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꿈 ① 조각가 이영학


연탄집게·호미·돌쩌귀 … 그가 만지면 훨훨 나는 새가 된다

​정선 아우라지 골짜기로 들어가
버려진 온갖 농기구에 새 숨결
수만 마리 새떼 나는 미술관 구상

 

 

3년 여 전국을 돌며 땅 관상을 본 뒤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문곡리 강변길 옛 남평초등학교 분교에 여생을

묻을 자리를 잡은 조각가 이영학씨. 평생 모아온 화강암 물확과 돌조각, 농기구 용품 등으로 자연보다

더 자연 같은 미술관을 지을 터다지기에 들어갔다. [정선=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짧지만 긴 인생을 꿈 하나에 걸고 간다. ‘내 멋대로 산다’는 자유와 나란히, 이 땅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의지가 빛난다. 제 이름 하나로 문화예술계에 길을 낸 이들을 만난다. 첫 인물은 전통과 자연을 하나로 만드는 작업에서 한국 조각의 뿌리를 찾는 이영학씨다.


 

청동과 돌2, 화강암·청동·대나무, 2000

물, 돌, 풀. 조각가 이영학(66)씨는 물과 돌과 풀로 세상을 빚어낸다. 물과 돌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돌과 풀, 물과 풀 또한 그렇다. 그들이 한데 어우러져 숨 쉬면 자연이 호흡하는 즐거움이 보인다. 목숨 살아가는 묘가 낭랑하다.

그뿐이 아니다. 돌은 돌이고, 물은 물이며, 풀은 풀이다. 돌을 쪼아 사람을 만들어도 돌은 돌로 돌아간다. 얼굴은 풍상(風霜) 서린 돌로 변용된다. 물처럼 흐르고, 풀처럼 눕는 그의 조각은 작품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을 통해버린 허정(虛靜)의 말이다. 소설가 한수산은 그런 이영학의 조각세계를 ‘정적과 회귀’라고 요약했다.

 한동안 이씨는 서울 수유리 공방에 돌과 마주앉아 한국인 얼굴로 노자(老子)의 말씀을 빚었다. ‘모가 나면 좀 무디게 한다’는 ‘좌기예(挫其銳)’를 육화한 그의 얼굴 조각에는 시간이 물처럼 고여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온갖 잡동사니를 끌어 모아 새를 날렸다. 소설가 박완서는 생전에 “이영학의 작업실에서 나는 새가 된 나의 연탄집게와 식칼을 만났다”고 썼다. 낫과 호미와 쇠스랑이 접 붙어 새로 퍼덕이고, 엿가위가 소머리로 환생했다. 사진가 강운구씨는 “고물 쇠 쪼가리들을 훨훨 날게 하는 그이의 상상력은 새처럼 자유롭다”고 감탄했다.

 

 

 

호랑이, 청동·대나무·철사, 1991

 

 

 

 물, 돌, 풀처럼 침묵하던 그가 강원도 정선으로 마음을 옮겼다. 북평면 문곡리 폐교에 평생 목숨처럼 끌어안고 살던 조각과 재료들을 모시고 새 길을 보고 있다. 흉금을 정에 담아 쪼음질을 하던 그가 이제 한국 땅을 두드려 국토 미술관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무엇이든 고향으로 돌아가지요. 나는 정선 아우라지 골짜구니에서 고향을 봤습니다. 어디에 뿌리를 내릴까 참 많이 쏘다녔습니다. 작업실에 들어앉아 돌만 만지고 있을 때도 세파를 느끼며 주유했지요. 여기만은 내가 지키고 싶어요. 한국인의 얼굴과 마음으로 세계인에게 평온과 기쁨을 줄 수 있어요. 자연에 스며들어 그저 돌처럼, 물처럼, 풀처럼 보이는 미술관을 쪼고 있습니다.”

 

 

 

새, 철·나무, 1999

 

 

그는 5년 여 전부터 차근차근 돌을 옮기고 물길을 끌어들여 길을 내고 있다. 강에 떠내려가는 죽은 나무를 건져내 말렸다. 도시로 떠난 사람들이 폐가에 버리고 간 농기구를 챙겨 쟁여놓았다. 기둥과 문짝 사이에 끼어 닳아버린 돌쩌귀, 만삭의 아낙이 김을 매다 힘없이 놓쳐버린 호미, 어느 집 가장이 나뭇결에 대못을 박던 장도리, 모두 모여 작가의 손이 자신에게 영혼을 불어넣어주길 기다리고 있다.

