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번동에서 동자동 갈 때는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 거리를 지나쳐 종각역에서 갈아탄다.

빨리 가는 코스도 있지만, 인사동 들리는 재미가 좋아서다.

 

일주일에 한 번은 별 볼일 없이 인사동 길을 걷게 되는데,

더러는 좋은 전시도 보지만, 반가운 분도 만날 수도 있어 도랑치고 게 잡는 일이다.

 

지난 월요일은 작심하고 볼만한 전람회를 찾아 나섰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이 나무아트에서 열리는 원치용의 길 건너기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시장에 올라가니, 문명 비판적인 작품들이 더 숨 막히게 한다.

 

드로잉 방식으로 그린 원치용의 화법도 독특했다.

철로에 코뿔소가 있거나 고속도로에 오리가 방황하는 

현대 문명에 의한 반생명적 개발행위를 비판하고 있었다.

 

눈앞에 다가온 재앙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었다.

 

두 번째 들린 곳은 인사아트센터 지하 제주갤러리에서 열리는

4.3미술아카이브 기획전 바라 이었다.

 

4,3과 관련된 전시로는 이달 초 인사아트프라자에서 열렸던,

동백이 피엄수다에 이은 두번째 전시로 탐라미술인협회에서 주최했다.

 

참여작가로는 고길천, 고혁진, 김수범, 박경훈, 양미경, 오석훈,

이경재, 이명복, 정용성씨 등 아홉 명이었다.

 

4,3의 아픔을 상징한 작품들이 걸린 전시장 분위기가 숙연감을 주었다.

그 가운데 이명복 작품 광란의 기억이 있었다.

이승만 도당의 본색과 악질 패거리 만행에 치를 떨었다.

 

지난 달 세상을 떠난 미술평론가 성완경선생의 글도 반가웠다.

 

세 번째는 한국펜화가협회전이 열리는 '인사아트프라자'로 갔는데,

관람객 없는 다른 전시장과 달리 관람객이 몇 있었다.

 

평소 회원전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지만,

지난해 많은 초상을 그려 보여준 임동은씨 작품이 기억나서다.

  

이번에는 사람이 아니라 군침 도는 문어 한 마리가 꿈틀대며 글자를 흘리고 있었다.

내 이름이 문호라 그런지, 문어가 남 같지 않더라.

 

네 번째는 김명식씨의 ‘East side story’가 열리는 선갤러리에 들렸다.

 

이분은 동아대에서 오래동안 교편잡던 분인데,

20여년 전부터 ‘East Side Story’연작으로 주목받은 화가다.

 

비슷한 집들이 적당하게 배치된 그림들은 주택단지의 평면도를 연상시키는데,

벗겨질 듯 연하게 묻은 물감 자욱들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전시제목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란

"아름다운 꿈을 꾸는 사람들의 공동체 이야기를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집 배열이 새마을 운동 같은 느낌도 난다.

 

담백한 구도와 풍부한 색감을 빚어낸 칼 질의

민감한 리듬성은 설렘의 활력소를 만들어낸다.

색으로 모인 집들의 조화와 여백이 따스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이하 시인의 홍제천 사진전’이 열리는 ‘다섯시’에 갔다.

김교서 시인의 비득치에 가면출판기념회도 함께 했다. 

 

김이하 시인은 오랫동안 사람과 홍제천을 기록해 왔다.

 

지난해의 사람에 이어 두 번째 보여 준 홍제천’은, 결국 사람과 자연은 하나라는 것일게다. 

사람을 좋아하고 자연 생태를 사랑하는 한 작가의 일상적 기록이고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다.

 

작가가 오랜 세월 찍어 온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떤 목적에 의한 기록이라기보다

좋아하는 자연환경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소통하는 것이다.

 

홍제천에 서식하는 청동오리나 왜가리, 해오라기 같은

작은 몸짓들을 살피며 함께 정 나누어 온 것이다.

 

아직 서울이 살아 있다는 것에 위안하며...

 

사진전과 함께 김교서 시인의 비득치에 가면’(영화나무) 출판기념회도 있었다.

 

40여 년 전 등단한 이래 처음으로 시집을 냈다는 김교서의 시는

시인 모습이나 이력처럼 갯벌처럼 끈적거렸다.

