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조문호 사진가


“강렬하게, 리얼하게” -민족 시원에서 강원까지- 전시를 위한 바이칼 순례 길



백두산이 민족의 성지라면, 바이칼은 한민족의 시원이다. 풍족한 호수라는 뜻인 바이칼의 영성적인 기운을 찾아 동시베리아 남부도시 이르쿠츠크로 떠났다.


‘춘천문화재단’에서 주최하고 미술평론가 최형순씨가 기획한 “강렬하게, 리얼하게” -민족 시원에서 강원까지- 전시를 위한 바이칼 순례 길은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 이어졌다.


오는 7월13일부터 26일까지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릴 이 기획전에는 권용택, 김대영, 김용철, 길종갑, 서숙희, 신대엽, 이재삼, 조문호, 황재형, 황효창씨 등 강원도 작가 열 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우리민족 DNA속에 내재된 신화 속 선조들의 뿌리를 찾는 일로, 바이칼 호수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 작업에 반영시키는 프로젝트다.


우리 민족 DNA의 원류를 찾아...바이칼호수는 세계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깊은 내륙호



▲아직 눈이 녹지않은 설산과 호수에 깔린 기운이 심상찮다.(사진=조문호)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한 버스는 자작나무숲과 완만한 구릉의 초원을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 보이며, 네 시간 넘게 달려서야 알혼 섬으로 들어가는 샤후르따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착장 주변은 여름철 성수기를 대비한 진입로공사와 부대 시설물 신축으로 부산했다. 원형을 잃어가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몰려드는 관광객 수용을 위한 최소한의 일로 보였다.


▲바이칼호에서 연결된 이르쿠츠크의 앙가라강.(사진=조문호)


만약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다면, 몰려드는 투자자들로 본래의 모습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바이칼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깊은 내륙호로 최고수심이 1,620m이며 길이 636㎞, 평균너비 48㎞, 면적 3만 1,500㎢나 되는 제주도 절반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 호수에 있는 물이 다 빠져 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약330년이고, 담수량은 미국 5대호를 다 합친 것 보다 많다는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알혼섬을 감싼 호수 왼쪽에 악어바위가 보인다.(사진=조문호)


 5억년이나 된 변성암, 퇴적암, 화성암으로 구성되며 호수 바닥의 퇴적층 두께는 무려 6,000m에 이른다. 호반 가까이에는 사화산들의 지각변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가끔 심한 지진이 발생한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기후는 주변지역보다 훨씬 온화해 1~2월의 기온은 평균 -19℃이고 8월평균기온은 11℃가량이다. 호수 면은 1월에 얼고 5월에 녹는다. 8월의 수면온도는 약 13℃이고 해안에서 가까운 얕은 곳에서는 수면온도가 20℃에 이른다.



▲알혼섬에서 가장 기가 세다는 부르한 바위.(사진=조문호)


파고는 4.5m 이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호수는 광물을 거의 함유하지 않아 수심 40m 까지 들여다보이며 염도도 낮다. 특히 이곳에 서식하는 민물세우가 물을 정화하는데 크게 기여한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동식물 생태 또한 풍부하고 다양하다. 수심에 따라 1,200종이 넘는 동물이 서식하고 600종에 가까운 식물이 수면 위나 수면 가까이에 분포한다. 이 가운데 약 3/4은 바이칼 호의 고유종이다.


▲하보이언덕을 향하는 협곡.(사진=조문호)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오물’같은 고유종으로 특히 연어류가 많이 잡힌다. 가장 큰 종류는 철갑상어로서 길이 1.8m, 무게 120㎏에 이르며, 코메포리다이과에 속하는 골로먄카라는 수명이 짧은 물고기도 서식한다. 그 중 유일한 포유동물은 바이칼 물범이며, 주변지역에는 326종의 조류와 곰이나 사슴도 서식한다.


동식물 생태 또한 풍부하고 다양, 그 중심에 신비한 영기가 서린 알혼섬 


바이칼호수에 있는 26개의 크고 작은 섬 중에서 알혼 섬이 가장 큰 섬으로 인구는 3,000여명에 불과하다. 바이칼호수가 시베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면 알혼 섬은 바이칼호수의 심장이라 했다.