 “다른 것도 많은데 왜 새를 만드는지 아십니까. 저것들은 그저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 손끝에서 길들여 지면 정이 쌓이고 혼이 고이죠. 그들이 새가 되어 날아가게 해주고 싶어요. 물건으로 살아온 설움을 황홀한 비상으로 풀어주는 거죠.”

 그는 정선군 장터에 비어있는 옛 대형 곡물 창고를 새떼 수만 마리로 채운 미술관으로 꾸미는 꿈을 내비쳤다. 오만 가지 농기구가 각양각색 새가 되어 날아오르는 모습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장관일 것이다. 몇 가지 도구에 최소한의 손길만 준 뒤 딱 감이 오는 순간에 손을 떼는 그의 새 작업은 모든 것을 자연 그대로 돌려주고픈 그의 마음을 대변한다.

 “지극한 사람은 자기 자신도 없습니다.”

 조각가 이영학과 그의 새들이 물, 돌, 풀과 만나 강원도 정선 천혜의 자연 속으로 녹아들고 있다. 
 

[중앙일보/ 정선=정재숙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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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학=1948년 부산 출생. 서울대 조소과 졸업 뒤 이탈리아 로마 예술원과 시립 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 . 서울대 대학원에서 ‘마리노 마리니 작품 연구’로 석사학위. 인체 두상 조각에 집중하며 250여 점이 넘는 한국 사회 대표 인물 조각상을 만들었다. 1990년대 이후 생활 폐품을 이용한 새와 호랑이 조각으로 일가를 이뤘다.

 

 





 

 

 

 

 

 

 

 

 

 

 



        이 시냇물은 영월ㆍ상동을 지나 정선 고을로 들어간다. 고을 앞 임계 서쪽에 있는 산기슭 남쪽이 정선 여량촌(餘糧村)이고,

우통수 물이 북쪽에서 여량촌을 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양쪽 기슭이 제법 넓고 언덕 위에는 키 큰 소나무와 흰모래가

맑은 물결을 가리고 비추기 때문에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다.

다만 전지(田地)가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마을 백성은 모두 자급자족하여 넉넉하다.

 

 

『택리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정선은 산 깊은 골짜기인지라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고을이었던 모양이다.

이곳을 찾았던 허소유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땅이 궁벽하니 누구인들 쉽사리 갈 수 있으랴
온 종일 몰아 달려서 강성(江城)을 택했네
개 어금니처럼 울퉁불퉁하여 고르지 않은 험한 길에 당했으니 고단(高丹, 땅 이름)이 멀고
여자의 눈썹처럼 공중에 떴으니 태백산이 가로질렀네
냉담(冷淡)한 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세속의 취미 어긋나고
평안하고 한가로움으로 스스로 즐기는 것이 나의 장점이네
토지는 메마르고 무거워서 유리(流離)해 도망한 백성이 많으니
집집마다 석청(石淸, 돌 사이에 모은 벌꿀)을 뽑아 바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네

 

 

임계천을 받아들인 골지천은 구미정(九美亭)을 지나 정선군 북면 여량리, 즉 아우라지1)에서 송천을 받아들인다.

아우라지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 한강 상류에 있는 나루터로, 평창군 대관령면의 황병산과 구절리에서 흘러내린 송천,

동쪽에서 흘러온 임계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아우라지 섶다리

 

이 아우라지의 뱃사공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정선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 즉 「정선아라리」가 처음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고 한다.

고려 왕조를 섬기고 벼슬에 올랐던 사람들 중 일곱 선비(전오륜, 고천우, 김충한, 변귀수, 김한, 이수생, 신안)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을 다짐하면서

개성의 깊은 산골 두문동에 은신하다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지난날 섬기던 임금을 사모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들이 멀리 두고 온 고향의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본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애달픈 모습을 보고 한시로 지어 읊은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사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옛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아우라지 건너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연애를 하였다.