 

이 시집은 편향된 사회에 대한 그의 편향된 분노이자

음습하게 가려진 그곳을 되비추는 거울이다고 김이하시인이 적고 있다.

 

전시장에는 김이하. 김교서 시인이 자리를 지켰고,

연극배우 이명희, 시인 이승철, 홍순창, 이동엽, 강경석씨 등

여러 명이 축하 술자리를 만들었다.

 

술자리 피해 콜라를 방패막이로 앉았는데,

이명희씨는 '스마트협동조합'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는

일인극을 핸드폰으로 보여주었다.

 

앤지 한 번 안 내고 단숨에 촬영했다는 동영상인데,

배우 이명희의 절규가 처절하도록 슬프게 만들었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순정의 드라마가 아니겠는가? 

'광고로 사용하면 대박나겠다'며 바람도 넣었다.

 

               

다섯시에서 열린 김이하의 홍제천을 마지막으로 서울역 가는 지하철을 탔다.

 

원치용의 길 건너기 한국펜화가협전은 지난 화요일로 전시가 끝나버렸다.

그러나 제주갤러리’에서 열리는 4.3미술아카이브 바라   5 9일까지 열린다.

선갤러리에서 열리는 김명식 ‘East side story’ 426일까지고,

다섯시의 김이하 홍제천 4월30일까지 열린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인사동에서 봄바람 나자.

 

사진,  / 조문호

 

아래는 인사아트센터 제주갤러리에서 열리는 4.3 미술아카이브 '바라-봄' 전시작입니다

 

 

길 건너기

 

원치용展 / WONCHIYONG / 元致鎔 / painting 

2022_0406 ▶ 2022_0419

 

원치용_철길_종이에 과슈, 색연필, 아크릴채색, 잉크_89.5×130.5cm_202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원치용의 '길 건너기' ● 35년 쯤 전 그를 처음 보았던 듯싶다. 서교동 한강미술관의 어떤 단체전 오프닝이었을 것이다. 자주 어울리는 화가들끼리 모이다 보니 낯선 이는 쉽게 노출되었는데, 그때 낯선 그와 자연스레 인사를 하고 몇 마디 얘기를 나누었다. 오랜 기간 파리에서 살았다는 것과, 대학 전공은 미술이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해서 기억에 남았다. 1989년 한강미술관이 폐관을 하고 그를 보지 못하다가, 세월이 한참 지난 2005년 어떻게 연락이 되어 과거 지인 몇몇과 함께 그의 개인전이 열리는 토포하우스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히 외국계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 전업 작가의 길을 걷지 못했으되, 틈틈이 그린 그림들로 미술에의 갈증을 푸는 정도를 하고 있다면서.

 

원치용_북극곰 어미와 새끼들_종이에 과슈, 색연필, 아크릴채색, 잉크_80.51×117cm×3_2022_부분

길지 않은 서문에서 개인사적인 이런 얘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이 작가뿐만 아니라 작업을 하는 여러 입장들이 떠올라서다. 누구는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 작업을 하고, 누구는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는 예술가적 제스처로 낭만적 딜레땅뜨나 스노비스트의 삶을 즐기기 위해서, 누군가는 가진 재주가 이것밖엔 없어서, 누군가는 취미생활로 일상의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작업 아닌 것으로는 온전히 말을 할 수 없어서… 등 그 입장은 수없이 많다. 돈과 명예를 가득 채운 작가라 해서 더 가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인의 취미생활이라 해서 몰가치 한 것도 아니다. 작업을 하는 것이 그만큼 자신의 절실함·해방감·의무감·즐김 등에 바탕 하는 한, 미술 행위는 그 누구에게든지 필요하고 또 가치 있는 것이니까. 100m 전력 질주해서 인간의 한계기록에 도전하는 엘리트 스포츠가 중요하듯, 시민 각자의 건강을 위한 생활체육도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처럼. 뛰어난 미적 이념과 감수성으로 탁월한 작가의 미술뿐만 아니라, 그를 감상하거나 창작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작업을 "누리는" 시민의 미술행위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다. 전문가의 작품과 일반시민이 주체가 되는 생활미술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코 분리될 성질이 아니다. 미술은 작가와 관객이 소통하는 감성의 사회적 분배이자 삶의 질을 고양하는 문화적 생성에 의한 생산의 가치니까. 기존 미술 제도나 시스템 안에 있지 않더라도, 자기 삶을 반영하는 언어를 담지한 모든 작업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어야 함은 그래서 당연하다고 하겠다.

