카루스는 지구생명의 그림(Erdlebenbildkunst)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풍경화의 전통과 자연에 대한 근대적 시각을 비판하고, 셸링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 정신의 동일성을 주장했다.5) 데이비드 건켈,『Of Remixology: Ethics and Aesthetics after remix)』, MIT PRESS, 2016.

 

Vol.20210722b | 황원해展 / HWANGWONHAE / 黃原海 / painting

막의 막 Facade In Facade

 

황원해展 / HWANGWONHAE / 黃原海 / painting 

2021_0722 ▶ 2021_0814 / 일,월요일 휴관

 

황원해_Cross Process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10cm_2021

 

작가와의 대화 / 2021_0731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 건축현장을 떠올려본다. 건물의 골조, 겉면을 덮어가는 여러 자재들, 천막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어릿한 형상 등 별개로 확립된 소재들이 새로운 창조를 위해 밀접히 연관된다. 각각의 역량을 올바르게 적용한, 융합의 물리적 모습이다. ● 황원해는 도심 속 건축물에서 관찰한 장면을 캔버스로 옮긴다. 거대한 조합체 안에서 각각의 요소를 발견해 중첩하고, 비틀어 보고, 녹여내고, 파편화 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수많은 이미지들을 횡단하며 가려진 부피를 가늠해보고, 얕은 단면 속에서 분명한 입체감을 포착한다. ● 평면과 입체의 경계에서 발견한 '막'은 그물망같이 얽히고설키며 조우하는 통섭의 기능을 가진다. 단면의 패턴이 모여 덩어리를 이루는 스크린톤으로 나타나 유영하고, 파사드를 닮은 캔버스 안에서 낯선 세계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며 회화로서의 새로운 융합을 시도한다. ■ 이영지

 

황원해_Cross Process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10cm_2021

지구(인공) 물질의 그림 ; 황원해. 막의 막(Facade In Facade) ● 매끈한 유리 파사드의 반사와 투과, 이와 대비되는 불완전한 건축적 구조 그리고 그 위에 스민 조각난 스크린 톤(screen tone) 1) 은 최근 황원해의 그림에 중요한 재료들이다. 이것은 캔버스 위에서 분해, 재조합되며 새로운 물질적 풍경을 제시한다. 이런 반복적 결과물은 푸르게 일렁이는 화면의 복잡성을 만든다. 하지만 실제 작가가 취하는 장면적 실험은 꽤 명료하다. 화면 안에서 재료 간의 조합을 발견하고 이를 그려나가는 것 그리고 다시 그 상징과 물리적 연결성을 해체하는 것이 현재 그가 회화라는 형식 안에서 몰두하며 일궈 나가는 일이다. 작가는 이 방법을 일종의 크로스 프로세싱(Cross Processing) 2) 에 비유하기도 한다. 3차원의 실제 환경이 지닌 굴곡을 무시한 채 건물의 표피에서 얻은 패턴과 스크린 톤을 결합해 만든 이미지들은 본래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의 구조를 덧입고 있다. ● 작품의 초기 구성은 이렇듯 추적 가능한 투명성을 지니지만, 이에 비해 그 최종적 상태를 결정 짓는 기준과 절차들은 결코 단순하지 못하다. 그것은 기존에 작가가 주목해온 풍경들이 어떤 변화를 겪어 냈는지를 살펴볼 때 여실히 드러난다. 역사적 층위에서의 시공간을 포착한 「Phantasmagoria(판타스마고리아)」(통의동 보안여관, 2018)는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Crack-ing / Reconstruction / Flake' 등의 단어처럼 줄곧 작가의 시선을 빼앗아온 건축적 구조물의 생성과 소멸의 언어가 이미지를 결정짓는 주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작가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과 더불어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흔적, 기억, 축적, 상충 등에 관한 시각적 기록물이다. 이렇게 발견된 이미지들은 프레임을 비껴가며 중첩되거나 심지어는 부스러지는 벽 틈 사이를 파고들지만 여전히 평평한 세계 위의 회화적 수사법을 놓지 않는다. 캔버스라는 프레임을 통해 현실과 가상적 공간에서의 경계를 흐리고자 하는 시도는 「제 4의 벽(The Forth Wall)」(공간 형, 2020)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황원해_Emul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90cm_2021
황원해_Emul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5×190cm_2021