그들은 동백을 따러 간다는 구실로 유천리에 있는 싸리골에서 서로 만나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 처녀는 총각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정선아리랑」 가락에 실어 부르게 된 것이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나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
정선읍내 일백오십 호 몽땅 잠들여놓고서
이호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그러나 「정선아라리」는 사회적,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반달 같은 우리 오빠는 대동아전쟁 갔는데 샛별 같은 우리 올케는 독수공방 지키네”라거나, “사발그릇은 깨어지면은 세네 쪽이 나고 삼팔선이 깨어지면은 한 덩어리로 뭉치네”라고 분단 상황을 노래하기도 하였으며, “아우라지 건너갈 때는 아우라지더니 가물재 넘어갈 때는 가물감실하네”라고 날 가문 날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면같이 경치 좋은 곳에 놀러 한번 오세요. 용산소, 폭포수 물 밑에도 해당화만 핍니다. 산천이 고와서 뒤돌아다봤소. 정든 곳이라서 뒤돌아다봤지”라는 구절도 있고, “겉눈은 슬쩍 감구야. 속눈으로 보니, 대관령 서낭님두 돈 시구 가잔다. 연감은 할멈 치고, 할멈은 아 치고, 아는 개 치고, 개는 꼬리치고, 꼬리는 마당 치고, 마당 가역에 수양버들은 바람을 받아 치는데, 우리 집 그대는 낮잠만 자느냐”라고 노래하기도 하였다.

성마령(星摩嶺)은 정선군과 평창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 고을의 관문이었다. 어찌나 높은지 그 마루에 서면 별을 만질 수가 있을 듯하다는 뜻에서 성마령이라고 불렀다 한다.

정선군 북면 유천리 양짓말에서 갓거리로 넘어가는 가물재는 몹시 가팔라서 재 밑을 내려다보면 정신이 가물거린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고, 자족령이라고도 부르는 칠족령은 신동면 제장에서 평창군 미탄면 마사리 뇌룬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꽃베리는 강릉에서 정선읍으로 오려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베리, 곧 벼루(벼랑)였다. 조선시대에 어느 관리가 가마를 타고 지나면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자 가마꾼에게 얼마나 더 가야 되느냐고 몇 차례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가마꾼들이 곧 베리가 끝난다고 했던 데서 ‘곧베리’가 되었다가 나중에 ‘꽃베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전치는 정선읍 광하리 마전에서 평창군 미탄면 백운리로 넘어가는 재로, 고개가 하도 높아서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행고개라고도 부른다.

 

 

 

 

 한편 조선시대에 이곳 여량리에는 여량역이 있었다. 큰 말 2마리, 짐 싣는 말 4마리,

역리 84명, 역조 77명, 역비 12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피곤에 지친 말은 실처럼 가는 길 뚫고 가기 주저하는데
삐죽삐죽 산봉우리는 깎아지른 듯 겹쳐진 성과 같네
바람은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 실은 수레가 구르는 듯하고
물은 마을 터 안고 흐르니 한 필의 비단 가로놓인 듯
내 신세 백년을 살며 양쪽 귀밑머리만 희어지고
강산 천리 길로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여
난간에 기대 앉아 동쪽 산에 떠오르는 달 기다리는데
고요한 밤 시를 짓고 싶은 마음 오래될수록 더욱 맑아져

 

용재 성현의 시가 흐르는 듯한 아우라지를 지난 강물은 나진을 지나고 한반도 지형을 빼닮은 상장산 자락을 지나 정선에 이른다. 여기부터가 동강이다.

「정선아리랑」을 연구하는 진용선은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아우라지에서부터 동강이라는 말을 썼고, 표기도 지금의 ‘동녘 동(東)’이 아니라 ‘오동나무 동(桐)’을 썼다”라고 말한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강, 서쪽은 서강이라고 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는 것이다.

 

 

 

  

서강 강원도 영월군 서면에서 만난 평창강과 주천강이 영월읍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동강과 합류할 때까지의 강을 서강이라 한다.

