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RVANA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18_0915 ▶︎ 2018_1020

김상표_Nirvana-싱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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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윤갤러리

YO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7

Tel. +82.(0)2.738.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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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의 존재론(얼굴성에 넣는 덧말) ● 통상 얼굴은 나의 정면, 네 눈에 나로 보이는 표피, 내 인격의 표징, 그리고 내가 너로부터 숨는 베일이다. 그래서 얼굴은 속절없이 노출된 것이고 자명하게 읽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얼굴의 가시적 형태는 비가시적 형상, 즉 가시적으로는 일그러짐이나 긁힘 혹은 짜부라짐 같은 것으로 명명될 형상을 위해서는 지워져야 하는 클리셰-이미지이다. 즉 보이는 얼굴은 안 보이는 얼굴, '진짜'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안 보아야 하는 그러나 결국 말려 들어가서 (잘못)읽고 있게 되는 속임수, 매끄러운 이미지다. 물론 보인 얼굴만이 안 보이는 얼굴의 배경, 암시이기에 이 이중성 혹은 동시성이 시계(視界)에 동시에 기록/배치되어야 한다. 이것이 얼굴을 그리면서 지우는, 만들면서 훼손하는 예술가의 과제이다. 얼굴이 많이 보일수록 그 얼굴은 사회적 위신이나 사적 인격의 알리바이가 되어 있을 것이고 사라질수록 나의 타자성에 충실해질 것이다. 얼굴은 나를 보호하기에 나를 억압한다. 얼굴이 많을수록 나는 질식한다.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을수록 나는 죽어간다. 얼굴은 당신이 나를 알아보고 그래서 당신이 안전해지는 당신의 일부이기에 나는 당신이 알아본 얼굴에 학대당한다(누가 내 얼굴 좀 치워줬으면!). 얼굴은 당신이 나를 통제하는, 그래서 '관계'를 이어가고 소유하는 데 필수적인 재현 이미지이다. 나의 얼굴은 내 것이 아니다. 당신이 알아보는 내게 나는 없다. 나는 당신이 알아보는 얼굴을 입고 나이지만, 그래서 그 얼굴과 나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만 그 간극을 당신은 간과해야 한다. 얼굴은 내 쪽으로 침범한 당신의 호의, (무)관심이기에 내 얼굴은 결국 당신의 환영적 이미지이다. 나는 아버지, 어른, 교수, 남편과 같이 당신이 읽는 상징 기호나 역할이 아니다. 나는 그런 기호로 잘 불려질수록, 당신이 덜 불안할수록 내가 아니다. 내가 당신이 원하는 좋은 사람의 얼굴을 가질수록 나는 점점 나를 잃어간다. 그래서 나의 '나'나 물론 당신의 '나'도 시에 자주 등장하는 서랍이나 주머니와 같은 은유가 그렇듯이 상대가 모르는 비밀을 숨기고 있다. 그 비밀은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는 분노나 슬픔이겠지만, 내게는 무사한 저 이름들이 슬픔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이름이 없었을 때, 이름이 붙지 않았을 때를 기억하고 욕망하고 그때로 돌아가려고 한다. 내가 한낱 소년이나 시시한 아이였을 때, 내가 최초의 어떤 행위들, 의미가 도착하기 전 도망가던/날라간 행위들이었을 때를 닮으려고 한다. 삶이 제스처, 즉흥, 사건만으로도 충분했을 때를 나는 반복하려고 한다. 나는 그래서 그리고 있었다. 나는 화가로서 그린 것이 아니라 행위로서, 하나의 즉흥으로서 캔버스와 물감에 몰입했다. 왜 유화였는지는 사후적으로 설명가능하다. 내가 해보지 않은 것이었고 내가 많이 봤던 것이었고 읽고 쓰는 데 능숙한 내가 해석-비평할 수 있는 대상이었고, 그만큼 내게는 가까이 있었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지지하던 행위였다. 이것은 나의 회화이다. 전혀 회화를 배우지 않았지만 회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내게 회화는 내가 오랫동안 연마해온 태극권이나 검도의 자세로 다루되, 이번에는 허공이 아닌 캔버스를 상대로 이번에는 칼이 아닌 붓으로 채우면 되는 시·공간이었다. 나는 "붓으로 춤을 추는", "붓을 칼처럼 휘두르며 발작적으로 그림그리기를 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 식의 회화를 발명했다. 나는 처음 그렸지만 나의 회화는 최초의 회화이다. 회화는 당신도 알고 있는 사회적 이름이지만 나는 그 이름을 내 식으로 최초로 채웠다. 나는 화가가 되려고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수식하는 여러 이름들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고, 이런 절대적 결여나 부재를 당신의 허락이나 이해를 바라지 않으면서 그러나 당신이 회화로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채우려고 했다. 누군가가 언명했듯이 나는 회화는 시각적 이미지와의 투쟁에서 획득한 형상을 위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내가 나의 자화상을 그린 전시에 붙인 '얼굴성'이라는 이름은 회화에서 말해온 형상(성)에 대한 내 이름/버전이다. 인격적인(personal) 얼굴이 아닌 비인칭적인(impersonal) 얼굴, 신중한 의도나 계산된 구성이 개입할 수 없을 만큼의 짧은 시간에 "서예필법과 검법이 녹아든 붓질과 열손가락의 본능적인 할큄"이 캔버스에 남고, 그러면 그것은 나의 얼굴성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지만 그래서 나는 '나쁜' 나,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나, 나를 위한 나를 사랑하고 책임지려고 자화상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아무 것도 아닌 인간-존재의 자유가 기록, 보존되는 장치나 의례이기에 나는 전시장에 걸려야 하는 회화의 오랜 존재방식을 따른다. 회화의 무의미는 회화의 사회적 기능 속에서만 존립한다. 얼굴의 무의미가 얼굴의 사회적 기능 속에서만 정당할 수 있듯이.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물었고 나의 3회에 걸친 개인전은 그 물음의 미적 형식으로서 구현되었다. 3회 개인전 『얼굴성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통해 나는 인간의 역설적 상황, 즉 의미의 체제에서 살면서도 허무를 욕망하기 마련인 인간의 운명을 얼굴을 매개로 탐구했다. 행위로서의 회화와 결과로서의 회화와 나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이 셋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은 글을 쓰고 칼을 휘두르고 몸을 그리고 마침내 붓을 쥐어든 내가 쉬지 않고 겨냥할 '거기'이다(이 글을 쓴 '나'는 김상표가 아니다. 그러나 김상표가 화가가 아니면서 화가이듯이 나도 김상표가 아니면서 김상표일 수 있다).


