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초에 다녀 온 곡성 이야기를 두 달이 지나서야 꺼내게 되었다.

정리하기 귀찮아 미루다보면 잊어버리는 일도 종종있는데,  

어쩌다 뒤늦게 걸려들어도 기억력이 없어 수소문하느라 더 힘들다.

철 지난 소식의 미안함에 사설을 달지만, 올려놓아야 기억하는 것이다.

 

곡성은 섬진강과 보성강, 옥과천을 끼고 도는 고장으로

일찍부터 하천 연변에 선사 문화가 남은 지역이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곡성군 입면의 정자 함허정이었다.

 

함허정은 조선전기 심광형이 만년에 시인 묵객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려고

건립한 팔작지붕 형태의 누정인데, ‘호연정으로 불리기도 한다.

 

1980년도 중수한 함허정은 남동향으로 자리 잡았는데,

가운데 방을 배치하고 사방에 툇마루를 돌린, 정면 4, 측면 2칸의 단층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우측 면에 바닥 난방을 위한 아궁이를 두고 정자 안에는 기문과 시문이 적힌 15개의 편액이 걸려있었다.

 

정자 아래로 섬진강이 흐르고 멀리는 무등산이 자리 잡았는데,

에스 자로 굽이치는 강 천변에는 버드나무와 습지 초지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그 아래 있는 '제호정고택' 길목에는 곡식을 탈곡하거나 제분할 때 사용한 연자방아가 있었다.

 

'제호정'은 사랑채 당호이며, 안채와 대문간채로 전체를 이루고 있다.

안채 마당 앞에 있는 행랑채 동쪽에는 동네 사랑인 군지정사가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동네 서당으로 쓰인 곳으로 담장이 없어 접근하기 좋았다.

 

남향의 안채는 정면 4, 측면 2칸의 일자형 겹집 형식의 집이다'

서쪽부터 2칸의 부엌이 위아래에 있으며, 그 옆에 큰방이 있는데 앞, 뒤에 툇마루를 깔았다.

 

큰방과 도장 앞은 문 없이 개방되었고, 작은방 앞은 문을 달아 가로막았다.

동쪽 끝 칸의 앞쪽 마루 머름 위에 바라지창을 설치한 것이 특이했다. 

 

다음은 곡성군 옥과면에 있는 옥과향교로 갔다.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해 지은 교육기관이다.

 

현유의 위패를 봉안한 옥과향교는 1392(태조)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49년 율정으로 이전하였고, 1755년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1757(영조) 때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으며, 1796년과 1898년에 중수하였다.

 

조선시대, 국가로부터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부터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가을에 걸쳐 제사만 지낸다.

 

이곳에 보관하고 있는 책 중 양목재절목’, ‘향교전곡출입절목등은 옥과향교만의 사료다.

 

옥과향교는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앞쪽 낮은 곳에는 배움의 공간으로 명륜당을 두고,

뒤쪽 높은 곳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두었다.

 

현존 건물로는 3칸의 대성전, 5칸의 명륜당, 3칸의 동재와 서재, 3칸의 육영재,

3칸의 전사실, 1칸의 장판고, 제기고, 고사, 내삼문, 외삼문, 고직사 등이 있다.

 

명륜당은 막돌 허튼 층 쌓기의 기단에 자연석 덤벙 주초를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웠고,

대성전은 약 110cm 높이의 기단에 원형의 정평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외삼문 전방에 향교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긴 통나무를 걸어 놓았던 구멍 뚫린 석물이 양쪽에 있다.

 

대성전에는 5, 송조 4,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어 임진왜란 때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유팽로 장군 위패를 모신 도산사를 찾아갔다.

 

류팽로(1554년~ 1592년)는 곡성에서 태어나 1579(선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옥과현에서 살았다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하여 국방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고 왜군이 침입하자

고향인 곡성 옥과로 내려와 수백 명의 의병을 일으킨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대박, 안영 등과 함께 궐기하여

피난민 500명과 가동100여명을 이끌고 담양에서 고경명의 군사와 합세했다.

그는 담양 추성관에서 동래부사를 역임한 고경명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여

전라도 연합의병을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수만의 왜군 병력을 오합지졸인 아군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험한 요지에 숨었다가 적이 교만하고 나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할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패전한 것이다. 류팽로는 사지에서 먼저 탈출했으나

고경명이 아직도 적진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뛰어들어 구출한 후,

39세의 젊은 나이로 순절하고 말았다. 왜군의 호남진출을 좌절시킨 금산전투에서...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광주 포충사와 금산 종용당에 제향되었다.

특히 제1차 금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유팽로, 안영, 고인후 등 호남 연합의병의 순절은

전국적인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고 그 중심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월파 유팽로가 있었다.

 

마지막 들린 곳은 화엄사 말사인 곡성 태안사로 갔다.

태안사 능파각을 지나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경찰충혼탑'이 보인다.