 

원치용_사자 어미와 새끼_종이에 과슈, 색연필, 잉크_80.5×117cm×3_2021~2_부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수십 년 직장 생활과 더불어 진행해온 원치용의 그림은 위에 거론한 유형 중 어디에 속할까. 아마도 마지막 거론했던 "자신의 삶을 작업 아닌 것으로는 온전히 말을 할 수 없어서"에 해당 되는 듯 여겨진다. 미술 전공자가 아니어서 습작기 훈련의 결여. 생활인이라 작업에 투자하는 시간과 집중도의 결여, 작가로 활동하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결여 등 많은 과정을 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묵묵하고도 끈질기게 작업을 지속해온 (한국미술계로 보자면)이방인인 이 60대 중반 작가(지망생)의 태도를 보면 말이다. 걸어왔던 인생길 한쪽을 마감하고 이제 비로소 미술을 온전히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나는 다름 아닌, 내가 걸어온 세계다"라는 어느 외국 시인의 말처럼 묵직해 보인다. 소 고삐를 잡고 삶을 가로지르는 그의 「길 건너기」의 현대판 '심우도尋牛圖'로도 여겨지고...

 

원치용_코뿔소 가족_종이에 과슈, 색연필, 유채, 아크릴채색, 잉크_80.5×117cm×3_2022_부분

고대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다. 이후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게 하자"는 근대 합리론자 데카르트와, 자연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자연을 더 손쉽게 지배할 수 있다"는 경험론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구 근대주의는 인간 이성을 중심축으로 오늘의 문명과 문화를 구축해왔다. 법·경제·산업·과학·기술·인문·예술 등 모든 영역에서 그 근대성을 바탕으로, 인간 이외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할 타자로 배제하면서 오늘의 지구를 만들어 왔다. 거기에 자본주의는 끝없는 욕망의 근골과 근육을 강화한 적자 주류 이데올로기로 작동했고. ● 그러나 '만물의 척도'이자 '자연의 주인'인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합리적 이성주의가 극한으로 진화(?)한 신자유주의와 4차 산업혁명의 장력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입장에 따라 답은 다르겠지만, 미증유의 팬데믹을 거치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호흡도 통제를 받고, 사람 사이 거리조차도 '만물의 척도'답지 않게 제도와 정책에 의해서 조절-지배되는 이 피동적 현실에서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근대성의 가장 주요한 가치인 개별적 '주체성'이, 근대성의 가장 중요한 기제인 '이성'에 의해 억압받는 모순된 현실에서는 더더욱 긍정적인 답은 나오기 어렵다. 더불어 근대적 이성이 생산한 이 엄청난 과학기술과 속도에 의해, 전쟁과 살육, 환경재앙과 기후재해의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과연 행복한 인간다움이 원론적으로 가능한 것인가를 되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원치용_명동 밤 골목길_종이에 과슈, 색연필, 아크릴채색, 잉크_100×75cm_2019

원치용의 이번 전시 작품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근대성이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현현되고 있는지, 그의 일상적 경험 서사(풍경)와 인식적 판단(풍경에 반하는 소재의 배치)의 몽타주로 엮어낸다. 자신의 일상적 현실을 접하는 감각적 현상으로부터, 반성적 사유와 상상, 그로 인한 결과적 형상에 이르기까지 결코 유쾌하지 않은 반생명적 공간체험이 그 바탕을 이룬다. 서울역·명동골목길·쇼핑센터·철거 예정지 등의 도심으로부터 철길과 고속도로와 송전탑을 거쳐 주변부로의 공간 이동과 확장을 통해서, 분당에서 살던 직장인이었던 본인이 퇴직 이후 파주에 정착하면서 체험한 서정과 공간 서사를 서술하면서, 또 거기에 상상으로 소환한 각종 동물(오리·코뿔소·북극곰·호랑이·송아지)과 충돌하는 현대문명의 부조리한 현실풍경을 대비하면서 말이다. ● 도시가 넓어지고 교통이 발달할수록 본래 그 공간의 주인이던 생명들은 삶의 터를 빼앗기고 멸종이라는 극점으로 밀려난 게 20세기 역사였다. 그 바탕에서 여전히 개발되고 있는 공간(장소)에서의 실제 풍경과, 문명에 대한 원치용의 반성적 성찰이 자연스레 교직된 형상으로 도출되어 나온 것이 이번 전시 작품의 내용적 축이다. 편안한(?) 퇴직 이후 전원생활을 꿈꾸던 그는 결국 다시 서울과 거주지를 오가는 공간에서 불편한 실체적 모순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고, 기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상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원치용_길 건너기_종이에 과슈, 색연필, 잉크_65.5×100cm_1995