김상표_Nirvana-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자화상의 존재론(너바나의 나) ● Nirvana는 누군가에게는 열반과 해탈이고 누군가에게는 너바나이다. 김상표는 이번 개인전의 제목 『Nirvana』로 그 두 가지 의미를 포괄해 들였다. 직접적으로는 너바나의 「스멜스라이크틴스피릿」 유투브 공연 영상에 나오는 인물들―싱어, 드러머, 치어걸, 청소부와 같은―의 심리적, 물리적 변화, 즉 일상의 자기 자리나 배역을 충실히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카오스 속 좀비나 유령처럼 변해가는 상황을 회화적으로 번역했다.


김상표_Nirvana-싱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Nirvana-드러머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누구보다 자기자신이려고 했던 소년이었지만, 순식간에 밀어닥친 부와 명성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Doomed to Die Young'의 하나로써 '너머'로 사라진 커트 코베인의 살아생전의 허무주의나 무정부주의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이다. 지금도 너바나의 팬들이 즐겨 찾아보는 동영상은 공연장이자 농구장인 무대가 정동(affect)의 장면으로 전치되고, 소년 소녀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 뒤에는 청소부와 포승줄에 묶인 교장 선생만 남는다.


김상표_Nirvana-치어걸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Nirvana-싱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젊어서 죽을 운명'인 예술가들은 어른이라는 사회적 이름을 거부하고 영원히 자기 젊음을 유지한다. 커트 코베인은 영원히 '27살'의 청년이다. 커트 코베인은 살아 생전 어떤 공연에서도 같은 모습이기를 거부했다. 독학자의 거칠고 즉흥적인 기타연주가 난무했고 목소리도 공연에 따라 제멋대로 사용했다. 자신에게 늘 타인이었던, 매번 새로 탄생했던 그가 남긴 유서의 문장, "점점 소멸되는 것보다 순식간에 타오르는 것이 낫다"는 그렇기에 '얼굴성'을 잃기를 거부한 자의 문장이다. 동일성이나 반복을 몰랐던 늘 차이로서 존립했던 커트 코베인, 즉흥과 사건으로서의 커트 코베인의 삶은 저 영상에서도 계속 증명된다. 보고 또 봐도 거기에는 계속 우리가 놀랄 장면들, 사건들이 존재한다.


