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impression 50x60&

 

이상선展 / LEESANGSUN / 李尙宣 / painting 

2022_0112 ▶ 2022_0122 / 월요일 휴관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100×100cm_202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아트비트 갤러리

ARTBIT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3(화동 132번지)

Tel. +82.(0)2.738.5511

www.artbit.kr

 

난 조금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211102 ● 더웠던 어느 날인가 그림 위에 그어진 선들과 푸른 색면이 수평선과 방파제로 보였다. 그 엉뚱한 상상은 '고향 가는 길'이 되었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게 영감과 상상력을 깨워주는 바000, 키00, 호00 선생들께 특별히 감사드린다. 211202 ● 그냥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은 그림 하나를 그린다. 210927 ● 회화에 진심이다. 그리기에 충실해 본다. 형태는 세잔의 법칙을 따르고 있으나 자유로운 상상을 자극하고, 색은 15가지 기본색에서 채도와 명도를 조절한다. 터치는 각각의 색면을 미세하게 분석하여 섬세하게 조절한다. 그래서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화면을 만든다. 조금 거친 베이스를 사용해 질감을 살리고 물감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밑색과 화면에서 병치 혼합되게 한다. 이야기는 나의 기억과 의도에 의해 섞이고 재조합 되어 왜곡된다. 210830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50×60cm_2021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60×50cm_2021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50×65cm_2021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65×53cm_2021

작업에 원칙을 정하지 않는다. 안되라는 것은 없다. 모든 강박을 버린다. 단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것에 솔직하면 되겠다. 210728 ● 그림다운 그림은 형태나 이미지에도 편견을 버려야 된다. 210528 ● 1단계 드로잉과 2단계 초벌칠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본다. 그림은 그림 같아야 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그림이 실제 같지 않고 그림 같은 상황. 익숙한 형태나 이미지들을 색분할로 산란시켜 표현한다. 내 작업의 출발선인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포착한 나의 의도성들을 하나씩 더 제거한다. 터치는 느리며 좀 더 섬세하게. 색의 농도는 좀 더 신중하게 조절한다. 그래서 형태와 이미지들을 살릴것인지 더 분할할 것인지 조절한다. 그것은 마치 모자이크 처리된 이미지 같은 무언가 있는데 잘 분간되지 않는 상태이다. 210513 ● 뭔가 거창하고 심오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210428 ● 언젠가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알고 싶다. 210418 ● 색과 빛의 흐름에 따라간다. 형태에 연연하지 마라. 인식된 빛은 의식하지 않는 색의 터치에서 자연스러워 진다. 어느 순간 그림이 그림을 그린다. 210309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100×100cm_2021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50×60cm_2021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91×117cm_2021

날 규정하려 하지말자. 타인의 욕망에 흔들리지 말고 어떤 틀에도 규정지어 지는걸 거부한다. 210305 ● 무언가를 그려야 된다는 의무감으로 작업하지 않기를.. 무언가를 그려야 된다면 기존의 것과 다른 새로운 거를 해야 된다. 보여줄 것이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도 방법이다. 새로운 것이 떠오를때까지 느긋하게 생각하고 연습한다. 새로움이란 익숙한 것이라도 인식되고 의식하지 않는 낯선 시선이다. 210110 ● 아이콘을 만들지 않는다. 특정 지어지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고유명사로 남지 않는다. 알파벳 소문자로 쓴다. 200806 ● 인위적으로 선택된 색깔의 표출이 아니라 선택되어 제각각 산란하는 자연스런 색감의 발현이다. 그래서 형태는 흐트러지고 모호해져 점점 추상적으로 된다. 그건 눈이 점점 나빠져서 실제로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것 일수도 있다. 200531 ● 세상 모든 것에는 색이 있다. 그건 고유색이 아니라 빛에 의한 착색이다. 빛의 산란과 번짐에 의해 같은 면에서도 재각각의 다른 색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세밀하게 관찰하면 익숙한것들이 낯설게 보이게 되고 그 지점에서 추상성을 발견한다. 그래서 표현된 이미지는 형태가 아닌 느낌으로 받아드려진다. 그래서 추상적인 인상이다. 200511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73×91cm_2021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73×61cm_2021
이상선_abstract impression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시멘트_100×100cm_2021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 내 작품의 출발선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나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담아낸다. 사회적인 실제 사건이나 현상에 상상을 첨가하여 리얼한 상황을 만든다. 그건 가장 추상적이다. 드로잉하고 계획하고 설계한다. 그것이 작업의 시작이자 끝이다. 완성된 작품은 빙산의 일각이다.빙산의 아래에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200211 ● 내 그림들은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진 게 아니라, 감상자에게 서로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사실 느낌이라는 것은 너무 분명하고 수명이 짧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도조차도 있다고 하기 힘들다. 나는 그냥 좀 더 원초적이고, 더 깊고, 더 섬세하고 오래가는 것을 찾고 있다. 190712 ● 나에 대해 상상하고 예측 가능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 190306 ■ 이상선

