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5일장 순례기/정영신 지음/256쪽·1만5000원·눈빛

 

 

충남 예산장에서 3대째 국수를 만들고 있다는 김성근 씨. 2011년 1월 촬영. 눈빛 제공

 

 

 

대여섯 살 때 입력돼 용케 세월에 쓸리지 않고 잔존한 대여섯 가지 기억 중 하나가 시장 구경이다. 머리 위로 번쩍 들린 손을 어머니께 꼭 붙잡힌 채 줄줄이 이어진 대야와 광주리 만물단지 숲을 휘둥그레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삑’ 소리 바코드와 쇼핑백이 아니라 됫박과 신문지 포장으로 마무리하던 주고받음의 공간이 서울 복판에도 존재했다.

“장에 오는 사람들은 됫박에 담아 받는 걸 좋아하는데 장 관리주체는 저울을 사용하라네요. 15년 넘게 몸뚱이처럼 지니고 다닌 됫박인데 장에서 못 쓰게 한다고 버리면 벌 받을 거예요. 이것 덕에 먹고살았는데.”

경기 성남시 모란장에서 약재를 파는 60대 상인 노 씨의 이야기. 저자는 30여 년 동안 전국 5일장 552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사람들에게 말을 붙였다. 두서없는 시장바닥 대화가 잡다한 서론 없이 단도직입 빼곡하다. 됫박이 좋을지, 저울이 좋을지 가치판단을 밀어 넣은 문장은 없다. 그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수십 년 전 시장바닥의 울퉁불퉁 축축한 시멘트길이 또렷하게 다시 밟힐 따름이다.

덤 더 주겠다고 손님 낚아챘다며 시비가 붙은 두 할머니의 다툼 소리. “머시여? 자네가 제대로 팔고 있는 것이 맞는가?” 태극기를 내걸고 앉아 “유관순 누나가 이것 먹고 대한민국 만세 외쳤다”고 외치는 충남 천안시 아우내장 된장 상인의 외침.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겠다’는 얄팍한 결심의 무모함, 살아가는 모양새의 옳고 그름을 언어로 논하는 어리석음의 뒤통수를 때린다. 카메라 하나 챙겨 들고 가까운 장에 나가고픈 욕망이 읽는 내내 들썩들썩한다. 책장 다 넘겨 덮기 전에 어떤 시장에든 당도해 있기를, 저자도 원할 거다.

동아일보 /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서평] 전국 5일장 순례기

"하늘만 빼곤 온통 까만 동네였드래요... 물도, 땅도, 아이들 얼굴도요. 겨울에 눈이 오면 하얀 이불 같다며 좋아했던 아이들 모습이 눈에 어물거립니다."
시간이 멈춘 검은 동네 철암장엔 과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장터를 지키고 있다.

- 강원 태백 철암장 중

 

▲ 전국 5일장 순례기 우리 전통과 인정을 찾아가는 장터 순례기
ⓒ 눈빛출판사

 


다큐 사진 작가 정영신의 글로 만나는 태백의 풍경이 낯설지 않은 이도 있을 것이다. 탄광촌에서 유년을 보냈거나, 탄광촌의 풍경을 보낸 이라면 향수에 젖어들 것이다. 밥도, 얼굴도, 옷도, 흐르는 물도, 까만 탄광촌 마을은 급속한 산업화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잊혀가는 전통과 인심, 삶의 흔적을 사진과 글로 살려낸 사진집 <전국 5일장 순례기>가 출간됐다.

정영신은 30년 동안 전국 522개 장터를 돌며 장터서 만난 사람과 풍경을 글로 담아냈다. 장이라야 유행가 가사로 들어 본 화개 장터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봉평장, 대화장 정도를 들어봤기에 전국에 522개의 장터를 돌며 장터 풍경과 사람을 담아 낸 작가의 끈기와 그 속에 담긴  투박한 삶, 삶의  땀 냄새가 함께 느껴지는 것 같다.

작가는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제주도 장터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을 통해 사라져 가는 전통과 인정, 그 안의 삶과 땀을 담아냈다. 각도의 대표적인 장터 풍경을 소개하고, 각 장터 소개 말미에 인근 장터의 특산물과 장날을 소개했다.