김상표_Nirvana-드러머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Nirvana-교장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는 이제 가족과 자기자신을 그렸던 3회까지의 개인전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너바나의 공연 영상 속 등장인물들-기호들을 자기자신으로 끌어안았다. 20살의 김상표의 분신들이고 청년 김상표가 겪었던 어른들에 대한 회상과 재해석이다. 그들은 모두 김상표로 수렴한다. 이번에는 모두 그의 춤, 칼, 몸짓으로서의 열 손가락의 행위를 통해 형상화되었다. 우리의 번뇌는 내가 변별적인 하나의 고정태, 개체, 윤곽이라는 전제에서 유발된다. 번뇌로부터의 해탈은 그러므로 자아를 복수화하고 나와 타자를, 나와 이 세계를 구분불가능한 것으로 통째로 감각하는 것, 혹은 자아를 실체가 아닌 타자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알고 있다. 영상 속 인물들이 너바나의 음악을 닮아가며 분별에서 흐름으로 넘어가듯이, 김상표는 니르바나를 욕망하는 영상 속 인간들에게서 자신을 보았고, 그럼으로써 그 이름들의 간극들을 지웠다. 허무는 충만이고 카오스는 전체이다. 김상표는 자아의 피로를 그렇게 씻고 정화된다. 음악이, 예술이 그런 의례를 책임진다. 이제 그의 자화상 연작은 나와 당신의 싸움에서 비롯되는 자아의 경계를 해체하는 쪽으로 확장되었다. 니르바나이고 너바나가 지향했던 상태이다. 물론 김상표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설명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그림은 설명불가능한 부분이 남는 과정"이라고 내게 말했다. 욕망이 없다면 행위는 없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욕망이 행위를 전부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 욕망의 소멸 이후에도 남는 것, 설명불가능한 것, 놀라운 것, 어쩌면 '아름다운' 것이다. 누구보다 지적인, 직업인이 아니라 인간으로 읽고 체화하는 인간 김상표가 자신의 지성의 '실패'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자기를 내려놓는, 자기를 쉬게 하는, 자기를 모르는 타자로 인정하는 과정으로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성의 실패와 감각의'폭력'과 동물의 슬픔은 비단 김상표만이 아닌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진실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김상표_Nirvana-청소부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8


이번에 확인한 사실인데 커트 코베인의 자살 뒤에 드러머 데이브 그롤은 새로운 밴드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결혼을 했고 가족과 친구들, 팬들에게 따듯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번에 들어본 Foo Fighters의 음악은 신나고 경쾌하면서 폭발적이었다. 나는 김상표의 회화를 '이번'에 그가 꺼내든 방편으로 간주했다. 무엇으로 불려도 좋을 그것이 이번에는 회화였다고. 이름은 불려질 수 없는 것들을 가리면서 가리키는 얼굴이기에. ■ 양효실


김상표_Nirvana-싱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불온한 자로서 NIRVANA ● "인간은 어떻게 그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 때,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의 절망적 삶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침몰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물의 근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발터벤야민) 세속적 의미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부자유한 자로서 너바나. 그들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존재의 바닥이었을 것이다. 너바나는 그 바닥을 노래하며 불온자로서 이 세상에 왔었다.