 

Vol.20220112a | 이상선展 / LEESANGSUN / 李尙宣 / painting

Natural Being

김근중展 / KIMKEUNJOONG / 金謹中 / painting
2020_0226 ▶︎ 2020_0317 / 월요일 휴관


김근중_Natural Being(存在)18-22_캔버스에 석고붕대와 안료_100×80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302g | 김근중展으로 갑니다.

김근중 홈페이지_http://www.kimkeunjoong.com



초대일시 / 2020_0226_수요일_05:00pm

작가와의 만남 / 2020_0307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아트비트 갤러리

ARTBIT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3(화동 13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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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면회화의 깊은 울림 김근중의 근작, 그 미니멀적 형식에 관한 비평적 단상 ● 김근중의 근작들을 청람(淸覽)하러 양평 청계리 산속 기슭에 자리한 작업실 가는 길에는 나뭇잎을 떨구어 낸 나무마다 겨울의 스산한 태세들이 가득했다. 필자는 그날, 작업실에서 정제된 색조 그러나 마음의 표정을 오롯이 담고 있는 다채로운 빛의 바다를 보았다. 대체로 청색, 보라색, 노란색, 붉은색 등으로 조율된 화면들은 미묘한 환영성을 창출하면서 나의 비평적 시선을 고정시켰다. 형식적으로 볼 때, 그의 이번 근작들은 가로줄의 부조적 겹침들이 빚어내는 시각적 환영성과 마치 하늘 혹은 우주 속에서 내려다 본 지표면의 흔적과 같은 형상들이 포치된 가시성/불가시성에 관한 중층적 구조화로 함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이러한 표현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주제의식(subject matter)은 무엇일까? 


김근중_Natural Being(存在)18-28_캔버스에 혼합재료와 안료_162×130cm_2018

김근중_Natural Being(存在)18-31_캔버스에 혼합재료와 안료_162×130cm_2018

김근중_Natural Being(存在)18-36_캔버스에 혼합재료와 안료_162×130cm_2018

나는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흐르는 변화무쌍한 색(色)의 세계, 즉 삼라만상(森羅萬象)의'은유적 드러냄(metaphoric revelation)'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은유적(隱喩的)이라 한 것은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暗示的)으로 나타내려는 문학적 표현을 지시하는 것인데, 김근중의 근작에서의 은유는 이러한 암시의 극단을 넘어서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가능성의 지평을 향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무엇보다 '본다'는 주체를 염두에 둔 오브제의 제시로서의 회화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연금술사처럼 물질적 질료를 예술적 대상으로 전환시켜 어떤 초월적 사유의 길로 열고 들어서게 하는 유혹의 지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의 도표로 압축하자면, [작가의 세계관의 표상화-은유된 오브제로서 작품-관객의 다기한 해석가능성]이 하나의 순환적 체계를 이루면서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상호작용을 가로지르는 작가와 관객과의 약속된 언어 혹은 사유의 오아시스는 각기 다른 자아(自我)의 이데아(idea)로의 항해지도이며, 내면을 향한 관조성(觀照性)으로의 권유(勸誘)라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근중_Natural Being(存在)18-54_캔버스에 석고붕대와 안료_70.3×90.8cm_2018