이전 작품들이 건축물이 지닌 역사적 특성과 독특한 시각적 요소를 함께 보여줬다면 최근에는 그 표면을 이루는 물리적 작용 그 자체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번 작품을 'Suspension / Slurry / Emulsion' 이라는 물질의 상태적 특성으로 지칭하고자한 작가의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런 표현의 변화는 이미지 수집과 선별의 기준점이 화자의 의도를 지닌 동사형에서 사물 간의 수동적 작용을 그대로 포착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자연을 포함한 인공적 사물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덧붙이기보다는 그것의 작용과 반작용을 지켜보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작은 유리 플라스크 안의 물질들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순간, 혹은 도심 속 거대한 파사드와 광고용 전광판이 모니터 위로 반사되며 뒤엉키는 광경을 바라보는 일 따위를 연상시킨다. 현재 황원해의 시선 역시 이런 관찰과 관망의 사이를 맴돌고 있는 듯하다. 인간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고 재현하는 일은 사실 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습관과 같다. 지극히 사소하고 자연스러운, 그러므로 절대 거대한 사건과 결말을 예언해 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황원해_Shee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1
황원해_Slurr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30cm_2021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  "지금 이 시점부터 우리에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이 단어는 어쩐지 손 기술에 불과한 것을 의미하는 듯해서 나의 온몸이 거부감을 느낀다.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단어를 제안한다. 지구생명, 지구생명의 그림." 3) ● 과거 풍경화는 성인이나 영웅이 등장하는 역사화에 비해 단순히 시각적 유희를 만족시키는 낮은 수준의 그림으로 여겨졌다. 그나마 종교나 신화의 인물과 사건의 등장을 암시하는 풍경화 정도가 겨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렇게 미술 아카데미즘의 변방으로 밀려난 이 장르는 한편으론 기존의 규칙과 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 받게된다. 이는 고전 미술 이후 모더니즘의 출발점이 풍경이란 대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도심의 환영은 이제 생물의 자연보다 더 가까이 접하는 또 다른 자연의 개념이 된 상황에서, 황원해의 그림은 다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풍경이라는 통속적인 명칭'이 아닌 지구생명이라는 유기체적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본 고전 예술가 4) 의 시도는 어쩌면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새로운 세대로 뭉뚱그려 설명되는 일련의 이미지들에 각자의 열린 결말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예술가가 포착한 일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일에 역사적 사건을 투과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구 환경의 새로운 유기적 성질을 관찰하며 개인의 미적 실험을 지속해나가는 것은 과거 주류적인 역사화를 넘어 풍경화를 기반으로 취했던 예술가들의 독립적 태도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황원해_Suspen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60cm_2021

콜라주와 매시업, 간과되는 테크닉 ● 회화의 장르적 분류라는 넓은 개념으로 작품을 살펴보았다면 화면을 이루고 있는 구체적 표현 기술은 어떤 양식을 띄고 있을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입체적인 건축물과 가상적 음영 효과인 스크린 톤 사이의 2차원적 결합일 것이다. 이 결합은 실제와 디지털을 오가는 콜라주 형식으로 구현된다. 최초의 콜라주가 재현의 반대인 부재를 겨냥했다면 이것을 이제 하나의 스킬처럼 회화의 구상과 제작, 배치의 과정 전반에 녹아 있다. 이는 현대미술의 이미지 생산에 큰 축을 담당하는 매시업(mash-up) 5) 과 같은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혼용되어 이미지 생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이런 기술의 흔적은(특히 회화에서) 다시 '손기술'을 통해 삭제되기도 한다. 공공연히 하대 받던 '손기술'은 재현의 도구로 간과되는 테크닉이라기보다 디지털 기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의도적인 '모호성'을 확보해 주는 요소가 된다. 황원해의 작품 역시 기술과 개념의 적절한 연결 고리를 찾는 이런 디지털 융합의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상의 환경에서 계획된 이미지들 사이에 작가가 만들어낸 붓질과 여백은 화면에 적절한 추상성을 부여해주는 동시에 작품이 표현하고자 한 물리적 상호작용과 표현성을 강조 시킨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절충적인 시선과 프레임의 모호한 경계를 가로지르며 캔버스라는 인공적 사물을 직면하는 관람자의 지각을 통해 회화의 평면성을 자신의 방식으로 온전히 확보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오늘도 우리가 지나쳐온 풍경의 실체적 질료를 파헤치며 또 다른 성질의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가고 있다. ■ 송고은

