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살다 보니 잊어버린 지가 한 참된 고향에 들리게 되었다.

 

지난 20일 부산에서 열린 최민식 선생 10주기 심포지엄 가야 하는데,

열차표가 매진되어 부득이 고물차를 끌고 가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차도 불안하지만, 나 역시 걸어 다니는 송장이지만 어쩌겠는가!

 꼭 가야 할 일이기도 하지만, 호텔 방까지 잡아 두었다는데...

평생을 천운에 맡기고 살아온 내가 새삼 걱정할 게 무언가?

걷는다면 오백 미터도 못 가지만, 차만 있다면 다음날 죽더라도 어디엔 들 못 가겠는가?

정동지 더러 ‘지루하지만 멋진 드라이브가 시작 된다는 안내맨트를 날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불알처럼 차고 다니던 카메라 주머니를 두고 와 버렸다.

이미 시가지를 벗어났으나, 그냥 갈수는 없었다.

 

되돌아가 다시 네비를 보니, 도착시간이 심포지엄 시작 시간보다 15분 늦었다.

연료 넣으러 휴게소에 잠시 들렸을 뿐, 도착시간 줄어들기만 바라며 냅다 밟았다.

단속 카메라 피해 다니느라 졸음 올 겨를도 없었다.

통행료 계산할 시간마저 아끼려고 하이패스로 빠져버렸는데, 정확하게 15분 늦었다.

 

지금 다시, 최민식을 바라보다는 타이틀로 열린 심포지엄은

이광수교수의 최민식 사진의 작품성: 평론가와 대중의 평가 차이를 중심으로발제로 열리고 있었다.

사진가 이동근씨의 사회로 진행된 패널로는 사진가 김문호, 문진우, 강제욱씨가 나와 있었다.

오기 전에 발제문을 보아 내용은 알고 있으나, 귀가 어두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정동지 메모 글을 넘겨보며 짐작할 뿐 자리만 지킨 것이다.

끝날 무렵에는 나 더러 무슨 말을 하라는데, 귀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입도 벙어리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관중공포증이 있어 사람의 눈만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벙어리 가슴 앓는 소리 몇 마디 지껄이긴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아구찜 집에서 술 마시는 시간은 좋았다.

이차로 하숙집이란 술집까지 갔는데, 술 맛나는 이교수 구라에 어찌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방에 들어가니, 그때 사 누적된 피로가 덮쳐 정신없이 뻗어버렸다.

다음 날은 이 교수 안내로 해운대 달맞이 명물 대구탕 집에 가서 해장하는 호강도 누렸다.

 

행사를 주관한 김정근 감독과의 인터뷰 약속이 있어 김 감독 스튜디오도 갔다.

걱정되는지 이교수까지 옆에 지켜 섰는데, 김감독이 다른 방으로 가시란다.

아마 김감독이 나의 문제점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정동지는 있어도 괜찮다는 걸 보니, 보호자로 여기는 모양이다.

말은 잘 못 하지만, 김감독 묻는 대로 답하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놓친 말이 있어 블로그에 다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래도 할말이 남았다.

언젠가 하늘나라 계시는 선생님께 못다한 편지를 쓰고 싶다.

 

일은 마쳤지만 길바닥에 기름 쏟으며 부산까지 왔는데, 반 본전이라도 뽑아야 하지 않겠나!

인근에 있는 경상도 장을 찾아 가려는데, 하필이면 밀양 무안장에 가 잔다.

어린 시절에도 가본 기억이 있는 무안장은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곳이라고 안 바뀔 수 있겠는가?

정동지는 사람들 만나 이야기를 듣거나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차에 자빠졌.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안까지 와서 고향 산소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장터 마겥에서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샀다.

 

부곡 온천을 거쳐 고향 영산으로 들어오니, 초입의 만년교가 반겼다.

만년교 풍경을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 김형권씨가 생각났다.

김형권씨는 쇠머리대기기능 보유자로 사진을 하셨는데, 주로 민속놀이를 찍으셨다.

삼일문화제를 찾는 아마추어 사진인들을 위해

한복을 차려 입은 어린이나 농부가 만년교를 건너가는 모습을 연출해주기도 했다.

  만년교 위에서 쥐불 돌리는 사진들은 대개 김형권씨 도움을 받아 찍은 사진일 게다.

 

그리고 박만영씨가 운영했던 '녹지사진관'의 진열장에는 항상 가족사진 대신 흑백풍경이 걸려 있었다.

나도 60년대 중반 무렵,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구입한 적이 있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텅스텐  전구를 터트리는 텅스텐 스트로보가 멋 있었다. 

친구들 기념사진이나 찍으며 폼 잡고 다닌 것이다.

찍은 흑백필름을 박만영씨 사진관에 맡겼는데, 그 때 암실을 살펴 본 기억이 난다. 

 서정적인 농촌풍경을 많이 찍으셨는데, 그 사진 원판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60년대 초반 창녕경찰서장으로 계셨던 이봉하씨도 사진을 찍었다.

이봉화씨는 주로 백로사진을 많이 찍으셨는데,

한 번은 관용차 타고 늪에 사진 찍으러 가다 엠비시 기자한테 걸려 혼이 나기도 했으나, 

정년 퇴임하여 '사협' 이사장까지 하셨다. 

 

영축산 아래턱의 대암골이라 불리는 산소는 본래 감나무 과수원이었다.

감나무는 고목이 되어 다 넘어졌으나, 지팡이 짚고 버티던 제실마저 넘어지고 없었다.

 

몇 년 만에 왔는지 기억조차 아련하니, 조상님께 어찌 고개 들 수 있겠는가?

언제나 감싸주시던 할머니부터 술 한 잔 올렸다.

마음으로 빌었으나,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힘들게는 살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며 잘 산다고 말씀드리고.

산소에서 뵙는 건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사진: 정영신, 조문호 / 글: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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