NIRVANA와의 만남 ● 붓을 칼처럼 휘두르며 발작적으로 그림그리기를 하는 나를 발견했다. 정말로 그림그리는 태도가 매우 불량해져갔다.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조차 10대 반항아들처럼 건들건들거렸다. 그때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 동영상을 만났다. 동영상 속 너바나 그룹 멤버들의 몸짓과 표정 그리고 목소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노래의 구절들도 내 저 밑바닥의 파토스를 자극했다. 첫 구절 '총을 장전하고', 마지막 구절 '부정, 부정, 부정, 부정', 이 두 구절이 특히 그러했다. 살아온 내내 죽음과 허무의 그림자를 안고 무의미함에 울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었던 나의 모습을 그 노래가 대변하는 듯했다. 너바나 그룹의 공연 모습이 이제까지의 나의 삶과 자연스레 겹쳐졌다. 너바나의 공연모습을 미친 듯이 그려댔다. 어느 날은 커트코베인이 되어 울부짖고 절규하며, 또 어느 날은 드러머가 되어 광란과 착란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다른 날은 치어걸이 되어 세속화된 몸짓으로 춤을 추면서, 또 다른 날은 그녀의 숨겨진 욕망을 폭발시키며 그림을 그렸다. 뒤이어 내게 폭력을 가했던 이들에 대한 분노 속에서 청소부를 그렸고, 마지막으로 위선으로 가득찼던 기성세대들에 대한 희롱으로 교장을 그렸다.


인생은 잔인하다 ● "인생은 잔인하다. 우연이 나를 여기 오게 했다. 떠나는 데는 선택을 요구한다. 결단을 미루는 주저함만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사이사이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언제나 마주하는 오늘,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생의 의지는 나를 더욱 옭아맨다. 겨울을 지낸 나목이 부끄러운 치장으로 생명주기를 연장하듯 오늘도 삶을 반복한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살아내야 할까?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렇게 마주해야만 하는가?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희망마저 더 깊은 절망으로 나를 몰아가지 않을까? 어떻게 출렁거리는 이 원색적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발적인 죽음, 생의 의지를 내던진 그 순간 나와 우주의 거리는 사라질까? 인생은 잔인하다." 이 글을 40대 중반에 써서 블로그에 올렸다가 "그런 글을 쓰면 엄마가 얼마나 슬퍼하겠어"라는 딸아이의 비난을 듣고 지웠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너바나 그림을 그리면서 이 시를 떠올렸다.


NIRVANA와 나는 무엇이 닮았는가? ● 너바나를 위시한 펑크락 그룹은 노동자청년들의 문화를 대표한다. 펑크락 그룹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상태에서 그에 대한 저항을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사회경제적 조건들에서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닮았다. 나 또한 어린 시절과 젊은 날에 심리적 어둠과 무의미 속에서 기존의 코드화된 교육과 삶의 양식에 저항했기에. 내가 학부, 석사, 박사 과정에서 관심을 가졌던 연구주제들도 많은 부분 이러한 내 기질과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펑크락 그룹은 반미학의 미학을 목표로 삼는다. 거칠고 조잡한 음악을 연주하며 그룹멤버들을 선발할 때도 프로보다는 아마추어를 선호했다. 나도 회화를 전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칠고 본능적인 내지름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림과 그림 아닌 것의 경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우리 둘은 사회에 대한 저항에 바탕에 두고 반미학의 미학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나의 NIRVANA되기 ● Smells Like Teen Spirit 동영상을 보면서 나는 너바나 공연에 서서히 감응되고 그 분위기에 전염되어 갔다. 점차로 나의 몸은 너바나 신체의 리듬과 강도와 속도에 공명하며 동기화되어졌다. 마침내 나는 너바나와 같은 감응으로 회화의 평면에서 무위의 춤을 추며 내 삶의 파토스들과 대면했었던 게 분명하다. 다시 말해 너바나 신체와 동조화된 감응으로 내 존재의 바닥, 어두운 심연 속에 있던 나의 충동들과 정념들, 그리고 끊임없이 내 자신으로 도래하는 비가시적인 삶과 소통하면서 그림을 그려냈다. '나의 비가시적 삶의 파토스'와 '나의 너바나 되기'가 서로를 포섭하면서 비로소 세계의 하나됨을 고백하고야마는 원융의 장소, 그곳이 바로 나의 회화적 평면이다.


그리기의 카오스모스 ● 세계는 카오스다. 나도 카오스다. 서로를 삼키고자 덤벼드는 카오스들 간의 싸움에서 잠시 적막이 흐르는 코스모스로 태어나지만, 늘 다시 카오스로 돌아갈 꿈을 꾸는 미완성의 코스모스일 뿐이다. 그것이 나의 그림에 담긴 이카로스의 날아오름이다. 서예필법과 검법이 녹아든 붓질과 열 손가락의 본능적인 할큄이 흩고 지나간 자리에는 원래의 모습을 상실한 형형색색의 물감덩어리가 '튀어오르기'와 '내려누르기'의 불규칙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아비규환의 전쟁터처럼 어지럽게 널려있는 마루와 골 위로 매끈한 물질덩어리가 언제든 흘러넘쳐날 것 같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고나면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하다. 끝나지 않은...곧 다시 시작될 것 같은...긴장감 가득한 불안정한 평화.