 

* 각주1) 영상 만화 제작 등에서 회색조 명암이나 무늬, 패턴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도구. 여기서는 과거 종이 원고용으로 사용된 톤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컴퓨터 원고용 톤이 있다. 국립국어원 참조.2) 사진 현상에 사용되는 필름의 제조사와 유형, 빛의 양, 화학 물질 등과 같이 여러 요인을 통해 이미 결정된 표준값 외에 사용자가 의도적으로 그 표준값을 조작하여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뜻한다.3) 카를 구스타프 카루스,『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 Neun Briefe über Landschaftsmalerei』(1831) 참조. 이화진, 2018, 미술사학연구회, C. G. 카루스의 『풍경화에 대한 아홉 개의 편지』와 지질학적 풍경.4) 앞의 자료. 카루스는 지구생명의 그림(Erdlebenbildkunst)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풍경화의 전통과 자연에 대한 근대적 시각을 비판하고, 셸링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 정신의 동일성을 주장했다.5) 데이비드 건켈,『Of Remixology: Ethics and Aesthetics after remix)』, MIT PRESS, 2016.

 

 

Vol.20210722b | 황원해展 / HWANGWONHAE / 黃原海 / painting

2021 CRE8TIVE REPORT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展 

2021_0121 ▶ 2021_0320 / 일,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GR1_김민호_김정은_손승범

이호억_전주연_정철규_천창환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요일 휴관

관람시간은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

www.ocimuseum.org

 

 

작가의 작품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마음을 동하게 하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분명 내면의 어딘가를 건드리는 자극이 있는데, 그 감정을 표현하자니 적당한 꾸밈말들이 쉽게 쌓이지 않습니다. ● 세상에는 언어로서 표현되지 않는 많은 감정이 존재합니다. 형상을 분석하여 기술하고 누군가의 이력에 기반하여 그 의도를 추리하는 것은 잠시 접어두고, 우선 작가의 시선과 감정을 천천히 쫓아가 볼까요. 그 어디쯤 내 나름의 상황과 감성을 투사해 다소 엉뚱한 생각들을 늘어놓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렇게 작품 하나가 내면에 천천히 똬리를 틀기 시작하면 언젠가 우리 일상에서 불쑥, 마치 데자뷔처럼 튀어나오기도 하겠죠. 작품에 담긴 작가의 시선 하나 손길 하나가 어느새 스며들어 나 자신을 생각하게 하는 정신 활동, 이것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예술의 힘일 것입니다. ● 2021년 1월,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0기 입주작가들의 사유가 작품이라는 다양한 형상과 구조로 재현되어 이곳에 자리합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울림이 여러분 내면에 존재하는 감성적 몰입을 이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GR1_2020_종이에 페인트 마커, 액자_각 79×55cm×27_2020

 

GR1은 도심 사이 오래된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 그 흔적을 작품 전면으로 촘촘히 드러냅니다. 나날이 집합되어 그 덩치를 키워가는 대도시는 좁은 골목을 밀고 또 밀어 결국 어둡고 스산한 담벼락밖에 남지 않았지만, 언젠가 찬란한 도시를 만들어 냈을 법한 낡은 용광로의 열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불쏘시개의 역할은 얼굴과 이름을 숨긴 채 당장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소수입니다. 다수의 침묵을 깨우는 소수의 고함은 골목길의 담벼락에서 캔버스로 옮겨져 여전히 그 열기를 유지합니다.

 

김민호_결 시리즈_한지에 피그먼트 프린트_각 140×73cm×32_2020

 

김민호의 시선은 일련의 사건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장소 또는 상황이 갖는 다수의 장면을 쌓으며 오히려 사건 자체를 희석시킵니다. 보통 관련 데이터가 모이면 문제의 모양새는 선명해지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연관된 이미지를 흔들고 새로운 수를 둠으로써 완벽한 재현에 그 의미를 가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목전의 사건만을 바라보는 매몰된 시야에서 벗어나 보다 능동적인 전개를 통한 다각도의 사유를 권합니다.

