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은 영문도 모른 채, 안성에 있는 변승훈씨 도예공방에 끌려갔다.
그 날은 여의도 집회 가는 토요일이지만, 정영신씨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나?
일을 끝내고 여의도 갈 작정으로 일찍 출발했는데,
마포에서 미술평론가 최석태씨를 태우는 걸 보니 좀 불안해졌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변승훈씨 공방이라면 한번 쯤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그를 알게 된지가 수십 년이 되었건만, 작업실은 커녕 그의 전람회조차 몇 번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달에도 ‘민예사랑’에서 초대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스스로 전시장 금족령 내린 그간의 사정에 또 모른 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빚진 듯한 오랜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동안 변승훈씨 전시를 두 번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제일 처음 본 건 80년대 후반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개인전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남다른 도예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두 번째 본 것은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민예사랑’의 ‘빙빙유람전’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문영태씨 연락으로 갔는데, 변승훈씨가 전시하는 걸 모르고 간 것이다.



30여년 만에 만난 그의 작품은 놀랍게 변신해 있었다.

투박한 질감의 매혹적인 그릇에 마음을 뺏겼으나, 전시 후에 또 잊어버렸다.

변승훈씨 분청작품이 좋다는 이야기는 여러차례 들었지만, 어쩐지 연이 닿지 않았다.

인사동 술자리에서 간혹 만나도 쓸데없는 술주정으로 시간 보냈다.



느닷없이 최석태씨와 변승훈씨 공방을 찾게 될줄이야 꿈엔들 알았겠는가.

가서야 알았지만 작품집 제작에 필요한 사진찍을 일이 있단다.



일단, 작업실 주변에 늘려 있는 그의 도자 작품에 압도되었다.

변승훈씨의 작품 영역은 분청의 생활도자에 국한되지 않고, 회화적, 부조적 도자로 폭 넓었다.

구석구석 자리 잡은 작품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전통 분청을 기반에 둔 디자인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분청세계를 개척했더라.

점심 때라 식당으로 안내되어 밥부터 먹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방황한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한 때 록그룹을 결성하는 등 음악에 푹 빠져 살았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계기로 홍익대에 진학하여 섬유미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는 도중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985년부터 도예에 몰입했다고 한다. 

분청에 일가를 이룬 윤광조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며 자신의 길을 찾은 듯했다.



다시 공방에 돌아와 그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뒤늦게 듣게 된 많은 이야기와 작품집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난, 백자나 청자보다 분청을 유달리 좋아한다.

분청하면, 분 바른 여인네가 술 한 잔 마신 듯한 불그레한 얼굴부터 연상되는데,

서민적인 인상을 주는 분청의 투박한 질감이 너무 정겨웠다.

한국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드러낸 분청은 무심하면서도 은근한 자연미를 담고있다.

우리네 정서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분청이야말로 우리민족의 숨소리를 듣는 듯 친근하다.



공방 입구에 자리 잡은 변승훈씨의 분청 항아리는 기존 형식을 넘어서고 있었다.

제 멋대로 생겼지만, 볼수록 정감 가는 작품이었다.



변승훈씨 작품 디테일에서 삼베같은 투박한 직조의 결을 느끼는 것은

섬유미술을 전공한 그만의 감성이요 감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변형된 작품들이라 자칫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으나 하나같이 자연스러웠다.

사진 찍을 때의 자연스럽다는 말에 앞서 모두 자연을 닮아 있었다.



분청사기로 시작되었으나, 그의 작품세계는 분청자기에 머물지 않았다.

현대적인 형태의 기물제작에서부터 목탄 드로잉을 도자 부조로 표현한 벽화에 이르기 까지 폭 넓었다.

이미 분당 요한성당과 대화성당 등의 도자벽화에서 보여준 작업들은

도자와 회화의 경계를 무너트리며, 분청사기의 평면화 작업에 일가를 이루었다.



작가의 실험적 도전정신도 돋보였다.

지금 작업 중인 작업도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운주사에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불상을 닮았다.