▲샤먼의 근거지답게 열세개의 세르게가 줄지어 서있다.(사진=조문호)


바지선에 실려 알혼 섬으로 들어갔더니, 사륜구동 우아직이란 별나게 생긴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누어 타고 숙소가 있는 후지르 마을로 향했는데, 원주민 기사의 운전솜씨가 만만찮았다. 두 대중 한 대는 번호판도 없는 무적차량인데, 사고 나면 끝장이겠다는 생각에 모두들 가슴 조려야 했다. 비포장 길을 얼마나 달리는지 마치 미쳐 질주하는 마차를 탄 기분이었다.


알혼섬은 그리 높지 않은 언덕과 구릉지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포근하고 차분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기암괴석들, 넓은 해변, 호수와 산, 하늘과 맞닿은 풍경들은 신비롭다 못해 신성하게 다가왔다.



▲땅끝 지점의 하보이 언덕에 선 신목.(사진=조문호)


통나무로 지어진 숙소에 여장을 풀고, 해변이나 다름없는 호숫가로 몰려 나가니 석양을 받은 호수는 금빛처럼 빛났고, 그 옆에 버틴 오방색 천에 감긴 신목에서 영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저절로 큰 절을 올리며,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제발! 저의 악업을 거두어 달라는...


그 자리에서 필자가 20여 년간 끌어 온 작업, ‘생명’전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산과 바다나 늪지 등 전국의 성스러운 자연과 함께 담아 온 남성 알몸 찍기에 화가 길종갑씨가 마지막 모델로 나서 주어 가능했다.



▲고풍스러운 모습을 간직한 이르쿠츠크의 통나무집들.(사진=조문호)



바이칼서 25년간 미완의 남성 알몸 찍기 ‘생명’전 마무리, 화가 길종갑씨 마지막 모델로


그 찬 호수 물에 정갈히 몸을 적셔, 기를 모아 주는 열성까지 보여주었는데, 얼마나 물이 차가웠으면 거시기가 자라목처럼 쏙 들어가 버렸다. 아무튼 바이칼호수에 발만 담가도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는데, 온 몸을 담가 영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미안한 마음은 좀 덜었던 것 같다.




▲하보이언덕 나뭇가지를 휘감은 오방색 천.(사진=조문호)


92년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 30명의 작가가 참여하였으나, 그 중 두 분이 저승으로 떠나버렸다. 촬영에 응해준 분들은 전시 후에 사진을 드린다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었는데, 그게 지켜지지 않아 늘 마음의 짐이 되어왔다. 항상 집에 걸어두고 죽은 후에는 영정사진으로 쓴다는 약속이 무산된 것이다.


사실 ‘생명’전 작업을 여지껏 마무리 하지 못한 원인은 팔리지 않는 전시인데다, 제작비가 많이 소요되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자연속의 육신을 실제 크기로 프린트해 세우려면, 그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이번 기획전의 내용과 맞아 떨어져 밀어붙여 버렸다.



▲이르쿠츠크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김치식당, 김치찌게가 일품이었다.(사진=조문호)


알몸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서 해방되려 본인 사진부터 방에 걸어 두었는데, 이내 가족들이 익숙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죽고 나면 영정사진으로 쓰라고 아내에게 당부도 해 두었다. 억지로 슬픈 표정을 짓는 것보다, 모두들 웃으며 저승길로 보내달라는 취지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데, 울고 불며 야단법석 떨면, 떠나는 망자의 마음이 편하겠나? 재수 없어 될 일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러시아 전통사우나인 반야라는 독특한 체험도 했다. 이는 장작불에 달궈진 조약돌에 물을 끼얹어 거기서 나오는 증기와 열기로 체온을 덥히는 일종의 증기욕인데, 자작나무 잎으로 몸을 두들기니 은은한 자작나무향이 온몸을 감싸 올랐다.




▲바이칼 호수변에서 인물스케치를 하는 화가.(사진=조문호)


자작나무 사우나 '반야'와 지금도 생각나는 바이칼 생선 '오물'


자작나무로 몸을 두들기는 건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밖에 없어, 내가 황효창선생을 두들겨 드리려 했더니, 쏜살같이 나가버렸다. “설마, 시원하게 두들기지, 아프게야 할까?”


체류기간동안 사람 입이 너무 간사하다는 것도 재차 실감했다. 몇 일간 보드카 좀 마셨다고, 그 좋아하던 소주가 싱거워 못 마시겠더라.