비인칭적 그리기 ● 신체적으로 보면 분명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자아 바깥의 그 무엇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되는 듯 싶다. 회화의 평면이 감당해낸 결과물에는 일상적 삶에서는 한번도 드러나지 않았던 내 몸의 리듬과 강도와 속도가 베어있다. 자아의 의식과 무의식 너머의 그 무엇, 난 감히 그것을 우주의 기억이라 부르고 싶다. 자아는 순간적으로 불러들이는 우주의 기억과의 교접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에 휩싸이고 곧이어 격렬한 그리기의 몸짓 속으로 빠져든다. 나는 비인칭적 그리기를 통해 주체를 망실한다. 그와 동시에 주체와 대상 그리고 캔버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에서 새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나도 대상도 캔버스도 그리기 과정에서 우주의 순수지속의 흐름 속으로 침수되어 늘 새로운 그림으로 솟아오른다.

무위의 춤 ● 나는 그리기 대상의 형태와 구조를 미리 확정하는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최초의 선과 색을 칠하면서 이것과 접속하는 다른 선과 색을 찾아간다. 그리기 과정에서 특정한 선과 색은 다른 수많은 선과 색들에 열린 채로 리좀적 접속을 계속한다. 이질적인 선과 색의 리듬들에 의해 형성된 패턴이 나의 공감각과 공명하는 어느 순간 그리기를 멈춘다. 이처럼 리좀적 접속을 통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사전에 설정되어 있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늘 잠정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결국 나의 그리기는 프로그램화되고 루틴화되고 코드화된 우리의 삶에 대해, 배반하고 저항하는 유쾌한 무위의 춤이다.


NIRVANA의 역사적 현재성 ● 일찍이 암울한 미래가 온다는 것을 감지한 불안세대인 '88만원 세대'와 헬조선을 외치는 작금의 청년세대가 그 한참 이전 세대인 너바나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 당시 불온한 존재였던 너바나를 굳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소환함으로써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예술적 저항의 역사를 현재화하고 싶다는 욕망을 욕망해본다. 또한 존재의 바닥을 경험한 불온한 존재의 의미를 되묻고 우리 시대에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존재와 조우하기 위함이다. 너바나를 회화적으로 형상화낸 이번 실험이 작은 시작이었으면 하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바람이다. Amor Fati! ■ 김상표



Vol.20180915f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존재론적 물음으로서 얼굴성 Ⅰ Faciality as an ontological question Ⅰ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2018_0627 ▶ 2018_0715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초대일시 / 2018_0627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윤갤러리