그리고 지금의 공방자리는 조상의 묘소가 있는 자리라는데,

그곳에서 몇 백년 전의 분청사기 파편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선조의 대를 잇는 필연의 업인지도 모른다.

그 게 분청에 전념한 계기라는데, 지금 사용하는 흙도 모두 그 터에서 나온 흙이란다.



변승훈씨는 술을 즐기는 애주가지만,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일체 술을 마시지 않는단다.

그 날도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술을 마셨는데, 운전 때문에 나만 못 마시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체되어 여의도 가는 일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어머니께서 자기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비롯하여 

누님이 어머니 역할을 대신했다는 이야기 등 집안의 감추어진 이야기까지 들춰냈다.

청바지를 사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눈치 챈 누님이 책갈피 속에 몰래 넣어 둔 5백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단다.



항시 돌이나 나무의 질감을 어루만져 그런지, 그 질감이 자연스럽게 옮겨 간단다.

작품에 드러난 질감도 그냥 생겨 난 것이 아니었다.




흙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스스로가 흙이라는 그의 말처럼, 아낌없이 작업에 불 태웠다.



술이 떨어져 다시 읍내 술집으로 옮겼는데,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음주면허라며 호기 부린 때가 엊거제 같은데, 뒤늦게 철든 셈이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일어섰는데, 변승훈씨도 서울가겠다며 따라 붙었다.

공방 문단속도 하지 않고 불도 켜두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돌아오는 내내 두 사내의 취중 잡담을 음악삼아 들어야 했다. 


"아이구~ 내 팔자가 와 이래 댓뿟노?"


사진, 글 / 조문호



















정영신사진

정영신사진























옷깃만 스쳐도 전생 인연이라 했던가. 30여년 전 경기도 광주 작업실에서 인연을 맺었던 문하생들을 다시 불러 함께 전시를 열었다. 반세기 동안 분청작업을 해온 급월당(汲月堂) 윤광조(72) 작가의 ‘짓’이다. 부름을 받은 이들은 한국 도예계의 스타작가 변승훈을 비롯해 김상기, 김문호, 이형석 등 나름의 세계가 확실한 작가들이다. 전시는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31일까지 열린다.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고 필라델피아미술관(2003년) 시애틀미술관(2005년) 등에서 개인전을 가진 윤광조 작가가 산동시리즈 작품 뒤에 섰다. 그의 작품은 서양형식주의 미술의 반성기류 속에서 몸이 만들어내는 즉자적인 감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전업작가가 작업을 계속하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마치 알몸으로 가시덤불을 기어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각자 흩어져 한적한 시골로 들어가 전업작가, 그것도 도예가의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은 대견하기도 하면서 가슴 한켠이 알싸합니다. 그때 저만 만나지 않았으면 지난한 길을 가지 않고 좀 더 쉬운 길을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책임감이 어깨를 누르지요.”

지난주 토요일 전시장에서 만난 윤 작가의 눈가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 모두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자적인 자기 작품세계를 갖고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과 함께 세월의 흔적을, 지금의 모습을 한자리에 모아 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는 생각에서 이번 전시를 갖게 됐습니다.”

가나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이번 전시의 제목은 ‘급월당 줄기 현대한국 분청전-이제 모두 얼음이네’다. 가나문화재단 김형국 이사장이 지었다. 각자의 길에서 30여년을 버텨 이제 모두 물에서 얼음이 됐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제에서 도반이 됐다는 얘기다.

윤 작가는 고려청자, 조선백자만 자기로 알고 지내던 어느 날 일본책을 보고 분청이 우리나라 도자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면서 가슴이 벅찼다.