회화에서 이런 방식으로 주제를 연동시키는 화면 구성 형식과 수사법은 물론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원치용이 포착해낸 현장에 대한 리얼한 분위기, 즉 현장성은 철저하게 본인의 공간에 대한 실존적 체험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에서, 풍경 자체가 비판적 분위기로 응축되며 주제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소재인 풍경과 이질적인 동물과의 몽타주라는 연상적 내용 전개 방식을 제거하더라도, 풍경 자체가 이미 건조하고도 메마른 '불안'과 '소외'의 작가 심리를 표출하는 표현성을 띠고 있어서 그렇다. 예컨대 2019년 작품인 「명동 골목길」은 철거 예정지의 을씨년스런 서정성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감정과 심리를 돌올 시키고, 「고속도로 옆 송전탑」이나 부처를 등장시키며 복선적 상징코드를 배치한 「길 건너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비와 서술에 의한 내용 전개의 설명적 방식보다는, 표현법과 그리기 자체에 의한 주관적 발성과 음색이 오히려 내용을 회화적으로 더 풍성하게 전달시켜준다는 뜻이다. 사실 다른 그림들도 동물을 넣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로 상징성을 충분히 띤다. 체질에 의한 그리기의 형상성이 소재의 소환과 배치에 의한 몽타주 방식의 기호성이나 서술성보다 더 민감하게 독자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이런 드로잉 방식의 표현법은, 그 자체가 서정적 주제를 견인해내는 형식으로 적절해 보인다.

 

원치용_고속도로옆 송전탑 1_종이에 과슈, 색연필, 잉크_38.5×53cm_2014

시간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다. 주인이 없다. 누구나 안다. 시간과 더불어 공간도 주인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내 땅"이나 "내 집"이란 사물에 소유격을 부과함으로 마치 자기가 그 공간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한다. 이 지구상에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객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 객이 주인행세를 하면서 뭇 생명을 배제한 들판(신도시)은 쓸쓸하다. 아파트가 건설되고 아스팔트가 넓어지고 사람들의 공간이 커질수록, 소멸된 동물의 운명처럼 우리의 미래도 어둡고 좁아질 수밖에 없다. 원치용의 그림은 바로 지금 그가 속도감 있게 지나치며 마주하는 (이미 죽어 버린) 풍경의 현장에서 뚜렷하게 감지한 그런 디스토피아를 경고하는 비판이다. "자연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만물의 척도"가 벌이는 반생명적 개발행위들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형상으로 질문하면서. ● 형상성은 비판성을 담보로 한다. 지난 30여 년간 자신만의 감수성과 인식으로 진행해온 원치용의 작업도 이런 그의 내적 필연성에서 기인한 형상이다. 망칠의 연배에 굳이 작가로 '성공'한다거나 작품을 판매해서 돈을 '번다'는 것보다-그는 이런 쪽으론 아예 생각 조차 않고 있다-미술이란 매체로 세계에 대해서 말을 한다는 겸허한 행위가 그에겐 뜻깊은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이렇듯 삶의 경험과 통찰에 바탕한 자기 형식의 발언으로 보자면 이미 그는 '길'을 건너온 작가라 하겠다. 늦은 나이, 퇴직 이후 두 번째 개인전을 갖는 그의 결연함에 성원을 보낸다. 치열하게 작업하시라. 그리고 더 많은 시도를 하시라. ■ 김진하

 

 

Vol.20220406c | 원치용展 / WONCHIYONG / 元致鎔 / painti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