 

 

동강에는 열두 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여울과 소, 절벽, 섶다리, 마을 풍경이 그것들이다. 1경은 가수리 느티나무와 마을 풍경이고,

2경은 신동읍 운치리의 수동 섶다리다. 3경은 나리소와 바리소(신동읍 고성리~운치리),

4경은 백운산(고성리~운치리)과 칠족령(덕천리 소골~제장마을), 5경은 고성리 산성(고성리 고방마을)과 주변 조망,

6경은 바새마을 앞 뼝대, 7경은 연포마을과 홍토 담배 건조막, 8경은 백룡동굴(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9경은 황새여울과 바위들,

10경은 두꺼비바위와 어우러진 자갈, 모래톱과 뼝대(영월읍 문산리 그무마을), 11경은 어라연(거운리), 12경은 된꼬까리 여울과 만지나루(거운리) 등이다.

산은 높고 골은 깊은 정선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골지천, 오대천, 지랑천, 용탄천, 어천, 임계천 같은 여러 내를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조양강이 되고 다시 더 내려가 동강이 된다.

정선은 고구려 때 잉매현(仍買縣)이었다가 신라의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때 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 때 사람인 곽충룡은 이곳 정선을 두고 “풍속은 순박하고 백성들은 송사를 벌이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역시 고려 때의 문장가인 이색은

 “일천 산엔 겹겹 푸름이 가로놓였으니 한 가닥 길은 푸른 공중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곽충룡은 이어서 “일백 번 굽이져 흐르는 냇물은

멀리 바다로 향하고 천 층으로 층계 진 절벽은 하늘에 의지해 가로질렀네”라고 하였다. 이렇듯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정선군을 일컬어

고려 때의 문인 한철충은 그의 시에서 “벼랑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길이 있구나. 옛 읍이 산을 의지하였는데 산은 성을 이루었네.

산중에 숨어 살고자 하나 참으로 방도가 없구나. 비록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나 진정(眞情)이 아닌 것만 같네”라고 하였다.

정추는 “하늘 모양은 작은 것이 우물 속에 비쳐서 보이는 것 같고, 산의 푸름은 멀리 구름 위에 가로놓였다. 다섯 동혈(洞穴)은 차고 서늘하여서 능히 뼛속까지 시리게 하고, 한 시냇물은 목메어 울어 순정(純情)을 호소하는 것 같다”라고 노래하였다. 그래서 이 근래에도 정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장을 두고 “하늘이 세 뼘밖에 되지 않는다”라거나 “앞산과 뒷산을 이어서 빨랫줄을 맬 수 있는 곳” 또는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온 고을을 메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안축은 그의 시에서 “산마을에 돼지의 배부름은 반드시 새벽에 물 먹인 것이 아니요, 이웃집 닭이 살져도 날마다 훔쳐가는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정선 관아의 북쪽에는 봉서루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를 두고 안축은 다음의 시를 남겼다.

 

 

가파른 언덕을 빙빙 돌아 말을 급히 몰아가니
뽕나무와 삼[마(麻)]이 십 리를 이은 옛 성터
거친 땅엔 자갈만 삐죽삐죽 규전(圭田)도 적고
비좁은 산허리에 가로질러진 실낱같이 가는 길
빗소리 들으니 나그네 시름 더하고
구름 보니 어버이 그리는 마음 참기 어렵네
바람 바위 물구멍은 사람 세상 아니로세
티끌 흔적 씻어내니 뼛속까지 시원하네

 

 

한편 이곳 정선에서 거두어들인 전세(田稅)는 무명이 1동(同) 19필이었고 『여지도서』에 그 이동 경로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3월에 거두어들여 4월에 바친다. 처음에는 육로로 실어 날라 사흘이면 충주 목계강에 도착한다. 배에 싣고 출발해 자진포, 두무포를 거쳐 경강의 뚝섬에 도착한다. 순풍을 만나면 이틀 반이면 호조에 바칠 수 있다. 대동과 균세도 이와 같다.