 

동리산 자락의 태안사는 742(경덕왕)3명의 신승이 창건하여

선문구산의 하나인 동리산파 중심사찰로 삼았다.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국사가 머물던 절에 윤다가 132칸의 당우를 짓고 대사찰을 창건한 것이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 화엄사 등 전라남도 대부분의 사찰이 이 절의 말사였으나,

고려 중기에 송광사가 수선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사세가 줄어들었다.

 

조선시대에는 효령대군의 원당이 되어 조정의 지원을 받았고, 1683(숙종)에 정심이 중창했다.

1737년(영조) 만들어진 능파각은 그 뒤에도 네 차례나 중수했다.

 

한국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불타버려, 근래에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만세루, 해회당, 선원, 능파각, 일주문 등이 있다.

이 중 해회당은 네모꼴로 이어진 큰 건물이고, 선원 역시 전국 굴지의 규모다.

 

중요문화재로는 혜철의 부도인 적인선사 조륜청정탑과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과 광자대사비, 대바라, 동종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리산 계곡 절묘한 자리에 세워진 능파각과 일주문은 전라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태안사 내 연못 중앙의 삼층석탑은 광자대사 부도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는 기단의 한쪽 면과 탑신의 1층 지붕돌, 2, 3층 몸돌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곳으로 옮기면서 2층 기단에 3층 탑신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기단 아래로는 탑을 옮길 때 마련해 둔 3단의 받침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높아 보인다.

기단은 각층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3단의 얕은 층을 내어 윗돌을 괴고 있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 4단씩 받침을 두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 놓인 머리 장식은 낮은 장식 받침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들이다.

 

비록 일부가 없어져 보충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과 안정감이 있었다.

기단과 지붕돌의 조각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연못 옆에는 부도군이 자리잡고 있다.

그 곳에 있는 '광자대사탑'은 높이가 3미터인데, 본래 탑비와 함께 건립된 것이다.

탑비는 귀부와 이수만 남았으나, 이 부도는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었다.

부도의 형태는 지대석부터 상륜보개석까지 팔각평면을 이루며,

기단부 위에 탑신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이.

 

지대석과 기단부의 하대와 중대까지는 같은 돌로 만들어졌는데,

8각의 지대상면에 8각이 서로 엇갈리게 8각의 굄대가 하대를 받치고 있다.

하단은 각형이고 중단은 약간 높은 반원형이며 상단은 아주 낮은 각형이다.

측면부와 상면부로 구성된 하대석은 2단의 각형 굄이 새겨졌으며,

각 측면에는 선각의 당초문이 장식되었다.

 

광자대사탑비는 950(광종)에 세워졌다.

 해동금석원의 기록에는 이 탑 비신의 높이가 5.2, 너비가 3척으로 나와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비신이 부서졌는데, 오른쪽 상부와 하부가 결실된 잔편은

귀부와 이수 사이에 놓여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다.

비문의 내용은 그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효공왕의 측근에서의 불심에 대한 문답,

고려 태조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내용 등이 실렸다고 한다.

 

태안사 입구의 일주문은 능파각에서 약 200미터 지난 높직한 돌계단 위에 있었다.

조선 숙종 9(1683)에 각현선사가 다시 지은 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하였다.

태안사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앞면 1칸의 규모로 세웠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웠다.

앞, 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찬 느낌이다.

화려한 일주문 천장 아래 용 머리를 조각하여 생동감도 준다.

앞면에는 동리산태안사라는 현판이 걸렸다.

 

보물 태안사적인선사탑은 높이가 3.1미터.

사찰 중심을 약간 벗어난 북쪽 언덕에 있는데 주위에 흙 담장을 쌓고 그 안에 탑비와 함께 서 있다.

 탑비는 뒷날 보완한 것이지만, 상륜부까지 모두 남아 있다.

귀부와 함께 석조부도의 전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방형 2단으로 구성된 지대석의 세련미가 돋보이나 별다른 조식은 없다.

기단부는 상,중,하대석으로 이루어졌으며 모두 8각이고 각기 다른 돌로 만들어졌다.

하대석은 1단이며 하단부에는 각형 1단의 높직한 굄이 조각되었고,

그 측면에는 각 면에 2구씩의 가늘고 긴 안상을 오목새김하였는데,

그 선각이 매우 예리하여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또한, 하대석은 위는 좁고 아래는 넉넉한 형태이므로

측면에서 보면 사다리꼴로, 1좌씩의 사자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이 사자들은 모두 그 방향이 다르고 머리와 전,후 양다리 형태도 달리하고 있으며,

특히 머리카락과 뒤꼬리가 올려지는 유려한 곡선으로 보아 움직이는 사자를 조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태안사로 진입하는 이 삼 킬로미터 주변의 경치가 너무 좋다.

그냥 우거진 숲 속 계곡에 멈추고 싶다.  


사진, / 조문호

 

 

 


                                           건국주차장으로 들어가면 왼쪽편에 입구가 있고, 툇마루 옆 골목으로 진입해도 또 다른 입구가 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 전화 02-732-6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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