이튿날은 우아직에 실려 바이칼 북쪽 끝으로 내달렸다. 탁 트인 언덕위에 올라서니 어디가 호수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하기 힘들더라. 시야는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어 버렸고 가슴은 벅차올랐다. 마치 가슴에 맺혔던 한이 깊은 호수로 스르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호수에 깔린 성스러운 공기, 성스러운 빛과 기운들이 내 몸속으로 베어드는 신성함에 빠질 수 있었다.



▲바이칼만의 생선 '오물'을 말리고 있다.(사진=조문호)


그런데, 도시락으로 싸왔던 '오물'이란 생선을 영 잊을 수가 없다. 생선을 쪄서 가져왔는데, 젓가락 없이 손으로 먹어야 했던 것이다. 더러운 손으로 발라 먹었으니, 영락없는 원시인이었다. 옛날에는 대부분 그렇게 살았겠지만, 옛말처럼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정답이었다.


알혼섬에서 가장 영기가 센 바위로 불리는 부르한바위(일명: 샤먼바위)에는 대제국을 호령한 징키스칸이 묻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빼시안카에는 돌덩이 부두와 건물잔해만 남았지만, 구 소련시절 정치범들을 가둔 수용소 터도 있었다. 그 곳을 지나 최북단에 이르니 연인처럼 어깨를 마주한 ‘사랑바위’가 보였다.



▲연인처럼 어깨를 마주한 사랑바위.(사진=조문호)


자식을 바라는 염원의 자리로 왼쪽 봉우리에 서면 아들, 오른쪽 봉우리에 서면 딸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유독 붉은 기운을 내뿜는 ‘삼형제바위’를 비롯하여, 사자머리와 악어형상을 한 바위 등 많은 이야기가 담긴 풍광을 조망할 수 있었다.


샤먼의 고향 바이칼, 매년 샤먼축제, 샤먼은 삼(三)과 안(하늘天, 신神)의 글자 합, 삼신할머니 유래


샤먼의 고향인 바이칼에서는 매년 세계 샤먼축제가 열린다. 샤먼이란 말은 삼(三)이란 글자와 안(하늘天, 신神)이란 글자가 합쳐진 말이다. 우리가 쓰는 표현을 빌리면 삼신할머니란 삼신이란 단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문도 샤먼에서 나온 단어이다.


삼안이란 단어는 아주 먼 옛날부터 북부 초원지대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쓰여 왔다. 이것을 서양학자들이 듣고 자신들의 발음으로 옮긴 단어가 샤먼이다. 이 샤먼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종교적 행위, 관습 등 관련문화를 샤머니즘이라 말한다.



▲칼호이저 야시장에 옷가지를 팔러 나온 할머니.(사진=조문호)


칭기즈칸이 통치하던 시절, 라마교의 탄압으로 바이칼이 샤먼들의 유일한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은 부랴트족의 조상이라 불리는 호리도이의 신화가 숨 쉬는 장소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바이칼호수의 여러 신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는데, 그 중 흰 독수리 형상의 옷을 입고 지내던 '한후테-바바이’의 아들인 ‘한쑤부-노이온’이 최초로 탱그리(하늘신)로부터 최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데, 그 탱그리 신화는 단군신화와 유사점도 있었다.


인류 최초의 사람 나반과 아만이 7월7석에 건넜다는 바이칼에서 아만에서 아빠, 엄마 나와


기록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사람 나반과 아만이 7월7석에 건넜다는 곳이 바이칼이다. 나반과 아만에서 아빠, 엄마, 아버지, 어머니라는 용어가 나왔다. 그래서 영어의 마마와 파파처럼 전세계 언어권에는 비슷하게 발음하고 뜻이 같은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류가 탄생한 호수여서인지 호수 성분도 어머니의 양수와 비슷하다고 한다.



▲ 칼호이저 야시장에서 옷사이즈를 재보는한 남성.(사진=조문호)



그리고 몽골족의 하나였던 부리야트 족의 기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의 소수민족중의 하나인 브리야트족은 한국인과 외형적으로 가장 닮았다. 발길 닿는 곳곳에 솟대와 신목, 그리고 소원을 비는 돌무더기와 오색 댕기들이 펄럭였다. 알혼섬 곳곳에 남은 샤머니즘의 흔적들이 우리민족의 발원과 유력한 관계를 말해 주고 있었다.