김근중_Natural Being(存在)19-2_캔버스에 석고붕대와 안료_162×130cm_2019

특히 앞서 언급한 비평적 표현 중 '오브제의 제시'라 말한 것은 그의 근작들이 수많은 덧칠 혹은 겹겹이 부착한 거즈의 응결된 집합체로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질료들의 가시성은 직관적으로는 색채의 향연으로 읽혀지지만,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은 수많은 덧칠된 색면의 레이어(layer)가 은닉되어 있다. 필자는 이를 축적된 시간의 다층성(多層性) 혹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부재증명이라 본다. 다시 말하자면 김근중은 우리의 현재는 흘러간 과거의 수많은 사연, 서사, 사유들이 표면화되지 못하고 '오늘(aujourd'hui)'이라는 존재성의 현존(現存) 혹은 표상(表象)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맥락에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다른 곶(L'Autre Cap)』에서 "새로운 곶이란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시간 속으로 그 모습을 다르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하나의 기호이며 상징이며 차연(差延, la différence)이다"라고 한 언급은 김근중의 근작과 관련하여 참조할 가치가 있다. 데리다는 나아가 우리의 곶(notre cap)을 넘어서 곶의 다른 곶(l'autre du cap)을 향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반대편 곶(anti-cap) 혹은 탈곶화(décapitation)의 형식, 기호 혹은 논리에도 따르지 않는 타자와의 어떤 동일성 관계까지도 도달해야 한다."고 했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유럽중심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직시하면서 "오늘, 당신은 무엇을 하실 겁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결국 「나」는 매일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에 의해 변별되고 또한 타자들과의 차이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나」를 김근중의 회화작품에 자연스럽게 대입한다면, 그의 작품은 결국 새롭게 그려진 작가인 「나」의 기호이며 상징이며 차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들이란 새로운 혹은 다른 곶을 향한 끝없는 내면의 소리인 셈이며, 우리는 그 작품이라는 물질적 표상 앞에서 그 개별적 차이의 근거들을 음미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김근중의 근작들은 "Natural Being" 즉,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회화적 사유의 또 다른 화신(化身)이자 이전의 곶을 벗어나 다른 곶을 향한 끝없는 항해라 할 것이다.


김근중_Natural Being(存在)20-10_캔버스에 석고붕대와 안료_116.8×92cm_2020

김근중_Natural Being(存在)20-11_캔버스에 혼합재료와 안료_162×130cm_2020

김근중의 근작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중국 돈황 막고굴 벽화에 매료되어 천착했던 미니멀적 형식들을 재소환하면서도 새로운 변주(變奏)를 시도한 것이다. 그가 작업노트에서 스스로 회고했듯이, 수묵풍경(1987~1990), 전통벽화의 재해석(1990~1995), 벽화의 미니멀적 시도(1996~2005), 모란의 현대화(2005~2014), 모란 및 꽃의 추상화(2014~현재)로 이어져 온 변주성의 산맥 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그러나 비록 회화적 문법이 달라졌을지라도 그의 평생 화업의 화두인 "Natural Being" 이라는 기표(記標)는 대하(大河)의 숨결처럼 흐르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그의 근작들은 이러한 화두를 품은 채,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색면의 층위들 위로 마침내 정착한 마지막 색조로 우리들을 향해 묻고 있다. 세상의 삼라만상 역사 이래로 유전(流轉)해 온 우리 인간사의 궁극적 극락정토(極樂淨土)가 어디냐고. 그것은 당신의 이전과 이후를 통괄한 마지막의 '오늘' 그 태어남도 사라진 바도 없는 무극(無極)의 경지에서 찾으라고. 김근중은 이러한 화두를 금강경(金剛經)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에서 이끌어 내고 있다. 김근중의 근작들은 변화하고 생멸하는 인간의 필연적 존재성, 번뇌와 의문으로 가득 찬 자신의 삶에 대한 회화적 성채(城砦)들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가 빚어내는 색면회화의 유연(幽然)한 향연 속에서 문득 자신의 존재이유를 깨닫게 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사바(娑婆)의 세계 너머, 그 어떤 '다른 곶'에 당도해 있을지도 모른다. (2020년 1월) ■ 장동광



Vol.20200226a | 김근중展 / KIMKEUNJOONG / 金謹中 / painting



 


바람의 조각 Pieces of the Wind
문이원展 / MOONEWON / 文履元 / mixed media
2019_0925 ▶︎ 2019_1015 / 월요일 휴관


문이원_dance of the wind-1909bh_목판에 자개_지름 120cm_201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80425e | 문이원展으로 갑니다.