 

김정은_물,길_01_필름인쇄, 아크릴채색_130×600cm_2020

 

김정은은 변화된 길의 모습을 기록하고 교차하며 기억과 경험의 보편적 가치를 되새깁니다. 작가가 다루는 물길은 사람이 이용하는 일정한 너비의 공간 아래를 흐릅니다. 과거로 사라진 시간을 품은 채 여전히 그 여정을 지속하는 물길은 어느 산자락을 가르고 이내 자갈 사이를 스쳐 날마다 새로운 흔적을 남깁니다. 작가는 그 과정을 추적하여 과거와 현재의 교차지점을 조형적 시각으로 읽어내고 객관적 지표로서의 지도가 아닌, 개인의 기억과 시간이 담긴 지도를 만들어냅니다.

 

손승범_사라지는 라오콘_장지에 먹, 과슈_227.3×181.8cm_2020

 

손승범은 믿음의 대상이거나 그 매개체 역할을 하는 고대 조각상과 함께 바위라는 원형적 형태를 재현하고 한낱 잡초나 곧 부러질 듯 앙상한 나뭇가지로 그 형태를 과감히 지워나갑니다. 맹목적인 믿음이나 변화라는 새로운 생성 과정의 이면에는 잊혀지고 소외된 것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작가는 믿음이라는 행위에 앞서 그것이 참이라 여기는 마음 자체를 다시 살펴보길, 피상적인 삶에 익숙한 우리가 본질을 좇아 구하고 생각해 보길 제안합니다.

 

이호억_무진(無盡)_종이에 먹과 석채_130×600cm_2020

 

이호억은 자연 속의 고유한 개인으로 천착하여 이미지를 발췌하고 장면을 채집합니다. 자연을 담던 날의 온도, 냄새, 습기는 작업을 하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도 입체적인 자료로 활용됩니다. 산맥을 뒤덮은 억센 뿌리를 붉은 실로 꿰매어 상처와 회복에 대해 고민하고, 산보다도 거대한 구름 아래 자신은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자연은 나 자신을 살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 작가는 자연에서 얻은 이치를 작품에 투사해, 보는 이의 감정과 정신을 일으켜 세웁니다.

 

전주연_묽은 프로젝트_트레팔지 위 수성잉크 프린팅, 투명 아크릴_각 16×21cm×300_2020

 

전주연의 작품은 습기의 막이 한 꺼풀 씌워진 것처럼 흐릿하지만 명료하지 않은 만큼 또 다른 이야기가 스며들 영역을 마련합니다. 어떠한 대상에 비추어 헤아리는 방법을 통해 끊임없이 확장하는 미술언어는 채득을 위한 연속적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언어적 사고의 틀, 인지에 대한 기대효과에 매몰되는 것을 탈피해 텍스트를 다른 감각으로 이행하는 작가는 언어의 세계와 미술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유의 과정을 온전히 즐기고 또 실험합니다.

 

정철규_누구든지 오셔도 됩니다_옥스포드 원단 위에 손바느질 드로잉_55×72cm_2020

 

정철규의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제스처가 작품 전체를 아우릅니다. 군데군데 긴 침묵이 끼어들 만큼 조심스러워 진행이 느릴지라도 허투루 풀어놓지 않으며 조금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밀어내지도 않습니다. 거칠고 직접적인 것보다 때로는 꺼질듯한 속삭임과 가느다란 감각들이 더 예리하게 마음을 꿰뚫기도 하죠. 작가는 오래 바라보고 자주 다시 생각해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의 가치를 꺼내 올립니다.

 

천창환_성수대교_캔버스에 유채_130.3×130.3cm_2020

 

천창환이 읽어내는 공간은 매우 다양한 감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무심한 듯 텅 빈 면적은 곁에 둔 강렬한 틈새 하나로 인해 예민한 긴장감을 가지고, 납작하고 도톰한 붓질이 교차되며 매우 헌신적인 표정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감각의 조각들은 스쳐가는 수많은 풍경의 틈새들을 채우며 되풀이된 적 없는 하루를, 서로 닮은 적 없었던 여러 밤들을 떠올리게 해 보는 이의 심리적 공감을 유도합니다. ● 모두를 지치게 했던 지난 한 해, OCI미술관 10기 입주작가들은 우리가 스치듯 지나는 장면을 쉬이 넘기지 않았습니다. 시선이나 정성이 깃들지 않는 곳을 깊게 들여다 보고, 잊혀지고 소외된 것들을 크게 안아 살피며, 섬세한 감각으로 대상을 거두어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스며든 이야기를 내어 놓았습니다. 이들의 시선과 손길이 상처입고 지친 우리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입주작가들의 다음 행보에도 큰 응원과 관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이영지