“육군사관학교박물관 연락병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국립박물관 최순우 선생(당시 미술과장)을 자주 뵙게 됐습니다. 분청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물으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지요. 제가 너무 현대적이라고 했더니 앞으로 분청을 공부하라고 권했습니다.” 그의 ‘분청 인생’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분청은 고려청자가 쇠퇴하고 조선백자가 틀을 잡기 전의 시기를 감당했던 자기다. 왕실 귀족과 사대부들의 권력 공백기의 틈새가 창조의 온상이 됐다. 순도 높은 양식성보다는 자유분방한 예술성이 강했다. 청자 흙에 백토(화장토)를 분장하듯 발라 분청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윤 작가는 20년 가까이 분청에 매달려 물레를 돌렸다. 어느 시점부터 새로운 형태에 대해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용기라는 원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고뇌’에 빠져들었다. 1986년도 겨울 아는 스님이 계신 지리산 전각사로 발길을 옮겼다.

“사정 얘기를 하니 스님은 ‘배운 사람들은 머리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절을 한 번 해보라고 하셨어요. 하루 3000배를 열흘 하면 뭔가 풀릴 수 있을 거라 했지요.”


그는 처음엔 선뜻 이해가 안 됐다. 조곤조곤 얘기를 해주지 왜 절을 하게 하나 했다.

“열흘간 하루 3000배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스님은 냉기가 도는 법당에서 5000배를 이틀간 더하게 했습니다. 4만배가 끝날 무렵 제가 물레를 안 돌리면 된다는 답이 주어졌어요. 고정관념을 깨는 깨달음이었어요.” 어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의 명실상부한 현대분청작품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저는 10년에 한 번은 주제를 바꿔 왔습니다. 작업도 그렇고 주제 접근 자세도 나태해지는 것을 저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시장에 출품된 작품 중에 최근작인 산동(山動)시리즈가 눈길을 끈다. 산의 형상을 입체적으로 심플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윤 작가는 24년 전 경주 안강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아침에 창을 열면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해 준 것은 도덕산이었다. “어느 날 도덕산 영감님이 저한테 걸어왔어요. 산이 다가오는 전율을 담아낸 것이 산동시리즈입니다.”

그는 언제부턴가 화장토 위에 그림마저도 그려 넣지 않았다. 재료 성질 자체만으로 표현하고 싶어서다. 이전엔 물성 위에 자신의 얘기만 한 꼴이었다고 했다.

“재료가 갖고 있는 물성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제가 흙이 되지요.”




30여년 만에 사제관계에서 도반관계로 함께 전시를 연 ‘5총사’.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문호, 윤광조, 김상기, 변승훈, 이형석 작가.



그는 종국엔 모두 흙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물성 이해를 잘하면 갈 때 흙과 더 친해져 죽음마저도 친숙해질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용기가 아닌 불규칙한 조형은 수축률이 일정치 않아 완성품은 30% 정도에 그친다.

“분청의 매력은 자연스러움에 있고 형태나 규격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러움에 있습니다. 각자 자기 스타일을 갖게 해주는 미덕이 있지요.”

그의 제자들 작품도 나름의 제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스승의 아류가 아님을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스승을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 작가는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작품이란 한 인간의 ‘고뇌하는 순수’와 ‘노동의 땀’이 독자적인 조형언어로 표현되어 여러 사람과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작품은 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디어나 지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순수와 고독과 열정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생전에 최순우 선생은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에게 좋은 도자기가 있으면 꼭 윤광조에 보여주라고 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오죽했으면 고유섭 선생의 아호인 급월당을 그에게 전해주었을까. 우물에 비친 보름달은 무슨 짓으로도 떠낼 수 없다는 고사대로 지고지선의 경지를 향해 성심으로 정진하라는 채찍이었다.

윤 작가는 볏짚은 화장토에 담갔다가 작품에 붙여 굽기도 했다. 삼베도 같은 방식으로 했다. 볏짚과 삼베의 흔적들이 작품에 새겨졌다.

“허상들이지요. 인생이 그런 겁니다.”

허허로운 그의 말 한마디가 법어처럼 전시장을 울렸다.