 

두메산골이었던 정선이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선 오일장의 부활이다. 5월에서 가을까지 2일과 7일에 서는 정선 오일장에는 서울에서 관광차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정선읍내의 오일장에는 정선군 일대에서 채취된 산나물이 다 쏟아져 나온다. 참취, 곰취, 며느리취, 나물취, 참나물, 누롯대, 참두릅, 개두릅, 더덕, 고비, 도라지, 곤드레 등 나물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선 여행의 별미인 콧등치기와 올챙이국수를 맛볼 수 있어 더욱 좋다. 콧등치기는 일종의 메밀국수다. 메밀을 반죽하여 국수를 만든 것인데 올챙이국수에 비해 끈기가 있고 단단하여 국숫발이 물에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육수에 된장을 살짝 풀고 깨소금 양념을 하여 먹는데 맛이 좋아 급히 빨아들이다 보면 국숫발이 살아 있는 듯 콧등을 친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올챙이국수는 찰옥수수를 갈아서 묽게 반죽하여 나무로 만든 굵은 체에 내려 만든 것이다. 찰기가 적어서 국숫발이 부슬부슬 끊어지는데, 갖은 양념을 하여 묵처럼 말아서 숟갈로 떠먹는다. 하지만 옛 시절 정선의 명물이었던 꿩꼬치산적 같은 음식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가 없다.

태백에서 시작된 남한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영서지방을 두고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영의 오른쪽은 영서(嶺西)라고 한다. 모든 물이 서쪽으로 흘러 한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데, 물이 적은 데는 거룻배가 다닐 수 있고, 물이 많은 데는 큰 배가 다닐 수 있다.

이익이 생존했던 18세기 중엽만 해도 남한강엔 수없이 많은 배들이 오르내렸지만 오늘날엔 큰 배는커녕 고깃배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암사

 
 

이곳 정선군 고한읍에 자장율사가 세운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정암사가 있다. 신라의 큰 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태백산 서쪽 기슭에 정암사를 창건한 것은 선덕여왕 14년이었다.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는 의미에서 정암사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이 절은 오대산의 상원사, 양산의 통도사, 영월의 법흥사, 설악산의 봉정암과 더불어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정암사의 창건 설화와 문수보살을 만난 자장율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정암사 적멸보궁 태백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정암사는 신라의 큰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14년에 창건한 절이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불교의 융성에 힘쓰던 자장율사는 진덕왕 때 대국통의 자리에서 물러나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살았다. 어느 날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말했다. “내일 너를 대송정에서 보리라.” 놀라 깨어난 자장이 대송정에 이르자 문수보살이 나타나 “태백의 갈반지에서 만나자” 하고 말한 뒤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 말을 따라 태백산에 들어가 갈반지를 찾아 헤매던 자장은 큰 구렁이들이 나무 아래 서로 얽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문수보살이 말한 갈반지라 여겨 ‘석남원(石南院, 곧 정암사)’이라는 절을 지었다.

자장율사가 석남원에 머물며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몹시 기다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가사를 걸친 초라한 늙은이가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들고 와서 “자장을 보러 왔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자장율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언짢았던 자장의 시중이 “어디서 온 누구인가?” 하고 호통을 치자, 그 늙은이는 천연덕스럽게 “자장에게 전해라. 그래야 갈 것이다”라고만 대꾸하였다.

자장율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늙은이를 쫓아내게 하였다. 그러자 늙은이는 “아상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 하고 탄식하면서 가지고 온 삼태기를 뒤집으니 죽은 강아지가 푸른 사자로 변하였다. 늙은이는 그 사자를 타고 빛을 뿌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알고 보니 바로 그 노인이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장이 곧바로 뒤를 쫓아갔으나, 이미 문수보살은 떠나가버린 뒤였다. 자장은 몸을 남겨두고 떠나며 “석 달 뒤에 돌아오마. 몸뚱이를 태워버리지 말고 기다려라” 하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스님이 와서 오래도록 다비하지 않음을 크게 나무란 뒤 자장의 몸뚱이를 태워버렸다. 석 달 뒤 자장이 돌아왔으나 이미 몸이 없어진 뒤였다. 자장은 “의탁할 몸이 없으니 끝이로구나! 어찌하겠는가. 내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라” 하는 부탁을 하고 사라져버렸다.

한편 자장은 사북리의 산꼭대기에 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계속 쓰러졌다.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눈 위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보궁, 사찰 터에서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을 짓고 그 절의 이름을 갈래사(葛來寺)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한읍에는 갈래라는 마을의 이름과 함께 갈래초등학교가 있고, 상갈래ㆍ하갈래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정암사는 숙종 39년(1713)에 중수되었으나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다시 중건되었고, 1771년과 1872년 그리고 지난 1972년에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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