원주민들 눈빛과 표정 친밀감, 강강수월래나 씨름을 닮은 전통놀이부터, ‘나무꾼과 선녀’, ‘심청전’ 같은 전설들도 우리와 비슷


여행 중 두 차례에 걸친 세미나에서도 우리민족과의 동질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황효창선생은 도처에 남아있는 샤먼의 흔적에서 확신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바이칼을 시베리아의 거대한 자궁이라 말해 온 황재형씨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고향을 찾은 듯 너무 편안하다고...



▲코발트의 물빛 층이 신비롭다.(사진=조문호)


야시장에서나 숙소에서 만난 원주민들의 눈빛과 표정들도 한국 사람처럼 친밀감이 느껴졌다. 곳곳에 피어있는 할미꽃도 그렇지만, 솟대와 장승, 신목 등 우리의 문화와 동일한 것이 너무 많았다. 강강수월래나 씨름을 닮은 전통놀이에서부터, ‘나무꾼과 선녀’나 ‘심청전’ 같은 전설들도 우리와 비슷했다.


이미 우리민족의 이동 경로나 DNA까지 조사한 역사학자들의 고증들이 있으니,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 출발한 이르쿠츠크 Delta 호텔 앞에 비친 물그림자다. 처음으로 셔터를 누른데 의미를 두었다.

이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여행이라 마음이 어두웠는데, 사진에 그 감정이 담긴 것 같다.




‘춘천문화재단’에서 제안하고 미술평론가 최형순씨가 기획한 ‘민족 시원에서 강원 춘천까지’ 전람회 일환으로

시행한 바이칼 순례 길이 지난 13일부터 17일까지 이어졌다. 

오는 7월13일부터 26일까지 ‘춘천문화회관’에서 열릴 계획인 “강렬하게, 리얼하게”전은 권용택, 김대영,

김용철, 길종갑, 서숙희, 신대엽, 이재삼, 조문호, 황재형, 황효창씨 등 강원도 작가 열 명이 참여한다.

우리민족 DNA속에 내재된 신화 속 선조들의 뿌리를 찾는 일로, 바이칼 호수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

작업에 반영시키는 프로젝트다.



화가 황재형씨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한 버스는 자작나무숲과 완만한 구릉의 초원들을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 보이며,

네 시간을 넘게 달려서야 알혼 섬으로 들어가는 샤후르따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착장 주변은 여름철 성수기를 대비한 공사로 부산했는데, 원형을 잃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미술평론가 최형순씨



바이칼호수가 시베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면 알혼 섬은 바이칼호수의 심장이라 했다.
바이칼호수에 있는 26개의 크고 작은 섬 중에서 알혼 섬이 가장 큰 섬이라는데,

그리 높지 않은 언덕과 구릉지가 끊임없이 펼쳐져, 보는 이로 하여금 포근하고 차분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기암괴석들, 넓은 해변, 호수와 산, 하늘과 맞닿은 풍경들은 신비롭다 못해 신성하게 다가왔다.



화가 황효창



바지선에 실려 알혼 섬으로 들어갔더니, 사륜구동 우아직이란 요상하게 생긴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숙소가 있는 후지르 마을로 향했는데, 원주민 기사의 운전솜씨가 만만찮았다.

두 대 중 한 대는 번호판도 없었는데, 사고 나면 끝장이겠다는 생각으로 모두들 가슴을 조아려야했다.

비포장 길을 얼마나 달리는지, 마치 미쳐 질주하는 마차를 탄 기분이었다.


통나무로 지어진 숙소에 여장을 풀고, 해변이나 다름없는 호숫가로 몰려 나가니,

석양을 받은 호수는 금빛처럼 빛났고, 그 옆에 버텨 선 오방색 천에 감긴 신목에서 영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저절로 큰 절을 올리며, 입에서는 주문이 흘러나왔다. 악업을 거두어 달라는...



화가 김용철



그 자리에서 20여 년간 끌어 왔던 작업, ‘생명’전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산과 바다나 늪지 등 전국의 성스러운 자연과 함께 담아 온 알몸 찍기에 화가 길종갑씨가

마지막 모델로 기꺼이 나서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찬 호수 물에 정갈히 몸을 적셔, 기를 모아 주는 열성까지 보여주었는데,

얼마나 물이 차거웠으면 고추가 자라목처럼 쏙 들어 가버렸다.

