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정식선생과의 오찬 약속이 잡혔다는 정 동지의 연락을 받았다.

찾아뵌 적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개월이 훌쩍 지났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세월이 빨라진다더니, 정말 총알처럼 빠르다.

 

선생께서는 부엌일 돕는 분의 요리솜씨가 형편없어 하루에 한 끼는 꼭 외식을 하신다.

혼자 식사하러 가시기가 편치 않으신지 가까운 지인들에게 가끔 연락하신다.

복요리를 좋아해 그 날도 ‘초원복집’에 갔는데, 종업원 서비스가 여간 아니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다 돌아가신 사진계 선배 M씨의 유작전이

인사동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전해 드렸더니,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다.

웬만하면 돌아가신 분 욕은 하지 않을 텐데, 대뜸 사기꾼이란 말씀부터 하셨다.

 

잔 재주를 잘 부려 평소 상종을 하지 않았는데,

82년 무렵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을 제작한다며 작품 두 점을 보내달라기에

사진사용에 따른 원고료를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당사자 반응에 더 화가 치밀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선집을 제작하여 큰 돈을 벌었는데,

"우리나라의 내로라는 화가들도 돈 싸들고 와 작품 넣어주길 부탁했는데,

그냥 실어주면 고맙게 생각해야지 원고료는 무슨 원고료냐?"는 말을 하더란다. 

어이가 없어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는데, 세 번이나 구구절절 장문의 편지를 보내 와

거절하지 못한 게 지금도 후회 된다는 말씀이셨다.

 

하기야!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가인 한정식선생 작품이 들어가지 않고

어찌 ‘한국현대사진대표작선집’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나 역시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사진원고를 부탁하면서 필름원판을 보내 달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전체 인쇄 농도를 맞추기 위해 필요하다는데, 문제는 필름을 다루는 사진가의 자세였다.

비슷한 사진 세 컷이 담긴 120필름 한 줄을 보내주었는데,

필요한 한 컷만 분리하기 위해 토막을 내어버렸다.

그 것도 가위로 정교하게 잘라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찢은 것이다.

나중에 필름을 돌려 받아보니, 찢어진 선이 아슬아슬하게 이미지를 스쳐갔더라.

 

그리고 책을 발간한 후 전국으로 끌고 다니며 순회전을 한 것도 차기 ‘사협’ 이사장을 노린 포석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전시가 끝났으면 사진은 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충무로에 건물도 가진 재력가인데, 돈이란 결코 좋게 벌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그 분과의 인연은 끝나야 했는데, 좁은 사진판에서 끝낼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85년 ‘사협’ 이사장에 당선되어 ‘사협’ 편집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월간사진’에서 그만두고 ‘청량리588’ 사진 작업을 하고 있을 땐데,

돈이 아쉬워 거절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당시에는 ‘사협’에서 나오는 회보가 사진 잡지라기보다 소식지에 가까웠다.

'사협' 총무가 소식들을 주워 모아 인쇄소로 보내 만드는 책인데,

편집장이란 직책까지 둔다기에 생각 자체가 가상한 일이었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야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거기에도 개인적인 욕심이 깔려 있었다.

매달 권두언을 쓰려니 대필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문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자리를 받아들인 게 탓이었다.

한 이년 정도 일하는 동안 ‘사협’에서 벌어지는

더럽고 추잡한 일들을 목격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그만 둘 수 있는 핑계거리가 생겼다.

‘87 민주항쟁’ 개인전을 하려는데, 이사장이 못하게 제지한 것이다.

‘사협’에 근무하면서 어떻게 그런 전시를 할 생각을 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귀가 막혔다.

사진하는 선배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미련 없이 사표내고 전시를 강행했는데, 그 뒤부터 그 이를 사진가로 보지 않았다.

그의 죽음도 갑작스런 비명횡사였는데, 이상한 소문까지 떠돌았다.

 

십여 년 동안 기억에서 사라진 그가 갑작스러운 유고 전으로 그 때 일을 일깨웠다.

돈과 권력이란 자칫하면 죽어서도 욕 먹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그 와중에도 이중 인격자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접했다.

죽고 나면 다 부질없는 짓인데, 다들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사진, 글 / 조문호

 

한정식 선생님게서 정영신씨 전시 중에 집에 한 번 들리라는 전화를 몇 차례나 하셨으나.

틈이 나지 않아 전시가 끝난 지난주에야 들릴 수 있었다.

찾아 뵌 적이 한 달이 더 되었는데, 같이 식사하기 위해 부른 줄 알았다.

 

식사도 식사지만, 정영신 전시에 가보지 못해 축의금 전해주려 부른 것 같았다.

뻔한 형편에 전시하는 것이 마음 쓰였는지, 정영신씨께 봉투를 건네 주신 것이다.

항상 걱정만 끼치는 송구함에 차마 고개 들 수 없었다.

 

그 날은 선생께서 비빔밥을 드시는 요일이지만,

복국을 사주겠다며 서초동 초원 복집으로 데려갔다.

꾀죄죄한 행색에, 전 날 술 퍼마신 것을 눈치라도 챘을까?

선생의 세심한 배려에 코끝이 찡했다, 살아 생 전 보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댁으로 돌아오니, 사모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들릴 때마다 벽에 걸리고 탁자에 진열된 가족사진에 먼저 눈길이 가는데,

누군들 가족사진보다 더 애착 가는 사진이 있겠는가?

 

가족사진 틈에 징그러운 내 꼬락서니도 보였다.

오래 전 선생 생신 때 찍은 단체사진에 끼어 있었는데,

선생님 모습은 젊어 보이는데, 나는 왜 그때부터 늙어 보일까?

 

커피 한 잔 마시는 중에 선생께서 보관하고 계신 사진 파일을 보여주었다.

불면증에 시달리기 전 인사동 작업실을 오갈 때 기록한 사진이라는데,

내년 봄 쯤, 사진집으로 묶을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지난 번에도 그 사진을 본 적은 있으나,

사진이 20여장 밖에 되지 않아 사진집 만든다는 말씀은 없었는데,

가을에서 겨울로란 사진집 제목까지 말씀하셨다.

하기야! 사진 내용이 중요하지 량이 무슨 소용이랴.

 

그 사진들은 이전에 발표된 '고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일상적인 도시풍경이 왜 그리 쓸쓸하고 슬퍼 보이는지 모르겠다.

마치 선생께서 투병으로 사진을 더 이상 못 찍게 될 걸 예견이라도 하신 것 같았다.

 

그 사진들은 선생의 허무하고 쓸쓸한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많은 사진인들에게 귀감이 될 좋은 사진집이 나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선생께서 마음의 병을 다스려 다시 작업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사진, / 조문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