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벽과 나 사이’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린다

지난 일요일, 윤길중의 ‘석인의 초상’사진전에 갔더니 마치 오래된 고분의 석실을 찾아든 느낌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석상들의 숙연한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무덤가에서 망자를 지켜야 할 석인들이, 이 복잡한 홍대까지 왜 떼거리로 몰려 나왔을까?




▲윤길중,석인1 경기도 수원



그건 바로 사진가 윤길중이 3년에 걸쳐 전국 700여 곳의 무덤에서 찾아 낸 결과물이었다. 그는 세월의 더께에 쌓인 석인의 형상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얼굴을 만났으며, 거기서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전시장을 메운 윤길중의 사진들은 디지털화 된 오늘의 프린트 기술이 만들어 낸 최고의 퀄리티였다. 흐린 날씨나 비 맞은 석인들을 찍어 화면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으며, 형상만 정교하게 따내어 배경과 같은 톤으로 프린트해 석조물에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윤길중,석인2 경기도 시흥



프린트 종이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조선시대 외발뜨기 전통방식으로 복원한 한지였다. 나도 처음들은 UV프린트(자외선 가시광선 분광법) 방식은 석조물에 낀 세월의 이끼까지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대상이 주는 분위기도 아주 독특했다. 사료적 가치에다 작가의 감성까지 담았구나. “야! 멋지다”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석인의 초상’ 사진집에 서문을 쓴 문예비평가 유헌식씨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석인의 의미를 죽은 자의 ‘수호에서 죽은 자와의 ‘동행’으로 해석할 때, 윤길중의 석인 사진은 단순한 기록사진이 아니라 예술사진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윤길중,석인3 경기도 용인



그때부터 스스로의 가치지준에 혼돈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난 사진 본래의 가치는 기록으로 치는 사진쟁이라 예술로 가는 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시장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전국각지의 석인을 기록한 작업인 줄 알았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석인이란 민초들과는 동떨어진 왕이나 세도가들의 능을 지킨다는 고리타분한 생각도 자리했다.



▲윤길중,석인4 경기도 용인



그렇지만 그 형상을 새겨 낸 석공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초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의 대개가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정형화되기도 하지만, 꼼꼼히 파낸 얼굴들은 늘 상 보아왔던 우리민족 본래의 정겨운 표정이다.


지그시 감은 눈에선 절실한 염원이 느껴지고, 굳게 다문 입에선 결연함이 배어난다. 내면의 절제미가 흐르는 가운데 애잔함도 묻어난다. 무엇보다 세월의 풍상이 덧입혀진 표정들은 마치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만나듯 친숙하고 편안하다.



▲윤길중,석인시리즈1


서재 앞에 걸어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증표로 삼고 싶었다. 사실, 실제의 석인이 있다면, 이 사진처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기록이냐? 예술이냐?는 근원적인 질문도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작이니 위작이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진짜도 가짜도 스스로만 좋으면 그만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세월 따라 눈높이가 바뀔지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이 최고인 것이다.



▲윤길중,석인시리즈2


아무리 평론가 잣대로 본 최고의 걸작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편치 않으면 집에 걸어두겠는가? 돈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기준에 맡긴다면 말이다. 나 역시 아무리 최고의 다큐멘터리작품이라도 끔찍한 살인 장면이라면 걸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소장가치와 평소 눈으로 즐기는 현실적 가치는 이처럼 이율배반적으로 다른 것이다.


가끔 오래된 그림이나 서예작이 담긴 액자들이 버려지기도 하지만, 한 참 후에 조명 받을 작품인지 누가 알겠는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또 한 가지 신통한 것은 다 버려져도 옛집 툇마루에나 안방에 걸렸던 가족사진틀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전시장의 석인 사진들1



사진가 윤길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류가헌’에서 열린, 아현동 철거지역을 찍은 ‘기억흔적’ 사진전이었다. 곰팡이 낀 낡은 물품을 소재삼아, 변하고 버려져 가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엔 장애인과 쓰러진 채 살아가는 나무도 찍었다고 했다. 얼핏 지금의 석인 작업과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죽어가는 것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으려는 되살리기 의식은 모두 같다는 점이다.



▲전시장의 석인 사진들2


듣기로, 윤길중은 오래 전 중병으로 투병하다 기사회생으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했다. 잘나가던 대기업 사원에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 덜컥 중병에 걸렸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사진작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사진 속에 불사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석공처럼 하잘 것 없는 사물에 염원을 담고 싶었던 게다.


이처럼 이름 없는 석공들의 염원을 담은 석인들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 처연했다.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석상의 형상과 표정들이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점이다. 마치 사람들처럼...



▲작품 앞에 선 윤길중, 석인을 닮았다.(사진=조문호)



사진의 느낌은 인터넷에 소개된 이미지로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꼭 전시된 사진들을 관람하기 바란다. 홍대부근에 있는 갤러리‘벽과 나 사이’(02-323-0308)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리고, ‘이안북스’에서 ‘석인’사진집(40,000원)도 나왔다.