혹시 그 사진을 보게 되더라도 그 점을 널리 헤아려 주기 바란다.

아무튼 바이칼호수에 발만 담가도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는데, 온 몸을 담가 영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미안한 마음은 좀 덜었던 것 같다.



화가 길종갑씨



사실 ‘생명’전 작업을 20여년이 넘도록 마무리 하지 못한 것은 돈이 되지 않는 일인데다,

돈만 많이 들어가는 전시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자연 속에 동화한 남자의 육신을 실제 크기로 프린트해 세우려면, 그 비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기획전의 주제와도 일치하는 것 같아 밀어부쳤던 거다.

그러나 이번에 출품해야 할 작품수가 여덟 점이라 나머지는 언제 본인에게 돌려 줄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늘 당사자를 만날 때마다 빚진 기분이었는데 말이다




화가 서숙희씨



이 프로젝트는 92년도부터 시작되었으나, 그동안 찍힌 사람 중에 두 분이나 저승으로 떠나버렸다.  

촬영에 응해 준 분들과, 전시 후 항상 집에 걸어두고 죽은 후에는 영정사진으로 쓴다는 약속까지 했는데, 

그게 지켜지지 않아 마음의 짐이 된것이다.


처음에는 가족들이 쑥스럽게 느낄지 모르지만, 금방 친숙하게 되고 알몸에 대한 잘 못된 관념에서 해방될 수 있는데,

대개의 일반인들은 손사레를 쳤으나, 흔쾌히 동조한 작가는 30여명이 된다.





먼저, 내 몸을 찍은 사진부터 프린트해 집에 걸어 두었는데,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이내 익숙해지는 것을 보아 왔다.

내가 죽으면 영정사진을 쓰라고 아내에게 당부도 해 두었다. 별 슬프지도 않으면서 슬픈 표정을 짓는 것보다,

모두가 웃으며 저승길로 보내달라는 취지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데, 울고 불며 야단법석 떨면,

떠나는 망자의 마음이 편하겠나? 재수 없어 될 일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출품하게 될 ‘생명’전의 기획의도를 말한 다는 게, 엉뚱한 이야기가 길었던 것 같다.



화가 이재삼



바이칼 여행 중, 사람 입이 너무 간사하다는 것도 재차 실감했다.

몇 일동안 보드카 좀 마셨다고, 그 좋아하던 소주가 싱거워 못 마시겠더라.


숙소로 돌아와 러시아 전통사우나인 반야라는 독특한 체험도 했다.

이는 장작불에 달궈진 조약돌에 물을 끼얹어 거기서 나오는 열기로 체온을 덥히는 일종의 증기욕인데,

자작나무 잎으로 몸을 두들기니 은은한 자작나무향이 온몸을 감싸 올랐다.

그러나 모두들 술이 취해 들어갔으니, 땀께나 흘려야 했다.

자작나무로 몸을 두들기는 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밖에 없어,

내가 황효창선생에게 해 드리려 했더니, 쏜살같이 나가버리시네.

“설마, 시원하게 두들기지, 아프게야 할까?”




화가 신대엽씨



이튿날은 우아직에 실려 바이칼 북쪽 끝으로 내달렸다.

탁 트인 언덕위에 올라서니 어디가 호수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하기 힘들더라.

시야는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어 버렸고 가슴은 벅차올랐다.

마치 가슴에 맺혔던 한이 깊은 호수로 스르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호수에 깔린 성스러운 공기, 성스러운 빛과 기운들이 내 몸속으로 베어드는 신성함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데, 도시락으로 싸왔던 '오물'이란 생선을 영 잊을 수가 없다.

생선을 쪄서 가져왔는데, 젓가락이 없어 손으로 먹은 것이다.

더러운 손으로 발라 먹었으니, 영락없는 원시인이었다.

옛날에는 대부분 그렇게 살았을 것인데, 모르는게 약이란 말이 정답이었다.



화가 김대영씨



첫날과 마지막 날, 두 차레에 걸쳐 세미나를 가졌는데, 우리민족과의 동질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황효창선생은 도처에 남아있는 샤먼의 흔적에서 확신을 얻었다는 말씀을 하셨고,

바이칼을 시베리아의 거대한 자궁이라 말해 온 황재형씨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고향을 찾은 듯 편안하다고...