YO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7

Tel. +82.(0)2.738.1144

blog.naver.com/yoon_gallery



"나는 그림을 모른다. 그림은 규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얼굴은 더욱 그렇다. 내가 나의 얼굴을 그리는 순간 그것은 나의 얼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규정되는 순간 얼굴에 대한 수많은 다른 규정성들이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얼굴이란 얼굴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물음 그 자체로서 얼굴성에 대해서 사유하고 명상한 단상들이 그림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그래서 나의 그림은 연구노트이다." (작가노트)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그림이 그리고 싶어져 잠시 화실에 다니면서 주로 정물 데생을 배웠다. 기계적 훈련을 반복시키는 화실의 교육방식이 맞지 않아 이내 그만두고 연필, 목탄, 볼펜, 유화물감, 아크릴물감, 수채화물감 등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혼자서 초상화를 더 그려보았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고 그리다가 '나'를 그리게 되었다. 항상 자아 찾기에 목말라했던, 그리고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는 '나'를 그리고 싶었다. 경영학을 전공해서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늘 본질에 대한 갈증으로 철학에 매달렸지만, 그래도 해소되지 않고 가슴에 얹혀 있는 무엇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절집 언저리를 서성이며 살아온 '나',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그 '나'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심정을 1회 전시회 작업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철학과 경영에 대한 고민을 할수록 보편적 범주들의 자아에 대한 독재에, 오히려 내 몸은 파닥거릴 뿐이었다. 모든 행위의 과정과 결과물은 내 자아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존재의 결여에 시달렸다. 어느 날 캔버스와 마주하고 나를 그리기 위해 숨가쁘게 형태를 잡고 색을 칠했다.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 내 안에서 우글거렸던 수많은 애벌레 주체들이 하나씩 토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존재가 내 몸을 빌려 열리고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토록 채워지지 않던 결여의 공간에 드디어 충만함이 자리잡기 시작했나 보다. 점점 더 자유로워지면서 형상의 자리에 색들이 가득 채워졌다. 자아 찾기의 도정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순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내 모습을 아내가 발견했다. 아름다움의 구원이 내게도 찾아온 모양이다." (작가노트)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40.9×31.8cm_2018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1회 개인전이 끝나고 반야심경을 행서로 쓰며 지내다가 얼굴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또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화두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생각하며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 색즉시공 공즉시색. 얼굴 형상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그리다가 추상으로 향하는 해체 욕구가 처음 발동했을 때는 붓으로 내 몸을 찢어 발기는 느낌이었다. 심지어는 마음까지 아프고 지성도 무력해지는 듯했다. 다시 구체적인 형상이 그림에 나타났을 때는 하나의 규정성만으로 특정되는 얼굴이 진짜 얼굴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같은 나선형 궤적의 마법에 걸려들어 양 극단을 오가며 저 멀리 발산되어 갔다.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고, 또 있음이기도 하고 없음이기도 하다면, 없음 가운데 있고, 있음 가운데 없는 것, 그것이 얼굴이 아닐까? 진공묘유(眞空妙有).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내 얼굴을 6호 크기의 캔버스에 담아내다가 점점 답답함을 느꼈다. 20호 캔버스를 상대하면서 내 안의 내가 나를 더욱 닦아세웠다. 이제 나는 또 다른 나의 포로가 되어 몰아 상태의 춤꾼이 되었다. ● "작업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숨이 차다. 어쩔 땐 양쪽 양말을 찾는 시간이 급해 한쪽 발에만 양말을 신은 채 정신 없이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형상을 잡아간다. 떠오르는 것을 시간을 두고 정리해 그림으로 구체화하기 보다는 느낌이 시키는 대로 손을 움직인다. 느낌의 흐름을 방해할까 봐 팔레트에 물감을 짜는 시간조차 아깝다. 작업이 심화되어 갈수록 너무 급해져 왼손으로 물감을 짜고 그것을 바로 붓에 찍어서 캔버스에 바른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물감이 지나치게 두껍게 발리거나 덩어리가 그대로 캔버스에 남아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날 것의 내 감각이 형상에 그대로 생생하게 묻어있다. 평소에 그토록 이성으로 무장해 있는 내가, 이성을 무력화하고 싶은 욕구에 강박적으로 집착한 듯 틈을 주지 않고 느끼는 대로 즉발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붓을 휘두른다. 붉은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작가노트)



김상표_얼굴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8


그린다는 행위는 새로운 물음이 일어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의 반복에 다름 아니었다. 물음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것이 비록 즉발적이기는 했지만 전 우주의 모든 여건들을 나의 주체적 지향으로 포섭하며 새로운 창조적 합생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합생 과정을 거쳐 만족된 물음은 완성된 작품으로 또 다른 물음을 불러왔다. 그때그때 새로운 물음에 응답하며 모험에 나섰던 아름다운 시간들, 거기에는 청춘의 꿈과 비극의 결실이 함께 담겨있다. 그 시간들을 견디며 사건의 흔적으로 작품들이 연구노트로 남았다. ● 차창 밖에는 4월의 봄비가 내린다.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림을 그릴 때면 어김없이 잠자고 있던 수많은 나의 애벌레 주체들이 깨어나서 뛰쳐나왔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며 종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평화가 찾아오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리는 것이 행복하다. ■ 김상표



Vol.20180627a | 김상표展 / KIMSANGPYO / 金相杓 / painting


불안예찬 禮讚
장승희展 / JANGSEUNGHEE / 張丞希 / painting
2018_0620 ▶ 2018_0626



장승희_불안예찬-red eye_한지에 석채_90.9×116.7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1203h | 장승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62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윤갤러리