[스크랩/ 세계일보]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동갑내기 도예가 윤광조, 서체추상 오수환 화백 2인전
21일까지 가나인사아트센터서…그림·도예 40점씩 선봬



도예가 윤광조 씨(왼쪽)와 추상화가 오수환 씨가 서울 인사동 가나아트센터 전시장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78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열린 장욱진 화백의 도화전(도자기그림전)에서 젊은 작가 둘이 처음 만났다. 장 화백의 도화전에 참여한 도예가 윤광조 씨와 화가 오수환 씨였다. 술을 좋아하는 이들은 곧바로 단짝 친구가 됐다. 조각과 회화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전통의 정신에 현대성을 녹여 넣는 작업에 서로 공감했다. 이들은 요즘도 술자리에서 서로를 ‘윤 도사’ ‘오 대인’으로 부르며 전통과 현대미술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야기한다. 

해방 후의 혼란한 사회와 전쟁, 독재와 민주화 시대,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를 겪은 두 작가는 이제 각자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다. 윤씨는 현대적 분청사기의 대가로, 오씨는 역동적인 서체 추상화가로 유명하다. 올해 만 70세가 된 이들은 지금도 소년 같은 순수함과 감수성으로 매일 10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이들의 70년 생애와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가 마련됐다. 가나문화재단이 오는 21일까지 서울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여는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유희삼매(遊戱三昧) 도반 윤광조·오수환’전이다. 두 원로 작가의 예술 인생과 철학을 한눈에 보여줄 작품 40여점씩을 엄선해 내놓았다. 이들은 “50여년에 걸친 작업은 일방통행식 서양미술에서 벗어나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미학 세계에 대한 아름다운 도전”이라고 한목소리로 설명했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윤씨는 한국의 전통적인 민예정신과 분청사기의 미학을 계승해온 작가다. 2003년 영국 런던에 있는 도예전문 화랑인 베송갤러리에 초대된 데 이어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됐다. 2011년에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열린 분청사기전에 참여해 주목받았다.

그는 초기에 흙의 물성을 깨워 불교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도자기에 담아냈다. 그러다가 1994년 경주 안강 도덕산 기슭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무위자연’ ‘자연스러움’에 초점을 맞췄다. ‘산동(山動)’ ‘혼돈(混沌)’ ‘심경(心經)’ 등 그의 최근작에선 일흔의 나이에도 ‘고뇌하는 순수’와 ‘노동의 땀’을 조형언어로 표현하려는 작가정신이 느껴진다. 물레도 없이 직접 흙가래를 쌓아올리는 기법으로 도예 작업을 하는 그는 “작업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한다”며 “죽을 때까지 흙과 불을 붙들고 예술적 삶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전통서예와 추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오 화백은 50년의 화업을 ‘선(線)과 선(禪)의 통합 과정’이라고 압축했다. 서울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베트남 파병군인 출신이다. 이후 1970년대에 5년간 구상작업을 하던 그는 사회 현실이 마뜩잖아서 그림보다는 포스터가 더 필요하다고 보고 군사독재를 비판하는 구상작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허무함을 느끼고 추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검은 필선에 선(禪)을 응축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필획에서 느껴지는 기운생동과 에너지, 모든 형식, 생각까지도 무한대로 헤엄치는 대로 내버려 둔다. 붓질은 단순하지만 힘이 충만하고 그야말로 자유자재의 경지를 일필휘지로 내닫는다. 바탕 색감도 강약을 주면서 예전보다 한층 밝아진 느낌이다. 

서울 수유동 작업실에서 하루 10시간 정도 작업한다는 그는 “내 그림의 궁극적인 고향은 직관적인 표현, 알 수 없고 쓸모없는 기호적 표현, 의미 없는 기호를 보여주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02)720-1020 

[한국경제 / 김경갑기자]


