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가수로 인사동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던 신현수씨가

돌아 가셨다는 부음을 두 달 가까이나 지나서야 전해 들었다.

 

어차피 한 번은 가야할 길 조금 먼저 돌아가신 것 보다 더 슬픈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쪽방에 기거하다 무연고로 돌아가셨다는 거다.

 

국립병원에 이송되어 연고자 없는 행려병자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그 역시 동자동 쪽방촌에서 이름 없이 사라지는 무연고자와 다를바 없었다.

 

신현수씨는 한때 연예협회 분과 사무국장을 지낸 연유로 신국장이라 불렀다.

김삿갓 노래를 불렀다는 연유인지 야유회에 삿갓을 쓰고 나타난 기억도 있다.

 

항상 김명성씨 술자리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며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인사동에 행사만 있으면 나타나 궂은일을 맡아했고

특히 ‘아라아트’ 김명성씨가 나타난 자리에는 수행원처럼 잔 심부름을 했다.

그러면서도 술자리가 파할 무렵에는 기타 치며 노래했다.

 

한 번은 술이 취해 그의 노래를 유심히 들어보았는데,

노래의 억양이나 리듬에 세상에 대한 저주나

비아냥 같은 것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가지 달갑지 않았던 것은 나이가 한 참 아래인 후배에게

“회장님 회장님”하며 너무 굽신 그렸다는 점이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더 많은 해방둥이인데,

얼마나 눈에 그슬렸으면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을까?

 

그러나 그의 마음이나 속사정도 모르면서 왜 그리 쉽게 속단했는지 모르겠다.

살아 생 전 존경의 마음으로 술 한 잔 권하지 못한 게 한이 된다.

 

인사동에 신국장의 발길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인사동 ‘아라아트’가 막 내릴 즈음이었으니,

그때부터 마음의 병이던 육신의 병이던 앓지 않았나 싶다.

 

인사동에서 ‘유목민;을 운영하는 전활철씨 이야기로는

부음을 듣기 한 달 전 새벽 무렵에 그를 보았다고 했다.

인사동매점에서 소주 한 병 들고 나오는 것이 마지막이었단다.

 

마지막 화장하는 날에야 알게 된 유재만씨와 김명성씨의 동생이자

역술인인 신단수선생이 가서 유골을 강물에 뿌리고 왔단다.

 

신현수 형! 이승에서 못다한 노래 저승에서라도 마음껏 불러 즐겁게 지내세요.

그곳에 존경했던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부디 극락왕생 하시길 간절히 빕니다.

가시는 걸음에 형이 남긴 파편들을 모아 올립니다.

 

사진, 글 / 조문호

 


연예협회 사무국장 출신의 인사동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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