[서울문화투데이 / 조문호기자/사진가]




지난 일요일, 윤길중의 ‘석인의 초상’사진전에 갔더니 마치 오래된 고분의 석실을 찾아든 느낌이었다.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석상들의 숙연한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무덤가에서 망자를 지켜야 할 석인들이, 이 복잡한 홍대까지 왜 떼거리로 나왔을까?



작품 앞에 선 윤길중, 석인을 닮았다./ 조문호사진



그건 바로 사진가 윤길중이 3년에 걸쳐 전국 700여 곳의 무덤에서 찾아 낸 결과물이었다.

그는 세월의 더께에 쌓인 석인의 형상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얼굴을 만났으며,

거기서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전시장을 메운 윤길중의 사진들은 디지털화 된 오늘의 프린트 기술이 만들어 낸 최고의 퀄리티였다.

흐린 날씨나 비 맞은 석인들을 찍어 화면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으며, 형상만 정교하게 따내어

배경과 같은 톤으로 프린트해 석조물에 무게감을 더해 주었다.



프린트 종이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조선시대 외발뜨기 전통방식으로 복원한 한지였다.

나도 처음들은 UV프린트(자외선 가시광선 분광법) 방식은 석조물에 낀 세월의 이끼까지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대상이 주는 분위기도 아주 독특했다. 사료적 가치에다 작가의 감성까지 담았구나.

“야! 멋지다”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전시장 풍경



‘석인의 초상’ 사진집에 서문을 쓴 문예비평가 유헌식씨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석인의 의미를 죽은 자의 ‘수호에서 죽은 자와의 ‘동행’으로 해석할 때,

윤길중의 석인 사진은 단순한 기록사진이 아니라 예술사진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전시장 풍경


그때부터 스스로의 가치지준에 혼돈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난 사진 본래의 가치는 기록으로 치는 사진쟁이라 예술로 가는 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전시장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전국각지의 석인을 기록한 작업인 줄 알았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석인이란 민초들과는 동떨어진 왕이나 세도가들의 능을 지킨다는

고리타분한 생각도 자리했다.



석인 시리즈



그렇지만 그 형상을 세겨낸 석공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초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의 대개가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정형화되기도 하지만,

꼼꼼히 파낸 얼굴들은 늘 상 보아왔던 우리민족 본래의 정겨운 표정이다.



석인 시리즈



지그시 감은 눈에선 절실한 염원이 느껴지고, 굳게 다문 입에선 결연함이 배어난다.

내면의 절제미가 흐르는 가운데 애잔함도 묻어난다.

무엇보다 세월의 풍상이 덧입혀진 표정들은 마치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만나듯 친숙하고 편안하다.





서재 앞에 걸어놓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증표로 삼고 싶었다.
사실, 실제의 석인이 있다면, 이 사진처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석인1 / 경기도 시흥



갑자기 기록이냐? 예술이냐?는 근원적인 질문도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대작이니 위작이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진짜도 가짜도 스스로만 좋으면 그만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세월 따라 눈높이가 바뀔지라도 본인이 좋아하는 작품이 최고인 것이다.



석인3 / 경기도 용인


아무리 평론가 잣대로 본 최고의 걸작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편치 않으면 집에 걸어두겠는가?

돈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기준에 맡긴다면 말이다.

나 역시 아무리 최고의 다큐멘터리작품이라도 끔찍한 살인 장면이라면 걸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소장가치와 평소 눈으로 즐기는 현실적 가치는 이처럼 이율배반적으로 다른 것이다.


석인2 / 경기도 수원



가끔은 오래된 그림이나 서예작품이 담긴 액자들이 버려지기도 하지만,

한 참 후에 조명 받을 작품인지 누가 알겠는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지만...
또 한 가지 신통한 것은 다 버려져도 옛집 툇마루에나 안방에 걸렸던 가족사진틀은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석인4 / 경기도 용인



사진가 윤길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류가헌’에서 열린, 아현동 철거지역을 찍은 ‘기억흔적’ 사진전이었다.

곰팡이 낀 낡은 물품을 소재삼아, 변하고 버려져 가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엔 장애인과 쓰러진 채 살아가는 나무도 찍었다고 했다.

얼핏 지금의 석인 작업과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죽어가는 것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으려는 되살리기 의식은

모두 같다는 점이다.





듣기로, 윤길중은 오래 전 중병으로 투병하다 기사회생으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했다.
잘나가던 대기업 사원에서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다 덜컥 중병을 얻었는데, 생사를 넘나들며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사진작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사진 속에 불사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석공처럼 하잘 것 없는 사물에 염원을 담고 싶었던 게다.

이처럼 이름 없는 석공들의 염원을 담은 석인들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 처연했다.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석상의 형상과 표정들이 하나도 같은 게 없다는 점이다. 마치 사람들처럼...





전시된 사진의 느낌은 인터넷에 소개된 이미지로는 제대로 알 수 없으니. 꼭 전시된 사진들을 관람하기 바란다.

홍대부근에 있는 갤러리‘벽과 나 사이’(02-323-0308)에서 오는 28일까지 열리고,

‘이안북스’에서 ‘석인’사진집(40,000원)도 나왔다.



글 / 조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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