경기도는 강화 풍물장의 화문석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유기 산지, 안성장,  국내 최대 시장이 된 성남 모란장, 화성 조암장, 평택 안중장을 소개한다.

강원도는 태백 철암장, 동해 북평장, 고성 거진장, 삼척 도계장 등 대표적인 장터를  통해 탄광촌의 고달팠던 삶의 흔적과 나물을 캐고 해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이 삶을 소개한다.

충청남도는 대전 유성장, 부여장, 예산장, 공주 산성장, 천안 아우내장, 서천 특화시장 소개를 통해 충청도 사람들의 서두르지 않는 여유와 국밥집 인심 등을 소개한다. 충청북도는 괴산장, 단암장, 영동장, 진천장, 미원장을 소개한다. 경상남도는 거창장, 합천장, 의령장, 경화장, 구포장, 반성장을 소개한다.

경상북도는 청도반시로 유명한 청도장, 건천장, 고령장, 경주 양복장, 예천 지보장을 소개한다. 전라북도는 울진 흥부장, 군산 대야장, 익산 북부장, 임실 길담장, 전북 고창장, 진안장을 소개한다.

전라남도는 전남 함평장 녹동장, 고흥장, 무안장, 진도장, 곡성 석곡장, 구례 산동장, 순천 아랫장, 광양 옥곡장, 벌교 꼬막으로 유명한 보성 벌교장, 영암 아리랑 영암 독천장, 진도 십일시장(임화장)을 소개한다.

전국의 장터를 소개합니다

"내 태자리가 여그 여자만 갯벌이여. 고행 땅이 좋은께 여태꺼정 대처에 나가 본적이 없당께. 허벅지까지 빠지는 뻘 속에서 고상을 해봐야 꼬막 장사든 바지락 장사든 할 자격이 있제."

벌교장을 소개하는 첫 대목에 태백산맥의 외서댁과 장터댁 등 태백산맥을 통해 각인된 벌교 꼬막과 여인들의 강인하고 차지고 끈질긴 삶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들 여성의 삶에 오체투지로 삭막한 자본가의 마음을 두드려 소통을 하려했던 기륭 여성노동자들이 겹쳐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사실  뻘같은 진흙탕 같은 세상 속에서 꼬막을 캐고 바지락을 캐며 강인하게 생명을 이어온 대지의 딸이나, 도시 노동자로 부모와 가족을 먹여 살리던 이들은 대부분은 이 땅의 어머니요, 누이인 여성들이다. 그들은 장터든, 공장이든, 산이든, 들이든 어디서든 생명을 키워내고, 정을 나누고, 덤을 나누고 산다.

작가는 주도 9군데 장터 중 제주 세화장과 모슬포장의 풍경과 사람을 소개하며 30년 간 작업을 마무리 한다. 에필로그에 30년간 522개의 장터를 어떤 마음으로 다녔으며, 어떤 눈길로 풍경과 사람을 담았는지 잘 드러난다. 장터에는 사람과, 역사와, 삶과 땀이 있다. 삶의 향방을 잃은 사람이라면 장돌뱅이처럼 장터를 돌며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삶의 의욕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장터는 작가 말처럼 사람의 희망을 엮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장터는 끝이 아니다. 5일장이 열리고 있는 한 또다시 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대상을 보는 관점이나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보부상에 대한 사려들을 찾아가면서 포괄적인 인문학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장을 지키는 개개인의 사람들에 집중되었다.

그 사람들을 모르면, 그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 없다는 생각에 찍히는 사람과의 소통에 관점을 두어 인터뷰도 했었다. 사진에서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전달하고, 벙어리로 남는 사진이 아니라 말을 건네는 사진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따뜻한 인간의 정과 덤이 살아있는 그곳 장터는 희망을 엮는 집어등(集魚燈)이다. - 책 내용

 

덧붙이는 글 | <전국 5일장 순례기> 정영신 글,사진/ 눈빛출판사/ 1만 5000원


 [오마이뉴스 / 이명옥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