YO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10길 7

Tel. +82.(0)2.738.1144

blog.naver.com/yoon_gallery


작가는 불안을 예찬(禮讚)한다. 불안을 예찬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는 불안에 대해서 불안은 불쾌한 것이지만, 다른 불쾌감을 주는 정서인 긴장이나 고통들과는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위험상태의 등장을 예고하고 이러한 상황을 회피하거나 방어할 수 있도록 내 스스로 보내는 신호라고 하였다. 결국, 불안은 내 안에 내재된 것으로 인간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상태의 감정인 것이다. 이렇듯 자아가 위험을 느낄 때의 신호로써 작가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표현된다. 그 위험을 알리는 감정은 누구나 위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상처를 더 이상 받기 싫어하는 방어기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을 작가는 예찬한다. 예찬은 누구나 다 알고 있듯 긍정을 이야기 한다. 여성으로 작가로 오랜 시간동안 활동해오면서 불안은 늘 동반자와 같이 작가와 함께 하였다. 작가는 이러한 불안한 감정을 작품을 통해 다른 태도로 바라보고 한 단계 더욱 성장하는 과정으로서 예찬이라는 긍정적 감정을 제시한다.



장승희_불안예찬-시각Ⅰ_한지에 석채_130.3×162.1cm_2018


장승희_불안예찬-시각Ⅱ_한지에 석채_130.3×162.1cm_2018


장승희_불안예찬-poppy_한지에 석채_90.9×116.7cm_2018


작가는 오랜 시간동안 가방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작업하였다. 가방은 작가에게 하나의 상징물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알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로 여긴다. 작품 속 가방은 내면세계와 연결해주는 매신저 역할을 하며 모든 대상은 역시 불안을 상징한다. 아마도 작가의 여성성이 더욱 반영된 부분도 있겠지만 누구나 가방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방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각자를 설명할 수 있는 물건들이 모여 하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가방은 이번 전시에서는 불안에 세계와 연결해주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가방이라 는 게이트를 지나면 구름이 가득한 아득하고 끝없는 환상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장승희_불안예찬-안목_한지에 석채_100×160.6cm_2018


작품 속 작가의 붓 터치는 바람이 되고 공기가 되며 구름으로 화면에 드러난다. 작가의 붓은 마치 하나의 바늘이 되어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한 올 한 올 수를 놓듯 하다. 수년간 전통기법을 사용하여 수고스러운 과정을 고수하며 작업해온 작가는 이번에도 역시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작가의 색은 블루와 레드가 주조색으로 이뤄지며 이 색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감정적 의미를 작가만의 감각으로 풀어낸다. 색은 결국 빛이 되고 그 빛은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몽환적 구름 속 하늘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나무는 땅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튼튼히 자리잡아야하지만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마치 물속을 허우적거리며 밖을 향해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을 구해주러 온 따뜻한 손길과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 뿌리의 기능은 보는 이들의 감정적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작가의 화면은 보는 이들에 불안의 감정에 따라 그리고 각자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읽을 수 있다. 가방 속을 들여다보는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내면세계로 언제든지 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장승희_불안예찬-bud_한지에 석채_90.9×116.7cm_2018


장승희_불안예찬-ear_한지에 석채_90.9×116.7cm_2018


또한 화면에서 볼 수 있는 눈은 이러한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제3의 감정으로 환기의 장치라 할 수 있다. 그 눈은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검은 눈동자로 마치 유리거울처럼 사물을 투영한다. 그 눈에는 생명이 존재하고 눈을 통해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은 다양한 생명력이 함께 부여된다. 눈으로 하여금 작품은 생명체가 되어 보는 이들에게 본인의 시선과의 소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 없는 눈빛은 보는 이들에게 불안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또 다른 압도적인 힘인 치유의 역할을 함께 형상화한다. 만다라(mandala, 曼茶羅, 우주 법계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를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의 하나)에서는 모든 감각의 중심은 눈이라고 한다. 인간의 의식에 대부분은 눈에서 수집된 정보에 의존하며 모든 에너지는 눈으로 방출된다고 하였다. 만다라는 눈을 통해 명상하며 마음의 정화를 한다. 이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와 정신의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치유의 상징물로서 눈은 작가의 작품에서도 작동된다. 내면이 불안한 감정을 눈을 통해 이완시켜주고 정서적 무의식을 통찰 할 수 있도록 명상의 과정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내면세계를 외부의 현실세계와 연결시켜주는 수단으로서 작용된다.