야시장에서나 숙소에서 만난 원주민들의 눈빛과 표정들도 한국 사람처럼 너무 편안했다.

구릉 곳곳에 피어있는 할미꽃도 친숙하지만, 솟대와 장승, 신목 등 우리의 문화와 동일한 것이 너무 많았다.

강강수월래를 닮은 전통놀이에서부터, ‘나무꾼과 선녀’나 ‘심청전’ 같은 전설들도 우리와 비슷했다.

이미 우리민족의 이동 경로나 DNA까지 조사한 역사학자들의 고증들이 있으니,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세미나에 참석한 작가들



그런데, 누군가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시 일정이 7월 중순으로 잡혀있으니, 그동안 어떻게 백호 이상의 대작을 여덟 점이나 그릴 수 있느냐는 이야기였지만,

그건 아닌 듯 했다. 바이칼이 우리민족의 전체가 될 수 없듯이, 바이칼과 연계된 작품은 한 점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게도 진부의 권용택씨가 산나물축제위원장을 맡아 못 오게 되었지만,

그 대신 목공예가 류정호씨가 참석해 나무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마디로 그는 나무박사였다.

그리고 이재삼씨의 만남도 특별했다. 작품만 좋은 게 아니라 삶의 철학이나 논리 정연한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또 한 가지 놀랜 것은 태백 황재형씨의 학구열이었다.

이미 바이칼이 우리민족의 시원이라는 확고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수많은 관련 기록들을 탐독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마저 부족해 카메라와 동영상으로 세세히 기록하는 것을 보고 혀를 내 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목공예가 류정호씨



한가지 마음에  걸렸던 일은 세미나에 참여한 분으로 부터 공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떠나며 블로거에 올린 "바이칼 호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란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했다.

취중인데다 자칫 회의 분위기를 망칠까봐 대꾸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는 되었다.


짐작컨데, 자기는 개인 돈으로 참가했는데,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느냐는 뜻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참여하기 싫어면 그만 두면 되겠지만, 솔직히 잘 못된 작가지원 시스템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없는 사람 입장으로서는 외국여행보다 작업에 실질적인 경제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분들의 입장은 돈보다 진지한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그래서 내 입장만 생각한 편견이었다는 것을 그 분을 통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이 모든 것 또한 당사자가 진위를 밝히지 않았으니, 잘못된 추정인지 모르지만...





 또 하나 밝히고 싶은 것은, 모든 분들이 바이칼의 아름다운 풍경사진을 바라고 있어나, 그 건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단지 ‘서울문화투데이’ 기행기에 쓸 자료로 몇 장 찍었을 뿐이다.

내가 관심있게 찍은 것은 우연히 지나치다 만난 칼호이저 야시장 사람들과 여기에 올린 작가들의 움직임이 전부다.

내가 기록하여 남기고 싶은 것은 오로지 사람이기 때문이다.

 

명색이 사진한다는 사람이 외국 여행에 똑닥이 카메라 하나 달랑 가져갔다면, 이해되지 않을 게다.

경찰 물대포에 망가져 쓸 수 있는 카메라가 이 뿐이기도 하지만, 그 것으로도 주변을 기록하는데 지장이 없다.




말이 너무 길어 마무리를 해야겠다.

바이칼을 출발하기 전에는 어려운 형편에 돈까지 구해야 하는 자체가 싫었지만,

와서 생각하니 힘들어도 보람된 여행이었다고 생각된다.

신의 은혜를 받아서인지 일도 슬슬 풀리는데다, 편견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과,

부정에서 긍정적인 삶으로 바꾸는 계기까지 마련하였으니, 이보다 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지금은 바이칼이란 이름만 떠올려도 왠지 가슴이 뛰고 푸근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여건만 되어진다면, 아내와 다시 한 번 떠나고 싶다.



사진, 글 / 조문호





































류정호씨가 바이칼 선착장 주변에서 오래된 말 편자를 주웠다.




















이분들은 부산에서 관광 온 아주머니들이다.







물이 얼마나 차거운지 1분을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생명전' 모델이 되어주기 위해 몸을 정갈하게 해, 기를 받는 길종갑씨




위 세분이 부부와 동행했는데, 살다보니 모두 닮아간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김치식당이다. 모처럼 맛있는 김치찌게를 맛볼 수 있었다.
























우리의 장승을 만났다.  황재형씨가 한민족이 옮겨 간 경로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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