문이원 홈페이지_moonewon.wixsite.com/moonewon



초대일시 / 2019_0928_토요일_05:3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설화수_아트비트갤러리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월요일 휴관



아트비트 갤러리

ARTBIT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74-13(화동 132번지)

Tel. +82.(0)2.738.5511

www.artbit.kr



문이원의 작품은 언어적 가치와 사회적 불의에 관한 보다 더 공감 가능한 논평 ● 문이원의 작업은 자개로 제작된 모자이크 시리즈다. 각 작품은 하나 또는 여러 줄기의 식물을 그려내는데, 작품 속 식물들은,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발하는 진주조각들로 이루어진 배경 위로, 칠흑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 작가는 말한다. "시들어가는 일년생 식물들을 허공에서 바라봤을 때, 그들이 그려내는 형상미를 좋아한다. 그 아름다움과 바람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은 '춤'으로 내 마음 속에 다가왔다. 이것이 이 프로젝트를 허공의 검은 춤이라고 한 이유다."


문이원_a black dance-1909bj_목판에 자개_지름 60cm_2019


작가를 통해 구현된 식물들은 마치 그들만의 고유한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풍취가 깃든 작품 속 흑단 색의 윤곽은, 화선지 위 서예의 붓획처럼, 화폭 위를 가로질러 움직이는 듯하다. 분명한 것은, 작가 자신의 노동 집약적 수단을 통해 신중한 재창조를 만든다는 것이다. 작가는 식물들의 화려함이나 그 생명의 정점에서 그들을 그려낸 것이 아닌, 그들에 대한 헌사적 초상화를 그려낸다. 아래로 향하는 처진 형태를 볼 때 우리가 삶의 끝자락을 떠올리듯이, 작품 속 순 검정색은 쇠퇴를 의미한다. 이 식물들은 생명을 잃어가는, 상업이 만들어낸 모식적 가치는 전혀 없어 보이는 잡초와도 같다. 갈라진 표면의 배경은, 마치 잡초가 다른 우아한 식물들을 제치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 해야만 하는 척박한 토양을 연상시킨다. 이들 식물들은 우월하며 생명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불모의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여 결국 번영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이원_a black dance-1908bb_목판에 자개_41.5×80cm_2019


문이원_dance of the wind-1906ba-목판에 자개_지름 120cm_2019

작가 문이원은, 저평가되고 폄하되는 존재들의 내재된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잊혀진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고 재구성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그녀는 사진촬영, 스케치 작업 그리고 작시(作詩)를 통하여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들은 우리들을 그녀의 인식 속으로 불러들이는 연서이자 선물이다. '잡초의 삶에 대한 재고'라는 그녀의 명제는 과학자이자 작가(author)인 피터 델 트레디치(Peter Del Tredici)에 의해 공감된다. 그는, "잡초는 단지 자신의 마당에는 없었으면 하는 식물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개인의 기호에 따른 가치판단을 기반으로 하는 단어다. 그러나 놀랍게도 '반갑지 않은 식물'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된 단어는 따로 없는 듯하다."라며 잡초는 제거의 대상이 아닌, 생태적, 사회적 그리고 심미적 가치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문이원_a black dance-1906bo_목판에 자개_60×60cm_2019


문이원_a black dance-1909bp_목판에 자개_60×60cm_2019


문이원의 작품들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가치를 정하는 방식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보다 많은 대중이 공감하는 논평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갤러리 코리아 전시장에서 3개월간 자라난 그녀의 잡초는 결코 불청객이 아니었다. (뉴욕한국문화원 전시서문에서 발췌) ■ 브룩 싱어



Vol.20190925b | 문이원展 / MOONEWON / 文履元 / 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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