장승희_불안예찬-시선Ⅰ_한지에 석채_33.3×45.5cm_2017


장승희_불안예찬-시선Ⅱ_한지에 석채_33.3×45.5cm_2017


또한 그러한 불안한 감정을 이완하며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성장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한 치유의 시간을 만나게 된다. 또한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 과정을 통해서도 작가는 마치 자기 수양의 마음과 자세로 역시 치유되는 과정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자아인식의 과정 속에서 늘 존재의 불확실함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작품을 통해 불안과 소통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얻기 위한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미량



Vol.20180620c | 장승희展 / JANGSEUNGHEE / 張丞希 / painting





지난 13일, 최대식씨 개인전이 인사동 ‘윤갤러리[02-738-1144]’에서 개막되었다.

전주의 도예가 한봉림씨의 만나자는 연락에 찾아갔더니,
생각지도 않은 최대식씨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최대식씨 내외를 비롯하여 한봉림, 김명성, 유근오, 이명희,
김재춘씨 등 여러 명이 남아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들 술집으로 옮길 채비라, 서둘러 작품을 돌아보았다.






전시장은 화려한 색들이 울긋불긋 수놓고 있었다.
아름답게 펼쳐진 색의 향연은 우리 오방색에서 비롯되었다.
쉴 사이 없이 쏟아지는 영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색의 마술사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예술경영학 교편까지 잡은 사람의 전시법이 특이해서다.
자기 작품을 컬렉션하는 마니아가 많이 확보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항상 여유롭게 미소 띤 그의 모습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전시를 열면 다들 알리기 위해 팜프렛이나 도록도 만들고
보도자료를 보내는 등 난리법석을 떠는데,
여지 것 팜프렛은 물론 리프렛을 만든 것도 보지 못했거니와
언론 프레이는 물론 전시 보러 오라는 연락조차 받은 적 없었다.






그는 한 때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다, ‘풍덩예술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는데,
몇 년 전만 해도 인사동에서 ‘31갤러리’를 운영했다.
그 갤러리는 본인의 작업실도 겸했는데,
갈 때마다 작업을 하고 있었으니, 운영의 어려움은 보나마나다.





그 후 미국으로 이주해버려 페북에서나 가끔 만났는데,
느닷없이 인사동에 나타나 전시를 하고 있었다.
최대식씨를 비롯하여 한봉림, '통인' 김완규씨 등,
다들 인사동을 사랑하는 동년배라 남다른 면도 있다.






한봉림씨는 서울 올라오며 자기가 입던 외투를 챙겨왔더라.
쪽방에서 떨고 있을 것 같아 챙겨 온 모양인데,
좀 무겁기는 했으나, 담요를 감은 듯 따뜻했다.

그 정도 옷이면 노숙을 해도 거뜬할 것 같았다.






그러나 부티 나는 옷이라 거지가 입기는 좀 그렇더라.

다행히 내가 있는 방은 낮이 더 춥다.

관리인이 추운 밤에만 불을 넣고 새벽부터 보일러를 꺼버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그 옷을 입고 일하니 안성맞춤이었다.
이토록 걱정해 주는 친구들이 있으니,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다.






오랜만의 회우라 다들 ‘여자만’으로 갔으나 앉을 자리가 없었다.
갤러리는 한산하지만, 술집은 넘쳐나는 것이 인사동의 현실이다.
하는 수 없이 가까이 있는 ‘옥정’에서 회포를 풀었는데,
할 말은 많으나, 귀도 어두운데다 말까지 어눌하여 소통이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종이에 적어 물어보기까지 했을까.







이차는 ‘유목민’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도 반가운 사람이 많았다.
정영신씨를 비롯하여 공윤희, 허미자, 송미향씨도 있었고,
홍천에 사는 양서욱씨 까지 와 있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마셨더니,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땐, 목이 터져라 노래라도 불러야 정신이 드는데,
이빨이 빠져 소리가 새는데다, 목도 걸걸거리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이젠 술자리 광대노릇도 끝내고, 술도 자제하라는 계시다.
좀 더 재미있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사진,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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