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풍류가 사라진 지 어제오늘 만의 일은 아니건만, 새삼 인사동 노래를 부른다.

인사동 풍류란 인사동에 시냇물이 흐르던 조선시대 서화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8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철학자 민병산선생을 비롯하여 천상병, 박이엽, 강민 시인 등의 문객들이 명동과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넘어오며 풍미했던 낭만 말이다.

 

인사동에 돈 바람이 분 것은 전통문화거리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살기 힘든 사람들이 집에 숨겨 둔 골동이나 고미술품을 팔려고 가져 나오며 비롯되었다.

오래된 집안 가보를 팔아 쌀을 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

당시 정보장교로 한국에 와 있던 막 뮐러는 한 달 봉급으로 두 트럭이나 되는 골동을 사 모으기도 했단다.

보관 창고에 임금의 옥쇄가 발에 차였다는 때로, 인사동의 골동상들이 떼돈을 벌던 시기였다.

배에 가득 실은 골동품을 일본으로 내다 판 매국노 같은 장사꾼도 있었다.

 

골동상이 얼마나 많은 돈을 주물렀으면, ‘금당살인사건이라는 끔찍한 일도 생겨났다.

79에 벌어진 금당 살인사건은 진귀한 골동품이 있다며 금당주인을 유인한 후,

안주인과 기사에게 현금 오백만원을 갖고 나오도록 만들어, 세 사람 모두 죽여 암매장한 사건이었다.

그 일로 인사동 고미술상이나 중계상 삼천여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76명은 그 사건과 관계없는 일로 구속되는 등 인사동 고미술상에 큰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지만, 그때뿐이었다.

 

고미술품과의 인연을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사동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야바위 같은 뒷거래가 은밀히 이루어진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모호하고 도굴품까지 늘렸으니,

장사꾼에서 장사꾼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등 희한한 일이 많았다.

케이비에스에서 방영한 진품명품이란 프로도 일조했다.

 

고미술품 전성시대는 안으로 곪았지만, 관광 시대로 접어든 88년부터는 밖으로 곪기 시작했다.

인사동 자체가 잡동사니 거리로 변한 것이다.

흐르는 세월 따라 변하는 인사동을 누가 잡겠냐마는, ‘구하산방’, ‘통문관’, ‘명신당필방’, ‘수도약국’,

통인화랑’, 이문설농탕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가 곳곳에 살아있는 곳이 아니던가?

 

뭐니 뭐니해도 예술 중심지인 인사동에 예술가들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예술로 빌어먹는 가객들이 콩깍지 속 콩알처럼 주막에 틀어박혀 개똥철학으로 목청 높인 적도 아득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인사동 골목 문화를 만들어 온 예술가들의 풍류가 새벽 안개처럼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오 가며 들렸던 벽치기 골목에 참새방앗간 하나 있었으나, 얼마 전 젊은 매니저가 들어 오며 제동이 걸려버렸다.

늙은이들이 있으면 젊은 사람이 오지 않는데다, 안주 하나에 술 한 병 시켜 놓고 세월을 죽이니 무슨 장사가 되겠는가?

인사동이야 노 예술가들의 출입이 잦아 여태 살아남았지, 다른 지역은 노인들 출입이 통제된 지 오래다.

 

인사동 골목골목을 찾아보면 술 마실 곳이야 없겠냐마는, 사람을 만날 장소 즉 이산가족 상봉소가 사라져 걱정이다.

아무리 그렇지만 전시를 여는 화랑이 밀집해 있는 이상, 등 돌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인사동 골목을 배회하다 발길을 돌리는데, 이젠 지인들의 전시 뒤풀이에서 만나는 방법뿐이다.

 

 

비싼 점포세 내가며 늙은 예술가들을 반길 곳은 없으므로

참새 방앗간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된다.

 

인사동을 출입하는 예술가들이 힘을 모아 인정과 예술이 살아 넘치는 곳을 한 번 만들어 보자.

십시일반 역할을 분담하여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라 작품을 싸게 거래하거나

시 낭송회나 여러가지 토론회를 갖는 등 하나밖에 없는 예술가들의 둥지를 만들자.

 

인사동을 방황하다 외롭게 떠나가신 강민시인과 심우성선생이 그리워진다.

 

사진,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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