동갑내기 윤광조·오수환 화업 40년 회고전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 동갑내기 일흔의 화업 도반 도예가 윤광조와 서양화가 오수환이 함께 전시를 연다. 스스로 좋아서 스스로 즐거워서 ‘놀이’에 매달린 세월은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었다. 미술의 길이 생계수단이 못 된다는 부모, 선배의 고언에도 막무가내로 내달려 온 길이다. 타고나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거나 긁적이는 사이에 자기표현의 기쁨이 있다고 여겼던 자기몰입의 삼매(三昧)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시제목도 ‘놀다 보니 벌써 일흔이네-유희삼매’다. 분청사기의 형식적 유사성을 탈피한 윤광조와 서예 등 우리 전통을 서양화로 승화시킨 오수환의 40년 화업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윤 작가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와 시애틀 등 국내외 유명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오 화백은 프랑스의 대표적 미술재단인 매그재단 초대로 3개월 동안 전시회를 가졌다. 전시를 기획한 가나문화재단 김형국 이사장은 “유명 선배작가들이 일본 유학 등으로 해외조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 견주어 두 작가는 순전히 한국 토양에서 연찬에 연찬을 거듭해 온 순국산의 작가정신을 가진 작가들”이라며 “우리 토양에서 우리 특유의 소재를 붙잡아 세계적 척도와도 씨름하게 된 작가들”이라고 평했다. 전시는 27일부터 8월 21일까지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7일 오후 2시엔 김 이사장의 전시연계 강연이 있고, 8월13일 오후 2시엔 도예가 윤광조의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마련된다.


윤광조 ‘산동’(山動,The Mountain Moves,2015, 34x12x51cm, 적점토, 화장토, 타래쌓기, 흘림, 귀얄, 뿌리기)


◆윤광조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 

우리나라의 현재 문화 환경에서 전업 작가가 작업을 계속하면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마치 알몸으로 가시덤불을 기어 나오는 것과 같다. 우리의 과거 도예문화는 매우 찬란하여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전 세계인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도예는 그 길을 잃고 있다. 다른 분야와 달리, 일반인들의 현대도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개인 작업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경제력과 지속적인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품이란 한 인간의 ‘고뇌하는 순수’와 ‘노동의 땀’이 독자적인 조형언어로 표현되어 여러 사람과의 공감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은 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디어나 지식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순수와 고독과 열정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미쳐야 한다. 그러나 미치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머리와 가슴은 구름 위에, 발은 땅을 굳게 딛고 있어야 한다. 이 지극히 상반된, 모순덩어리들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 사람이 예술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스러움, 자연스러움’이다. 새로운 조형인데 낯설지 않은 것, 우연과 필연, 대비와 조화의 교차, 이러한 것들을 통해 자유스러움, 자연스러움을 공감하고자 한다. 이러한 화두로 꾸준히 공부해 나아가면 언젠가 자유와 자연을 그대로 드러낼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수환 ‘변화’(變化, 2007, 235x200cm, Oil on canvas)


◆오수환의 화론(畵論)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는 사람에게 상상력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우주의 무한한 공간에서 노닐 게 하는 것이다. 그림은 최종적인 상태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문을 여는 것. 동양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에는 깊숙이 스며 있는 적막이 있다. 동양의 영원성은 바로 이 적막이다. 그에 비하여 서양의 영원성은 존재의 확실성을 위한 것이다.

동양예술은 격을 존중한다. 참다운 것은 기이한 것보다는 평범한 것에, 멀리 있는 것보다 근처에 있으며, 한 개의 돌멩이나 한 가닥의 흐르는 물에 있다고 본다. 평범한 몸짓, 붓의 흔적, 물질의 표정 같은 것이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에 “마음을 경건하게 가다듬고 행동은 간소하고 너그럽게 한다”는 글귀가 있다. 이 조용하고 깊은 경지가 중용(中庸)의 경지, 노(老)의 경지이다. 육체를 자연 속에 되돌리고 맑고 밝은 세계로 가는 것. 모양 없는 모양을 발견하는 경지라고 할까. 

나의 그림의 궁극적인 고향은 논리적이 아닌 직관적인 표현, 알 수 없는 쓸모없는 기호적 표현, 의미 없는 기호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의미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운명을 정직하게 따라가는 세계이다. 


[세계일보]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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