 

 

Vol.20210121b | 2021 CRE8TIVE REPORT-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展

○○이 머문 자리 The Scene Where ○○ Stayed

 

송수민展 / SONGSUMIN / 宋修旼 / painting

2020_0616 ▶︎ 2020_0711 / 일,월,공휴일 휴관

 

송수민_○○으로부터 만들어진 묶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0cm_202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91130h | 송수민展으로 갑니다.

 

작가와의 대화 / 2020_0704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9:00pm / 일,월,공휴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0)2.734.0440~1

www.ocimuseum.org

 

 

이미지의 연대 ● 1980년대 서구미술현장에서는 디지털 기술에 의한 시뮬라크르로 구성된 현실을 닮은 세계에 대한 담론을 상당히 심도 있게 다루었다. 예술에 있어서 비물질의 문제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다. 그 전조는 이른바 탈매체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1960년대 이후부터였다. 198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회화의 정체성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알다시피 근대미술의 탄생과 기술매체의 발명과 같은 매체 문명의 전환기에는 늘 회화의 위기론, 종말론이 반복되었다. 돌이켜보면 입체주의자들이 일상의 파편을 회화 속에 기입하고 뒤샹이 제품설명서 이미지를 유리판에 새겨 넣어 마치 필름처럼 사용한 방식은 그리기란 재현 방식을 일상적인 방식으로 변용, 차용, 확장하여 회화를 동시대적으로 갱신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사진 위에 유화 물감을 덮어씌운 "초과회화 사진(Overpainted photographs)"라는 회화적 실험을 전개한다. 리히터는 초과회화 사진 작업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진은 거의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100퍼센트 그림이다. 회화는 항상 리얼리티를 포함한다: 누구나 물감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그림으로 귀결된다... 나는 사진을 물감으로 문질렀다(smeared). 그랬더니 그 문제가 해결되었고 심지어 그것은 내가 주제에 대하여 말한 그 어떤 것보다도 나았을 정도로 좋았다." * 리히터의 말대로 형상을 인식할 수 있는 장면이 과연 리얼리티를 담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탈진실 시대(Post-truth era)의 이미지는 원본의 부재 또는 변용을 넘어서 가상세계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대체현실이 되레 현실을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리얼리티는 단순히 가상과 현실의 문제를 넘어선 상태를 의미한다.

 

송수민_○○이 머문 자리 6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20

 

언뜻 보면 송수민의 회화는 포스트 인터넷 세대라 불리는 작업 유형을 공유한다. 송수민은 또래의 작가들처럼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 서핑 도중에 발견한 흥미로운 이미지를 수집한다. 수집 목록은 일상의 장면과 사건사고의 보도사진이미지 등이 담겨 있지만, 일련의 이미지가 특정한 목적이나 방향성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수집된 이미지는 분명 작가의 관심사와 취향을 반영하지만 그것이 그의 작업 세계를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작가는 어느 날 보도사진에서 받은 감정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미지를 저장한다. 석 달이 지난 후에 다시 본 이미지에서 당시의 감정을 되찾기 어려웠다. 물리적 경험이 부재한 상태의 정보 이미지는 시간과 함께 감상의 느낌도 휘발시킨 것이다. 언뜻 보면 집요한 사생의 결과처럼 보이는, 자연 풍경, 심지어 들풀에 관한 식물도감처럼 보이는 이 풍경의 원천은 사실상 사적 기억이 부재한 이미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적 기억의 서사가 부재한 저장된 이미지의 운명은 현실의 잡음이 사라진 상태가 되어 순수한 조형적 이미지로 작가에게 재발견된다. 이러한 경험들은 이미지를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선택 이유가 모호하고 기억이 불확실한 이미지만을 골라서 작업이 진행되었다.

 

송수민_밤의 진동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25×391cm_2020

송수민_빽빽한 풀 사이의 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300cm_2020

 

예를 들어 발터 벤야민은 도시에서의 만유(flanerie)를 통하여 수많은 사건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기억하였다. 그가 수집한 이미지들은 불연속적인 세계를 확인시켜주는 증거물이자 정체성이 모호한 흔적이었다. 그는 도시를 매우 사적인 관계로 엮어내고자 했다. 그것들은 현실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통로와 같았다. 그렇게 근대 도시는 개인이 접속하는 방식에 따라 무수한 새로운 가상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는 가설이 세워진다. 송수민도 디지털 세계를 배회하면서 이미지를 수집한다. 벤야민이 이미지를 통하여 자신만의 도시를 구성하려 했다면, 송수민은 저장 후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다시 발견한 이미지에서 저장의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사진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동시대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위상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미지가 주인공이 되고 텍스트가 보충물이 된 시대란 것이다. 그러니까 송수민이 저장한 이미지는 상징적 표상이라기보다 기억을 위한 보충물 정도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과연 정보의 가치가 훼손되거나 증발한 이미지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송수민_예기치 못한 상황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5×112.1cm_2020

 

작가는 의미가 비워진 이미지들로부터 어떤 조형적 공통분모를 발견한다. 출처, 저장 동기, 주제와 무관한 또 다른 공유지가 나타난 셈이다. 푸코의 고고학적 연구는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가 불연속적이란 사실을 일깨워줬다. 인류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진리가 사실과 부분적으로 다르다는 발견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송수민은 계열, 주제, 진영 혹은 양식과 상관없이 오로지 유사한 형태를 발췌하기 시작한다. 회화로 생성되기 전 송수민이 수집한 이미지들은 그저 이미지 자체로서의 정보, 그러니까 파일 형식, 연결 프로그램, 위치, 크기, 디스크 할당 크기, 만든 날짜, 수정한 날짜, 액세스한 날짜로 표시된 이미지 데이터로만 존재했다. 그 어떤 관습을 따르지 않고 이미지에서 발췌한 개체들은 회화의 세계에 초대된다. 그곳에서 흔히 말하는 '우연의 공동체'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개체의 탄생 배경, 지역, 이름도 중요하지 않았다.

 

송수민_Circle Pattern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지름 18cm_2020

 

이번 전시의 단초는 소리였다. 이천의 금호창작스튜디오는 자연의 소리가 작업실 내부로 쉽게 유입된다고 한다. 이전 작업과의 큰 차이는 실제 작업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작업 과정에서 나타나는 듯하다. 아무래도 송수민의 회화는 풍경화의 성격을 띠는데, 작가가 발견한 개체 이미지가 대개 자연현상과 식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번에도 자연현상과 풍경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즐비하다. 작품 자체로는 이전과 변별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차이는 과정에 있다. 우연히 자신의 공간으로 허락도 없이 침범한 소리는 작가에게는 초대받지 않는 손님과 다르지 않았다. 자연은 실제로 매우 소란스럽기 마련이다. 목가적인 풍경은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형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소리의 침범에 의해 촉발된 작업은 실제 자연현상과의 조응의 결과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근작들은 소리의 조형성을 이미지로 치환하는 과정에 무게를 둔 작업이다. 그래서 송수민의 회화는 형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형태가 포개어진 상태로 진화하고 있다. 문명은 인간을 자연과 지속적으로 분리시켰다. 그리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 아니면 숭고의 상징으로 이원화했다. 그러나 포용의 시대는 언어와 문화를 넘어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상태와 성질을 감각하여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렇게 우리의 삶 안에 더이상 타자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송수민은 그가 속한 시간과 문화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의도치 않은 발견을 계기로 어쩌면 가장 수평적인 방법으로 세계와의 접점을 찾아가는 중이다. ■ 정현

 

* gagosian.com/exhibitions/2019/gerhard-richter-overpainted-photographs 2020년 4월 18일 방문"Now there's painting on one side and photography—that is, the picture as such—on the other. Photography has almost no reality; it is almost 100 percent picture. And painting always has reality: you can touch the paint; it has presence; but it always yields a picture... I once took some small photographs and then smeared them with paint. That partly resolved the problem, and it's really good—better than anything I could ever say on the subject." (Gerhard Rich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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